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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과 상상은 지식보다 중요하다
저 별은 이미 죽은 별인지도 모르지만, 그 별빛은 앞으로 수백 년도 더 지구에서 보게 될지 모른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º가 아니라 사실 270º 가 된다는 것을 가우스는 간단하게 증명했다. 가우스의 증명이 기초가 되었지만, 그 후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해 중력 때문에 시공간이 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3년 뒤, 태양의 뒤에 가려진 별이 중력에 의해 휘어져 보이게 되는 현상을 일식이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쉽게 관찰하게 되었단다. 이어 아이들의 호기심이 별처럼 반짝입니다.
일제고사는 성적에 포함되지 않으며 각 학년의 1반 성적만으로 표본 집계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모두가 같이 시험을 보지만 교사들은 1반만 신경을 쓰면 되고 나머지 반은 들러리를 서는 것입니다. 또, 늘 해 왔던 학업 성취도 평가는 3%의 아이들 성적을 표본 집계하여 강남, 북과 수도권, 지방 격차를 파악합니다.
교과부는 "3% 표집만으로는 정책 자료를 일반적으로 수립하는 데는 참고가 될 수 있지만, 전반적인 지역-학교 간 학력 격차가 늘어나는 데 대한 정확한 실태 파악에는 불리하다. 또한, 개별학교 학생들의 졸업 시 학력 수준을 알아보는 기회를 주는 것도 국가의 책무다. 내신에 반영되거나 선발 도구로써 활용되는 것이 아니기에 사교육 시장을 자극하지는 않으리라고 본다"며 2010년부터는 "학교서열화의 기준을 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제고사와 학업성취도 평가는 큰 차이가 없는 예산낭비이며, 교과부의 호들갑과는 달리, 아이들은 늘 이런 형태의 모두가 윈윈하는 것이 아닌 단 한 명만이 정점에 서는 골든벨식 시험에 모두 학습의욕을 잃을 뿐이며, 이미 잘못된 잣대에 의한 지역 간 학력격차 파악은 잘못된 교육정책만을 고질화시킬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기타지역의 학력이 낮을 경우, 강남보다 더 나은 교육정책과 투자비용을 투입하려는 교육기회균등 정책데이타를 얻으려는 착한 의도가 아니라, 사실 강남에 똬리를 튼 사교육의 우월성을 입증하고 싶은 교육 기생충들의 떡고물과 농간에 춤을 추며 교육이라는 직업유지에 혈안이 된 사악한 의도로 보입니다.
매년 '난이도 실패'나 '두 개의 답'이라는 논란에 휘말리는 '수능'은 대학에서 학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입니다. 그러나 특정 학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지선다 따위로는 알 수가 없고 아이들 각자의 학문적 재능과 호기심에 대한 성취도와 사고력의 장기적인 관찰로 알 수 있습니다.
또, 학문적 재능과 호기심과 성취도와 사고력은 달랑 일생에 단 한 번의 기회와 모두에게 동일한 정답을 고르게 하는 수능으로 간단하게 재단할 수 없으며, 초중고를 거치면서 한 학년의 천편일률적인 과목과 동일한 정답의 일정한 측정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개인의 능력에 대한 학력 평가는 매우 단순한 암기지식의 측정일 뿐이며 교육은 암기능력의 강요일 뿐입니다.
암기 시험도사 고승덕이라든가 난다 긴다 하며 탁상 앞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회지도층들과 학자들이 이 사회를 혼탁하게 하는 행패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학력평가가 '우수한 사회적 가치관'과 '개인의 재능'과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 평등, 박애의 '올바른 정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항상 신이 어떻게 이 세상을 창조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나머지는 지엽적인 것에 불과합니다."라며 스스로 "나는 사회 정의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열정적 감각을 가졌다."고 자부하고, 평화주의, 자유주의, 시오니즘을 지지하며, 미래의 지구촌에서 무욕무탈의 불교가 주류종교가 될 거라 예언한 이상주의자 Albert Einstein의 에너지-질량 방정식 가설은, 세계대전 당시 가장 파괴적인 무기인 원자폭탄으로 구체화되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난폭함을 드러냅니다. 그 직후 아인슈타인은 그 심정을 참담하게 피력하며 다음과 같은 생각과 태도로 과학을 바라봅니다.
