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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3> 조성택 교수 “불교는 깨달음보다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 ‘깨달음과 수행의 상관관계’는 불교의 가장 오래된 주제이자 가장 현실적인 주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으면 우리의 불교신행은 혼란을 면하기 어렵다. 오늘날 우리가 수행과 실천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면 이에대한 바른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본지는 이러한 문제의 극복을 위해 누구나 참여하고 주장을 펼수 있는 공개 기획토론을 진행중이다. 강호논객들의 주장을 가감없이 수용하는 이 토론에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바란다. 이번 호에는 세 번 째로 고려대 조성택 교수의 기고를 싣는다.
이것은 율장의 〈마하박가(Mahavagga)〉에 나오는 것으로 부처님이 60명의 제자에게 최초로 전법을 명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붓다에게 중요했던 점은 무엇을 설하느냐 보다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왜 설하느냐의 문제로서 그것은 각각의 현장에 따라 결정될 문제였다. 다만 그 설법의 현장에 맞게 무엇이든 설하되 그것은 반드시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그 종교적 유용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현대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 환경을 고려할 때, 불변하는 불교적 정신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과 타인의 행복일 것이다. 깨달음이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자신과 타인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마땅히 그 목표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깨달음의 불교가 아니라 행복의 불교이며, 깨달음을 위한 불교가 아니라 행복을 위한 불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대승의 보살정신과도 연결된다.
왜냐하면, 첫째, 깨달음을 수행의 최종 목적으로 하는 것은 ‘출가중심 불교’의 역사적 산물로서 재가자의 역할이 더욱 더 커지고 중요해지는 현대 사회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수행과 관련한 불교 교리의 구조적 문제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 지상주의는 때로 계율과 세간적 윤리 행위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선(禪)불교의 수증론(修證論)에서 계율은 항상 도구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셋째, 가장 현실적 이유로서, 목표는 실현 가능한 목표 일 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일부 특출한 수행자들만이 도달 할 수 있는 목표를 재가자를 비롯한 모든 수행자의 목표로 삼을 순 없다. 대부분이 도달하지 못하는 목표는 꿈 아니면 신화에 불과하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처럼 한국 불교에서 깨달음은 박제가 되어 버린 깨달음이 아닐까? 깨달음에 관한한 한국 불교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것에 대해서 여기서는 보살 사상의 재해석을 통해 깨달음 지상주의의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의 핵심은 중생구제의 서원으로서 “자신의 깨달음을 미루겠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대승 불교의 자비심과 관련하여 해석하나, 보살 사상의 발생론적 동기와 종교적 동기에서 볼 때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의 ‘할 일’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자각이며 동시에 불교 수행의 목표가 해탈이나 열반과 같은 최종적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윤리적 행위에 있다는 자각이기도 한 것이다.
보살사상의 재해석 통해 ‘깨달음 지상주의’극복해야
그러나 재가와 출가를 동등하게 여기는 보살 불교는 역사 속에서 쇠퇴하고 다시금 출가자 중심의 불교로 발전하고 말았다. 다만 그 편린들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일부 대승경전에서 몇몇 이름이 남아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시 출가자를 중심으로 한 사원불교로 옮아가고 말았다. 이제 진정한 보살 사상은 실천되지 않는 명목상의 교리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더구나 원산지에서의 오랜 발전 과정에서 등장하였던 보살 사상의 등장 배경과 동기를 모르는 중국인들로서 그 전통을 전해주는 출가자들의 입장을 본래적인 오리지날 불교의 모습으로 생각 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제대로 돕기 위해서 먼저 깨달아야한다는 것은 변명이다. 제대로 돕기 위해 먼저 깨달아야 하는 경우는 어떤 길이 옳은 길인지를 모를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박에 깨칠 수 있다는 교리 하나만 믿고 허송세월하느라 밥 축내고 시간 축내고 남을 돕기는커녕 자신도 돕지 못하는 사람은 종교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혹자는 “수행의 목표가 깨달음이지만 그 목표는 이번 생에 이루어질 수도 있고 다음 생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 아니냐. 이번 생에 이루어지든 다음 생에 이루어지든 어쨌든 수행의 최종 목표는 깨달음”이라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금 강조하건대 우리는 항상 현생을 살고 있을 뿐이다. 당신이 지금 생각하는 내생도 그때 가면 현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살로서 삼아야 할, 그리고 달성해야 할 ‘영원한 현생’에서의 수행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행복, 즉 나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인 것이다. 이 길은 부처님이 수많은 전생을 거듭하면서 걸었던 길이고 또 우리가 지금 현생에서 걷고자 하는 길이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출처 : 불교신문 2032호/ 5월18일자] |
첫댓글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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