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독 씹히며 눈물 찔끔 나게 하는 쫄깃한 맛 '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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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탁삼합 길라잡이가 싱싱한 홍어회나 홍어무침이 아닌 삭인 홍어를 처음 먹어본 것은 1980년대 끝자락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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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뒷마당 텃밭에 묻은 장독 속 포옥 익은 묵은지 꺼내
볏짚 태운 잿더미 속 포옥 삭은 홍어 한 점 올리고
타닥타닥 장작불에 포옥 삶은 돼지고기 한 점 겹쳐
볼 터지게 한 입 가득 넣으면
어느새 콧구멍에 싸한 꽃샘바람 이누나
눈물 핑 도는 모진 겨우살이 서러워
누룩 내음 훅 풍기는 막걸리 한 사발 쭈욱 들이키면
어느새 온몸에 새 기운이 펄펄 살아뛰누나
혓바닥 톡톡 쏘며 찰떡처럼 쫄깃하게 감기는 너
보고 또 보아도 보고픈 지독한 그리움처럼
먹고 또 먹어도 먹고픈 지독한 맛사랑
누가 너더러 홍어 거시기라 했는가
너는 홍어 거시기라도 되어 보았느냐
-이소리, '홍탁삼합' 모두
물속에서 헤엄치는 모습을 바라보면 가을바람에 너울대는 연잎처럼 보이는 홍어. 가을이 점점 깊어가고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슬슬 불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잊고 있던 홍어가 돌아오고 있다. 전라도 사람들이 흔히 '날씨가 추우면 홍어생각, 날씨가 따뜻하면 굴비생각'이라는 속담처럼 바야흐로 홍어철이 시작된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홍어는 전라도 음식이라 여기고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상식이다. 경상도에서도 집안에 잔치가 벌어지면 반드시 잔칫상에 여러 가지 채소와 버무린 홍어무침을 올린다. 다만 경상도에서는 삭힌 홍어는 즐기지 않고 삭이지 않은 신선한 홍어회를 좋아한다는 것이 전라도와 약간 다를 뿐이다.
홍어, 하면 전라남도 신안 흑산도에서 잡히는 홍어를 으뜸으로 친다. 흑산도 앞바다에서 잡히는 홍어는 붉은 빛이 또렷하고 살이 단단하며 씹을수록 쫄깃한 감칠맛이 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흑산도에서 나는 홍어는 사계절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 저지방 알카리성이어서 예로부터 우리 몸을 아주 이롭게 하는 물고기로 알려져 있다.
지금 흑산도에서는 11일(토)부터 12일(일)까지 이틀 동안 열리는 '제2회 흑산 홍어축제' 준비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신안군에 따르면 지난 해 처음 열린 '흑산 홍어축제'에 약 3천여 명이나 되는 관광객들이 몰려와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신안군은 "올해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릴 것으로 기대돼 어민들의 소득증대에 큰 보탬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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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어 홍어, 하면 전라남도 신안 흑산도에서 잡히는 홍어를 으뜸으로 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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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이드 냄새 지독하게 나는 이것도 음식이라고 먹습니까?"
"어이, 자네 말이야, 홍탁삼합이라고 들어봤는가?"
"홍탁삼합요? 그게 뭔데요?"
"자네 역시 경상도 사람이니까 그 기막힌 홍탁삼합을 잘 모르는구먼. 홍탁삼합이라는 것은 말이야, 포옥 삭힌 홍어를 묵은지와 돼지고기에 싸먹으면서 막걸리를 마시는 것을 말하네. 오늘 한 점 할랑가?"
길라잡이가 싱싱한 홍어회나 홍어무침이 아닌 삭힌 홍어를 처음 먹어본 것은 1980년대 끝자락이었다. 그때 길라잡이는 민족문학작가회의(지금의 한국작가회의) 총무간사를 맡고 있을 때였는데, 하루는 박종권(1954~1995, 고수) 시인이 전화를 걸어 "찬바람이 슬슬 불 때마다 늘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며 은근히 유혹했다.
그렇게 나선 곳이 은평구 불광동에 있는 자그마한 홍어전문점이었다. 그 자리에는 배명식(54, 목사) 시인과 송제홍(50) 시인도 함께 있었던 듯하다. 그 집 주인 고향이 나주라 했던가 영산포라 했던가 기억은 확실치 않다. 하여튼 그 집 주인이 그날 내놓은 음식은 홍어 썰은 것에 삶은 돼지고기와 묵은지, 막걸리 한 주전자였다.