'모든 기술의 개발과 관련되는 노력들은 반드시, 그리고 오직 인류를 위해서만이 행사되어야 할 것이다 ― 우리들의 과학적 사고가 인류에게 저주가 아닌 축복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노력들을 모아내고 그 결실들을 나눌 수 있어야 하며, 이것이야말로 지금까지 미해결 상태의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과제이고, 우리가 반드시 짊어져야만 할 숙제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뮌헨 초등시절, 독일 교육부는 성적등급제도를 종전과는 정반대의 평점 방식으로 바꿉니다.
덕분에 이해력이 느리고 특히 암기과목에 취약한 아인슈타인은 그리스어 교사로부터 "넌 아무것도 되지 못할 거다."라는 폭언을 듣기도 하고, 담임에게 "이 학생은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이라는 성적표를 받지만, 어머니의 "걱정할 것 없어, 남과 같아지려고 하면 결코 남보다 나아질 수 없다. 너는 남과 다르기 때문에 꼭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라는 격려에 학년이 경과하면서 최하의 등급에서 마지막에는 최고의 과학자에 이릅니다.
모차르트도 허접한 곡을 600여 편이나 발표하여 비웃음을 받기도 했고, 셰익스피어도 수백 편의 형편없는 시를 썼고 에디슨도 학습지진아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도전과 열정을 통해 자신들만의 삶을 찾았습니다.
ADHD장애아였던 펠프스는 시드니 올림픽 200m에서 5위를 하고 크게 실망했으나 그나마 5위라도 한 기념으로 동네잔치를 벌이려던 어머니를 "앞으로 펠프스가 따낼 메달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일로 잔치를 하느냐'"며 어머니를 야단치는 감독의 격려에 베이징 올림픽에서 8관왕의 위업을 이루며 수영 영웅이 됩니다.
천재를 만드는 교육자나 부모의 임무는 소위 학력이라는 잔머리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호기심을 갖도록 방향을 찾아 주고, 바른 마음으로 목표에 최선을 기울이도록 격려하고 동기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점’을 ‘다름’으로 보는 혜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상상은 지식보다 중요합니다. 지식은 제한되어 있지만, 상상은 세상을 호기심으로 관찰합니다." "저의 과학적 업적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좀 더 멀리 봤을 뿐입니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심각하게 새기며 아이들의 인격과 상상력을 자신의 도구처럼 좌지우지하는 나쁜 부모와 나쁜 교육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보수는 변화에 취약하지만 안정적이고, 진보는 변화에 적극적이지만 비판적인 자정능력이 있고 모험적입니다.
역사란 점잖게 앉아 타고 가는 자전거 안장(보수) 아래에서 바쁘게 회전하는 두 발(진보)과 모험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눈(선각자)이 없다면 쓰러지게 되므로 서로의 장단점이 협력하고 공존해야 전진하게 됩니다.
이 나라에 진정한 보수와 진보가 없는 것은 식민지청산과정에 근본적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교육에 대한 왜곡과 텃세 때문입니다.
일제의 반공교육이라는 교육왜곡에서 국민의 가치관이 획일화되어 극복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면서 친일토호세력들의 다양한 카르텔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 부동산과 사교육의 기득권과, 거품만 키우는 바보들의 폭탄 돌리기에 중독된 텃세(집단지역이기주의)를 타파하려는 민주화세력들은 늘 이단아로 외면당하며 적반하장의 역논리에 매장됩니다. 텃세는 언제나 '신입'이나 '혁신세력'을 폄하하며 '바른 소리를 싸가지 없이 한다'거나 '말이 많다'며 '구관이 명관'이라는 관행적 병폐와 매너리즘으로 배척을 합니다.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부정적인 역사를 정리하고 자신들의 꿈과 비전을 확립할 수 있었던 참여정부를 386들과 진보세력들이 터줏대감들과 다를 바 없이 대하여 역사발전의 동력을 뒤로 돌렸다는 아이러니입니다. 그렇게 배고팠던가요?
텃세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셈이지만 우리의 교육사에서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접근하고 아이들을 존중하려고 의미 있게 노력한 시도는 이해찬님의 평준화가 유일합니다.
