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봄을 맞아 초록색 잡초는 싱그러워지고 향기로운 꽃향기가 물씬 피어오르는 청계천, 나는 콘크리트로 단장한 축대 난간에 서서 육십 년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그동안 많이 변했구나.’
국가경제와 국익을 위해서 희생되었던 청계천은 오랜 시간을 콘크리트로 덮어버려서 혈맥이 끊어졌고 그 위에 우뚝선 고가도로에는 자동차가 부유한 삶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떼를 지어서 달려가던 그 시절이 엊그제 같았는데
‘산책길에는 사람도 많이 다니고’
덩그러니 철거에서 살아남은 교각 두 개가 옛날을 보여주는 청계천의 맑아진 숨결은 물고기가 헤엄을 치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여기를 찾는 많은 사람이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길을 사색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명소로 탈바꿈을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이건 사람의 손길로 만든 조화와 같은 아름다움이지 진정한 숨결의 생화는 아닌 것이야.’
내 머릿속에는 어느새 꾸밈없는 자연 그대로 흐르던 청계천의 옛 모습이 영상필름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미숙이 엄마와 원산댁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청계천변에서 고락을 함께 했던 이웃사촌의 다정한 얼굴이 문뜩 떠오른다.
‘혹시 함흥댁은 아직까지 살아계실까?’
돌아앉기도 비좁은 천막점포에서 불편하기는 했지만 마음은 늘 함께했던 함흥댁이 보고 싶어진다.
‘그래, 내가 그동안 그리워했던 것은 이웃과 함께했던 옛정이었어.’
내가 아는 청계천의 진면목은 천변에 다닥다닥 붙어살던 판잣집은 늘 바닥을 들어내는 생활고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지만 정이 넘쳐나는 동네였고 천막 한 장 없어 추위에 떨고 땡볕에 생살을 끄슬려도 인심이 후했던 청계천변 장사치의 그리운 야사가 이곳에 있었다.
“아이고, 준이 엄마 이걸 어떻게 하면 조우”
재영이 엄마가 손으로 방바닥을 내려치며 방문을 빠끔히 열고 머리를 들여 미는 준이 엄마에게 큰소리로 넋두리를 하다가 다시 내뱉는 말이
“글쎄 조카 놈이 국군장교인데 재영이와 준이를 청량리역 기차간에서 봤다지 뭐야”
“네에, 준이와 재영이를 봤다고요. 그게 정말이에요?”
준이 엄마가 눈이 휘둥그레져가지고 재영이 엄마의 말이 믿기지 않아서 그 자리에 선 채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글쎄, 그렇다니까”
눈물 콧물을 훌쩍거리면서 재영이 엄마가 하던 말을 다시 이으면서
“조카 놈이 미군열차 호송관으로 근무하는데 재영이가 타고 있어서 너 죽으려고 이 기차를 탔느냐고 고함쳤더니 아이들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라지 뭐야”
“아니 그러면 조카가 한국군 장교라면서 애들을 왜 못 데려왔데요?”
준이 엄마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얼굴로 방안으로 황급히 들어서며 묻자 재영이 엄마가 가슴을 쿵쿵 치면서 대답을 했다.
“아무리 장교라도 미군관할이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지 뭐야”
“아이고, 내 새끼 불쌍해서 이걸 어떻게 하나.”
이제는 준이 엄마가 목을 놓아 꺼이꺼이 울기 시작하고 재영이 엄마도 따라서 통곡을 한다.
“아니 얘들이 어떻게 그 기차를 탔대요?”
궁금한 생각에 훔쳐듣던 내가 답답한 생각에 창문을 열고 물어보았다.
“민씨, 마침 잘 왔우.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 재영이 엄마가 오만상을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글쎄 내 말 좀 들어보우? 이렇게 억울할 데가 있나 조카가 전하는 말을 들어보면 애들이 동대문시장에 놀러갔다가 길거리에서 미군부대에 취직시켜준다고 꼬이는 말에 넘어가서 미군트럭을 탔는데 돈암동 어느 큰 기와집에 데리고 들어가더니 대청마루와 방안에 앉은 사람들 신분증을 거둬가지고 그 자리에서 태워버리더라지 뭐야”
“아이고, 이걸 어떻게 해”
“이런, 날강도 같은 놈들!”
결국 준이 엄마와 재영이 엄마가 서러움을 못 참아서 붙잡고 엉엉 운다.
“아직 어린것을 왜 데려갔을까요? 이런 쳐 죽일 놈들 같으니라고”
나는 생때같은 어린 아들을 도둑맞은 피울음소리를 듣자 세상이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영 못마땅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래 어디로 데려갔데요?”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어서 참고 물었다.
“똥뀌부대라고 속초로 갔다는데 낙하산에 태워서 얘들을 이북에 보낸다지 뭐야”
“네에, 이걸 어떻게 하면 좋아. 그런데 민씨, 똥뀌가 뭔 말인가요?”
