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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탕 - 북방 캠패인의 진행도>
1) 덴마크
바이킹의 후예 중 하나로서 12세기에 이르러 강력한 군사적, 상업적 세력으로 성장한 덴마크 왕국은 발트해 동부 지역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방 십자군이 설파되기 이전에도 덴마크 함대는 1170년대를 통틀어 뤼벡과 그단스크(= 단찌히, Danzig) 사이의 포메라니아 해안을 지속적으로 침공하여 1186년에 정복을 완료하였고 1191년과 1202년에는 핀란드를, 1210년에는 프러시아를 공격했습니다.
한편 이교도 에스토니아 인과 쿠르 인들의 해적 활동은 발트해의 상업활동을 위협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덴마크 함대는 1170년, 1194년, 1197년에 에스토니아를 공격하였고, 1206년에는 덴마크 왕 "승리의 발데마르 2세(Valdemar II the Victorious)"의 지휘 하에 에스토니아 북서부의 외젤 섬(Ösel =사레마Saaremaa)을 점령합니다. 덴마크는 정복된 섬 주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요새를 건설하였으나 정작 요새가 완공되자 주둔하고 싶어하는 지원자가 없어 요새를 불태우고 떠나고 맙니다.
덴마크의 군사 활동에 특별히 종교적인 동기가 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으나, 이 외젤 섬에 대한 공격은 이교도에 대한 십자군 활동으로 간주되었으니 1209년 교황 이노센트 3세는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에게 서한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격려하였습니다.
‘이교신앙의 그릇됨을 뿌리뽑고 그리스도의 신앙의 경계를 확산하기 위하여… 이 전쟁에서 적극적인 그리스도의 기사답게 용감하고 맹렬하게 싸울지어다… (to root out the error of paganism and spread the bounds of the Christian faith… Fight in this battle of the war bravely and strongly like an active knight of Christ…)”
이와 더불어 이노센트 3세는 발데마르 2세의 군사 활동에 대해 “그토록 성스러운 순례의 여정” 이라 평하면서 십자군에 대해 주어지는 면죄권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교황의 지지는 앞으로 발데마르 2세로 하여금 당시 리보니아에서 펼쳐지고 있는 일련의 십자군 활동에 참여하도록 부추긴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실은 거의 10년이나 지난 1219년이 되어서야 덴마크 왕의 북부 에스토니아 침공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북부 에스토니아의 해안>
1219년, 왕이 이끄는 대규모의 덴마크 원정군은 북부 에스토니아의 린다니쎄(Lyndanisse, 현재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Tallin)에 상륙하여 원주민의 거점인 목조성채를 점령합니다. 그러자 6월 15일, 주변의 에스토니아 부족들이 몰려와 덴마크 군을 기습하였고, 불의의 기습을 당한 덴마크 군대는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전투는 덴마크의 동맹군이었던 뤼겐 족의 왕 비트슬라프 1세(Vitslav I)가 군대를 재정비 한 후 에스토니아 인들을 몰아내는 것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날의 전투가 극에 달한 순간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이 하늘에서 떨어졌고 무질서한 덴마크 군대에 사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 깃발은 덴마크 국기(Dannebrog)의 기원이 되었고, 린다니쎄 전투가 벌어진 날은 현대 덴마크에서 “국기의 날”이라 하여 국경일로 경축되고 있다고 합니다.
<덴마크 국기>
에스토니아에서의 덴마크 세력의 개입은, 빌랸디(Viljandi) 전투의 승리 후 에스토니아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독일 세력과 필연적으로 충돌을 빚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발트해의 제해권은 덴마크 함대가 장악하고 있었고, 발데마르 2세는 이것을 이용하여 당시 발트해 최대의 교역 거점이었던 북 독일의 항구도시인 뤼베크의 교역을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독일측과 덴마크 왕국은 에스토니아 분할에 합의하여, 1220년 덴마크 왕은 검의 형제단이 이미 정복한 남부 에스토니아 지역의 독일 소유권에 동의하였고, 독일 측의 알베르트 주교는 북 에스토니아의 덴마크 소유권에 동의하였습니다.
이후 1227년 분쟁이 재발하여 리보니아 검의 형제단은 덴마크 령 에스토니아 전체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스텐스비(Stensby) 협정에 의해 구 덴마크령 에스토니아의 예르비아(Jerwia), 하리아(Harria), 비로니아(Vironia) 중 하리아와 비로니아를 1238년에 덴마크로 반환하고 기사단은 예르비아 만을 소유하게 됩니다.
