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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시편 139편 6-8절, 90편 2절
무한하신 하나님
계속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해 살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필 내용은 하나님의 무한성에 관해서입니다. 무한성이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로서는 수(數), 양(量), 공간, 시간 따위에 제한이나 한계가 없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무한성이라고 할 때는 공간과 시간적인 측면에서 비교가 되는데, 개혁자 가운데 토마스 카트라이트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무한성과 관련해 이렇게 말합니다(기독교 교리 강론).
[문] 하나님의 무한성에 대해서 당신은 무엇을 말하겠는가?
[답] 그것은 공간에서 광대함이고, 또한 시간에서 영원함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무한성과 관련해 우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장소와 관련해 설명할 수 있는 그의 광대하심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과 관련해 설명할 수 있는 그의 영원하심입니다. 그러나 이런 장소와 시간과 함께 무엇까지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을 다 측량할 수 없다, 모든 것에 대해서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라고 할 때 이미 무한하다는 말 자체가 측량할 수 없는 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으로서 인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39편과 90편을 통해 크게 세 가지로 나눠 하나님의 무한성이라는 걸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측량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생각할 것이고, 두 번째는 장소와 관련해 그의 광대하심에 대한 것이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시간과 관련해 그의 영원하심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6절을 보시면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왜 이런 말씀이 나왔는가? 1절 이하 5절을 보시면 시편 기자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을 잘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을 잘 알고 계시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펴보시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 즉 교회를 향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관심이 교회를 향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잘 아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5절 마지막에는 안수하셨다고 말씀하시는데, 단순히 관심의 대상만이 아니라 그런 관심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 보호하시며 친히 붙드시는 역사로 있다는 것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시편 기자는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듯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지식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지식에 있어서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수능 1등을 한 사람들도, 또한 박사 과정을 마친 사람들도, 심지어 전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석학이라 할지라도 다 지식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자기 분야에서 최고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그 분야에서조차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든 지식을 가질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욥기를 보면 세 친구와의 논쟁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친히 욥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꽤 길기 때문에 다 읽을 수는 없고 앞부분만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욥기 38장 1절 이하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욥38:1-11) 이런 물음이 어디까지 계속해서 되느냐? 39장까지 계속됩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아느냐?”고 묻지만 욥 편에서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물으신다면 우리 역시 대답하지 못할 내용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 알고 계시는데,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시느냐? 나 자신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아니 모르는 부분이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과 관련해서 몇 주 동안 계속해서 살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신이시다. 그때 우리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것까지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으로 계신다. 그러나 배워서 안다고 할 때도 여전히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인간이 알 수 있는가? 아무리 설명하고 설명해도 다 알 수 없습니다.
욥기 11장으로 가시면 나아마 사람 소발이 이런 말을 합니다. 7절 말씀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그리고 곧바로 나오는 것이 오늘 본문처럼 장소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말합니다.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욥11:8-9) 하나님의 무한하심이란 무한하다는 말 자체로 이미 측량할 수 없다,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11장 33절도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얼마나 풍성한지, 그의 판단을 헤아릴 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없다고 그럽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 달리 표현하자면 무한함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인 겁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 앞에 우리가 가장 먼저 교훈 받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나아가 그분의 일하심에 대하여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히 모든 일이 그분의 뜻을 따라 일어난다고 할 때, 그리고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할 때 더더욱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도서 5장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쉽게 이해하자면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고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거나 급한 마음으로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보기에 좋지 못한 듯 보이는 일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는 반드시 우리의 유익을 위한 일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 일에 대해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쉽게 원망하고 불평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입을 함부로 여는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일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좋은 일처럼 보이는 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우리에게 유익이란 보장도 없습니다. 히스기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 따르면 분명 그가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15년이라는 생명을 연장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그에게 유익이 되었는가? 그렇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그가 나음으로 인하여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5년 생명이 연장되는 동안 히스기야 다음으로 왕이 된 므낫세라는 인물을 낳았는데, 그는 어떤 왕인가? 적어도 남유다 왕들 가운데서는 가장 악한 왕이라고 할 만한 그런 왕이었습니다. 지금 현재 좋은 것처럼 보이는 일이 나중에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걸 분명히 보여주는 예인 것입니다.
