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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설계자
정도전(0620)
정도준의 동상
1382년 호바투가 이끄는 여진족이 자주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자 조정에서는 그 지방 출신인 이성계(李成桂)를 동북면(함경도) 도지휘사로 임명하여 토벌케 하였다. 이성계가 임지(任地)에 머물고 있던 1383년 가을 어느 날 동북면에 위치해 있던 이성계의 군막(軍幕)으로 뜻밖의 사람이 한 명 찾아 왔다. 내방인(來訪人)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었다. 이성계는 정도전을 위해 요즘 군사용어로 하면 사열을 시켜 주었다. 훈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을 지켜본 정도전이 이성계의 심중을 타진하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정도전: 장군님! 정말 훌륭하십니다. 이 정도 군사면 무엇인들 못하시겠습니까?
이성계: 삼봉, 무엇인들 못하겠느냐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정도전: 이곳 북방 경비는 물론 동남방에서 출몰하는 왜구를 토벌하는 일도 문제가
없겠다는 뜻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7년 전인 1375년 정도전이 성균관사예로 있을 때의 일이다. 북원(北元)의 사신이 국경 근처에 도착했다는 전갈이 고려 조정으로 날아들었다. 북원은 명태조 주원장에게 패한 원나라의 잔존세력들이 몽골에다 세운 나라였다. 이때 실권을 쥐고 있던 이인임과 경복홍은 북원이 상국으로 모시던 원나라의 후예이므로 사신들을 정중하게 모셔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정도전 김구용 이승만 권근 등 신진사대부들이 북원의 사신을 칙사 대접하여 명나라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다는 상소를 올렸다. 11세의 우왕을 대신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인임과 경복홍은 그 상소를 무시하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북원 사신들을 접대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자 정도전은 술을 진땅 마시고 밤에 경복홍의 집으로 찾아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나더러 원나라 사신을 접대하라면 그 사신을 잡아서 명나라로 보낼 것이오!”
정 5품의 하급관리가 최고 관직인 시중의 집을 찾아가서 항명(抗命)한 사건은 조용히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정도전은 삭탈관직 되고,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으로 귀향 보내졌다. 2년 뒤 경상도 봉화로 유배지가 옮겨졌고, 그로부터 4년의 적소생활 끝에 겨우 풀려났지만, 같이 유배됐던 사람들은 복직이 된 반면, 정도전의 복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도전이 이런 불이익을 당한 것은 그의 출신 성분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정도전은 1342년 충청도 단양의 삼봉에서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문제는 어머니의 출신성분에 있었다.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명문 단양 우씨 우현보 집안의 인척인 승려 김진이, 자기 종인 수이의 아내와 정을 통해서 낳은 딸이었다. 김진은 득녀 후 속퇴하여, 수이의 아내를 빼앗아 가정을 이룬 다음, 뒤늦게 얻은 딸을 각별히 사랑하여 고이 기른 후, 명문가인 연안 차씨 집안의 사위인 우연의 첩으로 들여보냈다. 우연과 김진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정도전의 어머니다. 뿐만 아니라 정도전도 연안 차씨 집안의 사위인 최습이라는 사람의 서녀와 혼인한 바 있었다. 최습은 우연의 정실부인인 연안 차씨의 오빠인 차안도의 사위다.
고려시대에는 첩 소생도 일단 관직에 나갈 수는 있었다. 그러나 고위직으로 올라가기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정도전의 경우 그의 혈통을 잘 알고 있는 단양 명문가 출신의 우현보와 세 아들들이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그들은 정도전이 과거에 합격했을 때부터 자기 집 종의 자식이라며 폄하하더니, 승진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도전에게 불리한 여론을 퍼트려 탈락하도록 유도한 바 있었다.
