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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에 관한 성경적 입장*
종교에 따라서 자살에 관한 태도는 상이하다.
이슬람교에서는 자살은 죄이지만 순교나 적을 향한 공격으로 자살하는 것은 죄로 보지 않는다.
유태교에서는 자살 동기가 허용될 수 있는 경우나 정신장애로 인한 것은 허용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베다 시대에는 자살을 종교적인 희생 의식으로 보았으며 우하니샤드 시대에는 죄악으로 간주하였다.
불교에서는 자살을 허용하지 않으나 승려들의 분신자살은 자신을 태움으로서 열반에 이으려는 의식으로 최고의 정신적 가치로 인정하였다.
유교에서는 천수를 누리는 것이 복이라 하여 자살이 인정되지 않지만 살신성인을 주장하여 참된 자아실현을 위해 자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인격은 하나의 인격체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창1:27, 2:7) 라고 하는 데에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자살에 대해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성서에서는 자살에 대한 확실한 단죄가 나타나 있지 않다. 또한 자살을 직접 금하거나 종용한 적이 없다. 때로는 공동선과 조국이나 민족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을 영예로 여기기도 하였다. 성경에는 자살이라는 말 자체는 언급되지는 않으나 자살행위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이 6차례나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가 자살에 대해서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성경이 그러한 사건에 대한 단순한 기록 외에 그 어떤 부연 적 설명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살에 대한 허용이나 묵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살에 대한 관한 기록이 적다는 것은 그만큼 자살이 억제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아히도벨과 유다의 경우에서 보듯 자살이 중대한 죄의 결과로 나타나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1) 성경에 나타난 자살 사례
가. 아비멜렉
사사기9:52-54에 (아비멜렉이 망대 앞에 이르러서 치며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그것을 불사르려 하더니 53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던져 그 두골을 깨뜨리니 54 아비멜렉이 자기의 병기 잡은 소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그가 여인에게 죽었다 할까 하노라 소년이 찌르매 그가 곧 죽은지라)
나오는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첩의 아들로서 이복형제 70명을 죽이고 세겜에서 왕이 되었으나 요담의 비판으로 세겜이 반기를 들자 도륙하고 데베스를 쳐부수다가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중상을 입게 되자 병기든 소년에게 명하여 자신의 자살을 돕게 하여 일어난 내용이다. - 죄 값의 죽음이다.
나. 삼손
사사기16장에 나오는 삼손은 단 지파 마노아의 아들로 태어나 나실 인으로서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어 사사가 되었으나 블레셋 여인을 취하고 후에 들릴라에게 유혹되어 힘을 잃고 블레셋의 포로가 되어 눈을 뽑히고 옥에 갇혀 지내다가 축제일에 집을 무너뜨려 원수인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음을 택하였다. 그러나 이 삼손의 죽음을 자살로 보지 않는다. 삼손은 자기 생명을 끊는데 그 행위의 초점과 목적을 두지 않았고 대적들을 소멸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견해이다. 결국 그것은 적군을 무찌르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용사의 장렬한 전사와도 같고 자식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드는 어머니의 죽음과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 사명 감당의 죽음이다.(사사기14:4, 16:28-30, 참고 - 요10:17-18)
삿14:4, 이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 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 하였더라
삿16:28-30,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 하옵나니 나를 생각 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 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29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30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다. 사울과 병기 든 자(2인)
삼상31장에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대 블레셋 전에서 중상을 입었다. 적군의 승리가 확실하게 되는 상황에서 할례 없는 이방인의 손에 모욕을 당하 바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자기 칼을 취하여 자살했다. 이튿날 블레셋 군인들이 사울의 목을 쳐서 승전 기념물로 취하고 그 시체는 성벽에 못 박았다. 후에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성벽에서 시체를 내리고 화장을 하게 되었다. 문둥이로 죽은 웃시야 왕이 열 왕의 묘실에 묻히지 못하고 불명예스런 매장을 당한 것처럼 사울은 화장이란 불명예스런 인생 퇴진을 한 것이다. 이렇듯 성경은 범죄 한 일생과 참혹한 최후라는 관점에서 사울의 죽음을 다룰 뿐 자살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 죄 값이다.