1219년 이래 덴마크 령 에스토니아의 수도는 린다니쎄였으며 과거 원주민의 목조 성채는 강력한 석조 성채로 재건되었습니다. 1220년과 1223년 사이에 에스토니아 인들이 이 성채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독일계 정착민들이 유입되어 북부 에스토니아 일대의 주요 교역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탈린(=린다니쎄)의 성채. Steve Jurvetson 촬영>
한편으로는 동쪽의 슬라브 족과 접한 비로니아 지방의 베젠베르크(Wesenberg, = 라크베레Rakvere), 나르바(Narva)에서도 요새가 건설되어 방어선을 형성하였습니다. 앞선 게시물에서도 말했다시피, 성채를 쌓는 전술은 숫적으로 우세하지만 전술 능력이 떨어지는 원주민에게 대항하는 효율적인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이 지역에서 덴마크의 통치는 그리 강하지 않았으며 덴마크 군대는 가끔씩만 파견되었습니다. 북부 에스토니아는 명목상 덴마크 령이었으나, 실제로는 덴마크 보다는 독일 색이 더 짙었습니다. 이 지역의 방위는 주로 덴마크 왕에게서 그 지역의 봉토를 하사받은 지역 호족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 대부분은 베스트팔렌에서 온 독일인이었으며, 여기에는 소수의 에스토니아 인 장로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후 덴마크는 1240년부터 1242년까지 노브고로드와 전쟁에 돌입하여 보티아(Votia)로 진출하고자 했으나 성공하지 못합니다.
<라크베레(=베젠베르크)의 옛 성채>
2) 스웨덴
에스토니아에 대한 주변 세력의 급격한 세력 확장에 자극을 받은 스웨덴 역시 북부 해안 지역에 대한 정복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독일과 덴마크와는 달리, 스웨덴의 에스토니아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1220년 스웨덴 왕 요한 스베르케르손 (Johan Sverkersson)이 이끄는 스웨덴 군대는 에스토니아 북서부 해안에 상륙하여 리훌라(Lihula)를 점령하고 작은 군사 주둔지를 설치한 후, 왕가의 일족인 비엘보(Bjelbo) 가문의 “귀머거리” 샤를(Charles)과 린쾨핑(Linköping)의 주교인 카를 망누손(Karl Magnusson), 그리고 소수의 수비병력을 남기고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8일, 외젤(= 사레마) 섬 원주민을 비롯한 주변 에스토니아 부족들이 리훌라로 쳐들어와 스웨덴 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고, 이 전투에서 스웨덴 군은 사령관인 샤를과 주교, 그리고 500여명의 병사가 몰살하는 참패를 당하였으며, 단지 소수의 생존자 만이 혈로를 뚫고 덴마크가 지배하고 있는 린다니쎄(=탈린)으로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이 참패 이후 스웨덴인은 16세기가 될 때까지 소수의 정착지를 세우는 것 외에는 에스토니아 정세에 거의 관여할 수 없었습니다. 스웨덴 인들은 핀란드에서 러시아 인들과 분쟁에 돌입하였고, 덴마크와는 달리 스웨덴 본국의 정세 또한 명확한 구심점이 없이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으므로 여력이 없었습니다.
3) 독일
<사레마(=외젤)섬의 풍경>
덴마크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에스토니아 지역에서 최후까지 정복되지 않은 채 살아남은 외젤 섬은 결국 독일 십자군의 몫이 되었습니다. 덴마크 인들이 섬 주민들까지 강제 동원하여 건축한 멀쩡한 요새를 허무하게 불태우고 떠나가 버린 후에 외젤 섬의 에스토니아 인들은 1218년~1219년의 겨울 사이에 동결된 이르베 해협(Irbe strait)을 건너온 리투아니아 인들의 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외젤 섬의 주민들은 일찍이 쿠르 인(Couronians)들과 함께 발트해의 해적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재건된 외젤 섬의 선박들은 덴마크와 스웨덴 인들의 함대를 지속적으로 괴롭혔습니다.
<외젤섬의 위치 - 중간의 타원형의 섬에 사레마(Saaremaa)라고 적혀 있는 섬이다. 섬 남쪽의 길쭉한 반도 밑으로 이르베 해협(Irbe Strait)가 보인다.>
결국 1226년~1227년 겨울이 되자, 교황의 특사였던 모데나의 성직자인 윌리엄(William of Modena)은 일련의 독일 십자군을 거느리고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 외젤 섬을 공격하여 에스토니아 인들을 격파하였습니다. 외젤 섬 공략에 성공하자 그의 군대는 남쪽으로 발길을 돌려, 외젤 섬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해상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라트비아 서부 해안지대의 쿠르 족과, 그때까지만 해도 독일인들의 동맹자였던 드비나 강 남쪽의 세미갈 족(Semigallians)을 공격합니다. 이 부족들은 완전히 제압되지 않았으며, 쿠르 족은 1266년까지, 세미갈 족은 1290년까지 저항을 그치지 않게 됩니다.
