허난설헌 무덤* 앞에서
양 한성
이끼 뒤집어 쓴 문인석
텅 빈 무덤 지키고 있다
열 발자국 둘레 봉분에 갇혀
무갑산 그림자 속에 잠들었던 여인은
여기 없다
삼수갑산의 풀포기들도
서로 어울리며 사는데
눈물로 적시고 연밥 따며 부른 노래
둘둘 말린 종이가 되어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규방 깊숙한 곳 원망이
한 층 한 층 쌓일 때마다
하늘 향해 뻗어간 능소화 흔적 따라
티끌세상 귀양살이 끝내고 마침내 삼청궁에 오른다
새벽별이 더 빛나는 건
아직 태우지 못한 인연이 남아서일까
빛이 바래지 않는 기억 하나
멀리 산자락에 떨어진다
돌이켜 생각하면 할수록 하늘과 가까워져
이제는 함박눈이 되어 내리는 사람
그 여인의 꽃에는 아직 피지 못한 꽃잎이 남아 있다
*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산29-5에 허난설헌 묘소가 있다
두미리 미륵댕이 석불*
두루뭉실 돌덩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제 살 깎아 양식 내어주던
가슴 두근거리던 생애
지나온 풍경 가로질러 흐려져 간다
연꽃 받침도
머리 관도 없던 몸
초라한 절반은 땅속에 묻어두고
천지가 뒤집혀 개벽이 다시 올 때까지
그렇게 사라져 간다
코를 갈아 아들 낳게 해주고
귀 한줌 떼어 곡식 영글게 하고
손마디 뼈를 잘라 도적을 물리치니
대덕(大德)이 별것이던가
곁에 서 있는 바람벽 여섯 느티나무
이제는 목신(木神)이 되어가고
두루뭉실 돌덩이
스스로 낮아지고 있다
* 이천시 모가면 두미1리 산57-3 미륵댕이 마을에 모셔진 불상
천덕봉*의 봄
독조봉에서 위로 뻗은 산줄기
회색 고래로 누웠다가
허공을 베어오는 꽃바람에 밀려 밀려
북으로 쫓겨 온다
허리춤 아래는 연두빛 물결에 잠기고
잿빛 머리만 거두어 여기 천덕봉에서
한때는 구름이었던 물을 만나
한때는 물이었던 구름을 따라
다시 솟구치니
가라 가라
가르마 같은 저 능선 길 따라 거침없이 가라
길 옆 늘어선 은사시나무도 너를 따라오지 않았느냐
해마다 4월이면 쑥국새도 돌아와 울지 않느냐
앵자봉 너머 여울 끝나는 곳
푸르디 푸른 남한강 큰물에 잠겼다가
바람을 노래하던 억새마저 다 지고
원적봉 오가는 하늘오솔길 열리면
첫눈과 함께 오라
그렇게 다시 오라
* 이천시 백사면과 광주시 곤지암읍, 여주시 흥천면에 걸쳐 있는 원적산의 최고봉(634m).
한남정맥의 문수봉에서 시작하여 독조봉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해룡산, 국수봉, 정개산, 앵자봉, 해협산을 지나 광주시 남종면 종여울 남한강에서 그 맥을 다하는 앵자지맥의 중간에 있다.
모죽지랑가* 2
여름날 아침 노고단에 서 본 사람은 안다
밤새 숨어있던 바람이 몸을 일으켜
섬진강가 물방울들 몰고 와
구름바다 만든다는 것을
여름날 아침 은빛 노고단에 서 본 사람은 안다
잠든 산하를 비추던 별들이
새벽이면 하나 둘 뚝뚝 떨어져
노오란 원추리꽃 피운다는 것을
서쪽 나아가는 하늘 보며
돌멩이 쌓던 사로국 청년
돌탑 속 남은 피멍은 그대로인데
그가 머문 자리
동자꽃 한 무더기 서럽게 피어나고 있다
산새들은 날개를 접고
바람도 잠시 숨을 멈추는
좁은 인연의 길
앞에 놓인 얕은 곳을 건너가면 깊은 곳에 다다를 수 있을까
나의 번민은 꽃망울 하나 맺지도 못한다
왕시루봉 보이는 자드락길 따라
술 한 병 설병 한 그릇
곡진하게 짊어진
득오의 모습이
그대에겐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
* 신라 효소왕 때 득오가 지은 8구체 향가
프로필)
- 경남 통영 출생
-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 2023년 이천문인협회 「이젠 나도 작가」 2기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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