대체 무슨 맛이기에 홍탁삼합이란 이름까지 붙었을까. 맛이 궁금했다. 막걸리 한 사발 쭈욱 들이키고 난 뒤 묵은지에 홍어와 삶은 돼지고기를 싸서 한 입 넣고 씹었다. 처음 몇 번 씹을 때는 코끝만 약간 찡한 듯했다. 근데, 씹으면 씹을수록 포장마차에서 쓰는 카바이드 가스 같은 내음이 입천장과 코끝에 독하게 번지면서 급기야 눈물까지 찔끔 났다.
"맛이 어떤가?"
"으…"
"아니, 왜 그러는가? 홍탁삼합을 처음 먹어보는 자네한테 너무 삭힌 걸 달라고 한 건가? 막걸리 한 잔 드세. 그러면 궁합이 꼭 맞을 걸세."
"아니, 카바이드 냄새 지독하게 나는 이것도 음식이라고 먹습니까?"
"홍탁삼합은 바로 그 톡 쏘는 맛에 먹는 거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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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하젓 이 집 특징은 홍어, 막걸리, 돼지고기 수육, 묵은지 외에도 쌈배추, 깻잎, 호박나물, 마늘, 송송 썬 고추, 토하젓, 된장, 소금 등이 밑반찬으로 곁들여진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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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역국 이 집 미역국은 향긋하고 구수한 맛 속에 은은함이 배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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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너울대는 연잎' 홍어, 술독 해독에 특효
조선 후기 학자이자 문신이었던 이익(1629~1690) 선생이 지은 <성호사설>에는 "홍어 꼬리를 나무에 꽂아두면 독성 때문에 그 나무가 죽는다"고 적혀 있다. 이와 함께 "어부들이 홍어잡이를 기피하는 것은 홍어 꼬리의 독성 때문인데, 만약 찔리면 상처에 오줌을 바르고 수달가죽으로 싸매면 해독이 된다"고 써있다.
조선 후기 학자이자 천주교 선교사였던 정약전(1758~1816) 선생이 지은 <자산어보>에는 "물속에서 움직이는 모양이 '흡사 바람에 너울대는 연잎과 같다'는 홍어를 먹으면 장이 깨끗해지고 술독을 해독하는데 큰 효험을 볼 수 있다. 숙취를 해소시켜주는 거담 효과가 뛰어나며, 뱀에 물렸을 때 홍어 껍질을 붙이면 치료가 된다"고 나와 있다.
어디 그뿐이랴. 국악계에 떠도는 이야기에 따르면 전라도에서는 소리꾼들이 홍어가 가래를 삭여준다하여 지금도 즐겨 먹는다. 특히 홍어국은 소변색이 탁한 남자나 소변을 볼 때 요도가 아프고 이물질이 나오는 사람이 먹으면 효과가 있고, 몸에 열이 많은 사람들이 여름을 날 때 먹으면 아주 좋다.
홍어전문 쇼핑몰 '홍어바다'에 따르면 홍어는 꽃게나 돔, 광어, 우럭, 멸치, 조기 등을 먹이로 하기 때문에 고단백 알칼리성 영양식품의 보고이다. 따라서 홍어는 관절염, 류마티스, 기관지에 효과가 좋으며 감기치료에 그만이다. 특히 삭힌 홍어는 강알칼리성 식품으로 병후회복과 기미, 주근깨, 검버섯은 물론 피부미용에도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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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탁삼합 묵은지를 얇게 펴서 그 위에 홍어 한 점과 돼지고기 수육 한 점을 올려 젓가락으로 돌돌 말아 입에 넣고 오도독 오도독 씹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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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탁삼합 묵은지 위에 홍어, 돼지고기 수육을 다시 올린 뒤 마늘 한 쪽 곁들여 돌돌 말아 입으로 가져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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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고 깨끗한 맛 남는 홍어가 좋은 홍어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가 홍어 조리하는 걸 참 많이 봤지요. 저는 그때 엄마가 만들던 그대로 홍어를 조리해요. 홍어는 흑산도 홍어만을 고집하는데, 요즈음 흑산도 홍어가 너무 귀하고 비싸요. 그래서 가끔 흑산도 홍어와 맛이 가장 비슷한 칠레산 홍어를 쓰기도 하지요. 막걸리는 한계령에서 가져 오구요."
5일(일) 저녁 7시, 오랜만에 만난 박은산(49) 시인과 함께 광진구 자양2동 한강 고수부지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홍어전문점을 찾았다. 서울에 함께 살면서도 서로 일이 바빠 1년에 몇 번밖에 만나지 못하고 있는 처지여서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터놓고 나누기 위해서였다.
