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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판공호수를 지나다
새벽 쯤 바다처럼 널브러진 판공호수(班公湖, Palgon Lake 혹은 Bangong Lake)를 지난다. 호숫가를 돌고 돌면서 길이
아스라이 이어져 간다. 달빛을 받은 호면은 은비늘이 반짝이고, 은빛 물결은 길 가장자리까지 몰려 왔다간
호심(湖心)으로 돌아간다. 그 많던 새들은 모두 어디에서 이 밤을 새우는지…
푸른빛의 호수는 신비한 옛 얘기를 제 혼자 간직한 채 깊은 어둠에 잠겨있다.
저 호수에 밤배 띄워 북서쪽으로 한없이 나아가면 라다크(Ladakh)에 가 닿겠지.
저 호수 밑에는 이 세계가 형성된 이래 지상에서 벌어진 온갖 사건의 영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신비한 거울이 있겠지.
내 품안에 사막의 왕이 준 ‘마음의 거울’이 있듯이.
이 호수는 바닥이 유리를 깔아온 것처럼 투명하여 깊이를 알 수 없다. 그래서 고래로 순례자들이 발목만 적시려고 물속에 들어갔다가 깊이를 짐작할 수 없어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전해온다. 판공호수에 배를 띄우면 라다크와 구게왕국을
왕래할 수 있다. 이 호수는 인도와 티벳을 연결하는 통로이다. 홀연히 백조가 날아오른다.
달밤에 눈부신 백조의 무리가 난다. 하얀 새떼의 비상에 은파(銀波)가 일어나는 호수는 신비한 광경이다.
13. 구게 왕국에 이르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별천지에 온 것 같아. 꿈을 꾸고 있는 듯
‘지금 여기에 있다’는 현실감이 들지 않는데. 거대한 토주(土柱,흙기둥)가 백만 대군이 창검을 들고 서있는 듯이 벌려서 있고, 멀리서 보면 보살(Bodhisattva)대중이 모두 일어서서 법회를 열고 있는 듯, 백만의 호법신(Dharma Protector)들이 깃발을 높이 들고 옹호하고 서있는 듯.
아, 티벳 불교도에겐 이 경관이 만달라(Mandala)로 보였으리라. 장엄한 악시스 문디(Axis Mundi,우주의 축)가 여기에 꽂히면서 비밀스런 만달라 궁전이 세워졌구나. 중중으로 무진하게 쌓여진 저 토주의 행렬을 보라. 산하대지가 모두 성불(成佛)했다고 하더니만, 오늘에야 실감한다. 저 오묘한 자연에 부처님의 뜻이 모두 드러나 있지 아니한가.
이 지역은 본래 바다였는데 유라시아대륙과 인도대륙이 서로 머리를 디밀고 치솟는 바람에 바닷물이 빠지면서 그 해저가 노출되어 이와 같은 장관을 연출하게 된 것이라고. 해구(海溝,해저에 깊이 팬 도랑 혹은 계곡)였던 깊은 고랑은 사람 다니는 길이 되었고. 길은 토주와 암벽 사이를 뱀이 기어가듯 꼬불꼬불 감아 돌고. 가끔가다 맑은 시냇물이 흐른다.
가던 길을 멈추고 시냇물을 한 모금 마시며. 하늘을 우러러 보니 그냥 보아왔던 그 하늘이 아니네.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그렇다고 딱히 어디로 가야할 정처도 없는 불안하면서도 동경에 찬 하늘빛이여. 순례자는 제 마음을 하늘에서 느끼는 것이다. 일행은 어느 듯 강변을 지난다.
순전한 황토 빛의 강물과 강 언덕(江岸)은 이 세상의 풍경이 아니라 마치 저승으로 건너가는 스틱스(Styx,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강으로서 카론의 뱃사공이 이 강을 건네준다고 한다)강처럼 비장하게 느껴지니. 쇠줄을 엮어 만든 다리를 지나 작은 마을에 들어선다. 여기가 구게왕국의 도읍인 '짜다(Zada/Zanda)'이다.
