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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잿빛 식민지에 ‘황금광 시대’ 연 삼성금광 신화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식민지 부호들 ④광산재벌 최창학
1930년대 ‘황금광 시대’라는 말이 유행했다. 찰리 채플린이 1925년 만든 무성영화 ‘황금광 시대(The Gold Rush)’에서 따온 용어인데, 최창학이 금광 개발로 일약 조선 유수의 갑부로 올라서자 금광 개발 열풍이 일었다. 식민지와 황금이란 모순된 조합이 성행했던 뒤틀린 사회였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최창학. 자신이 사냥한 호랑이 등 위에 앉아 있다. [사진 최창학 선생의 외손녀 양준심씨]
『동광』 1931년 9월호는
조선의 광산왕, 황금귀(黃金鬼) 등으로 불린 최창학은 식민지 한국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만큼 여러 면에서 기존 부호들과는 달랐다. 언론인 류광렬이
1929년 500만원대 거부로 평가 받아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최창학(오른쪽 첫째)이 북경 북해공원에서 사위 양효손(오른쪽 둘째·양기탁의 외아들)과 서 있다.
최창학에 대해 세론이 나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자수성가한 측면도 있지만 일제 때 많은 부자가 민영휘처럼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귀족들과 그 후예인 데 대한 반감도 강했다.
오수산은
조선 제일의 부자 민영휘는 망국 후 자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매국적(賣國賊)이었고, 한때 조선에서 현금이 제일이라고 평가받았던 이항구는 이완용의 차남으로서 1924년 남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였다.
고영희는 1907년 제3차 한일협약(정미 7조약) 체결에 앞장서 이완용, 송병준 등과 함께 정미7적(丁未七賊)으로 규탄받았던 인물이자 1910년(경술년) 망국 후 경술국적(庚戌國賊)으로 지탄당했던 매국적으로서 자작 작위를 받은 인물이었다. 고영희의 장남이 고희경인데 1916년 고영희가 사망하자 자작 작위를 물려받았다가 1920년에는 백작으로 오히려 승급했던 친일파였다.
오수산은
최창학은 1890년 평안북도 귀성(龜城)군의 빈촌에서 태어나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했다. 20대 초반부터 금맥을 찾아 떠돌아다니다가 숱한 실패를 맛보았는데 그 과정에서 금광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1923년 고향인 귀성군 관서면(<8218>西面) 조악동(造岳洞)에서 금맥을 발견하면서 인생역전의 싹이 트였다. 채광(採鑛) 자금이 없었던 그는 삼촌 최첨사(崔僉使)에게 약 2만원을 빌려 채금(採金)을 시작했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이 식민지 한국을 황금광 시대로 몰아넣었던 삼성금광(三成金鑛)의 탄생이었다.
오수산은
최창학의 재산 규모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해
‘동아일보’는 1930년 말에는 “햄마 한 개로 천만장자가 된 조선의 광산왕”이라며 천만장자라고 더 높이고 있다. ‘동아일보’는 1929년 8월 18일자에서 최창학이 귀성군 관서면의 삼성금광을 8월 15일 일본의 미쓰이광산(三井鑛山)에 넘겼는데 매도가는 탐문하면 150만원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같은 해 9월 6일 삼성금광을 미쓰이광산이 인수한 후 일본 대표 기노시타(木下正道)의 광산 경영방침이 과거와 돌변해서 금광으로 먹고사는 5천여 주민의 생활이 극도로 곤란해지고 조악동을 떠나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가난을 경험한 최창학은 그나마 관대하게 경영했지만 일본인들이 가혹하게 경영하면서 광부들의 생활기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금광 안 하는 사람이 미친놈 취급 받기도
최창학은 광산 부근에 학교인 삼성의숙(三成義塾)을 설립했는데 이것도 경영 곤란한 상태에 빠져서 최창학이 200원을 기부했으며 만주 좁쌀 100포를 굶주리는 광부 500명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전할 정도로 일본인이 인수하면서 상황이 급하게 악화되었던 것이다.
