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판을 향하여
2007년 6월 24일 점심을 좀 일찍 먹고, 밀양역으로 갔다.
역에서 황중일 밀양교장을 만나 같이 12시 34분 KTX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역에 도착 시간은 2시 57분, 다시 역을 빠져나와 인천공항 가는 셔틀버스를 탈 때가 3시 17분, 목적지에 내리니 4시 20분쯤. 약속 시각 6시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는다. 공항을 돌아다니다가 요기를 했다.
일행들이 아시아나 3번 출구 근처에 모여 만났다. 김선옥교장도 만나고, 전화상으로 대화했던 충무에서 온 김평수씨도 만나고, 그리고 안면이 있어 통성명을 하니 27년 전 광주에서 알았던 조금용교장도 만나 반가웠다.
7시 출국 수속 시작하여 7시40분에 이륙 시간상으로는 5시간이 넘게 걸리지만 시차가 한 시간 빠르기 때문에 4시간 거리인 사이판에 닿은 시각은 1시 4분(현지 시각)
사이판에서
6월 25일! 자고 일어나니 몇 시 인 줄 모르겠다. 창밖 커튼 사이로 밝은 빛이 흘러 들어와 잠이 깨었다. 간단히 사워를 하고 베란다에 나오니 태양이 양쪽에서 뜬 양, 구름 색깔이 양쪽에서 빛난다. 아, 눈앞에 펼치지는 시원한 바다. 남국의 야자수 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주홍빛깔로 수놓은 이름 모를 커다란 꽃나무가 만발하였다, 바로 발아래는 깨끗한 수영장이 손짓하며 유혹하고, 시원한 수평선 위로 큰 기선이 두 척이 한가로이 떠 있다. 이름 모를 새, 삐익삐익 아침을 쪼고, 끝없이 밀려든 파도는 진작 해변에서는 조용하다. 원주민인 듯한 사람이 개를 끌고 산책하는 모습이 보이고, 사이사이 하얀색 파란색 파라솔들이 빈 보트를 지켜주고 있다.
간밤에 비가 왔는지 나무 테이블이 비에 젖었다. 아침부터 기온은 덥다. 수평선 너머로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은 우리나라 구름을 닮았고, 두 마리 하늘을 나는 새 방향을 바꾸니 햇살을 받아 빛나는 은빛 새가 된다. 갑자기 초록색 지붕을 두드리며 새를 쫓는 사람 얼굴이 검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월드리조트’로 10층 건물에 1층만 빼고 2층부터 객실인데 한 층이 30개씩이니 270개의 객실이 있는 커다란 호텔이다. 건물만 아니라 주위 조경이 더욱 눈에 드는 호텔이다. 수영장이 두 개나 되고, 어린이 놀이터 큰 나무들, 잔디밭, 테니스장 알고 보니 경영인이 한국 사람이란다. 인수한 후로 리모델링 하여 이렇게 멋진 호텔을 만들었단다.
그래서 그런지 텔레비전 채널에도 한국방송이 나오고, 아침 식사 메뉴에도 우리나라에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김치도 나오고, 밥도 있는 동양식이다.
아침을 먹고 먼저 시내 관광에 나섰다. 사이판에는 6만5천여명의 주민이 사는데 그 중 원주민이 35000명, 필리핀인이 11000명, 중국인인 8000명, 우리 교민이 4000명 정도로 살고 있다. 정확하게 북마리애나 미국자치령인데 사이판을 비롯하여 티니안, 로타 3개의 유인도와 11개의 무인도로 구성되어 있다. 이 근처 괌에 미군 군함이 있고, 공군기지도 있다. 동쪽이 바로 태평양이고, 서쪽은 필리핀해인데 근처에 세계적으로 가장 깊은 마리애나 해구가 있다. 온천수가 풍부한 화산지대이지만, 물이 귀하여 소방서가 있긴 하지만 사람만 구해 내오는 실정이란다.