물론 다양한 상황들이 있을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분의 일하심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어선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모든 일 가운데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따라 가는 내용과 방향으로만 있어야 합니다. 전도서 3장 말씀으로 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 11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앞선 말씀에서 “범사에 기한이 있고 찬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하면서 인생의 희노애락을 쭉 말하는데, 그런 일에 대하여 우리가 측량할 수 있게 하셨는가? 없게 하셨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하셨는가? 14절에 보면 이 목적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그러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는 삶이란 하나님만을 경외함으로 따라 가는 삶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안에는 더 많은 실천적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난을 당한다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것이고, 즐거워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약5:13). 또한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잠3:6). 율법에서 명하신 것처럼 하나님만 사랑해야 하고, 또한 그 사랑이 이웃 사랑의 정신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더 말씀은 드리지 않겠지만 분명한 것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그렇게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함부로 입을 여는 자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기억하셔야 합니다. 야고보가 가르친 것처럼 “주의 뜻이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리라”(약4:14)가 우리의 자리라는 걸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은 공간과 비교하여 하나님의 광대하심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걸 보게 됩니다. 7절과 8절을 보시면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을 수 있는 곳이 있는가? 아무데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의 경우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 있는 속성인데, 이 속성에 의해서 그분이 모든 것을 포함하시고, 지금 상상하거나 혹은 상상될 수 있는 어떤 것에 의해서 포함되지 않으신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장소에 현재하신다. 그분은 크기에서 무한하신 분으로서, 어떤 한정된 장소의 한계로서 제한된다든가 혹은 한계를 정한다든가 하는 것이 불가능한 분이시다(시139:7, 욥11:7, 사66:1, 왕상8:27, 사40:12).”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곳에 동시에 충만히 계시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모든 곳에 동시에 충만히 계시기 때문에 이것도 하나님, 저것도 하나님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소위 범신론적인 사고처럼 모든 곳에 충만히 계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란 소리는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세계와 구별되며, 그것과 동일시 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전 존재와 권능으로 그 창조물의 각 부분에 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소요리문답 공과 3과 참조).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을 떠나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피하여 숨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혹 우리가 빛의 속도로 날아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벗어날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눈을 피해 비밀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늘, 아니 그것보다 더 광대한 우주로 나간다 할지라도, 바다, 아니 그것보다 더 깊은 지금의 중심부까지 갈 수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 23장 24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특히 이 말씀 뒤에 이런 말씀을 따라 온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그들이 서로 꿈 꾼 것을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렘23:25-27)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계시의 방식으로 있는 꿈을 꾸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 것이 맞는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들의 말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그들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린 것처럼 지금 하나님을 잊게 만드는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는데,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순 없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인간의 마음까지도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보면 여전히 동일한 문제 가운데 있는 것이 교회의 형편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입니다.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고, 주의 이름으로 말씀으로 전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주님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면 과연 바알을 섬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감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방식이 아닌 것으로 예배하는 것,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모든 설교들,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자유의지를 높이는 것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이라 말씀드립니다. 달리 표현하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그것은 바알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잊어버린 그들 조상들의 길과 전혀 다르지 않는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무한하신 하나님, 광대하신 하나님은 모든 곳에 충만히 계시는 분이시며, 그런 분 앞에 피하여 숨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교훈 받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삶이 그분의 면전에 있는 것처럼 행해야 합니다. 그것도 외적으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까지도 아시기 때문에 진심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살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라틴어인데 ‘코람데오’(Coram Deo)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으로 가시면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5절과 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6절에서 1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구제나 기도나 금식이나 그 외 신앙으로 말미암은 모든 행위가 누구 앞에서만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느냐? 하나님 앞에서만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했을 때 오늘 우리가 살피고 있는 내용은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장소와 관련해 광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심지어 우리의 숨겨진 마음까지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떠냐? 겉으로 보고 판단할 수는 있지만, 마음을 알 수는 없습니다. 사람 앞에 행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자기 마음을 속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속일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계속해서 살핀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무엇으로 설명하는가? 하나님은 아버지요, 우리는 그의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5장 마지막 절에 보면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바로 이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아들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온전케 되기 위해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 가운데는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케 되는 거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케 될 수 있는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그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코람데오’라는 말처럼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가 살핀 시편 90편 2절로 가시면 시간관 비교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대해 알려주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여러분,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있기 전이란 무(無), 어떤 것도 있지 않는 상태입니다. 장소도 없고, 시간이라는 개념도 없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은 계시더란 겁니다. 이미 영원전부터 존재하시는 분, 그리고 영원토록 존재하실 수 있는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이 속성은 그분이 처음과 마지막이시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준다(계1:8,11, 사44:6, 시90:2, 딤전1:17이하).”