먼저 마을 아래 강변에 있는 퇼링(Toling)사원을 참배한다. 흙벽을 뚫어내어 지은 불당과 흙벽돌로 쌓은 회랑, 강렬한 표현주의적으로 채색된 탕카(탱화)와 벽화들이 보는 사람의 정신을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올라 아득한 경지로 보내 버린다. 사람의 발이 닿기 전 신(神)들의 땅을 밟는 듯한 감상에 빠졌다가 문을 나와 현실로 돌아오니 '인간은 시간의 노예'라는 것을 새삼 자각한다. 그대 시간의 강물을 거스를 수 없으리. '지금 이 순간' 오직 한번 뿐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 'Here & now', only once never again.
시간이 바래버린 흙벽위로 태양은 무정한 시선을 던지며 타오르고 있다. 여기는 인정사정없는 자연의 영역. 편리함에 길들여져 나약해진 인간이여, 네 마음속에 잊었던 오아시스를 찾아라, 네 마음 안에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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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주(土柱)-Clay Forest
구게 왕국
<주>
1. 구게(Guge)왕국-인간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이 오지에 불교왕국을 세운 그들은 누구인가. 티벳을 통치하였던 중앙 왕조(吐藩/토번/Tubo왕조)의 랑다르마 왕이 폐불정책에 반대하는 불교 승려에 의해 시해되어 왕국이 분열된 후 그 증손자들이 이 오지로 들어와서 왕조를 건설하니, 구게왕조요, 16대의 왕이 700년간을 이어왔다.
그 전성기인 장춥외(Jangchub O, 984~1078)왕은 벵갈의 비크라마실라(Vikramasila)불교대학의 승원장인 다팡카라 쉬리즈냐나(Dipamkara Shrijnana)(아티샤(Atisha, 980~1054)존자로 잘 알려져 있다)를 초청하였다.
이 무렵에는 린첸 쌍포(Rinchen Zangpo, 958~1055)라는 대 역경사가 있어 이미 많은 분량의 불교경전이 번역되어 있었는데, 왕은 영혼의 어머니인 인도로 부터 법유(法乳, 진리의 젖)를 흡수하기를 간절히 원하여 존자를 모셔왔다. 물론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장춥외의 아버지 예세외(Yeshe O, 947~1024)가 이웃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었는데 그 몸값으로
어른의 머리만한 황금덩어리를 요구했다. 아들인 장춥외가 황금을 구해가지고 아버지를 찾아갔더니 아버지 예세외가
말하길 "내가 이 옥에서 나가 세상에 살아본들 머지않아 죽게 될 터인데, 죽을 운명의 이 몸을 구하려 황금을 사용하기보다는 영원한 불멸의 가르침인 부처님의 법을 구하는데 쓰라." 인간적인 정으로 본다면 아버지를 구해야겠지만,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하여 몸을 잊어버림)하시려는 아버지의 소원을 받들어야 했으니... 그 황금은 아티샤존자를 모셔오는 대가로 비크라마실라대학에 기부되었다. 아버지의 목숨과 맞바꾼 구법행(求法行)! 오늘 우리의 눈앞에 펼쳐져 보이는 불경의 글자 한자 한자가 옛사람들이 흘린 핏방울이요, 땀방울이다.
2. 아티샤존자가 구게왕국으로 올 때 다수의 인도 예술가를 동반하여 왔기에 자연스럽게 인도 후기 밀교의 예술과 문화가 전수된다.
그냥 하나의 진흙덩어리였던 이 황량한 오지가 일시에 금강승 만달라로 변모된다.
토주와 토굴의 내부는 파내어져 성스러운 비밀 공간이 되었고, 향불과 탱화가 신비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토굴 내부의 좁은 창을 투과한 빛이 어둠과 키스를 나누며 서늘하고도 아늑한 시간을 만들어낸다.