섬의 중심도로는 비취로드와 미들로드가 있는데 확장공사를 삼성중공업에서 1980년도에 맡아 완성했다고 한다. 기름 값이 싸서 우리나라의 절반 정도뿐이 안 된다.
청정지역이라 시야가 60km까지 보일 만큼 맑고 투명한 바다다. 모기도 별로 없고, 아침에 일어나 보았던 붉은 꽃의 나무는 잎이 자귀나무를 닮았는데 이름은 불꽃나무(플라밍엔트리)였다. 옛날 일본 비행기가 공습하기 위해 마을을 내려다보니 이 불꽃나무가 벌써 폭격하여 벌건 줄 알고 그냥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다. 그래서 이 섬의 지정 나무가 되었다. 따라서 이 고장은 플레밍이란 축제가 20일간 계속된다. 거리에는 현대 마티즈 차가 유유히 지나갔다.
놀랍게 수출품이 세 가지 있다고 해서 귀를 기울이니 진주와 산호 그리고 하나는 넌센스라 해서 모두 나름대로 답을 했지만 못 맞췄는데 알고 보니 태풍이란다. 태풍이 이곳에서 발생하여 우리나라 등지로 올라오는 것을 비유해서 하는 말인 모양이다.
태평양전쟁 참전 한국인추념평화탑이 21피트 높이로 서서 우리를 맞이하였다. 꼭대기에는 비둘기 모형을 새겨 넣었고, 곁에는 태극문양의 조각품이 놓여져 있었다.
막막한 태평양의 외로운 섬이여
머나먼 고향 하늘 바라보면서
망향의 슬픈 가슴 어루만지다
처량하게 가신님들 기억하는가.
몹쓸 전쟁 고된 삶에 시달리다가
여기서 숨 거두신 우리님들의
피맺힌 원한을 헤아리면서
우리 정성 모두어 이 섬 기슭에
위령의 돌탑 하나 다시 세우니
님이여, 이 자락에 늘 계시면서
우리들의 사랑을 되새기소서.
여기에 과일이 흔한데 그 중에서 망고, 코코넛, 노니가 3대 과일이라고 했다. 야자열매가 바로 코코넛이라고 해서 이때껏 살면서 그것을 몰랐을까 생각하니 여행은 필요한 건가 보다.
일본 전투 기지를 돌아보니 그때의 대포가 녹슬어가고 있었고, 자연지형을 이용해 구축한 진지가 아직 남아 있었다. 이곳을 지키던 사령관 사이또 중장은 악명높은 가미가제특공대, 생체실험, 위안부동원을 함께 한 원흉이라고 했다. 그는 전투 중 중상을 입자 할복자살을 했단다.
일본군이 항복하지 않고 떨어져 죽었다는 만세바위를 둘러보았다.
해변에는 소나무 비슷한 나무가 우거져 있어 물어보니 호주산소나무란다. 잎이 두 개가 아니라 하나로 되어 있고, 우리나라 소나무 잎보다 훨씬 길다. 떨어진 낙엽은 우리 갈비가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이곳도 마약이나 총기를 소지할 수 없도록 법으로 엄격하게 정해놓았다고 했다. 사이판을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많이 찾는데 그 이유로 물론 첫째 골프 등 관광을 위해서 오고, 두 번째는 원정출산 때문에 그리고 세 번째는 병 치료를 위해서 온다고 했다. 노니가 구급약으로 개발되어 다량생산체제를 갖추었다고 하니 한몫 하는 셈이다.
가까운 곳에 보이는 섬이 마리와나 섬인데 고기 반 물 반으로 낚시꾼들이 몰려드는 곳이란다.
한국 식당은 25군데 있는데 우리가 묵은 월드리조트를 비롯해 플로베리아호텔이 유명하다. 한인장로교회도 7군데나 된단다. 밤무대는 없고, 밤에는 쇼핑할 곳도 없다고 한다.
사이판에는 초등학교가 12개 초급대학교가 1개 있다.