최창학이 삼성금광을 매도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평북 삭주군(朔州郡)에 새로운 금광을 물색해 두었기 때문이다. 삭주군은 예부터 유명한 금광 소재지로서 황금광 시대에 광업가는 물론 농민들과 목동들까지도 탐광(探鑛)에 열중했다는 곳이다. 삭주군 수풍면 신상동(新上洞) 삼봉산(三峯山)에 일본인 미쓰노(光野佐助)가 허가를 출원한 금광이 있었는데 최창학이 이 권리를 매수했다. 전문가들과 시굴(試掘)해 보니 우량한 금광이라서 허가가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동아일보’ 1930년 3월 13일자는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삭주군 광산에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1936년 2월 그가 소유한 삭주군 대정광무소(大正鑛務所)에서 불이 나 20만원의 거대한 재산 손실을 본 것이다. 그간 시련도 적지 않았다. 1924년 7월에는 최창학의 금광을 강도단이 습격했다. 최창학은 얼른 인부들 틈에 숨었는데 때마침 놀러 왔던 일경(日警) 두 명과 총격전이 벌어져 일경 두 명이 사살되었다. 강도단은 최창학을 찾아서 납치하려고 하다가 얼굴을 몰라서 사무소 금고 안에 있던 현금 6000원과 1만원짜리 금괴 1개를 빼앗아 달아난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이 단순한 강도단인지 독립군인지는 분명치 않다. ‘조선중앙일보’ 1933년 4월 15일자는 1932년 7월 ‘조선××단’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벽동군을 거쳐 귀성군으로 잠입해 최창학을 납치하려다가 실패했다고 보도하고 있는데, ‘조선××단’이란 ‘조선독립단’이란 뜻일 것이다. ‘동아일보’ 1935년 9월 14일자는 시국을 표방하면서 가짜 권총을 들고 의주군을 횡행하다가 금광왕 최창학을 습격하러 귀성군으로 가는 도중 석하(石下)에서 체포된 의주 출신 문영삼(文永三), 양관일(梁貫一) 등 4명에게 신의주 지방법원 기구치(菊地) 재판장이 검사 구형대로 징역 9~7년을 언도했다고 보도했다.
최창학의 현금을 획득해 독립운동에 쓰려던 사건이 반복해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금광으로 일확천금의 꿈을 이룬 사람은 최창학 외에도 조선일보사를 인수한 방응모(方應謨)를 비롯해 김태원(金台原), 방의석(方義錫), 박용운(朴容雲) 등 여러 사람이 있었다.
함북에 땅 투기 광풍, 벼락부자 된 김기덕·홍종화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식민지 부호들 ⑤ 부동산 재벌
1930년대 한반도의 가장 오지였던 함경북도에 부동산 광풍이 불었다. 우울한 식민지의 잿빛 공기를 단숨에 황금빛으로 바꿔버린 황금광 시대처럼 느닷없이 함경도 오지에 부동산 광풍이 불면서 몇몇 행운의 벼락부자들이 탄생했다. 일제의 대륙 침략이 낳은 산물이었다.
만주벌판을 달리는 만주철도. 만주와 한반도를 잇는 길회선(길림~회령)의 종단항으로 나진이 선정되면서 함경북도에 유례 없는 부동산 광풍이 일었다. [사진가 권태균]
1932년 여름, 한반도 최북단 함경도 청진(淸津)과 웅기(雄基) 땅값이 들썩거렸다. 오지였던 관북(關北:함경도)의 땅값이 들썩거린 것은 대륙 진출의 관문(關門)으로 유력시된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일제는 1928년 10월께부터 대륙 침공을 목적으로 만주의 길림(吉林)과 함경도 회령(會寧)을 잇는 길회선(吉會線) 철도를 부설했는데, 이를 연장하는 동해의 종단항(終端港)을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종단항은 1932년 3월 건국된 만주국 진출의 관문이 될 것이었다. 이전에는 주로 요동반도 대련(大連)이 일본과 만주 사이의 중간기지 역할을 했지만 동해의 종단항을 세워 그 역할을 대신시키겠다는 뜻이었다.
1 청진의 미생정 거리. 만주사변 이후 청진·웅기 등의 부동산이 급등했다.
