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군 소위 장교가 되니 생활은 재미있었다. 강원도 홍천에 있는 1사단 15연대 3대대 12중대 1소대장으로 첫 장교 생활을 시작했다. 기관총소대 소대장이었다. 후보생과 장교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1961년 12월 추운 겨울에 소대장으로 부임 했는데, 처음에 영내에서 사병들과 함께 생활했다. 전령이라는 직책으로 소대장에게 딸린 당번 병사를 선택하라고 하면서 소대원들의 신상명세서를 보여주기에, 먼저 나이부터 살펴보았더니, 나보다 어린 병사가 소대에 단 한명이 있었다. 1961년도에 내 나이 만 22세였는데, 군대에 가는 나이로 어린 편이었다. 또 병사들은 나보다 먼저 입대해서 이미 군대생활을 상당히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보다 어린 병사를 불러 보았더니, 키가 작은 편에 동안으로 예쁘장했고, 고향이 전라남도 영암이었다. 나는 그 병사를 나의 당번병으로 지명했다. 당번병의 하는 일은 소대장을 전적으로 보살피는 일이었다. 모든 사역에서 제외되고, 오직 소대장을 보살피는 몸종과 같았다. 빼치카옆 따뜻한 곳에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자고 나면 옷을 깨끗이 빨아 다려놓고, 신을 닦아놓고, 추운 겨울에 따뜻한 세수 물을 준비하고, 옆에서 수건을 들고 서 있으며, 식사 때가 되면 밥을 먹을 수 있게 준비해 주었다.
그 무렵 나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면서, 육군소위가 이렇게 높은 줄을 미처 몰랐다고 쓰기도 했었다. 장교와 사병도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사병들은 장교에게 절대 복종이었다. 당시에 일선 사단의 말단인 소대에 배치되는 병사들은, 최고 학력이 중졸이 대부분이었다. 행정요원 몇 사람이 고졸 정도의 학력이었다. 가끔 교보나 학보로 오는 사람들이 드물게 있었다. 촌에서 머슴살이 하다가 온 사람도 많았다. 한글을 읽지 못하는 무학자도 있었다. 휴가를 가라고 해도 자기 집을 찾아가지 못하는 병사도 있었다. 그러한 병사들은 같은 고향이나 가까운 동네에 사는 병사와 묶어서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사병들의 복종심은 절대적이었다.
홍천의 사단은 전방의 예비사단으로 교육훈련이 생활의 중심이었다. 매일 교관이 되어 병사들을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것이 장교들의 생활이었다. 나는 사병들을 심하게 다루지 않았다. 장교로 진급도 제대로 하고 출세하려면 원리원칙을 준수하고, 사병들 교육을 잘 시켜야했다. 그러면 사병들의 생활은 많이 힘들게 되어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단기 장교로 의무연한만 할 생각이었기에 아마추어 장교였다. 아마추어 후보생에서 아마추어 장교가 되어 있었다. 병사들을 많이 생각해 주었기에 병사들은 나를 많이 좋아 했다. 봉급을 받으면 가끔은 회식도 시켜 주곤 했다. 높은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한번은 중대장이 나에게 충고조로 말하기도 했다. 아래 사람보다 높은 사람에게 잘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군대 생활을 끝낼 때까지 높은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었다.