그중 우리가 방문하는 학교는 San Vicente Elementary School 이다. 5월 말, 방학에 들어가기 때문에 학생들은 없다. 학교 정원은 넓고, 모두 잔디로 깔려 있어 공원 같지만, 학교건물은 창고 같이 창문이 없거나 있어도 위쪽에 아주 작다. 이유는 뜨거운 햇볕이 들어오지 못하게 그런 장치를 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 학교는 학생이 900정도 되는 제법 큰 학교로 한 학급당 30명 정도 된단다. 유급제라 학력이 충실하여야 하고, 방과후 프로그램으로 외국어를 좋아하는데 중국어 일어 등을 선호한다고 했다.
아이들 보호가 철저하여 2시 반 쯤 수업을 다 마치면 부모들이 데리러 온다. 늦으면 당장 호출을 당하며 법적 조치를 취한단다. 수업도 아동 위주로 하기 때문에 시량이 우리나라 보다 많지만, 지루하지 않고 잘 소화한다는 이야기다. 날씨가 더워서 7시 반에 수업이 시작되며 점심시간 후에도 4시간 모두 8시간의 일정이다.
다음은 Hopwood Junior High School 로 구경 갔다. 대충 건물을 둘러보고 오는데 학생들이 보였다. 문이 닫혀 있는 어느 교실 안을 구경하는데 그 교실 주인인 선생님이 환경에 대해서 자기가 창안했다며 소개하는 문구를 보니 3D란다. 즉 Desire(희망), Discipline (훈련),Dedication(배려) 학교를 돌고 있는데 몇 명의 학생들이 오는 것을 보고 안내하던 사람이 이 학생들에게 학교안내를 부탁할 테니 따라가라고 했다. 영어를 모르니 답답하다. 일행 중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있어 통역까지 한다. 철조망으로 막아놓은 공간이 있어 물어보니 벌 받는 공간이란다. 학생들이 선생님 말을 듣지 않거나 교칙을 어겼을 때는 거기에 가두어놓고 생활을 하라고 지시한다는 것이다.
저녁은 호텔 주인이 내는 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모두 뷔페식이다. 먹을 만한 메뉴가 있다. 과일이 맛있어 더 덜어먹었다. 바나나, 망고, 멜론 등이다.
저녁에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였다. 수영장의 많은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으니 한국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 어느 수영장에 온 것 같다. 뱀모양과 악어모양의 구조물 위를 타고 아이들이 좋아라 다닌다. 얼굴은 서양 어린이인데 살결은 구릿빛으로 탄 어린이가 그 악어모양의 구조물에 타고는 밖에 책을 보던 엄마를 부른다. 그러자 책을 읽던 어머니가 가방에 뒤적이더니 카메라를 꺼내어 사진을 찍어준다.
밖에 나와 노랫소리가 들려 곁에 갔더니 한국가요다. 남국의 하늘에 울려 퍼지는 가요, 빛나는 별 테이블마다 앉은 사람들, 북두칠성도 하늘 가운데쯤 있다.
호텔은 아주 과학적이다. 문을 열면 자동으로 에어컨이 꺼진다. 그리고 두 개의 엘리베이터가 누르면 한 개만 작동되도록 서로 연결장치가 되어 있다. 이런 점은 배울 점이다.
티니안섬으로
6월26일! 오늘 아침도 일찍 잠이 깨었다. 바닷가를 산책하였다. 고요의 나라다. 맑은 물이 찰랑찰랑 발끝에서 속삭인다. 깨끗한 모래가 반긴다. 낚시질하는 사람들, 바닷가를 거니는 연인들 낭만적이다. 하늘에는 원을 그리는 수평선 위에는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진작 하늘 가운데는 파란 하늘이 열렸다. 해변가로 호주산소나무가 우거져 있다. 떨어진 낙엽은 소나무낙엽을 닮았지만 잎이 훨씬 길고 잎이 하나다. 밤마다 내리는 스콜로 인해 산뜻하다. 야자가 떨어져 있어 주워 왔지만 그림의 떡이다. 아침햇살에 플라이엔트리는 빛을 낸다.
