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에서 1000년전 신라인의 변기(便器)를 만나다
기념품 판매장 뒷길에 있는 변기돌. 여기에 3기가 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먹지 않고는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다. 따라서 먹은 만큼은 또 배설해야 하기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화장실은 반드시 필요한 시설이며 또 존재하여 왔다.
우리 선조들은 화장실을 '뒷간'이라고 했다. '똥을 눈다'는 의미의 말로 '뒤를 본다'에서 나온 순수한 우리말이다. 이 뒷간이 일제시대에 이르러 변소라는 말로 불리어 오다가 아파트가 우리 생활의 주거지로 자리잡게 되자 슬며시 화장실이란 말로 바뀌어졌다. 아마도 그곳에서 큰일도 치루고 손도 씻고 간단한 화장도 하다 보니 그렇게 바꾸어 부르나보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왕과 왕비가 사용하던 이동식 변기를 '매화틀'이라고 했다. 왕과 왕비의 대변을 그냥 변이라고 하기 어려워 '매화(梅花)'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조선 왕실의 매화틀 <이 사진은 '동아 사이언스'에서 가져왔습니다>
각설하고 그럼 신라인들의 뒷간 변기(便器)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이런 사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적혀 있지 않으니 알 수가 없겠지만 우리가 눈 여겨 보지 않은 곳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것도 글과 그림이 아닌 실체를......
아마 수학여행을 비롯하여 불국사를 가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불국사라고 하면 언뜻 떠오르는 것이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 백운교, 대웅전 .... 모두가 국보급 문화재들이다. 요즘은 작년(2007년)에 발견된 극락전 현판 뒤의 황금돼지가 최고의 인기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국보요 보물이니 작은 변기돌 쯤이야 누가 관심을 가지겠는가? 하긴 안내판조차 없는 돌멩이니까.......
불국사에는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져보면 재미난 유물이 많다. 이는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우선 좀 구리지만 신라인들 앉았던 변기돌을 찾아가자
불국사 정문을 들어서서 다보탑, 석가탑이 있는 대웅전으로 들어가려면 왼쪽으로 해서 극락전을 거쳐 들어가는 길과 오른쪽으로 돌아 바로 들어가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왼쪽 길로 가서 당간지주와 석조가 있는 곳을 거쳐 극락전 쪽으로 가자. 극락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종각이 있고 종각 뒤편에 전통찻집과 기념품 판매장이 있다. 찻집 뒤로 화장실로 가는 길이 있는데 그 길 좌우와 또 다른 석조가 있는 넓은 공터 여기저기에 많은 석재들이 놓여 있다. (불국사에는 석조가 세 개가 있다)
불국사 복원 공사를 하면서 나온 석재들을 재사용하고 남은 석재들을 모아 놓은 곳이다.
그 석재더미에 1000년전 우리 신라인들이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동시에 세상의 근심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던 해우소(절간에서는 뒷간을 해우소라고 하니 그렇게 부르자)의 흔적이 있다.
바로 이 변기돌들이다. 사진에 보이는 돌들은 대변소(大便所) 위에 걸쳐놓은 바닥돌이다 판석의 크기를 보면 한사람이 들어가기에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크기이며 파낸 홈의 크 기도 적당하고 쪼그리고 앉았을 때 두 발이 놓여지는 위치도 알맞다. 2개의 돌을 대칭이 되게 파낸 뒤 맞붙혀 놓았다
발이 놓이는 옆으로 돌을 ㄴ자로 파내어 각을 지어 놓았는데 칸막이용 나무를 세워놓기 위함이 아닐까 작은 부분까지 신경을 많이 쓴 신라인들의 석공기술이 놀랍다
이 변기돌은 서로 다른 것을 적당히 마주보게 놓아둔 것 같다. 파인 홈의 크기가 다르며 발이 놓이는 위치의 너비도 다르다. 오른쪽의 받침돌은 ㄴ자로 깎여 있으나 왼쪽은 깎임이 없는 걸로 봐서 제짝이 아닌게 분명하다
변기돌은 한 개의 돌에 알맞은 크기의 구멍을 뚫은 것도 있고 두 개의 돌을 사용하여 반쪽씩 파내 붙여둔 것도 있다
변기돌도 격이 있었나보다.
이 변기돌은 길 윗쪽의 석조 바로 옆에 있다 원래 한개의 통돌로 만들어진 것인데 두동강이 났다. 그러나 다른 변기돌과 달리 사방의 모서리를 세우고 바닥은 약간 안쪽으로 비스듬히 각을 지어 깎아 놓았다. 왜 이렇게 안쪽으로 비스듬히 깎았을까. 생각컨대 청소를 할 때의 편리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청소를 할 때 물을 붇기만 해도 안쪽으로 떨어질테니까.... 다른 변기돌과 비교할 때 좀 더 섬세한 것을 보아 고위의 스님들이 사용하던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 변기돌 옆에 길게 ?은 홈이 파져 있는 돌이 하나 있는데 이것의 용도는 확실히 가늠하기가 어렵다 물이 흘러가게 만든 홈통이라면 아랫 부분에 깎은듯이 파낸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을 소변을 보던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홈이 좁고 깎아낸 쪽은 화장실의 벽 뒤쪽까지 뻗어나가 바로 밖으로 떨어지게 설치하지 않았을까? 옛 절간의 화장실 구조를 살펴볼 때 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들지만 더 이상 언급하지 말자.
이것은 소변기(小便器)이다. 네모난 통돌 중앙에 소변이 튀지 않게 깊게 타원형의 홈을 파고 홈의 아랫부분 바닥에는 소변이 빠져나가게 돌의 아래쪽까지 구멍을 뚫어 놓았다.밑 바닥은 소변이 잘 빠지도록 약간 비스듬하게 경사지를 지어 파놓았다
아마 소변을 본 뒤는 옆에 준비해 둔 물통의 물을 부어서 소변의 흔적을 말끔히 지웠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불국사의 화장실은 세계 최초의 수세식화장실이 아니었을까......
돌로 바닥을 깐 신라 가람의 화장실, 바닥이 돌일진데 그 위에 세워진 건물의 화려함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으랴 !
전남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에 있는 고찰 선암사(仙巖寺)의 해우소(解憂所)는 아름다운 조선시대의 목조건축로 문화재자료(제214호)로 지정되어 있다.
1000년을 넘게 절터를 지켜 온 이 신라의 변기돌이 제대로 자리잡아 놓여진다면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더 높아지지 않을까?
불행히 경주에 있는 문화재들은 제 값어치를 못 받고 있는 실정이다. 산재한 문화재들이 워낙 많다보니 복원을 하기엔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다. 그러니 여기저기에 그냥 방치되고 비바람에 살결이 벗겨지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변기돌이 있는 곳의 위치도이다. 정문이 있는 곳이 남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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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토함산솔이파리 원문보기 글쓴이: 솔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