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최초한글성경번역과 최초소래교회를 세운 선구자서상륜
아펜젤러와 함께 공식선교사로 최초 입국한 선교사 언더우드는 평양을 거쳐 황해도 소래교회를 방문하면서“우리는 이 땅에 씨를 뿌리러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의 열매를 추수하러 왔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말 그랬다. 그는 선교사로 미지의 땅에 첫 발을 내디뎠다 생각했는데 이미 교회가 세워져 있음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상륜의 한국교회사적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 Ross)와 매킨타이어(J. MacIntyre)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조선선교에 대한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들은 1874년 고려문을 넘나들며 홍삼장사를 하는 의주청년들을 만났다. 그들은 이응찬,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등과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다 장사 수입보다 많은 것을 줄 테니 자신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내 의주청년들은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에게 조선말을 가르쳐 주었고 그 과정에서 성경말씀을 익히고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사람으로는 최초로 만주에서 세례교인이 되었다. 당시 조선은 대동강변에서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사건 이후 쇄국정책이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는 머지않아 조선에도 선교의 문이 반드시 열릴 것이라 믿고, 조선청년들에게 투자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서번역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마침내 1882년 3월 24일 심양에서 한글성경 누가복음 3천 권이 최초로 발간되었다. 이 최초의 한글성경 번역작업은 서상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성경을 로스와 서상륜의 공동번역이라고도 말한다. 그렇게 성경을 번역한 서상륜은 또 하나의 사명을 갖고 자신이 번역한 복음서를 안고 압록강을 건너 고향 의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당시는 성서 반입이 불법인지라 고려문을 통과하다가 국경 관리들에게 적발되어 붙잡혔다. 다행히 먼 친척인 김효순의 도움으로 성경 10여 권만을 챙겨가지고 밤에 도주하는 데 성공을 한다. 이렇게 고향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위기를 느낀 그는 동생 서경조와 함께 외가가 있는 황해도 장연의 소래(송천, 松泉)로 피신하게 된다. 거기서 그는 자기 가슴속에 몰래 숨겨온 성경을 가지고 외가 친척과 인근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전도가 점차 활기를 띠면서 가정집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로써 1883년 5월 16일, 한국 최초로 외부의 도움 없이 자생적으로 세워진 소래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한편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에 의하여 서울에 설립된 최초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창립될 때 참여한 14명의 최초교인들도 서상륜과 백홍준이 전도한 교인들이었다. 그 이후 서상륜은 새문안교회의 조사로 세워졌고 언더우드 선교사의 동역자가 되었으며 선교초기 권서인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복음사역에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한국교회 선교역사에 초석을 놓으며 선구자의 삶을 사신 서상륜은 1925년 12월 16일 7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비록 평신도였지만 그의 장례는 장로교총회장으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평신도의 장례를 장로교총회장으로 예우한 것은 전례에 없는 특별한 일이었다. 한편 그의 동생 서경조는 장로교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7인 중의 한 명이다. 그의 아들 서병호는 독립운동가로 상해에서 활동하였으며 그의 후손으로는 서원석 장로(전 대한성서공회) 서경석 목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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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꿈을 가진 나그네 원문보기 글쓴이: 박경진
첫댓글 한국 기독교의 선구자 서상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