동광
일제는 드디어 그해 8월 25일 종단항을 발표했는데 정작 선정된 곳은 청진도 웅기도 아닌 청진 동쪽의 나진(羅津)이었다. 나진은 함경북도 경흥군 신안면에 소속되어 있던, 불과 20호 미만의 작은 어촌(漁村)이었다. 그곳에 갑자기 거센 부동산 광풍이 불었다.
2 김기덕. 부동산 광풍 덕에 일약 식민지 조선 제일의 갑부로 뛰어올랐다.
이윤재가 쓴 앞의 기행문 제목이 ‘나진만(羅津灣)의 황금비’였던 데서도 광풍의 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윤재는 ‘와글와글 브로커들이 몰려들어 여관마다 대만원이고 가로에는 밤낮없이 사람들의 어깨가 서로 부딪쳐서 실로 공전의 대활기를 띠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윤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1평에 불과 2전, 3전 하던 것이 지금은 일약 10원, 20원까지 올랐다’고 덧붙였다. 몇몇 곳은 30, 40원으로 뛰기도 했으니 삽시간에 무려 수천 배가 올랐던 것이다. 이윤재가 “금후 대륙과 일본의 교통은 나진이 중심이 될 것이고 장차 대련과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 등의 번영을 빼앗을 것”이라고 예견한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김기덕, 국제무역 하다 땅 450만 평 구입
부동산 광풍에 수많은 희·비극이 연출되었다. 한 투기꾼이 1000평짜리 산을 평당 8원씩에 매입했는데 산 주인은 모두 8원이라는 줄 알았다. “8000원을 받은 땅 임자는 넋 잃은 사람같이 아무 말도 못하고 덜덜 떨기만 하다가 돌아가서 이내 실신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일화와 함께, 30원으로 일주일에 20만원의 거금을 번 청년의 일화도 전해진다. 반면 수년 전에 수만 평을 샀다가 종단항 결정 몇 개월 전 원가에서 밑지면서 판 사람의 이야기도 전해졌다. 그 땅에 시가지가 들어설 예정이라서 후에는 평당 200원씩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추회막급(追悔莫及)이라며 가슴을 치고 통곡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윤재는 “나진에 수만 평씩 가진 청진의 김모(全某), 나남(羅南)의 홍모(洪某)… 같은 행운의 대지주들은 오늘날 어떻게 되었겠는가?”라고 대지주들을 거론했다. 청진의 김모가 김기덕(金基德), 나남의 홍모가 홍종화(洪鍾華)인데
그러나 김기덕과 홍종화는 우연히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함경도 부령(富寧)의 한미한 농가에서 태어난 김기덕은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했다. 청진으로 이사한 김기덕은 조선과 러시아, 만주를 잇는 국제무역에 뛰어들어 기반을 닦았다.
이 무렵 자본주의 제국들 사이의 식민지 쟁탈전인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전쟁 특수가 일고 러시아 혁명까지 가세해 그 여파가 시베리아와 한반도 북부까지 밀려들자 김기덕은 루블화 장사에 나섰다. 제정 러시아의 500만 루블을 매입했는데, 일화(日貨) 1원에 1원20전~1원30전 하던 루블화는 점차 40전까지 떨어졌다가 볼셰비키 정권이 시베리아까지 장악하면서 휴지로 변하고 말았다. 제정 러시아의 승리에 운명을 걸었지만 볼셰비키가 승리하면서 망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기덕은 좌절하지 않고 해산물·목재 무역을 계속하면서 부동산에 뛰어들었다. 비록 오지이지만 석탄과 목재와 해산물이 풍부한 북관의 미래를 낙관한 그는 상공업의 요지가 될 만한 부동산을 미리 사서 파는 수법으로 백만장자가 되었다. 물론 모든 투기가 그렇듯이 실패도 해서 조선은행에 50만원의 빚이 있었다.
그는 나진과 웅기를 주목해서 웅기에 300만 평, 나진에 150만 평의 토지를 샀다. 나진항을 감싸는 천혜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대초도(大草島) 80만 평과 소초도(小草島) 40만 평도 몽땅 사들였다.