여러분, 하나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시간의 한계를 초월해 계십니다. 순간의 연속도 없이 존재하시는 영원한 분이십니다. 욥기 36장 2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의 햇수를 헤아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년 수를 계산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계실 분이십니다(계1:8).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디모데전서에서는 하나님에게만 썩지 아니함과 죽지 아니함이 있다(딤전1:17, 6:16)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어떻습니까? 썩고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썩음과 죽음 자체가 없습니다. 생명만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생명은 누구에게만 있는가? 영원하신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소요리문답 공과 3과 참조).
여러분, 지금 우리가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계시기 때문임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둬 가고자 하시면 누구도 예외 없이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이하의 말씀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편 90편 3절과 4절입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하나님께는 천 년이 마치 어제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그러나 인생은 어떤가? 그렇지 않습니다. 공간 안에서 살고, 시간 안에서 삽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도 하나님께서 불러 가시면 끝입니다. 티끌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티끌로 돌아갈 뿐입니다. 시편 90편 5절과 6절에서는 이렇게 말할 정도입니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과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쉽게 말하자면 인생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어 마르는 꽃과 같습니다. 인생무상이라는 말처럼 인생이라는 것이 매우 덧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실질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지만 인간 스스로 그 생명을 마치 덧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던 겁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편 90편 7절 이하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아는 말씀이 나옵니다. 10절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그러나 이런 인생들 가운데도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로 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누구를 보내셨느냐? 하나님의 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런 은총 가운데 있는 자들인 겁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게 하신 자들! 그래서 우리를 거듭난 자, 중생한 자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한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사실은 영원한 생명이 그분께만 있다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물론 성경은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의 생명이 이후 영원을 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영원한 벌로서의 영생이기에 그것을 영생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는 걸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영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때문에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는 반드시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삶을 준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다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한 순간일 뿐입니다. 시편 90편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인생이 길어봐야 70, 강건하면 80입니다. 오늘날 의학의 기술이 발전해서 인생의 연수가 길어졌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러가고자 하시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생명을 연장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때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나그네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이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이곳은 잠시 살다가 이별할 세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셔야 합니다. 실제로 성경에 기록된 조상들의 삶이 그러했다고 증거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과 14절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특히 구약 백성들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서 내다보는 방식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다고 합니다. 믿음을 따라 살았고, 믿음으로 따라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마지막으로 모든 말씀을 다 우리에게 일러 주셨습니다. 감추인 것이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 믿음으로 살기보다는 믿음과 상관없이 살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리 마음대로, 우리 소견에 옳은대로, 또한 이 세상의 방법대로만 살아가려고 하는 모습으로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모든 것인 양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을 위해 준비하고 계시다는 걸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이 땅을 사는 이유는 단지 이 땅에서만 살기 위한 목적으로 있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영원을 사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유한은 무한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성만찬과 관련해서 나온 말이지만, 오늘 우리가 살핀 말씀과 함께 이해하자면 유한한 인생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무한하시다고 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광대하시며,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측량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하여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피하여 숨을 수 없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은 마음조차 감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으로서 택한 백성들의 영원을 주기시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새생명을 단지 이 땅이 모든 것인 양 살아서는 안 되고,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자로서 이 땅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 목적으로 거기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부디 이런 인생을 사셔서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성도가 되도록 더욱 선한 열심을 품는 모든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