7평 남짓한 이 집에 들어서자 전남 나주 영산포가 고향이라는 이 집 주인 나귀임(60)씨가 "어서 오세요, 저기 창가에 앉아 조금만 기다리세요"라며 단골손님처럼 반갑게 맞이한다. 길라잡이가 자리에 앉아 "어떤 홍어가 좋은 홍어죠?"라고 나씨에게 묻자 "드시고 나면 시원하고 깨끗한 맛이 남는 홍어가 좋은 홍어"라고 귀띔한다.
나씨는 "홍어를 돼지고기 수육과 묵은지에 싸먹은 뒤 막걸리 한 잔을 쭈욱 마시는 것은 막걸리가 홍어의 톡 쏘는 맛을 부드럽게 다듬어주기 때문"이라며 "그렇게 먹어야 홍어의 찬 성질과 막걸리의 뜨거운 성질이 서로 어우러져 음식궁합이 잘 맞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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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어무침 삭인 홍어를 싫어하는 손님을 위해 내놓는 홍어무침도 상큼하게 씹히는 맛이 그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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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묵은지에 돼지수육과 함께 싸먹는 홍어 맛
"홍어는 매운 맛과 부드러운 맛 두 가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매운 맛은 말 그대로 매우면서도 부드럽고 구수한 맛을 말하며, 부드러운 맛은 부드럽지만 싱거운 맛을 말하지요. 이처럼 홍어는 톡 쏘는 맛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어우러져야 제대로 삭힌 홍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 나씨의 감칠맛 나는 설명을 들으며 막걸리 한 잔 들이킨 뒤 밑반찬으로 나온 미역국부터 먼저 한 술 뜬다. 향긋하고 구수한 맛 속에 은은함이 배어 있다. 이 집 특징은 홍어, 막걸리, 돼지고기 수육, 묵은지 외에도 쌈배추, 깻잎, 호박나물, 마늘, 송송 썬 고추, 토하젓, 된장, 소금 등이 밑반찬으로 곁들여진다는 점이다.
흙내가 훅 풍기는 달착지근한 막걸리 한 잔 더 들이킨 뒤 묵은지를 얇게 펴서 그 위에 홍어 한 점과 돼지고기 수육 한 점을 올려 젓가락으로 돌돌 말아 입에 넣고 오도독 오도독 씹는다. 묵은지의 새콤달콤한 맛과 함께 홍어 특유의 톡 쏘는 맛이 구수한 돼지고기 수육과 함께 어우러져 홍탁삼합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세 가지 맛이 난다.
하지만 톡 쏘는 매운 맛이 적은 걸 보면 이 집 홍탁삼합(3인분 5만 원)은 아마도 부드러운 맛에 속하는 듯하다. 막걸리 한 잔 더 마신 뒤 묵은지 위에 홍어, 돼지고기 수육을 다시 올린 뒤 마늘 한 쪽 곁들여 돌돌 말아 입으로 가져간다. 이번에 매운 맛이다. 특히 마늘이 풍기는 매운 향과 홍어가 풍기는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코끝까지 찡해진다.
그 참! 마늘 한 쪽이 홍어 맛을 이리도 바꿔놓을 수가 있다니. 가끔 토하젓과 된장에 찍어 쌈배추에 싸먹는 홍어 맛도 감칠맛이 깊고 쫄깃쫄깃 씹히는 뒷맛이 고소하다. 특히 소금에 찍어먹는 홍어 맛은 창가를 스치는 가을바람처럼 시원하고 깔끔하다. 삭힌 홍어를 싫어하는 손님을 위해 내놓는 홍어무침도 상큼하게 씹히는 맛이 그만이다.
자리를 마주 한 박은산 시인은 "서울에 있는 여러 홍어 전문점을 다녀보았지만 이 집처럼 씹히는 뼈가 부드럽고 쫄깃한 뒷맛이 깊은 곳은 거의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박 시인은 "술을 많이 마셔 속이 특히 안 좋을 때 이 집을 즐겨 찾는다"며 "이 집에서 홍탁삼합을 먹고 나면 몸이 가벼워지면서 괜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기분이 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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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걸리 이 집 막걸리는 한계령에서 가져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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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줄지어 선 가로수 잎이 빨강 노랑빛으로 슬슬 물들고, 이제는 옷깃을 여며야 할 정도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솔솔 부는 가을 저녁.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가을노을이 발갛게 물드는 서녘하늘을 지그시 바라보며 홍탁 한 접시 시켜놓고 오순도순 홍어 이야기꽃을 피워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