9개월 정도 지나 소속 부대가 홍천에서 철원 최전방으로 이동이 되었다. 이동과 동시에 나는 연대연락 장교가 되어 사단과 연대를 오가며 연결시키는 임무를 받았다. 아침에 사단사령부로 출근하여 회의에 참석하고 연대에 알려야할 정보를 가지고 연대에 갔다가 퇴근하는 일과였다. 자연히 사단사령부의 장사병들을 알게 되고 정보도 빨랐다. 전투병과에서 특과로 전과시키는 일이 있었다. 나는 곧 헌병과로 전과지원서를 냈다. 연대에는 알리지 않고 사단에서 했다. 연대에서는 장교가 빠져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비공식적으로 서류를 만들어 지원서를 냈다. 그리고 재무부에 근무하는 서울 외삼촌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했더니, 외사촌 매제가 육군본부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더니 바로 전과분류의 실무자인 육본 소요보좌관실의 소령을 잘 안다고 해서 부탁을 했다. 헌병과로의 전과는 경쟁이 64:1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너무 쉽게 전과가 되었다. 1963년도에 나는 헌병장교가 되었다. 보병은 3보 이상은 구보라고 했는데, 헌병은 3보 이상은 승차이동이라 했다. 헌병과에는 차가 많았다. 순찰용 백차들이 많았다. 백차를 타고 다니면 걸릴게 없었다. 복장도 수실로 단장을 하고 깨끗하고 멋있었다. 우월감으로 기분이 상승된 근무였다. 위반자들을 적발하고, 죄지은 자들을 잡아다가 벌을 주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권력기관인지라 상명하복의 군기가 더 엄하기도 했다. 죄를 벌해야 하는 병과에 발을 내딛고, 맨 처음 알게 된 것은 도둑을 잡아야할 곳에, 도둑들이 우글거린다는 것이었다. 죄 지은 자들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타협해서 돈을 뜯어내고, 물자 취급을 하는 부대 사람과 타협해서 군수물자를 빼돌리는데 앞장서고, 하급자는 많이 부정을 해서 상급자들에게 가져다 바치고 하는 일들이 먼저 눈에 띠었다. 후회가 되었다. 빨리 제대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년 6개월 정도 헌병장교로 근무하면서 순찰소대장, 작조계장, 5군단지구 5부 합동 군수품취재반장. 본부계장 등 초급 장교로 할 수 있는 보직을 모두 거쳤다. 3개월씩 두 번, 경북 영천에 있는 헌병학교에 가서 초등군사반과 범죄수사반 교육도 받았다. 보직이 오래가지 않아 조금씩 하다 보니, 초급장교가 할 수 있는 보직을 모두 거쳤다. 업무에 별로 열심히 하지 않고, 기회 있는 대로 백차를 타고 많이 돌아 다녔다. 주말이나 시간이 있으면 서울로 외출도 많이 했다. 고모 집에도 자주 갔고, 여동생과 어울려 놀기도 했다. 여동생의 친구를 소개받아 같이 데이트도 많이 했다. 당시에 밤 12시가 되면 통행금지 제도가 있을 때, 데이트하다가 통행금지 시간이 되어, 할 수 없이 가까이에 있는 여관으로 동생 친구와 함께 들어갔던 일이 있었다.
여자가 몹시 어색해 했다. 잠자리를 같이 할 수밖에 없었는데 너무 경계를 하기에, 가볍게 입만 한번 맞추고, 나는 잠을 잤다. 나는 겉옷을 벗었지만, 여자는 겉옷도 벗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새벽이 되어 통행금지가 해제된 시간에 맞추어 여자는 돌아간 듯했다. 나는 여자가 가는 것도 모르고 잤다. 다음에 만났을 때, 여자는 잠을 전혀 자지 않고, 잘 자는 나를 지켜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후로 여자와의 사이가 뜸해졌으나, 계속 연락은 하며 살다가, 제대 후에 헤어졌다. 후에 생각이지만, 여자가 함께했던 밤에 나를 너무 경계하지 않고, 사랑을 나누었더라면, 그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부모가 계시지 않고, 언니 집에서 기거하며 조카를 보살피는 것 같았고,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한국의 텍사스라고 했던 운천에서 언니가 큰 가게를 하고 있었고, 놀기 좋은 곳이어서 운천에 내가 자주 갔었던 것이다.
