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산책]『천수경』②
염관음(念觀音)·염미타(念彌陀)
『천수경』은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천수천안관세음보살에 대해서 말하는 경전이다. 그런 까닭에, 『천수경』을 독송하고 신앙한다는 것은 곧 관세음보살을 신앙하는 일이 된다. 관세음보살 염불이 『천수경』 신행의 중요한 프로그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하나의 대상에 믿음을 지극히 한다는 것은 다른 대상에 대해서는 배제하려는 마음이 생기기 쉽다. 관세음보살을 염해 가면서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을 갖고 염불하려는 마음이 옅어지는 것이었다. 내가 어디에서고 공개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내면 속에서는 이런 갈등이 없지 않았다는 말이다.
만약 이러한 태도를 올바른 것으로 유지하게 된다면, 어느 덧 우리는 종파적·독단적 관점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평소 회통(會通)을 추구하는 내 기본입장과 맞지 않게 된다. 어떻게 해야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을 하면서도 아미타불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 편집된 ‘독송용 『천수경』’의 성립 과정을 살펴볼 때, 그 상한은 신라의 의상(義相, 625∼702)스님에게까지 소급된다. 의상스님은 화엄종의 창시자로서만이 아니라 『천수경』 신행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남겨주신 스승의 한 분이다.
그런데, 이 분이 관음성지인 낙산사를 창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토신앙에 입각하여 부석사를 창건하셨던 것이다. 왜 의상스님은 관세음보살 신앙과 아미타불 신앙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할 수 있게 된 논리적 근거는 무엇이었던 것일까?
신라 때도 관음신앙 유행
물론, 『무량수경』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아미타불을 모시는 존재로서 그리고 있고, 그러한 영향은 『천수경』에도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 ‘원본 『천수경』’ 에서 관세음보살은 “지극한 마음으로 나의 이름을 염하고, 또한 마땅히 나의 스승(本師) 아미타불을 오롯이 염해야 한다”라고 하신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독송용 『천수경』’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기 전에 “나무본사아미타불”을 염하고 있으며, “아미타불 속히뵙기 원하옵니다”(원아속견아미타)라고 서원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의 관계는 제자와 스승의 관계이며 시봉(侍奉)하는 자와 시봉 받는 자의 관계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와같은 이해에는 아직 두 분 사이에 계급이 존재하게 되어서,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믿는 신자들에게는 못내 섭섭한 마음이 없지 않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를 나는 작년 봄 일본 천태종의 원진(圓珍, 814∼891)스님을 통해서 만나게 되었다.
원진스님은 “천수경의 비밀을 말하다”라는 뜻의 책, 『천수경술비초』를 남겼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책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단 한 줄이 전할 뿐이다. “불공(不空) 삼장이 말씀하신 것처럼, 관세음보살을 서방정토에서는 무량수불이라고 말한다.…관음과 미타는 한 몸이면서 두 부처님인 까닭이다.”
관음-미타는 한 몸의 두 부처님
참으로 비수와 같은 말씀이고, 충격적인 말씀이었다. 그렇다. 관음과 미타는 같은 부처님이다. 기실, ‘원본 『천수경』’에서도 이미 관세음보살을 ‘정법명여래(正法明如來)’라고 하지 않던가. 이렇게 나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염불이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염불이나 모두 차별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관세음보살” 염불과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모두 수행하든지, 아니면 그 어느 하나를 수행하더라도 공히 두 부처님을 함께 염하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두 분이 곧 한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김호성
동국대 교수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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