이무렵 스승인 이색(李穡)이 재상의 직위에 올라 인사권을 쥐고 있었지만 이색도 우현보가 강력하게 반대하자 정도전의 복직에 힘을 보태주지 않았다. 정도전은 이때 스승 이색에 대해서도 원한을 키운 것으로 여겨진다. 유배령이 해제된 뒤에도 복직이 되지 않았던 정도전은 서울의 삼각산 기슭에서 초막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노릇을 했는데, 이마저도 땅을 불법 접거했다는 고변으로 못하게 되자, 그로부터 삼천리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정도전의 생애를 통해 이 기간이 가장 중요한 시기일 것으로 사료 된다. 한가하게 산천경개나 관광하고 다닌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민심을 살폈고, 백성들이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리는 실상을 똑똑하게 목격한 다음 진정으로 백성들이 주인이 되고, 거들먹거리는 권신들을 다 몰아내고 민초들이 살맛나서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구상을 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정도전의 새나라에 대한 설계는 방구석에 처박혀 책을 뒤지면서 만든 것이 아니다. 그의 청사진은 발로 뛰며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끼며 완성한 것이다.
정도전은 썩을 대로 썩은 권신(權臣)들에 둘러 싸여있는 고려왕으로써는 도탄 속에 빠진 백성들을 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한다고 생각한 정도전은 그 동안 새로운 시대를 여는데 뜻을 같이할 혁명 동지를 찾아 다녔다고 볼 수 있었다. 이성계를 찾은 것은 결코 지나는 길에 우연히 들린 것이 아니었다.
이 정도 군사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냐는 말의 속뜻은 썩은 나라를 뒤집어엎고 새 나라를 세우는 것도 가능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었다. 이성계도 대강 그런 정도전의 의향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섣불리 맞장구를 칠 수 없어 시치미를 뗀 것이었다. 백전노장 이성계도 녹녹치 않은 인물이었다. 쉽게 마음을 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며칠 후 정도전은 그곳을 떠나기 직전 이성계 군막 앞에 서있던 아름드리 노송(老松)의 둥치에다 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새겨 놓았다.
滄茫歲月一株松(창망세월일주송)
生長靑山幾萬重(생장청산기만중)
好在他年相見否(호재타년상견부)
人間俯仰便陳蹤(인간부앙변진종)
아득한 세월, 한그루 소나무
청산에 나고 자라 몇 만 년인가.
좋은 시절 다른 해에 서로 볼 수 있을까
살아가는 동안 높이 보고 따르리
정도전이 살아가는 동안 높이 보고 따르고 싶은 소나무는 이성계를 이르는 것이었다. 이 시는 두 사람이 며칠 사이에 의기투합이 되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정도전은 일단 그곳을 떠났다가 얼마 후 다시 동북면으로 찾아와 1년 가까이 이성계의 곁에 머물며 막료로 일했었다. 그 후 정도전은 1384년 전교부령이 되어 정계로 컴백하였다.
정도전이 정계 복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의기투합된 이성계의 강력한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방 오랑캐와 남방 왜구들을 격퇴시키며 꾸준히 신망을 쌓아온 이성계의 힘은 최영의 반발을 무마하고, 정도전을 모함하는 우현보와 그 세 아들들의 입을 막고, 이색과 정몽주의 묵인을 이끌어낼 수 있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정도준은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온 후 1385년에는 성균좨주를 거쳐 남양부사에 임명 되었다. 그 후 이성계의 강력한 추천으로 정3품인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한다. 이것은 정도전이 혈통적 약점 때문에 열리지 않았던 중앙정계의 문 안으로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부터는 우현보와 그 세 아들들도 정도전을 함부로 폄하할 수 없게 되었다.
우왕과 최영의 명을 받고 요동정벌에 나섰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인 1388년 5월의 일이었다. 이성계는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내쳤다가 사약을 내렸다. 고려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는 오른팔 정도전을 밀직부사로 승진시켰다. 여기까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는데, 조민수가 이색과 연대하여 창왕을 보위에 올리자, 혁명은 주춤해질 수밖에 없었다.
1389년 정몽주와 이성계는 폐가입진 즉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올린다는 논리를 내세워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보위에 올렸다. 1년 후인 1390년 5월 이초와 윤이가 명 태조 주원장에게 이성계가 명나라를 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이성계에 의해 실각한 이색과 조민수로 하여금 이성계를 토벌할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는 밀서를 보낸 것이 탄로 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양왕은 진위를 밝히기 위해 이색과 조민수를 국문했지만 그들은 결백을 주장하였다. 밀서는 이초와 윤이가 꾸민 것으로 결론 내려졌지만, 이 사건은 이색과 조민수를 비롯하여 그때까지 고위직을 유지하고 있던 우현보 권중화 등 고려 구신들의 입지를 위축 시켰다. 정도전이 출사길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던 우현보와 그의 세 아들은 물론 한 번도 자기의 편이 되어 주지 않은 스승 이색을 탄핵하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리는 것으로 포문을 열었다.