라. 아히도벨
삼하17장에 등장하는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을 배반하여 왕위 찬탈의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압살롬에게 모반 모략을 제공했던 장본인이었다. 후에 후새의 역 모략에 몰려서 자신의 모략이 수포로 돌아가자 아히도벨은 나귀를 타고 귀향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다윗의 모사인데 밧세바의 할아버지이다.(삼하11:3, 23:34)
-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은 다윗을 배반한 죄 값이다.(삼하7:11-17)
마. 시므리
왕상16장에 나오는 시므리는 북 왕조 이스라엘의 엘라 왕이 폭정을 가하자 쿠데타를 일으킨다. 엘라 왕이 술에 취해 대신들과 흥청거릴 때 시므리가 그를 쳐 죽였다. 시무리가 집권한 지 7일 만에 백성들이 시므리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어서 오므리를 등극시키고 시무리가 머물던 왕도를 포위하였다. 다급해진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죽었다. 성경은 시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행하고 범죄 함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자살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 죄 값이다(자기 살인)
바. 가룟 유다
신약의 기록에는 자살을 한 사람이 한사람으로 기록되어있다. 그것이 바로 마27장에 나오는 가룟 유다의 기록이다. 유다는 무죄한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 30에 판 후에 죄를 뉘우치고 은 30을 반환한 뒤 성전에서 나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범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는 스승을 팔아 받았던 돈을 반환했으나 여전히 죄책감으로 영혼이 괴로움에 빠지고 그는 자살이라는 선택을 한 것이다. 사도행전1:18절은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라고 처참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예수님을 배반한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나를 알 수가 있다.
- 죄 값이다.(자기 살인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경우도 탐욕과 배신이라는 죄가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가져왔는가하는 시각에서 기록되었을 뿐 자살 자체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성서 자체에서 자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찾기는 힘들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자살은 커다란 죄이다. 자살하는 자는 무조건 지옥에 간다.”라고 생각을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 원인을 찾아본다면 그것은 전통적으로 교회가 자살을 금지하고 자살에 대한 이해가 자살을 죄악으로 규정하는 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초기부터 로마인들의 자살에 관한 수용적 태도에 강하게 반대하여 자살을 금지하였다. 초대교회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견지해온 자살에 관한 태도는 분명하고도 비타협적인 거부이다.
2)자살에 관한 신학적 입장
어거스틴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직접계시를 받지 않는 한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은 ‘살인하지 말지니라.’의 제6계명을 범하는 살인 행위라 하였고 모든 경우의 자살을 거부하였으며 교회는 거듭되는 회의를 통해 자살을 죄로 정하고 금지하였다.
<본훼퍼>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궁극적인 판단에서 자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자살의 결단이 스스로의 정당화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정당화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권리와 함께 생명을 보존할 의무가 있다고 보았고 자살을 신앙의 결여로 이해하고 자살을 죄로 보았다.
그러나 본훼퍼 자신도 자살에 희생적인 측면이 있다고 보았는데 예를 들면 고칠 수 없는 질병으로 고생하는 노인이 다른 가족을 위해 목숨을 끊는 경우,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지 않기 위하여 자결하는 행위, 심지어는 명예가 훼손될 것이 두려워서 또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자살하는 경우에도 희생적인 요소가 있다고 보았다. 자살에 대한 본훼퍼의 결론은 희생적 자살이 윤리적으로는 긍정될 수 있지만 자기희생적인 동기가 강한 경우에도 생명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손에 의탁해야 할 것을 권하면서 신앙의 결여라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죄라고 결론짓는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살에 있어서 예외적인 경우를 인정하지 않았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생명의 시종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시간의 결정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에 자살은 하나님께 대한 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자연법과 사랑이라는 측면에서도 자살은 시인되지 않는다고 보았고, 정의에도 반대 된다고 보았다. 더구나 자살은 죄를 회개하여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기 때문에 치명적인 죄라고 이해했다. (칼 바르트)는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 위탁받은 것이며 인간은 이 생명에 대한 청지기에 불과하다고 본다. 생명이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오히려 때로는 무조건적으로 생명의 연장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고 정의나 자유의 연고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시인된다면 자살에 대한용서도 긍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용서라는 은총의 조명 밑에서도 자살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살하는 예외가 있는데 바르트는 삼손의 죽음을 그렇게 보았다. 자살의 가능성이 세 가지 토대에서 제시될 수 있는데
첫째로 인간에게 자유가 있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주권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요,
둘째로는 육체적인 생명의 연장만이 최고의 선은 아닌 고로 보다 높은 목적을 위하여 자살이 선이 될 수 있으면
셋째로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 있다면 그러한 봉사를 위하여 생명을 스스로 포기함이 긍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에 대하여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며 자살은 모두 죄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예외와 긍정을 한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한 자살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에 의해 명령된 순교의 행위가 있다는 것이다.