군 업무에 별로 충실하지도 않고, 많이 돌아다니며, 높은 사람들을 사귀지 못해 불이익도 많이 받았다. 막강한 권력이 주어진 군수품 취재반장 때에는 로봇노릇을 자청해서 했고, 5사단 헌병대에서 28사단 헌병대로 이동이 되기도 했다, 28사단에서 헌병참모의 노골적인 비방에 분을 참지 못하고 있던 차에, 마침 전역 지원을 할 수 있는 공문을 접하고, 곧바로 전역지원을 해서, 군복을 벗을 수가 있었다. 경력이 짧아 전역이 어려울 거라고 했는데, 1군사령부 헌병부에, 내가 속한 중대의 중사가 파견근무중인 것을 알고 부탁을 했더니, 자기가 헌병감실에 담당자와 잘 알고 있으니 이야기 하겠다고 했다, 그런 것들이 효과가 있었는지 제대를 할 수가 있었다. 1965년 5월 31일자 전역특명을 받은 것이다. 여유를 주지 않으려는 듯 촉박하게 받은 전역명령이었다. 4년 3개월, 총 51개월의 군 생활 마감이었다.
전혀 여유가 없어 전역준비를 할 틈이 없었다. 문제는 수중에 돈이 없었다. 귀향할 여비도 없었다. 군대 생활 하는 중에 나 자신을 위한 저축은 전혀 하지 못했다. 초급 장교의 얼마 안 되는 봉급을 집으로 모두 송금했다. 동생들이 필요한 돈을 요구하면 보내 주어야 하기도 했다. 쌀을 사지 못하고 있다는 등 어머니의 애절한 편지들을, 조금만 돈을 늦게 보내면 받아야 했다. 생활이 궁했던지 자식에게 의지하는 빈도가 많았다. 서울에 살던 고모 가정도 무척 생활이 어려워서 때때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광주에서 간호고등학교를 다니던 고모 딸이 필요한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충분하지는 못해도 조금씩 도와주었다. 후에 두고두고 그때의 도움을 감사하는 인사를 받기도 했다. 나를 위한 저축 같은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전역명령을 받으니 주변 사람들도 냉랭했다. 권력기관의 생리를 조금이나마 경험해야 했다. 전역준비를 위해 부정한 짓이나 하지 않을까 하는 감시의 눈초리도 느껴야 했다. 그 때 검문소에 파견 나가있는 사병이, 군대 고철을 취급하는 고물 장사와 결탁하여, 부정한 행동을 한 것이 적발되어 조사를 받고 있었다.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지만, 직속상관인 내가 사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전역해서 귀향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직속상관으로 CID(범죄수사대)에 불려가 조서를 받기도 했다. 아마 전역하지 않았으면 지휘책임으로 어떤 벌을 받았을지도 모르나, 곧 귀향했기에 그 후의 일은 모른다. 전역으로 받게 되는 약간의 퇴직금은 서울에 있는 경리부대에서 찾으라고 했다. 친하게 지내던 동기생이 준 약간의 돈을 받아, 서울에 가서 바쁘게 퇴직금을 먼저 찾아 귀향해야 했다.