재영이 엄마의 대답에 준이 엄마가 뭔 말인가 이해가 안 되는지 울다가 눈을 치켜뜨고 나를 쳐다본다.
“통키라는 말은 당나귀란 뜻입니다.”
“당나귀가 무슨 부대인지는 모르지만 이북에 가면 죽은 목숨인데 이걸 어떻게 하나”
"그래도 행방이 모연해서 걱정했던 아이들 소식을 들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나는 그렇게 한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답답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어서 창문을 닫고 하늘을 쳐다보며 혼자서 투덜거렸다.
“에이, 미친놈의 세상”
그래도 장사를 해야 아이들을 거두고 병들어 누워있는 재영이 아버지의 약값도 벌어야 해서 재영이 엄마가 울다가 두 손가락으로 콧물을 팽하고 풀더니
“민씨, 어서 갑시다.”
치맛자락으로 콧물을 훔치고 나를 따라나서자 준이 엄마도 떡이 든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찬바람이 몰아치는 기동차철길을 따라서 꼬불거리는 협소한 길을 나섰는데 찬바람이 반갑다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잣집 지붕위에 누워 있다가 하얀 눈가루를 뿌려댄다.
“아이고, 눈 매워라“
젖은 나무가 타는 연기에 실밥을 입에 물고 뜯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함흥댁이 투덜거리는 말이 거슬렸는지 나를 따라온 찬바람이 비좁은 천막 안으로 발을 들여 밀어서
“어이구, 추워”
나는 잔뜩 어깨를 움츠리면서 청계천 냇가를 바라보니 아직도 얼굴이 부스스한 얼음덩어리가 누워있는 땅바닥에는 돌로 고인 아궁이에서 너저분한 잡목이 불꽃을 머리에 이고 힘에 부쳐서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이고, 곰을 잡네.”
깡마른 좌판위에 미군작업복과 군화 등 잡동사니를 늘어놓던 내가 참다못해서 고함을 쳤는데
“조금만 참으셔”
두 눈을 질끈 감고 흐르는 눈물을 연신 훔치며 막대기로 아궁이를 헤치던 용이 아범이, 미안한 마음에 너스레를 떨어서 나는 허허 웃고 말았다.
“......,”
반 토막 난 드럼통에는 하얀 수증기가 검은 연기와 뒤엉키며 하늘로 오르는데 먹음직하게 보이지만 이것은 먹을거리가 아닌 미군작업복을 까맣게 염색하는 중이고 매운 연기에 눈물 콧물 쏟으면서 함흥댁이 재봉틀발판을 부지런히 밟으며 헐렁하게 큰 작업복을 새 주인의 치수에 맞게 고치는 중이다.
“누님, 조금만 쉬었다가 하세요.”
보기가 딱해서 내가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더니
“이걸 맡긴 젊은이가 오늘 찾으러 온다고 했으니 어서 마무리를 해야지”
함흥댁이 내 말을 되받아넘기고 재봉틀 발판을 부지런히 밟는 천막아래 찬바람이 몰아치는 청계천 빨랫줄에는 까맣게 염색된 군복바지가 추위에 동태처럼 얼어서 마치 패잔병의 깃발처럼 무겁게 펄럭거리면서 새 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첨벙’
반 토막 드럼통에서 염색된 군복이 하나 둘 차디찬 살얼음 냇물에 뛰어들 때마다 그래도 마음이 착해서 자리를 내어준 청계천의 얼굴이 새까만 눈물을 흘리며 말 한마디를 던지는 것 같았다.
“나는 괜찮으니 부지런히 벌어서 아이들이나 열심히 키우셔요.”
내가 혼자 그렇게 생각을 하니 저절로 마음이 풀어져서 피식 웃고 말았는데
“엠피- 엠피……”
별안간 소리소리 지르면서 입성이 남루한 사내가 시장 길을 따라가며 다급하게 달려간다. 시장입구에서 망을 보고 있던 순자 아빠다.
“어서 빨리 숨어”
나는 재빨리 진열해놓았던 군복과 군화를 좌판아래 구덩이에 쑤셔 넣고 미리 준비했던 헌옷가지를 자루에서 꺼내 널어놓았다.
“후유, 큰일 날 뻔했네.”
나는 한숨을 돌리고 시장골목길을 내다보니 사방천지가 온통 북새통이다. 고기깡통, 양담배, 과자, 군복 등 너저분한 상품이 머리부터 감추느라고 난리가 났는데
“떴다.”
“......,”
시치미를 떼고 쳐다보는 시장상인의 싸늘한 눈총을 받으면서 검은색 안경을 쓴 미군헌병 둘이 지프차에 앉은 채 메케한 휘발유가 타고 남은 냄새를 풀썩 뿜어대면서 시장 길을 누비고 지나가고
“이거 내놓지 못 해, 이 도둑놈아!”