그러자 구신들도 정몽주와 힘을 합해 정도전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노비의 피가 섞인 비천한 출신의 정도전이 재상의 자리에 오른 다음 자기의 천한 근본을 엄폐할 목적으로 본 주인인 우현보 등을 모함하여 조정을 어지롭히고 있다는 것이었다.
공양왕은 정몽주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한목소리를 내는 구신들의 주장을 받아 드려 정도전을 유배 보내는 결정을 내렸다. 공양왕이 허수아비처럼 자신을 조정하는 이성계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저항을 한 것인데, 이는 자신의 생명을 단축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성계는 이색과 정몽주를 해할 생각이 없어 망설이고 있던 터였다. 이때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한 것을 감지한 사람이 이방원이다.
이방원은 공양왕의 절대 신임을 배경으로 이성계 일파를 몰아내려는 정몽주의 심중을 괴뚧어보고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선지교에서 철퇴로 정몽주를 때려죽이는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만약 이 사건이 아니었다면 이성계와 정도전을 비롯한 혁명파들은 이때 사태를 반전 시키지 못하고 역적으로 몰려 처형될 가능성이 높았다. 수백 년 동안 내려온 구신들의 결집력은 신흥 세력들이 쉽게 제압할 수 없을 만큼 컸고, 공양왕과 정몽주 연대도 생각보다는 큰 저항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성계는 거기서 멈추면 죽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시기적절하게 이방원이 나서지 않았다면 이성계는 정몽주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감안할 때 이방원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 건국의 제일 공로자는 이방원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그 점을 아버지인 이성계가 우선 인정하지 않았다. 정몽주를 죽였다는 보고를 받고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버럭 화를 내었다.
“만 백성의 존경을 받는 사람을 죽이고 어떻게 민심을 얻는단 말이냐. 네가 앞에 나서면 백성들의 원성이 쏠릴 것이니 절대 나서지 말고, 은인자중하고 있거라!”
이성계는 조선 개국의 논공행상을 할 때도 이방원을 철저하게 배제 시켰다. 정도전이 이방원의 몫까지 모두 가로채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개국 일등공신 정도전은 문하시랑 찬성사, 동판 도평의사사, 판호조사, 판성서사서, 보문각 대학사, 지경언 예문춘추관사, 의흥친군위 절재사 등등의 벼슬을 제수 받았다. 이성계 다음으로 가장 높은 권력을 쥐게 된 것이었다. 그 직후 정도전은 우현보와 이색에 대한 보복의 칼날을 다시 뽑아 들었다. 이성계가 즉위 교서를 만들라는 하명을 내리자 정도전은 교서에 우현보와 그 세 아들, 이색, 이숭인, 설장수 등 10여명의 죄상을 열거하여 극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적었다. 이성계는 고려 최고의 학자였던 이색을 존경해 왔었다. 가는 길이 다르다고 죽이고 싶지 않았다. 회유하여 중용할 생각을 하는 중인데 정도전이 제동을 건 것이었다.
“전하, 그들은 대역 죄인들입니다. 만약 저들을 용서한다면 화근덩어리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되옵니다.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울 수 없음을 헤아려 주소서!"
“과인은 이미 그들의 죄를 사한다 말한 적이 있소.”
이것은 정도전이 이미 예상했던 말이었다. 그래서 목소리를 낮추어 이성계의 체면을 살려주는 타협책을 제시한다.
“극형에 처하라는 교서 내용을 수정하여 유배나 장형(杖刑)으로 다스린다는 어명을 내리신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성은을 베푸는 것이 될 것이 옵니다, 전하?”
그러니 혁명동지의 말을 더 이상 반대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색과 우현보는 나이가 많으니 유배를 보내되 장형은 면하게 하시오.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유배형과 장 100대로 다스리는 것을 윤허하겠소.”