3)자살에 관한 윤리적 입장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창1:27, 2:7) 그러므로 신성하며 존엄한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이 고귀한 생명을 지켜야 한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마땅히 보전되어야 할 고귀한 것이며 영원토록 지탱되어야 한다. 생명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본성상 생명으로서 그의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는 분이시다. 생명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소유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한 사람이 자기 생명을 파괴할 권리도 없고 생명이 있는 다른 사람을 죽일 권리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것을 요구하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생명을 보호하시며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을 귀하게 여기길 원하신다. 사람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으로 여겨 그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자체를 존엄하게 여기는 자세는 기독교인의 삶과 죽음에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생각하는 기본토대가 되어야 한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책임감 있는 삶으로 부르심이다. 자살은 자기가 부여받은 생명을 스스로 파괴하는 행위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것을 취하는 모든 행위는 살인을 금하는 십계명을 범하는 일이다. 남을 죽이는 일만이 살인이 아니라 스스로 취하여 생명을 끊는 자살도 하나님의 주권을 명백히 침해하는 것이다.
특히 자살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말하는 사랑의 첫째 조건인 자기 사랑조차 포기하는 매우 죄악된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파기하는 행위이다. 자신의 생명을 사랑할 줄 아는 책임적인 부분들도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신성한 것이고 존엄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생명을 경외하여야 한다. 이 말은 생명을 우상화하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에 쓰라는 것이다. 더욱이 믿는 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생명인 영생을 얻게 되었으니 그 생명이 주님의 것임을 알고 사나 죽으나(롬14:7-8) 그를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생명은 단 일회적인 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의 귀중함을 깨닫고 그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들을 쏟아야 할 것이다.
결론: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생명까지)
욥기41: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인간의 생명포함)
롬11:36 이는 만물(생명)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 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생명)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 하느뇨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시편36:9에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시편42:8에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딤전6:13에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마10:29) - 사람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는 날을 알 수 없고 죽는 날을 결정할 수도 없습니다.
요1:4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그 말씀으로 생명을 창조하심
요6:63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자살은 자기 살인입니다.
욥기14:1-5 사람의 수명의 날, 달수도 하나님께서 정하심
신30: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노니
신30:19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신3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렘21:8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모세가 기록한 시편90:10에도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살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끊는 것인데 자기 살인입니다. 생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맘대로 생명을 끊는 것이 아닙니다.(살인)
사무엘상2:6에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도다.
롬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 로라. -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매인 몸입니다. 그래서 자살은 살인입니다.
인간의 자아나 본성은 타락한 본성입니다.(유1:10) 우리들은 아담의 타락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왔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자살은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는 악질적인 살인입니다. - 신앙생활을 한다 해도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삶입니다.(몇 년 전에 자살한 행복전도사 최진실 집사, 최윤희 집사)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적으로 엄청난 고난을 당했어도 자살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우리나라에서는 주기철, 손양원 목사) 2천 년 전 로마 원형경기장에서 화형을 당하고 짐승의 먹이가 되어도 자살을 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요10:17-18을 잘못 해석해서 일부 멍청한 목사들이 예수가 자살했다고 하는 작자들도 있다.(영안이 막힌 교수, 목사들)
요10: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 주님의 십자가 사명 감당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의 주인은 사람(본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믿음의 조상들이 자살해서 죽은 조상들이 없다. 자살이 하나님의 허락은 아니다.
자연사 인데 예수님은 이렇다 할 성취도, 역사에 남을 만한 저서도, 건축도, 활동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 가지, 생명에 대한 사랑을 남겼습니다. 골고다 언덕 높이 달려 온 인류를 위해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다 주셨습니다. 이것이 곧 생명을 사랑한 예수님의 흔적이셨습니다.
벧전1:9 에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자살하면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억만금이 있다 해도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거나 좌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과 삶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대상29:11-12).
대상29:11-12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생명포함)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시간’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입니다, ‘안락’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입니다, ‘충족’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어느 누구도 생명을 해할 능력이나 조건을 주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에 대해서는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자살을 하면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인정하지 않으며,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부정하는 불신앙의 길이기에 지옥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받은 이 귀한 생명을 죽이는 것은 자살이든 타살이든 살인죄입니다. 출20:13에 살인하지 말찌니라. 자살을 하면 살인죄이고 회개할 기회가 없습니다. 자살을 하면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인정하지 않으며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부정하는 불신앙의 길이기에 지옥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입각한 생명 관을 정립해야 합니다.
첫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둘째,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므로 인간에게는 자살할 권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자살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패역한 행위인 것입니다.
셋째, 사람의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므로 거룩히 지켜서 영생의 기업을 누려 야 합니다.(고전3:16-17, 6:19-20)
*사람이란 본래 하나님께서 친히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령의 존재로 만드셨습니다.(창2:7) 그래서 생명은 하나님 외에는 만질 수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만이 관계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