“깟뗌”
미처 숨지 못한 물품은 강제로 지프차에 실려서 제집으로 돌아가게 되고 손을 놓고 지켜보는 상인은 막대한 손해를 보고 눈물께나 흘리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누가 털렸어?”
“춘자네가 몽땅 털렸어요."
“아니, 어쩌다가 털렸나?”
“글쎄, 변소에 간 사이에 엠피가 들이닥쳤으니 물건을 치울 시간이 없었지”
“하필이면 그때 그게 나올게 뭐람”
“조금만 참았어도 되는 걸”
“아이고 딱해라, 어쩌면 좋아”
“그러게 말이야”
시장바닥 별명이 떠벌녀 원산댁과 함흥댁이 주고받는 말을 말없이 듣고 있던 나는 어떻게 된 일인가 궁금해서 뒷짐을 지고 천천히 시장 길을 걸어가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좋아”
“이거 큰일이 아닌 감”
“몽땅 뺏겼으니 어떻게 살지”
“설마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칠라고.”
춘자 엄마 가게주변의 상인들이 혀를 차면서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성님, 집에 가서 조금 쉬셔야 쓰겠소.”
“......,”
천막으로 둘러친 허술한 가게에는 빈 박스와 잡동사니만 널브러져있는데 허옇게 눈물자국이 말라버린 춘자 엄마가 초점 잃은 눈동자로 먼 하늘을 바라보며 땅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았다가 이웃가게 미숙이 엄마의 부축을 받고 끌려가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이제 새끼들과 어떻게 살지?"
“......,”
나는 춘자 엄마의 넋두리에 울컥 가슴을 치밀고 오르는 분노를 혼자 눌러 삭이면서 털레털레 가게로 돌아오는데 시장 안을 온통 휘젓는 고소한 냄새가 위장을 자극하고 코끝을 간질이며 파고들었다.
“꿀꿀이 죽이나 한 그릇 비울까”
미군이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인 줄은 알았지만 저렴한 가격에 나는 모진 추위에 바람막이 천막도 없이 장사하는 꿀꿀이죽을 파는 사람의 화로가 늘어선 장터에서 그래도 가끔 단골로 다니는 복동이 할머니의 화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맛있는 냄새를 솔솔 풍기며 김이 무럭무럭 나는 솥단지를 바라보는데
“민씨, 한 그릇 드실 라우?”
“예, 한 그릇 주세요.”
복동이 할머니의 물음에 대답해주고 나는 위장을 자극하는 시장 끼와 손끝까지 저려오는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 남루한 옷차림에 몹시 피곤한 얼굴의 생면부지의 사람이 대부분인데 그 중에는 낯익은 시장상인의 얼굴도 여럿이 죽 그릇을 비우고 있었다.
“오늘은 장사가 좀 되었우?”
복동이 할머니의 늘상 묻는 말에
“웬걸요, 오늘은 아직 마수걸이도 못했어요.”
내가 판에 박은 대답을 하고 옆을 보니
“민씨도 한 그릇 비우러 왔는가?”
전라북도 정읍에서 소작농사를 짓다가 형편이 나아질까 해서 무작정 서울로 왔다는 수염이 더부룩한 지게꾼 김서방이 옆집 화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정신없이 죽 그릇을 비우다가 아는 체를 해서 나는 대답대신 빙그레 미소를 보냈는데
“식기 전에 어서 들어”
“......,”
복동이 할머니의 채근을 받고서야 김이 무럭무럭 나는 죽 그릇을 들고 시장한 탓에 정신없이 입에 퍼 넣었다.
‘후루룩’
고소한 냄새가 감미롭게 입맛을 돋우고 간혹 잘근잘근 씹히는 소시지와 햄의 부드러운 감촉을 목구멍에 느끼면서 서너 수저 들었는데 죽 그릇 안에서 담배꽁초가 말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할머니, 담배꽁초가 나왔어요,”
나는 울컥 차오르는 메스꺼움에 진저리를 치며 손가락으로 담배꽁초를 집어서 복동이 할머니에게 건네주었더니
“이거 가끔 나와”
복동이 할머니는 대수롭지 않은지 쳐다보지도 않고 시큰둥해서 대답을 했다.
“......,”
시장바닥에서 제일 싼 먹을거리라 그러려니 하고 그냥 참는 수밖에 없어서 내키지는 않아도 죽 그릇을 마저 비워버리고 십 환짜리 지전 두 장을 복동이 할머니 손에 쥐어주고 돌아선 나는 또 잡념에 빠지고 말았다.