이렇게 여유롭게 산책을 하고 다시 숙소에 와서 침대에 뒹굴다가 황교장 깨기를 기다렸는데 그게 탈이었다. 황교장은 늦게 일어나 시간이 어떻게 되었냐고 묻자 그때야 먼저 가라고 한다. 식사도 여유 있게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식사를 마치고 나오다가 통영서 온 김평수씨와 또 한사람이 입이 부어서 말하는 것이 벌써 출발하고 없다는 것이다. 아뿔사 시간은 약속시간이 넘은 9시40분이다. 이래서 경험하려던 스쿠버다이빙 기회를 놓쳤다.
할 일이 없다. 방에서 낮잠 자는 수밖에 없다. 밖은 가히 살인적인 더위다. 둘이서 낮잠을 자다가 보니 어언 11시다. 서둘러 밖에 나와 기다렸지만 스쿠버다이빙 간 사람들은 도착하지 않는다. 11시 반에 출발하였다.
PIC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2시30분에 출발하여 티니안 섬으로 향했다. 40분 거리다.
서남방향으로 가는데 유람선 차창이 흐려 바깥 경치가 흐릿하다. 그렇지만 곧 왼편으로 긴 산줄기가 나타난다. 알고 보니 바로 이웃이다. 항구가 서로 먼 곳이라 그런지 두 섬이 지척간이다.
중국인이 경영하는 Tinian Dynasty에서 일박하다.
카지노에서 돈 따먹는 구경을 하다가 홀에 와서 조금용씨와 앉아 이야기하며 놀았다. 늦게 우리 방을 찾아가는데 호수를 모르겠다. 열쇠에 몇 호인지 적혀 있는지 봐도 없다. 기억으로는 572호로 기억나서 열쇠를 넣어 봐도 맞지 않다. 방마다 넣으며 확인한 결과 582호다.
아침바다
6월27일 날이 샜다. 남태평양에 와서 바닷물에 몸을 담그지 않는다는 것은 참 아까운 일이다. 수영복을 가지고 호텔을 빠져나갔다. 차도가 좁지만 인도가 따로나 있어 괜찮다. 야자수 나무 밑을 지나 잘 다듬어진 잔디밭을 지나 서쪽으로 향하니 절벽이다. 바위 밑에 출렁이는 바닷물이 너무 파래서 무섬증이 인다. 눈을 들어 북쪽을 보니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앗싸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길을 걷다가 원주민인 듯한 여자를 만났는데 고개를 외로 돌려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그냥 지나치려고 했더니 늦게 나를 발견했는지 good morning! 하고 인사를 한다. 얼마 가지 않아 낮은 바위들이 모래에 머리를 파묻고 있다. 바위 위에 옷을 벗기 전에 한 소년이 커다란 깡통에 무엇을 담고 있기에 “쓰레기 줍는가?” 하고 들여다보며 이번에는 내가 먼저 good morning! 하고 인사했다. 자잘한 물고기들이었다. 저 위쪽에 부자간인지 아이는 깡통을 들고 있고, 어른은 그물을 쥐고 있다. 아하 이른 아침부터 고기잡이하는 모양이다.
옷을 훌훌 벗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아, 이 깨끗한 모래, 수심 깊이 바닥이 보이는 물, 알맞은 수온, 처음에는 잠깐 담갔다가 나오려 했으나 나오기 싫다. 혹시 죠스가 나올까 염려 되지만, 한계를 지어놓고 헤엄쳐 다녔다. 몸에 감기는 감촉도 다른 것 같다. 바닷물인지 입 속에 넣어보니 이곳은 더 짜다더니 그렇지 않다. 부드럽게 감겨드는 바닷물 속에 언제까지나 있고 싶다.