그렇게 하여 이색과 우현보는 귀향 보내지는 것으로 그쳤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유배지에서 장형을 받게 되는데, 곤장 백대를 다채우고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현보의 세 아들이 모두 장형 집행 중에 절명했고, 이색의 큰아들은 장독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 후에 유명을 달리했다. 정도전의 밀명을 받은 사람들이 죄인들의 척추를 집중적으로 내려치니 장형 백대는 능지처참이나 교수형보다도 도 더 참혹하게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극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는 장형 100대가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과 같다고는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일 년이 흘렀다.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큰아들이 비명에 간 후 아내마저도 세상을 뜨자 뼈에 사모치는 고독을 시를 짓는 것으로 달래며 연명하던 이색이 경기도 여강 나루에서 변사체로 떠올랐다. 이것도 정도전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 살해된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원한 진 사람들을 철저하게 응징한 정도전이 스승이라고 해서 이색을 용서했을 것 같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명을 받은 사헌부에서 이색의 죽음과 관련하여 집중 조사를 한 결과로는 자살로 결론 내려졌다. 철학적 사유를 했던 노시인은 말년에 이르러 잘못 살아 왔다는 자괴감에 빠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신분열까지는 아니래도 우울증이 심화되어 살아야 할 동기를 상실하고 죽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면 바이오코드는 자살이라는 형태를 통해 열성적 인자를 도태시키는 결정을 내린다. 바이어코드는 죽고 싶어하는 사람은 죽게 하고 악착같이 살고 싶어하면 살려 주는 역활도 한다. 현실참여형 시인이 벽에 부딪쳤을 때 선택할 법한 방법이다.
태조실록에는 정도전을 복수의 화신처럼 묘사해 놓은 반면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왜곡하거나 축소해 놓은 감이 있다. 스승인 이색을 탄핵한 것을 두고 인륜을 저버린 것처럼 묘사했지만 정도전의 입장에서 보면 사제 간이라도 가는 길이 다르면 같이 갈 수 없다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우현보의 편을 들어 복직이나 승진에 전혀 도움을 주지않았던 점 쯤이야 더 이상 올라갈데가 없을 만큼 높은 지위를 확보한 상태니 관대해 질 수도 있었다. 문제는 부패한 고려 권신들을 감싸고 돈 이색은 정도전이 꿈꾸던 이상 국가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벽이었다는데 있었다. 구신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회유가 통하지 않는다면 스승이라도 제거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철저하게 했다고 여겼겠지만 나중에 정도전이 일소시키지 못한 고려 구신 세력에 의해 제거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때 오히려 피를 덜 본 감이 있다. 혁명은 이렇게 비정한 것이다.
어쨌든 정도전은 조선개국의 일등 공신으로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지은 사람이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대궐터를 잡고, 경복궁과 강녕전, 근정전 등을 비롯한 대궐 전각과 사대문과 보신각의 이름을 지은 것들이 모두 정도전의 작품이다. 그는 무엇보다 조선경국전을 집필하여 조선왕조 5백년의 통치 이념을 정립시켰다. 그는 왕조의 제도적 법적 기틀을 마련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을 신속하게 추진하였으며, 사병을 혁파하고 과전법을 시행하여 권신들에게서 몰수한 토지를 실제 경작을 할 수 있는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가 조선 팔도를 다리품 팔아가며 만들었던 새왕조의 그림이 서서히 웅자를 드러내고 있었다.