지상의 모든 것을 불태울 듯이 타오르는 햇볕이 토굴 방의 틈새로 기어들어오면 순화가 되어 '어둠'이라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다. 그러면 벽 위에 그려진 본존들이 눈알을 부라리며 격정과 분노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천둥치듯 큰 소리를 지르고, 무수한 팔을 휘두르며 보는 이의 혼을 빼놓는다.
3. 본존들을 모신 방을 라캉(Lhakang,불당 혹은 신전)이라하는데 여기에 모셔져 있던 탕카(thanka,'탱화'라고 한다)와 벽화는 그 색채와 구도가 너무나 선명하고 감동적이어서 살아있는 보물창고와 같았다고 라마 아나가리카 고빈다(Lama Anagarika Govinda)는 말한다. 그는 독일 태생으로 처음에는 스리랑카에서 출가하여 남방불교스님이 되었다가 나중에 티벳불교로 전향하여 티벳으로 성지 순례를 하였다. 카일라스와 구게왕국을 탐사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쓴 여행기 "흰 구름의 길"이 유명하다. 그기에 보면 자기의 영혼의 도반이었던 인도 여자 수행자인 고타미(Lee Gotami)가 구게왕국의 불당의 벽화를 실측하고 모사해서 기록으로 남겼다.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이 예까지 몰려와 불상을 때려 부수고 탱화를 찢거나 태웠다. 눈먼 인간들의 우매한 짓이거니, 미친개들의 광란이거니 해야겠지만, 같은 인간이란 사실이 부끄럽고 두려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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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게왕국은 번영하는 중이다. 주민들은 토벽에 굴을 파고 혈거생활을 하고. 굴집(穴居)은 낮에는 시원하고 밤에는 아늑한 안식처가 됨직하다. 강수량이 미미하여 황량해 보일 것 같은 황토 구릉지대가 녹색을 띠고 있는 것은 관개수로 덕분이다. 보리와 귀리, 밀과 옥수수가 푸른 물결을 이루고 있다.
저 아래로 보이는 수트레지(Sutleji)강에는 황토 빛 강물이 흐른다. 물이 흐르는 곳에는 식물이 깃들면서 생명의 색으로 물든다. 강가에는 풀과 버드나무가 쭉쭉 뻗어있어 눈 둘 곳 없는 이 황량한 풍경에 시선이 머물 수 있는 안식처가 돼주고. 물은 가장 귀중한 자산이다. 푸른 색, 푸른 풀이 귀하다. 물과 녹색은 구게의 생명. 주민들이 요소요소에 샘을 파서 정성스레 관리한다.
왕국 주민의 생업은 농경과 목축, 거래와 교역이다. 모두 순박하다.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있기에 바깥세상 소식에 대한 갈증이 있다. 그들의 촉각은 항상 외부로 향해 있다. 여기는 외딴 곳, 격리된 곳, 절해고도와 같아 세상을 향해 손을 흔들고 싶은 심정이리라. 무엇이 그리도 그리울까?
넓은 세계와 연결되고 싶어서, 섬이 대륙과 연결되고 싶듯이, 객지로 나간 아들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듯이. 그리움과 동경은 편안히 잠들지 못하게 한다.
14. 구게 왕과 왕비 알현
인도에서 순례자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구게왕은 그를 보고자 한다는 전언을 보내왔다. 사막의 아들은 목욕을 하고 옷도 빨아 입었다. 궁정으로 들어가 구게왕을 알현했다. 인도에서 온 순례자에 대해 낭만적인 환상을 가진 왕은 수미산에 대한 열렬한 관심을 표명한다. 자신도 왕위를 물려주고 수미산 순례를 떠나고 싶다고. 그러나 한번 올라간 왕좌에서 내려오기란 쉽지 않은 것.
여기서 석 달을 쉬고 내년 봄에 길을 떠나라 한다. 열네 살 타쉬 공주(Tashi)에게 산스크리트어도 가르쳐주고, 인문지리와 인도 역사와 설산 과 수미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응락하다. 왕가의 가정교사 생활이 시작된다.