사람들이 가 버리자 혹시 하는 무서움이 들어 아까 샤워시설을 눈여겨보았기에 가서 몸을 씻었다. 해변 곳곳에 이렇게 샤워하도록 편리하게 해 두었구나. 오는 길 곳곳에 바비큐 할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다. 곳곳에 야자열매가 떨어져 있고, 똑같은 나무인가 여겼는데 야자열매가 아니라 도토리처럼 생긴 좀 크긴 하지만 색깔도 붉은 열매가 주저리 달려 있어 잎 모양을 자꾸 살펴보았다. 굳이 구분하자면 야자수 잎은 아래로 내리뻗었고, 그 나무는 위로 치솟았다. 도둑고양이인지 나를 살펴보고 있다. 오는 길에 해가 뜬다. 알고 보니 호텔 뒤쪽이 동쪽이다. 정문 가까이 오니 나를 보고 반기는 사람“어머 어디 갔다오세요?” 우리 일행이다. 단 둘이 만나지니 반가운 모양이다.
객실이 한 층이 89개다. 5층이다. 아래층은 카지노라 새벽에도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으리으리한 홀, 반들거리는 대리석 바닥, 원으로 배치한 탁자와 의자 우리 곡을 치는 피아니스트, 건물보다 부대시설이 엄청 넓은 공간, 휘날리는 국기 중에 태극기도 있다. 성조기, 오성기, 일장기, 말레지아기, 필리핀기, 러시아기 등.
티니안 관광
아침을 호텔내 식당에서 먹고 티니안 구경하러 나섰다. 가이드가 피터박으로 바뀌었는데 친절하다. “하파다이(안녕)?” 하고 인사한다. 기사는 현지인 마이크다. 사이판이 개발된 섬이라면 티니안은 자연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가이드는 85년도에 이곳에 와서 정착하여 결혼하고 사는데 스스로 원주민을 차모로라고 부르는데 자신은 코모로라고 칭했다.
사이판 섬의 3분의 2 정도로 울릉도 크기라고 했다. 가까이 보이는 무인도 섬을 코트아일랜드라며 염소섬이라고 소개했다. 이곳은 3천명 정도 살고 있는데 원주민이 1500명 정도인데 한국계가 20%이고, 한국인이 50명 정도 살고 있다. 원주민의 한국계는 남양군도로 강제징용당하여 온 사람 중 다섯 가구가 정착하여 2-4세 후예들이 살고 있는데 한국성인 김, 신 박, 최씨들을 가졌다.
유적지 타가로 갔다. Nouse of TAGA(추장)을 상징하는 유적지에는 돌로 탑을 쌓아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스톤문명의 전설이 있었다. 야그족으로 지칭하는 원주민은 웃통을 벗고 살았는데 지금은 개화되었다고 한다.
티니안 근처에 거인들이 사는 섬이 있었는데 추장의 아들이 힘이 세어 코코넛게를 잡기 위해 뿌리채 나무를 뽑아버렸다. 그걸 본 신하들이 추장에게 힘이 너무 세어 위험하다며 제거할 것을 건의했다. 엄마가 알고 티니안으로 피신시켰다. 그래서 티니안의 타가 추장이 탄생했다는 전설이다. 라테스톤이란 계급에 따라 상징물이 다르고, 이 스톤유적은 북마리애나 상징물로 국기에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곳을 원주민은 신전처럼 신성시하여 피해를 주면 큰 재앙을 받는다고 믿고 있다.
이 북마리애나 자치령은 기원 전 2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16세기 마젤란이 세계일주할 때 들린 곳으로 그 후부터 350 여 년 동안 스페인령이 되어 통치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고유문화는 소멸되고, 스페인 카톨릭 문화로 변질되었다. 그 후 1900년부터 14년간 독일령이 되어 지배를 받다가 다시 1914년부터 일본령으로 30년간 귀속되었다. 일본의 항복과 같이 미국령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래서 독일의 흔적도 남아 있는데 일본의 후손은 한 명도 살지 않고 있다.