<재탕 - 발트지역의 민족 맵>
1228년, 일단 표면적으로나마 리보니아는 기독교 세력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교황의 특사인 윌리엄의 중재 하에 최종적으로 5개의 독일 세력에 의해 분할된 리보니아 연방(Livonian Confederation)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리보니아 연방 - 1260년 지도로 아직 본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전투지역이 표시되어 있다.>
독일령 리보니아의 2/3는 리보니아 기사단(Livonian Order, = 검의 형제단, 검우기사단, 검의 형제 기사단)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그 중심지는 펠린(Fellin) 이었습니다. 펠린은 과거 빌랸디(Viljandi)라고 불렸었으며, 이 곳은 10년 전 사칼라의 족장 렘비투가 그의 전사들과 함께 리보니아 검의 형제단과 싸워 쓰러진 곳이기도 했습니다.
<기사단의 문장>
리보니아 교회는 발트 십자군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리보니아 교회의 수장인 알베르트 폰 북스게브덴(Albert von Buxhoeveden)주교는 공로를 인정받아 이미 1225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7세로부터 “공작(Prince)”의 칭호를 수여 받았으며, 리보니아 최대의 도시인 리가 시를 거점으로 리가 대주교구(Archbishopric of Riga)의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리가 시의 문장>
도르팟 주교구는(Bishopric of Dorpat) 알베르트 대주교의 형제인 헤르만 폰 북스게브덴(Hermann von Buxhoeveden)에 의해 1225년 창설되었으며 그 중심지는 도르팟(Dorpat)입니다. 도르팟은 한때 타르바타라고도 불렸으며, 이 곳은 과거 루릭 왕족이었던 뱌치코가 그의 드루지나 전사들과 에스토니아 동맹군과 함께 항복을 거부하고 옥쇄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 곳은 노브고로드의 접경지대 이기도 하며, 나중에 알렉산드르 네프스키(Alexandr Nevski)로 유명해질 페이푸스 호수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타르투(=도르팟)의 옛 성당유적>
외젤-비크 주교구(Bishopric of Ösel-Wiek)는 앞에서도 언급했었던 문제의 외젤 섬과 에스토니아의 북서해안을 관할하였습니다. 중심지는 아렌스부르크(Arensburg)입니다.
<쿠레사레(Kuresaare, = 아렌스부르크) 성채>
마지막으로 쿠를란트 주교구(Bishopric of Courland)는 쿠르 족의 땅에 세워졌으며, 그 중심지는 필테네(Piltene, =필텐)입니다.
<필테네의 문장>
북방 지역은 앞으로도 일련의 소요와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지만 리보니아 연방 체제하에서 기독교화의 대세는 피할 수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발트지역의 이교도는 많이 남아 있었고, 그들은 아직 남쪽에 살고 있었습니다.
완강한 전사인 리투아니아 인들은 영민한 지도자의 등장으로 하나의 국가로 통합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남쪽의 프루스 인들(Prussians)은 여전히 분열되어 있었으나 그들의 활발한 공격성은 폴란드의 마조프셰(Mazowsze, = 마조비아) 공(公) 콘라드의 근심걱정을 늘리고 있었습니다.
북방십자군의 첫 전환점이 다가올 때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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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를란트 주교구의 수도를 빈다우(Windau)로 썼었는데 다시 확인해 보니 필테네 였군요. 정정합니다.
첫댓글 훌륭한 글입니다
희안하게 북방십자군은 자료가적죠;; 잘 봤습니다~~
영민한 지도자면 민다우가스일테고... 이제 튜튼 기사단과 리투아니아를 통일할 민다우가스가 나올 때군요.
종교로 인해 벌어지는 전쟁범죄만큼 추잡한 것도 없을 거에요. 감사합니다.^^
저 쿠레사레 성채는 현존하는 건물인가요? 그림 같은 경치군요.
쿠레사레 성채는 예전에 주교가 거주하던 곳이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답니다.
지도의 출저가 어딘지 알고 싶네요........... 저장이 안돼서요.
맨 위의 지도는 구글맵을 가지고 만든 것이고, 중간중간 퀄리티가 높은 지도는 출처가 위키피디아입니다. 저장이 안되는건 복사금지 체크를 해놨기 때문이에요.예전에 모 익명 커뮤니티에 글을 몇개 쓴게 도용당한 적이 좀 있어서...
잘 봤습니다~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1225년이면 하인리히 7세가 아니라 프리드리히 2세입니다만;
프리드리히가 맞지요 프리드리히는 군주론의 주요 인물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