“으이그”
미군이 먹고 남은 그릇을 치운 쓰레기 돼지의 먹을거리를 사람이 먹어야하는 세상, 이 난장판을 벗어나려면 어느 한 쪽은 죽어야하는 몹쓸 전쟁은 없어야 춘자 엄마 같은 사람이 없는 예전 생활로 되돌아 갈 수 있지 않겠는가.
“에이-”
내가 의기소침해서 가게로 돌아와 천막으로 벽을 두른 비좁은 공간에서 조그만 화로를 끼고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데 매섭게 추운 날씨라서 오늘따라 시장 안을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썰렁하고 추운 것 같아 몸이 움츠러든다.
“저놈들 또 생사람을 잡네.”
“......,”
시장골목 입구 모퉁이에 자리를 잡은 야바위꾼들 내가 한동안 지켜보니 손놀림이 빠른 최씨를 정점으로 바람잡이 서너 명과 망보기 등 조직적으로 관리를 하는데 가끔 경찰의 단속에 걸려서 붙들려가도 며칠만 지나면 또 다시 판을 벌려서 가뜩이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난한 사람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울린다.
“자, 돈 놓고 돈 따먹기”
“어서 돈을 걸어요.”
물론 눈앞에 보이는 물욕에 사로잡혀 사기를 당하는 사람도 문제가 있지만 오죽 생활고에 쪼들렸으면 바람잡이의 꼬임에 빠져서 몇 푼 안 되는 돈을 모두 잃고 돌려달라고 사정사정하다가 울며 시장바닥을 나서는 것이 다반사였다.
“아이고, 몹쓸 놈들”
“......,”
그럴 때마다 말이나 행동이 맺고 끊음이 분명한 함흥댁이 나서서 할 말은 못하고 애가 타서 재봉틀발판을 힘주어 밟으면서 속 풀이를 하곤 했다.
“저 놈들 언젠가는 천벌을 받을 거야”
그러다가 가끔 애꿎은 나에게 퍼붓기도 했다.
“동생, 사내가 저런 걸 보고도 가만히 있우?”
그럴 때 마다 험상궂은 최씨의 얼굴을 떠올리며 주먹을 움켜쥐어 봤지만 전쟁터 죽음의 갈림길에서 숫한 고난을 겪었어도 여인의 살갗처럼 매끄러운 내 주먹을 보면 난감해서 그냥 못들은 척 할 수밖에 없었다.
“......,”
주변 상인의 곱지 않은 시선을 주먹을 앞세워 무시하고 하루 종일 길거리에서 추위에 내몰린 야바위꾼은 허기라도 면하려고 놀이판을 잠시 닫고 술자리를 마련할 때마다 판잣집 이웃사촌 바람잡이 강씨가 내 손을 붙잡고 술 한 잔 하자고 억지를 부릴 때에는 난감해서 흘깃 함흥댁의 눈치를 보면 쓰다달다 말없이 곁눈질도 안준다.
“이보게 민씨, 나 좀 봐”
“......,”
오늘도 바람잡이 강씨가 내 손목을 잡아끌어서 나는 마지못해 함흥댁을 힐끗 쳐다보고 무거운 엉덩이를 쳐들고 일어나서 가보니 접었다가 펴는 탁자에 김치 한 보시기와 고추장 한 종지 그리고 굵은 멸치 한 움큼이 술안주의 전부인데 그래도 한잔 술에 허기와 언 몸이 녹아내린 사람은 천상에서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시장할 때는 막걸리가 최고여”
벌컥벌컥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고 입술에 묻은 막걸리를 소매로 닦아내면서 강씨가 씨익 웃자
“암, 추위도 물리고”
망보기 순자 아빠가 킬킬 웃어댄다.
“.........”
나는 말없이 손 재주꾼 최씨가 따라준 막걸리 잔을 받아 들고 조금 전에 푼돈을 잃고 돌려달라고 떼거리를 쓰다가 뒤돌아서서 울던 나이 지긋한 여인의 뒷모습이 고향에서 타계하신 어머니의 환영인 듯 눈앞에 어른거려서 막걸리를 몇 잔을 주는대로 들이키자 정신이 몽롱해서 울적한 심사를 풀어보려고 그동안에 참았던 말을 두서없이 내뱉었다.
“이봐요 강씨, 이러고 살면 안 되지”
“어허, 이 친구 술 두어 잔에 완전히 맛이 갔구먼.”
바람잡이 강 씨가 혀를 끌끌 차면서 비틀거리는 나를 부축해주는 것을 뿌리치고 다시 고함을 질렀다.
“야, 이거 놓으라고 이 나쁜 놈아! 가난한 사람을 울리면 천벌을 받는다고”
“뭐라고, 이 새끼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손 재주꾼 최씨의 거친 목소리가 귀에 박히는 순간, 나는 눈두덩 에서 하얀 불똥이 퍽퍽 튀어 다니는 것을 보고 땅바닥에 늘어져버렸다.
제2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