다음은 한국인의 위령탑에 갔다. 1977년에 건립하였는데 어느 한국인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원주민이 안내를 하여 따라갔더니 드럼통에 담은 유골을 보여주더라는 것이다. 가슴을 치는 우리 정부의 무성의를 눈으로 직접 보고 곧 위령사업회를 결성하여 사할린까지 오 천명 희생자의 영혼을 달래는 사업을 하여 여기에도 위령탑을 세웠단다. ‘그 날 무명으로 열린 오천의 꽃 떨기 백의의 딸들이 여기 누워 있다’로 시작되는 시를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일본은 티니안섬에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해 죄수들을 투입했는데 정착금으로 땅을 5ha 주었다고 한다. 전쟁 나기 전까지는 14000여명의 원주민이 살았는데 전쟁으로 인해 이주하여 줄어들었다.
이 섬으로 관광 온 노부부의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설움을 깊게 안고 있었다.
미국이 출루 해안으로 상륙하여 밀고 들어오자 일본군은 쫓기면서 남쪽 바닷가 동굴 속으로 피신한다. 물론 거기에 우리 한국인들도 포함되었다. 이 절벽 동굴에 다섯 식구가 역시 피신하여 있었는데 갑자기 다섯 살 난 아이가 울기 시작하였다. 그때 일본군이 총부리로 어머니를 겨냥하며 명령을 내렸다. 어머니는 아들의 목을 졸라 죽였고, 바다에 던졌다. 이로 인해 그곳에 피난했던 사람들은 무사했지만, 어머니의 가슴에는 지울 수 없는 못을 박았다. 어머니는 그곳에 살 수 없어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 큰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해마다 티니안섬으로 가서 동생의 제사를 지내달라고. 그 노부부의 남편이 바로 큰아들이었다.
티니안에는 코리언빌리지가 있었다. 현재 흔적은 사라졌지만 기록에는 남아 있다.
브로도웨이는 남북으로 뚫린 10km 의 길로 좁았다. 그때 공병대장의 이름을 따라 지명으로 명명했단다. 길 양옆으로 아카시아와 비슷한 당가당가라는 나무가 우거졌는데 일본과 격전때 네이팜탄을 투하해 나무가 완전히 불탔다. 그 뒤 미국에서 벌거숭이산에 번식력이 강한 이 나무를 심었는데 바비큐 요리 때의 숯으로 냄새도 나지 않고 화력이 좋아 최고란다.
길이 고도가 높아지자 길이 원을 돌며 가운데 구조물이 남아 있는데 일장기를 상징하고 오대양을 지배하겠다는 터무니없는 모양새란다.
그리고 길 끝 쪽에 2차 대전 당시 원자폭탄을 가져와 이곳에서 실어 히로시마로 날아갔다는 곳이 남아 있는데 그때 당시의 B29폭격기와 폭탄이 탑재된 사진이 걸려 있었다.
한편 한국인 2세들의 활약상을 이야기하는데 한국인 2세가 4년 임기인 경찰서장을 무려 12년 동안 맡아 믿음을 주었다는 이야기하며 어머니가 한국인이며 아버지가 한국인2세인 딸 중 큰딸인 이 소녀는 미국에 가 공부를 하고 돌아와 미스북마리아나에 뽑혀, 정부홍보대사로 활약했으며 티니안 시장의 특채로 정부홍보대사로 활약하다가 법관의 꿈을 버리지 못해 미국에 가 졸업장을 움켜쥐었다. 지금은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간병차 서울 성심병원에 와 있다는 것이다. 그가 미스선발대회에 뽑혀서 “엄마,아빠 감사합니다.” 라고 한국말로 인사해서 한국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알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 뿌듯했다.
다음은 Blow Hall이란 해안으로 갔다. 파도가 바위를 쳐서 생기는 물보라가 장관을 이루었다. 해변가는 화산 분출 때 용암이 흘러 굳었는지 못생긴 바위투성이었다. 그 중에 구멍이 난 사이로 파도가 칠 때 물이 치솟아 오르는데 그 멋진 모습을 뒤로 하고 사진을 찍어댔다.
차를 타려는데 바닷가에 난 야생화를 여러 송이 꺾어온 안내인은 일행들에게 하나씩 건넨다. 그리고 투러브플라워라는 꽃이라며 그에 따른 꽃말 이야기를 들려준다.