남들보다 반 발자국 앞서가면 성공한다지만 노공이산님이나 ‘유명해’님처럼 한 발자국을 앞서가면 사람들이 이해를 못해 손가락질을 받기도 합니다. 선각자들이 충고를 해도 사람들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저 감정만 소모되고 모함을 당하기도 하고 공허한 메아리로 매장되기도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들의 족적과 언행은 들불처럼 세상을 밝힙니다.
미국의 이상행동자녀문제 프로그램을 모방한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결국 아이의 이상행동의 원인이 부모로 밝혀집니다. 또, 더 뒤집어 보면 부모들이 이 사회에서 불안하게 사는 것이 원인이며 정치구조와 교육 가치관의 문제점이 근본원인입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해 가는 프로그램의 해법은 결국 인성교육과 사회복지문제이며 아이들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감을 찾아주고 적절한 환경을 보장하고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취업난이 심각한 요즈음 방학이 시작되면서 각 교수들의 메일주소에 학점을 올려달라고 하소연하는 학생들의 e-mail이 넘쳐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과제물 제출에 달린 교수들의 피드백은 "이걸로 충분할까?", "그래서 결론은?", "좋은 글" 정도랍니다. 사실 불량스런 덧글 수준도 피드백이냐고 웃을지 모르지만 돌려받은 과제물에 짧게나마 교수의 멘트가 달려있는 경우는 아프리카 사바나 초원 한복판에서 펭귄을 찾아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랍니다.
평가를 하는 이유는 학습자의 부족한 부분을 찾아 학문의 전문성을 견인하는 것을 계획하는 데 있는데, 성의없는 피드백과 노코멘트의 평가로 줄을 세우겠다는 것은 문제 많은 초중등교육과정과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학문을 연마한다는 대학에서 오로지 학점을 매기는 기준으로만 학생의 과제물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피드백으로 평가하는 구태의연한 교수의 학자적 양심과, 시간에 쫓기며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는 강사의 노동에 대한 학교당국의 태도가 근본 문제이기도 하며 교과부의 총체적 역량 문제입니다.
초중등교육과 대학이 획일적인 산업시대 시스템에서 발전하지 못하고 갈수록 뒤로 주춤거리며 정보화시대의 지식산업에서 허우적거리며 국가 경제와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하는 서식지인 가정경제를 파괴하고 국가의 미래의 기둥인 아이들의 풍부한 호기심과 다양한 재능과 국부를 창출할 창의력과 국제적인 경쟁력을 말살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아이들의 자유와 일상을 빼앗는 나쁜 부모와 나쁜 교육자가 되어 우리나라가 후진하는데 개털 투자를 하면서 경제를 낭비하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지구에서 우주생명체를 찾으려는 천문학자들의 노력이 미궁에 빠지자, 역으로 위성을 멀리 띄워 지구를 관찰하여 생명체의 징후를 찾는 기준을 얻어 제 출발하려는 시도를 보았습니다. 그것도 생각처럼 쉽지 않다고 하는데 이처럼 부모들과 교육자들과 정책입안자들은 이제 아이들의 문제를 그릇된 자신들의 사회구조를 유지하려는 텃세에서 벗어나, 어른들의 관점이 아니라 아이들의 관점으로 해결하려는 역발상을 하기를 권합니다.
ⓒ 시골훈장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1&uid=172183 |
첫댓글 음음 생각하는척................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했는데 10년 앞도 보이지가 않네.보이지않으니 불안한 마음에 다들 한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고..모두 이것이 옳은 방향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게 현실이고.줄세우기 교육정책은 없어져야해.사람이 얼마나 다양하고 예측불허의 가능성을 가진 동물인데 한가지 잣대로 쭉정이취급을 해버려 너도 나도 앞에 서려고 대가리를 들이미니 불이나지.우리 모두에게 결단력이 한 날 한 시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주어질 수는 없겠지
전국 각 지역에서 대안학교라는 운동이 조금씩 보이긴 하지. 시골훈장님 말씀대로 그 동안 친일토호세력들의 다양한 카르텔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 부동산과 사교육의 기득권이 60년 이상 이렇게 만들어 왔으니, 앞으로 아무리빨라도 이런 쓰레기들이 청소되려면 30년은 족히 걸릴거야.
나도 대안학교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었어.주희 어릴때..자신없더라.
대안학교. 그거 정말로 큰맘 먹질 않으면 엄두도 못낼꺼야. 아직 검증되지 않았거니와 혹시라도 잘못되면 아이들을 오히려 더 망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