거처를 정해주는데, 궁전의 북쪽 외딴 방. 거기서 멀리까지 다 보인다. 전망이 좋다. 강과 강 언덕, 버드나무 숲, 보리밭, 흙담으로 이어진 마을 집들과 토주를 의지해 지어진 집들. 승려들은 어디에 거처하나? 궁성 훨씬 뒤쪽,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황토벽에 굴을 파고 법당과 요사채로 쓰고 있다. 승려는 천 여 명 정도로 인구의 10할이나 된다. 주민들과 승려는 모두 가족관계이며 최고 승려 지도자는 왕족과 혈연관계에 있다. 주민들이 승려의 의식주를 돌봐준다. 궁정 살림은 검소하다.
왕은 소탈하고 왕비는 아담한 몸매의 미인이다.
매일 아침 동이 터올 때면 왕국전체가 울리도록 라둥(Radung, 주둥이가 아주 긴 나팔, 험준한 계곡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소리는 티벳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자아낸다)이 울리고 북소리가 둥둥 울려 퍼진다. 아련하게 들려오는 그 소리는
먼 나라로 여행 갔다가 돌아온 소리처럼 그리움이 잔뜩 묻어있다. 메아리소리는 외부세계로 향해 뻗었다가 거둬들이는
팔인 듯 외부공간을 왕국의 중심으로 끌어당긴다.
그리고 아침을 해먹는다. 마을 위로 연기가 모락모락 오른다. 흙으로 만든 화덕 안에서 구워낸 짜파티(밀가루 부침개),
콩을 으깨어 끓인 것, 보리죽, 보리빵, 호밀빵, 소금, 향신료, 강에서 잡은 물고기, 호수에서 낚아 올린 고기, 말린 육포,
건포도, 말린 살구가 식탁에 오른다.
점심은 성찬으로 준비되나 싱싱한 채소는 귀하다.
저녁은 빵이 주식. 디저트로 사탕수수 결정으로 만든 발효주와 포도주가 나온다.
푸랑을 거쳐 수입되는 것은 바닷소금(암염은 여기에 풍부하다), 바다고기 말린 것, 해물 말린 것, 미역과 다시마,
건조된 야채, 말린 과일 종류, 견과류.
15. 어느 여름밤.
하늘에서 이상스런 빛이 환히 빛난다. 모두 놀라서 문을 열고 나와 하늘을 쳐다본다. 건조한 바람이 강에서 휘익 불어온다. 전갈자리는 남쪽하늘을 기어오르고, 북두칠성에서 은하가 쏟아지는데... 어른 주먹만한 불들이 강 건너편의 황토 산꼭대기에서 휙 튀어 올라 하늘로 솟구친다. 불꽃놀이를 하듯이, 소리도 들린다. “쉬익 쉬익” 무엇일까? 그런데 빛 덩이의 색깔도 가지가지. 붉은 색, 노란 색, 하얀 색, 푸른 색. 푸른 것은 은빛이 나는 귀기(鬼氣)가 서린 색이다.
사막의 아들은 놀라서 물어보니 해마다 여름 이 때쯤 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여기서는 ‘도깨비불’이라 한다고.
도깨비들은 죽은 사람의 혼령으로 중음계를 통과하지 못하여 환생의 기회를 놓친 중음신(中陰神)들이 토주에 붙어 있다가 여름밤이면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고. 존재의 껍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짓인가, 환생의 기회를 엿보고자 하는 몸짓인가? 지상에 붙잡혀 있는 영혼들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귀기서린 구게의 여름밤 하늘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타시 공주는 놀라서 나를 꼭 껴안는다.
왕비가 ‘타시, 그러면 실례가 되잖아.’ ‘괜찮아요. 사막의 아들에게 정이 들었나봐요.’
나그네를 좋아하면 안 되는데, 소녀의 감수성이 민감하여 이별의 상처가 클 텐데. 더 정들기 전에 떠나야지.
순례자는 길 떠날 준비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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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스님, 언뜻 '나르치스와 고르트문트'가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