스페인군이 점령할 당시 스페인 장교는 부족장의 딸에 반했다. 그런데 이 딸에게는 이미 정혼자가 있었다. 스페인 장교는 아버지를 압박하여 결혼할 것을 승낙 받았다. 이 사실을 안 딸은 정혼자와 도망을 가는데 이를 눈치 챈 장교가 곧 뒤따라 잡으러 나섰다. 쫓고 쫓기기를 얼마동안 하다가 쫓기는 그들 앞에 절벽이 나타났다. 더 이상 도망할 수 없음을 깨달은 둘은 서로 부둥켜안고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그 후에 떨어진 곳에 꽃이 피어났는데 한쪽 모습만의 꽃이 피어 둘을 맞대놓고 보면 완전한 꽃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 맞춰보니 그러했다. 투러브플라워! 그런 사연이 숨어 있었구나!
미국이 1945년8월1일 티니안을 점령하고 곧 4개의 활주로를 건설했는데 일본은 이곳을 재탈환하기 위하여 이오지마(유황도)에서 군비를 증강하였다. 이 사실은 안 미군은 유황도를 해병대가 공격하는데 얼마나 치열했던지 오천 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미군이 드디어 상륙하여 성조기를 꽂는 모습을 본 미국인들이 큰 감동을 받았다고들 한다. 영화로도 나왔는데 유황도의 별이다. 이 여세를 몰아 오끼나와도 점령하였다.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한 원자폭탄 프로젝트가 7월17일 마련되고, 네바다사막에서 실험에 성공한다. 그리고 포츠담회담에서 항복할 것을 권유했지만, 거절하여 마침내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이곳 티니안섬으로 옮겨온 원자폭탄을 8월6일 새벽3시 에노라일게일(비행기)에 리틀보이(원폭 암호)를 탑재하여 8시 15분 히로시마 5800m 상공에 투하하여 시 전체를 초토화시켰다. 다시 8월9일 나가사키에 뚱뚱보(원폭 암호)를 떨어뜨렸다. 실제 2개 뿐인데 다시 이번에는 도꾜에 투하하겠다고 겁을 주었다. 여기에 일본천황은 8월15일 정오 항복방송을 하였다.
그 다음 출루비취라는 곳에 갔는데 이곳으로 미군 해병대가 상륙하였다고 한다. 아직 녹슨 탱크 잔재가 남아 있는 해변에는 깨끗한 바닷물이 그날의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넘실거렸다. 이 상륙작전은 성공적이어서 만 오천 명의 군사 중에 77명의 사망자만 났을 뿐이란다. 부상자도 백여 명에 불과했단다. 일본군의 눈을 속이고 감행한 이 상륙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비슷한 시기에 성공한 사례로 꼽힌단다.
LISS학교 방문
점심을 호텔에 돌아와서 먹고, 다시 사이판으로 갔다.
Ladera International school of Saipan 국제학교에 갔다. 사실 이 학교가 이번 여행의 주 목적지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이 사립형 학교는 무려 30억이 투자되었단다. 교장은 Night씨다. 식당겸 회의장에서 브리핑을 들었다.
LISS를 찾는 이유를 몇 가지로 꼽는데
첫째 미국 본토에서 인정받는 정통 미국 Curriculum 그대로 교육하기 때문에 미국에서 100% 학력을 인정하고, 전학도 가능하다. 그리고 미국서는 거의 불가능한 초등생 100% 학생비자 발급이 가능하다.
둘째, 사이판 정부 및 관광청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Edu-tourism" 개발의 선구자 역할 수행
셋째, 최고의 정교사와 전문 교사
넷째, 모든 학생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한 아늑한 Campus
다섯째, 미국령 유일의 초등 Boarding School
여섯째, 학생과 전문 staff & 교사 비율이 5:1로 최상의 Care 가능
일곱째, 가까운 거리, 안정된 날씨, 세계 최고의 청정 지역, 그리고 최상의 안전 보장
여덟째, 우리 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영어 공용국에서 배우는 정통 영어
아홉째, 미래의 국제 인재 양성을 위한 모국어 교육 및 전문화 교육
열째, 산 학비로 최상의 교육 제공 등이다.