김기덕은 운도 좋았다. 일제는 나진항 건설을 발표하면서 거의 절반의 토지를 수용했지만 김기덕이 소유한 간의동(間依洞), 신안동(新安洞)에는 되레 시가지가 조성될 예정이었고, 공업지대 예상지에도 막대한 토지가 있었다. 그가 가진 450만 평의 토지를 평당 2원으로 계산하면 900만원이고, 5원씩 계산하면 4500만원으로 민영휘와 김성수 일가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조선 제일의 부호로 등극한 것이다. 나진이 앞으로 대련을 능가할 대도시로 성장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었으니 김기덕의 재산은 계속 올라갈 것이었다.
함북 경성(鏡城) 출신의 홍종화 역시 한미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망국 전 경성에 있던 함일(咸一)학교와 경일야학(鏡一夜學)에서 공부하다가 학교가 강제로 문을 닫자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일본군 군수품(軍需品)이었다. 조선에는 용산(龍山)의 20사단과 함북 나남(羅南)의 19사단이 있었는데 홍종화는 나남의 19사단을 주목했다.
홍종화, 만철 토지 수용 때 갈등 빚기도
만주침략과 만주의 독립군을 염두에 둔 일본이 나남을 사단 본부로 확정했을 때 나남은 불과 수십 호의 농가가 살던 한미한 촌락이었다. 홍종화는 나남 군영지(軍營地) 부근의 토지와 일반 주민이 거주할 만한 토지를 매수하는 한편 군수품을 납품하는 용달상(用達商)으로 나섰다. 물론 일본군 사단 병력이 주둔하는데 일본군 군납업자가 따라붙지 않을 리 없어서 후쿠시마(福島律次)나 요시다(吉田) 같은 거대 자본의 군수업자가 있었지만 수만 명에게 제공되는 모든 군수품을 독점할 수는 없었다.
홍종화는 나남사단에 군수품을 납품하면서 차츰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수만원을 모으자 북선일일신문(北鮮日日新聞)도 경영했다. 홍종화는 군사적 관점에서 경제를 바라보면서 부동산 사업에 나섰다. 일본이 러시아의 부동항(不凍港)인 블라디보스토크에 필적할 군사도시를 북관에 세울 것으로 예상하고 천연 지리가 동양 제일이라는 나진만(羅津灣)을 주목했다. 홍종화가 전 재산을 기울여 웅기와 나진 지역의 토지를 매입하자 지방 주민들은 물속에 황금을 버리는 격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1931년 9월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홍종화는 살던 집까지 금융조합에 전당잡히면서 나진과 웅기의 토지를 매입했다. 홍종화의 소유 토지 규모는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대략 500만 평이 넘는다고 예상했다. 평당 2원씩 잡아도 1000만원인데 종단항 발표 후 나진에 평당 30, 40원을 호가하는 토지가 다수 생겨났으니 김기덕과 함께 조선 제일의 부자가 된 것이다. 게다가 만철(滿鐵:만주철도)에서 1933년 4월부터 1년 동안에만 1700만원을 투자해서 나진에 시가지와 부두를 건설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자 땅값은 더욱 폭등했다.
이때 홍종화는 만철과의 갈등도 겪었다. 홍종화의 토지 3만 평이 수용되었는데, 1934년 만철에서는 8만원을 제시한 반면 홍종화는 80만원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 결정권을 가진 인물은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의 여덟 배에 해당하는 넓고 넓은 만몽(滿蒙)천지에 대한 대륙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한, 또 이 대륙정책이 발단이 되어 13대(對) 1, 53대 1 적(的)으로 대세가 유도되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세계적 대전이 일어나지 않는 한 대전이 일어나도 일본이 패주하지 않는 한 결코 나진항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값이 떨어지지 않으리라.(
53대 1 같은 표현은 만주사변 후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1933년 2월 24일 국제연맹은 일본군의 만주 철수 권고안을 42 대 1로 채택했고 일본은 연맹을 탈퇴했다. 만주 특수에 도취된 일본인들은 연맹 탈퇴를 오히려 환영했다. 자본주의가 덜 발달했던 일본 경제는 전쟁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었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맹점이 여기에 있다. 일본 자본주의는 조직폭력배가 민간인의 돈을 갈취하는 착취경제와 같았다.
그렇게 일제는 확전의 길로 나가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패주’하고 말았다. 그런 침략의 떡고물 일부가 일시나마 관북의 부동산 붐으로 나타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