군 생활이 끝나고 집에 왔다. 6월이 되어 있었다. 1월에 전역 신청을 하고 전역한다는 소식을 집에 알렸었다. 전남대학교 본부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하고 계시던 아버지가 전역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학 3학년까지 마치고 군대에 간 아들이 돌아오면, 먼저 대학 4학년 과정을 마저 다니고 졸업할 수 있게 하려고, 3월에 복학 수속을 해 놓으셨다. 3월까지는 전역이 되리라 예상했던 것이 빗나가 5월말에 전역이 되어, 정상적이면 복학 수속이 무효가 되었을 것인데, 당시 대학가의 상황이 어수선하여 복학이 되었다. 1965년도의 우리나라 상황은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세력들의 극심한 반대로 혼란스러웠다. 반대세력의 중심이 대학가였고, 대학생들의 데모가 끝이지 않았다. 대학의 학사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아 중간고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강의실은 학생들이 오지 않아 휴강의 연속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나는 대학생이 되어 학교에 갔다. 뒤늦게 수강신청을 하고, 강의실에 가서 강의를 들었다. 강의실에 가면, 많으면 10여명, 어떤 때는 둘이서 강의를 듣기도 했다. 휴강이 많았지만 두 명만 있어도 교수들은 강의실에 와서 강의를 했다. 자연히 교수들에게 얼굴이 알려지게 되었다. 아침에 일찍 대학 통학버스에 몸을 실으면, 불과 며칠 전까지 백차를 타고 경기도 양평일대를 누비던 내 모습과 너무도 대조가 되어 입가에 쓴 웃음이 번지기도 했다. 강의가 없으면 대학 도서관에 가서 틈틈이 책을 읽었다. 잠시 휴식하려고 도서관 밖으로 나오면 대학 본부 앞에 모여 열심히 데모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도서관이 본부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28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양평에서, 비상시에 데모 진압부대로 출동하기 위해 여러 가지 훈련과 준비를 했던 것을 생각하며, 대학생 신분이 되어 데모 대열에 함께 한다면, 신분이 180도 달라진 것이었다. 내 신분의 변화가 여러 가지를 생각게 하기도 했다. 다행인 것은 진압부대로 출동하기 전에 전역된 것이고, 또 데모는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기에 도서관에서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며 소일 했다.
대학 4학년에는 무슨 사정이었는지 모르지만, 나와 입학년도가 같은 학생이 3명 더 있었다. 그들이 대화의 상대가 되어주기도 했다. 7월초였을가? 대학의 학사는 진행되어야 했기에, 기말고사가 시행되었다. 4학년 학생들은 졸업을 해야 되기 때문에 많은 학생이 시험에 응시를 했다. 강의가 많이 없었기에 , 시험범위가 많지 않았다. 나에게 모두 유리한 상황이었다. 교수들에게 강의를 많이 들은 학생으로 얼굴이 알려진 것도 좋았다. 시험결과 평균 B학점이었다. B학점 이상이면 수업료를 면제받는 장학생이었다. 대학의 마지막 학기 등록금에서 수업료를 면제받은 것이다.
여름방학 기간에 광주에서는 전국체육대회가 열리고, 함께 산업박람회가 광주공원 일대에서 개최되었었다. 산업박람회장의 경비요원으로 대학생들 중에 희망자를 모집했다. 약간의 경쟁이 있었으나 경비요원으로 채용이 되어 한 달 정도 근무를 해서 약간의 돈을 벌기도 했다. 4학년 2학기는 거의 강의가 없고, 학생들은 취업 준비를 하며 보내는 기간이었다. 농협 채용시험에 응시해보았다. 하지만 내 실력은 많이 부족한 것 같았다. 실패한 것이다. 내 마음은 취업보다 신학공부 할 것에 더 마음이 가 있었다. 12월이 되어 목포에 있는 내과의사 가정에 중학교 1학년 학생을 지도하는 입주 과외교사 노릇도 했다. 목포여고에 근무하던 매형의 소개였다. 의사 가정의 아들이 소아마비로 정상아가 아니어서, 학업과 인성을 함께 지도해 줄 교사를 구한 것인데, 나를 적임자로 매형이 추천해 주었던 것이다. 가정교사를 하면서 한국신학대학에 학사편입절차를 밟았다.
당시에 신학대학에서, 대학을 졸업한 학사들에게 대학 입학금과 등록금을 전액 지원하는 장학제도가 있었고, 2학년으로 편입되어 3년간 공부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숙사비와 용돈만 있으면 3년간 공부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동안 모아둔 약간의 돈으로 한 학기 공부는 할 수 있는 계산이 되어 지원을 했다. 학사 출신들은 시험도 면접만 했고, 모두 합격시켜 주었다. 7명의 학사들이 함께 편입해서 공부하게 되었다. 1966년 2월 26일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제 10회로 졸업장을 받고, 나는 곧 서울로 올라가 수유리에 있는 한국신학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신학공부를 시작 했다.