저녁 식사로는 학부모까지 동원되어 마련된 바비큐와 불고기를 맛나게 먹었다. 먹고 나서 낙조도 구경했다.
우리가 묵을 호텔로 옮기는 자리에서 숙소로 바로 갈 사람과 쇼핑을 할 사람으로 나뉘었다. 따라서 호텔로 바로 가는 차에도 새 손님들이 타서 농담이 오고갔다. 내리고 숙소로 발길을 옮기는데 한 여자분이 나를 보고 바닷가에 가지 않겠냐며 제의해 왔다. 이거 웬 데이트 신청? 기분이 수수해져 방에 들어와서 곧장 누워 자려는 황교장에게 예의 상 같이 해수욕하러 가지 않겠냐 제의를 했다. 그랬더니 내 의도와는 달리 선뜻 가겠다고 나섰다. 둘이 나왔더니 약속 장소에 아직 시간이 이른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호텔 안내인에게 물어 바닷가로 가는 길을 물었더니 고맙게 전동카로 데려다 주어 편히 잘 왔다.
타국 땅에 낯선 밤길을 더듬어 내려가니 물소리 맑은 바다다. 달빛은 밝았지만 아무도 없으니 수영복이고 뭐고 그냥 들어갈까 순간 의논하다가 그래도 가져온 옷이라 입고 들어갔다. 나중 일이지만 참 잘한 일이었다. 발밑은 작은 바위들이 박혀 있어 모래밭보다는 못했지만 물이 따뜻하니 남국의 밤바다에서 해수욕하는 재미도 그만이었다.
잠시 후 불빛과 함께 떠드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둠 속에서 여성들이 나타난다.
“누구냐?”
반가워서 알면서도 물 속에 얼굴만 내밀고 고함을 질렀더니
“밀양개!”
하면서 웃어제친다. 나를 알고 있다. 그녀들은 스스럼없이 우리가 있는 물속으로 들어온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후훗 선녀가 다섯이나 된다.
“아이코 아릿다운 선녀님들이 목욕하러 오셨구먼. 그런데 나무꾼이 둘이나 되니 조심하슈.”
“제 옷 가져가세요.”
그러면서 까르르 웃어제낀다.
달빛에 번들거리는 하얀 속살들은 진짜 선녀들처럼 곱다. 달밤에 선녀들과 목욕하는 기분이다. 한 선녀가 불편하게 팔을 들고 있다.
“방수시계라고 자랑하는 거야?”
“아냐! 아니니까 이렇게 팔을 들고 있지 않아.”
자기들끼리 말해놓고 깔깔거린다.
남국 밤하늘의 별빛은 유난히 반짝거린다. 바로 눈앞에 떨어질 것 같은 북두칠성도 보인다. 2시간 후에 전동카를 오라고 했다며 나갈 줄을 모른다. 나는 그들 곁으로 슬슬 다가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며 아이들 데리고 해수욕하던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이 깊은 바다로 못가도록 이렇게 깊은 쪽에서 지켰어요. 가까이 오면 물총을 먹이고.”
그러다가
“누가 여자들하고 같이 해수욕했다고 소문낼까봐 먼저 갑니다.”
하고 나오는데
“소문 좋게 낼게요.”
하며 응수한다. 그러더니 자갈밭에 와서 보이지도 않을 것 같아 그냥 벗고 옷을 갈아입는데 얼마나 보이는지 깔깔거리며 야단났다.
귀국
6월28일, 새벽에 일어나 공항으로 갔다. 모두 잠이 들깬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둠 속에서 공항은 조용히 우리를 맞이했다. 다시 사이판에 올 기회가 있을 것인지.
A석이지만 깜깜한 하늘에 구경거리가 없다. 그러다가 힘차게 솟아오르니 새벽달이 보인다. 시간이 지나자 차츰 날이 밝아지며 찬란한 해가 솟아오른다. 그러던 날씨가 인천공항에 내리니 비가 온다. 그것도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