정도전은 숨돌릴 여유도 없이 몰아 부쳤다. 1393년(태조 2년) 7월 정도전은 동북면 도안무사로써 일대에 살던 토착 여진족을 조선의 호적에 올리고, 그들에게 농토를 주어 농사를 짓도록 생존권을 보장해 주는 조처를 취했다. 이어서 동북면을 주(州) 군(郡) 현(縣)으로 나누고 성(城)과 보(堡)를 쌓아 함경도 일대의 땅을 우리의 국토로 편입하는 작업을 했다. 명나라로써는 이 일대를 고스란히 조선에 넘겨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데, 정도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의흥삼군부의 책임자로서 중외의 병전을 장악하고 병제를 대폭 개혁하여 고려 말에 거의 사병화된 군대를 혁파한 다음 공병으로 귀속시키는 조처를 취했다. 군사제도와 병법을 개혁한 다음 요동 수복을 위한 전쟁 준비에 착수한 것이었다. 제보에 의해 이런 사실을 알게된 명나라는 태조 4년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이 무례하다는 것을 이유로 정도전을 표전문 작성자로 지목하여 그의 압송을 요구하여 왔다. 표전문 작성자는 정도전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명나라는 화근덩어리인 정도전을 제거하는 구실로 표전문을 물고 늘어진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도전은 더욱 군사훈련에 박차를 가하며 요동수복운동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표전문 사건은 정도전의 요동수복운동을 강화시켰고, 이로인하여 격화된 두 나라의 긴장 관계는 마침내 이성계와 정도전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정도전 일파의 권력 강화와 대명 관계의 긴장에 불만을 품은 구신들이 연대하여 정도전 일파의 제거에 나서게 되는데, 그 중심에 이방원이 있었다.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은 이성계 자신의 의사가 가장 많이 작용했지만 정도전이 반대했다면 재고했을 것이다. 정도전은 야심 많은 이방원이 집권하면 자신의 정치적 지위도 위태로워지고 신권 우위의 관료정치를 제대로 펼 수 없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나이 어린 방석을 보위에 올리도록 한 것이었다. 그래야 마음대로 이상을 펼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을 했기 때문이었다. 세자의 지위를 아우에게 뺏기고 병제 개혁 과정에서 병권마저 박탈당한 이방원은 정도전을 제거할 결심을 한다. 왕권을 찬탈한 것은 자신인데 죽쒀서 개준 다음 뒷전으로 밀려날 수 만은 절대없는 뜨거운 야망덩어리가 이방원이다.
역성혁명에 소극적이었거나 반대하던 고려 구신세력 중 변계량, 하륜, 권근과 같은 이들이 방원 세력에 가담하였고, 이방원은 마침내 태조 7년 10월에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날 정도전은 남은의 애첩이 마련한 주안상을 앞에 놓고 세자 방석의 장인인 심효생 이직 등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불시에 습격을 감행한 방원이 이끄는 기습군들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무참하게 도륙하였다.
정도전은 새 왕조의 건설에 분골쇄신한 보람도 없이 왕자와 종친을 모해하였다는 역적 누명을 쓰고 방원의 칼에 쓰러진 것이었다. 정도전은 그 화급 중에 짧은 시 한 수를 남겼다.
三十年來勸苦業(삼십년래근고업)
松亭一醉竟成空(송정일취경성공)
30년 세월 동안 쉬지않고 이룩한 고업(苦業)
송정에서 술 한잔 마실 새 허사가 되었구나
아무렴 방심하고 마신 술 한 잔이 힘들여 쌓은 고업을 무위로 만든 원인의 전부겠는가. 급진적인 개혁 보다는 구신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아우르는 당근책을 동시에 펴고, 철저하게 소외된 방원의 원한을 어루만지는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꿈꾸던 새나라를 만들어 놓고도 끝까지 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역적으로 몰려 죽은 원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숭례문을 비롯 사대문의 이름도 정도전이 작명한 것이다. 화재 당하기 전의 숭례문 사진.
정도전은 1342년생이다. 몇 월생인지를 정확히 기록해 놓은 문헌은 없다. G06코드인 것만은 분명하다. G06의 가장 큰 특징은 활동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는 방구석에 처박혀 책이나 뒤적인 결과로 조선을 설계한 것이 아니다. 두 발로 삼천리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민생을 살핀 후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 설계를 한 것이었다.
그가 10월에 살해 되었다는 것은 10월이 가장 시운(時運)이 막혔던 때라는 반증이 된다. 10월의 충(衝)은 4월이다. 다시 말하면 4월생이니까 충월(衝月)인 10월에 죽게 된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4월 생으로 보면 그의 바이오코드는 0620이 된다. 0620은 큰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발로 뛰는 특성을 보여준다. 정도전의 행적과 딱 맞아 떨어지기에 4월 생이라는 추론이 힘을 받는다. 백성이, 왕이 아니라 신하가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보다 큰 그림이 있겠는가.
