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먹고 또 먹고
마산땅콩캬라멜
2010년 10월 23일(토).. 창덕궁과 낙서재ㆍ비원ㆍ궐내각사, 창경궁 등 둘러본 후 창덕궁을 나선다. 9시부터 13시까지..
그리고나니 배고파▶ 점심식사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니 다시 원기회복! 붐비는 종로거리를 걸으면서 욕심을 낸다. 그래서 오늘 일정에서 마지막으로 종묘(서울시 종로구 종로 155. 02-765-0195. http://jm.cha.go.kr)를 관람하기로 한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당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이다. 조선 왕조는 건국 직후 궁궐을 세움과 동시에 조상신에게 나라의 안녕을 비는 사당인 종묘와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을 마련했다.
즉 태조 3년(1394년)에 종묘 조성을 시작했고, 이듬해 종묘를 완공했으니! 정전, 신실 7칸 좌우 익실 각각 2탄 규모라~ 정전에 추존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 신주 봉안이 이루어지고~
조상신과 자연신에게 정중히 제사 지내는 것은 왕실이 통치의 정통성과 권위를 부여받은 신성한 존재임을 상징힌다. 따라서 조선 왕조는 종묘와 사직을 궁궐 못지않게 중요시하였으며, 이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종묘에서 모시는 제사를 '종묘제례', 종묘제례 때 연주되는 음악과 춤을 '종묘제례악'이라 한다. 종묘제례는 국가 최고의 제례로 왕이 친히 받드는 제사였으며 유교적 절차에 따라 매우 엄격하게 치러졌다. 또한 제례 절차에 따라 음악과 춤이 어우러져 장엄함을 더하였다.
즉 종묘제례는 크게 신을 맞이하는 절차로 시작하여, 신이 즐기도록 음식과 술을 올려 대접한 뒤, 신을 보내드리는 순서로 진행된다. 제례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제례 준비에 온 정성을 다하였고, 제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지위에 맡은 역할에 따라 각각 다른 제례복을 입었다.
종묘대제는 해마다 5차례씩 정기적으로 거행되었으나, 1971년부터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한 차례 거행되고 있다. 조선 왕조는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없지만, 왕실의 조상들을 위한 공간과 제사,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음악과 춤은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전해오고 있다. 옛 왕조의 왕과 왕비를 위해 제례를 올리고, 그것도 600년이 넘게 전통을 이어온 사례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은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인류가 소중히 보전해야 할 문화유산으로서 유네스코 무형유산 대표 목록으로 선정되었다.

향어로를 들어서 주변 울창한 숲이 꽤 신성스럽다.


향대청은 종묘에 사용하는 향축폐(香祝幣)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祭享)에 나갈 헌관들이 대기하는 곳이다.


정전 동남쪽에 위치하여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임금님과 세자가 제사를 준비하는 재궁! 즉 어숙실이다.


어숙실 북쪽에는 왕이 머무는 어재실이 있다..



제수를 마련하던 곳 전사청!



전사청 내에서는 당일 신청 관람객들이 제례의식을 체험하고 있다.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축물은 정전이다. 좌우 길이가 총 101m로 우리나라의 단일 목조건물로는 가장 긴 건물이며 그 내부는 하나의 건물 안에 신실을 나누어 신주를 모시는 동당이실(同堂異室)로 되어 있다. 신실의 실과 실은 발을 드리워 분리하고 각 감실의 북쪽에는 신줄르 모신 신주장을 두고 좌우로 보장과 시책장을 두었으며 그 앞에는 신탑을 설치했다. 감실 사방에는 황색 내면장을 내려 생전의 침전과 같이 꾸몄고 감실의 전면에는 황색 외면장을 길게 쳤다. 신실에 모셔진 신주는 깊은 산에서 곧게 자란 밤나무를 구하여 윗면은 둥글고 아랫면이 네모난 직육면체로 만들고 혼이 깃들어 의지하시라는 의미로 가운데 상하좌우로 규(竅)라는 구멍을 내었다. 신주의 가운데는묘호와 시호, 존호, 휘호를 썼고, 왕의 신주에는 백저건을 왕비의 신주에는 청저건을 덮어두었다.
종묘에 모셔진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는 모두 83위로, 정전과 영녕전에 나누어 모셨다. 두 전각이 모두 매우 긴 一자형의 독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 지을 때 그 규모를 계획한 것이 아니라 모셔야 하는 신주가 늘어남에 따라 신실을 증축해 나갔기 때문이다.
명종 1년(1546년)에 정전은 11칸으로 증축되었는데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추후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정전 11칸을 다시 지었으니! 그리고 영조 2년(1726년)에 정전은 15칸으로 증축되고, 헌종 2년(1836년)에 다시금 19칸으로 증축되었다. 그럼으로써 정전의 19실에 역대 왕과 왕비 49분이 모셔졌다.




영녕전은 세종 3년(1421년)에 신실 6칸 규모로 건립되었다. 정전에 모셔야 할 신주가 늘어나면서 새로이 지은 전각이다.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영녕전은 10칸 규모로 중건되었다. 그리고 현종 8년(1667년) 영녕전을 12칸으로 증축했다. 그리고 헌종 2년(1836년) 영녕전은 16칸으로 다시금 증축되니! 그럼으로써 영녕전의 16실에 조천되신 왕과 왕비 34분이 모셔졌다.
종묘는 정전과 영녕전을 포함하여 제례를 지낼 때 필요한 몇몇 부속 전각만으로 이루어져, 전체적으로 전각 수가 많지 않고 구성과 배치가 단순하다. 신실을 꾸민 것 이외에는 전각에 어떤 장식도 하지 않았다. 이는 조상신의 영혼이 깃든 공간인 종묘의 존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함이다.
종묘 공간에 담긴 의미와 이를 수백 년간 엄격하게 지켜온 선조들의 뜻을 생각하면, 궁궐을 돌아볼 때와는 다른 숙연함이 전해진다.

1973년에 영녕전 16실에 의민황태자(영왕) 신주를 봉안했다. 1995년에는 종묘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기에 이른다. 2001년에는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 유네스코 무형유산 대표 목록으로 선정되었구요~
종묘에 모셔진 조선 왕의 신주는 모두 35위이다. 조선의 왕은 모두 27명인데, 어떻게 된 일일까? 조선 왕 가운데는 돌아가신 뒤에 왕으로 높여 모셔진 '추존 왕'이 있다.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렇게 추존된 왕이 9명, 왕위에 올랐으나 폐위되어 종묘에 모셔지지 않은 연산군과 광해군을 빼고,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영왕)까지 합하여 모두 왕의 신주 35위, 그리고 왕비 신주 48위가 종묘에 모셔져 있다.

제례악과 무(舞)를 준비하는 영녕전의 악공청!

영녕전과 정전 악공청을 지나며 정전 남신문도 지나 향어로에 이른다. 그리고 종묘를 나선다.
16시 30분.. 이로써 금번 서울 창덕궁과 낙서재 및 비원 그리고 궐내각사, 그리고 창경궁 등을 관람하고 종묘까지▶ 서울 고궁 여행을 마친다.

이제 많이 걸었으니! 명동까지 걷는 발걸음도 무겁고 몸까지 추워라~
명동에서 저녁식사를 위해 들어선 음식점에 앉자마자 민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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