군 생활을 끝내고 집에 와 있는 동안에, 군대생활 하는 동안 소홀했던 교회생활도 열심히 했다. 찬양대로 참여하고,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 했다. 찬양대 지휘자가 자기 조카를 데려와 나에게 소개 시켜 주기도 했다. 전남여고 출신으로 다른 교회에 다닌 사람을 일부러 데려와서, 찬양대를 함께 하게 하며, 나를 소개시켜 준 것이다. 여자가 처음부터 나를 좋아해 주었다. 일고와 전남여고는 광주에서 함께 일류이고, 두 학교간의 유대도 많았고, 따라서 친한 학생들이 많았었는데, 자기도 일고 출신을 만난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학생인 내 형편을 생각해서 데이트를 할 때면, 필요한 경비를 모두 부담해 주었다. 어떤 때는 용돈이라며 돈을 주기도 했다. 찬양대 연습이 끝나면 함께 데이트를 많이 했는데, 핑계만 있으면 피하고 싶어졌다. 부담스러웠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여자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즐거워했다, 신학공부를 하기 위해 떠날 때, 금반지를 선물로 주면서, 비상시에 사용하라고 했다. 기숙사비용을 내고, 책을 사 보고 하는데, 돈이 필요한 때가 있어서 금반지를 팔아 요긴하게 사용 했다. 하지만 여자에 대한 관심이 점점 소원해지고, 어느 날부터인가 거의 연락이 끊겼다.
훗날, 신학공부를 중단하고, 영광에서 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여자가 수소문해서 내가 있는 곳을 알아내고, 편지로 자기가 보낸 편지를 비롯해서, 자기 것을 모두 돌려달라는 편지를 했었다. 편지들은 이미 없애버려 돌려줄 것이 없었으나, 금반지가 생각났다. 미안하다는 편지와 함께, 금반지 값을 돈으로 환산하여 보내 주었다. 그렇게 끝이 났다. 좋은 여자였는데, 너무 많이 생각해 줌으로 부담을 주지 않았다면, 그 여자와의 관계도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신학대학에서 한 학기 공부를 마치고, 여름방학이 되어 집에 왔었다. 2학기에 다시 공부할 준비가 막막했다. 방학 동안에 뾰족하게 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 교육청에서 초등학교 교사 모집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학 졸업자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우선 응시를 했다. 합격이었다. 발령은 언제일지 모르니까 그냥 기다리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8월 중순에는 예비군 훈련을 받으라는 통지가 왔다. 영천에 있는 헌병학교에 가서 2주간 훈련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모처럼 헌병 중위 계급장을 달고 헌병학교에 갔다. 중령에서부터 중위까지의 예비군 장교들이 한반 정도 모였다. 영내 거주를 하면서 교육을 받았는데, 예비역들의 위로 모임 같았다. 현역 장교들이 선배들을 찾아보며 대접을 해 주었다. 자유스런 대화의 자리가 많았다. 교육이 끝나니 당시 육국 중위 봉급의 절반을 주었다. 다시 신학대학에 가서 두달 정도는 생활할 수 있는 돈이었다. 교육이 끝나고 학교 기숙사로 갔다. 9월 한 달분의 기숙사비용을 내고 2학기 공부를 시작 했다. 9월의 마지막 날인 30일에 서울 한강에서 국군의 날 행사로 공군 비행기 쇼가 있어서 구경하러 갔었다. 구경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니, 광주 집에서 지급전보가 와 있었다. 10월 1일자로 초등학교 교사 발령이 났다는 것이었다. 즉시 대강의 짐을 챙겨 10월 1일 광주로 왔다. 영광 군서송학초등학교로 발령이 나 있었다. 10월 2일 영광교육청을 경유하여 학교에 부임 했다. 교사 자격증이 없었기에 강사로 발령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