한고조는 장량을 책사로 발탁하여 새 왕조를 열었던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에게 등극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는 것이 정도전의 생각이었다. 그가 스스로를 해동의 장량에 비유했던 것은 조선의 설계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성계가 원한 나라를 만드는데 뜻을 같이하고 힘껏 도운 혁명 동지가 아니라 자신이 설계한 새나라의 주군으로 이성계를 앉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그림을 다부지게 크게 그렸고, 그것을 이루기도 했지만, 행동력 보다 좀 더 주위를 살피고 배려하는 인격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역적으로 몰려 비명에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0620은 달릴수록 힘이 나는 한혈마(汗血馬)다. 문제는 어디로 달리는지 본인도 모를 때가 있다는 것이다. 정열적이고 저돌적이며 힘이 넘친다. 무슨 일이든 생각하기만 하면 곧바로 실행에 옮길 정도로 빠르고 거침없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브레이크를 밟지않고 내달리고 보는 게 단점이다. 정치 지도자가 되면 국가에 활력을 넣어줄 수 있지만 추진력이 너무 강해 오버페이스에 따른 부작용이 연출된다. 정도전은 성급하게 토지를 개혁하고 비대한 사병조직을 혁파하려다 역풍을 맞은 것이었다. 속도만 조절했다면 반발세력을 훨씬 완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고, 최소한 역모로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0620은 자칫하면 스케일과 행동반경만 넓지 실속을 얻기 어렵다. 즉 S20은 거창한 그림을 그리도록 만드는데, 그것이 성공 가능성이 있는가를 검토하기도 전에 곧바로 G06에 따른 행동이 나오기 때문에 이런 실수의 초래가 필연적인 수순이다. 달리면서 계획을 수정해나가는 스타일이라 자신을 좀 더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 정도전은 자신의 그림대로 조선을 개국하는데 까지는 성공할 수 있었다. 유배와 승진 탈락같은 불행이 오히려 그의 질주를 막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0620이라는 별의 괘도를 벗어나지 않고 자기 괘도를 따라 정확하게 운행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행동파 0620은 수행자가 되기 쉽지 않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힘들어도 인욕을 일상화하고 수행 정진을 생활화하면 과오를 범할 확율을 낮출 수 있다. 그런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내세웠으니 그에 따른 과보를 받는 것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0620은 어째튼 항성코드가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왕이 될 수는 없다. 킹메이커가 최상의 역활인데, 자기의 코드를 십분 발휘하여 조선 건국 일등공신이 될 수 있었다. 0620은 활동적이고 야심차다. 따라서 자기중심적이다. 이것이 책망의 대상이 된다. 0620에게 부여된 이 결점을 자신이 제어할 수 있을 만한 강한 절제력을 얻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남의 충고를 잘 받아 드리지 않기 때문에 실패를 자초하게 된다. 정도전이 여말에 포기했던 요동정벌을 단행하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역사 속에서 비겁자로 기억되기를 원치 않았던 이성계도 포기했던 요동정벌을 다시 실행에 옮겨 성공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여말보다는 여건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조선의 국력은 그때까지도 충분하게 비축된 상태가 아니었다. 요동정벌은 당장 실천에 옮기려 하지 말고 차분하게 준비하며 다음 기회를 노렸어야 하는 문제인데, 허락했던 이성계도 정도전도 성급했다. 여기서 실패로 돌아가고 철저한 친명파들이 조선을 장악하므로써 요동정벌은 영원히 물건너가 버리고 말았다. 0620은 속도를 늦추는 것에 대해 매우 힘들어한다. 스트레스가 지나치면 과격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동선을 묶고, 속도를 잡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정권을 잡은 후의 한열마 정도전은 앞으로 내달리기만 하였다.
0620에게 이치를 따져 설득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귀중한 시간만 낭비할 것이다. 0620은 권력을 난폭하게 다룰 수도 있다. 더구나 자신의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조절해야 하는지 잘 모르며, 이런 단점을 스스로 느끼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0620은 외부의 암시나 조짐에 민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해조차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정도전은 요동정벌에 대한 계획을 수정하려 하지 않았고, 가는 길이 다른 정치가들이나 자신을 모욕했던 사람들을 난폭하게 응징했던 것이다.
세월을 거꾸로 돌려 다시 산다고 해도 정도전은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일 것이다. 별들은 자신의 괘도를 이탈하지 않고 정해진 궤적을 따라 항성으로 또는 행성이나 위성으로 정확하게 자신이 갈 길을 따라 운행(運行)하기 때문이다. 우주를 앞마당 삼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인격적 자재를 얻은 별은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 부처님뿐이다.
첫댓글 우주를 앞마당 삼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인격적 자재를 얻은 별은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 부처님뿐이라는 말씀에 공감이 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