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 尹씨 약사
예부터 종중에 전해오는 기록에 따르면 신라 진성왕 칠년(서기 892)추석날 파주군 파평면 눌노리에 있는 용연에 옥함이 떠있는 것을 부근에 사는 노파가 건져서 얼어보니 옥색이 찬란한 새털에 쌓인 옥동자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그 어린아기는 좌우 어깨에 일원을 상징하는 붉은 사마귀가 있고 발바닥에는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일곱개의 검은 점이 있으며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비늘이 있어서 그 기상이 비범했다고 한다.그 노파는 아기를 자기집으로 안고가서 정성드려 양육했는데 그 어린이가 자라서 우리 파평윤씨의 시조가 되셨다.그리고 그 손바닥에는 尹자와 같은 형태의 금이 있으므로 윤씨로 성을 달았다고 한다.
이 시조의 탄생설에 대해서는 의문도 있겠으나 신라의 朴혁거세왕,대가야국의 金수로와,제주도의 고,양,부등 삼성의 시조탄생설등 모두가 기적이었던 설화가 있지만 우리 시조의 탄강전설도 하나의 기적 이었다고 해석한다.
시조(윤신달)깨서는 문무를 이수하시면서 자라서 일찍부터 조정에 등용되셨다가 왕건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합에 크게 공을 세우고 벽상삼한익찬공신이 되시어 삼중대광태사 라는 정일품의직에 계시었다.그후 왕건태조가 죽고 2세왕 혜종이 등극하면서 신라유민을 잘 다스리기 위하여 공신중에서 가장 신뢰하는 태사공을 경주대도독부의 부윤으로 제수하였던 것이다. 태사공 께서는 경주대도독부에 부임하셔서 어지신 덕으로 백성을 다스렸기 때문에 30년간을 유임하시다가 춘추80세에 서거하시어 경주에서 가까운 영일군 기계면 봉계리에 안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뒤
2세공신공
3세복야공
4세문정공
5세 문숙공 윤관대원군에 이르러 크게 번창되기 시작하였다.
이분이 바로 예종2년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정벌을 하신 윤관장군님 이시다.서소문공원에는 동상이 건립되어 있으며 북수원에 예장된 묘소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문숙공(윤관)의 아드님은 7형제가 계셨는데 맏아드님 언인의 후손은 남원 및 함안윤씨가 되었고.둘째아드님 언순및 일곱째 아드님 언민의 후손은 구보에 수록되지 않았으며 셋째및넷째 아드님은 승려가 되었고 다섯째 아드님 언식의 후손은 덕산윤씨가 되었으며 여섯째 아드님 문강공 언이의 후손이 파평본을 계승하여 백만대성으로 번영되고 있다.
문강공의 맏아드님 문정공 인첨이 우리 문정공파의 중시조로서 파평파의 종손이시다.
문강공의 셋째 아드님 자고의 후손은 신안윤씨가 되었고 다섯째 아드님 돈신의 후손은 크게 번창하여 대언공파,양간공파,전의공파,소정공파,판도공파,원평군파,소부공파,태위공파등등 여러파로 갈라져 있다.
문강공의 둘째 아드님 자양과 여섯째 아드님 돈의 두분은 후손이 없었으며 넷째 아드님 효돈은 승려가 되었고 칠자는 어려서 요사하였다.
문강공의 맏아드님이신 문정공은 장자 종약,이자 종해,종의 종양등 아드님4형제가 있엇는데 맏아드님 상서공 종약의 후손은 평안남도와 함경도에 크게 번영되어 있고 이자 예성공 종해의 후손은 중주지방에 세거하고 있으며 종의 및 종양두분은 후손이 없었다.
우리 파평윤씨는 고려시대에도 크게 번영되어 와후가 한분계셨고 상신과 공신도 많았거니와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왕후가 오위,상신이 11위,공신이 16위 과거급제가 340위 옥당이 88위등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문벌이 사서와 보단에 빛나고 있다.
그와같이 우리 문중이 번영하는 것은 시조로부터 역대 선조님들이 어진 덕을 쌓으신 은덕이며 한편으로는 시조로부터 일천여년의 유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숭조,목종의 순수한 전통을 지켜온 결과라고 생각한다.따라서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은 열선조께서 쌓으신 적선의 정신을 터측하며 예부터 전해오는 빛나는 전통을 변함없이 준수하여 종문이 더욱 번영하도록 분발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시조-2세(공신공)-3세(복야공)-4세(문정공)-5세(문숙공윤관)-6세 문숙공윤관의여석째아드님(문강공언이)7세 문강공의 맏아들(문정공 인첨)우리 문정공파의 중시조로서 파평파의 종손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