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 元鎭 作-
菊花
秋叢繞舍似陶家(추총요사사도가)
便繞籬邊日漸斜(편요리변일점사)
不是花中偏愛菊(불시화중편애국)
此花開盡更無花(차화개진경무화)
소담한 국화는 도연명의 집처럼 집안에 둘러서
울타리 가를 둘러 싸니 해는 점점 기울도다
꽃 중에도 유독히 국화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이 꽃이 다 피고 나면 다시
국화(菊花)
秋叢繞舍似陶家(추총요사사도가)
도연명 집과 같이 가을 국화송이 둘러선 집
遍繞籬邊日漸斜(편요리변일점사)
해는 담장 옆 빼곡한 국화 위에 기우네
不是花中偏愛菊(불시화중편애국)
이 꽃만 편애하는 것은 아니지만
此花開盡更無花(차화개진갱무화)
이 꽃이 지고 나면 또 무슨 꽃이 있으리
국화는 흔히 은자(隱者)의 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동진(東晋)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에게서 연유한 것이다.
도연명(陶淵明)은 세상을 등지고 산 인물은 아니지만
시골에서 손수 농사를 지으며 유유자적한 삶을 누리고 간,
특이한 유형의 은자(隱者)이다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것도, 가을의 끝을 알리는 것도 국화이다.
넓고 넓은 세상천지에 사시사철 꽃은 피고 지지만, 사람들 눈에 많이 띄는
꽃들만 놓고 보면 국화가 한 해의 마지막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력이 남다른 꽃이기는 하지만, 국화도 때가 되면 지게 마련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른 것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국화가 지고 나면,
새봄이 올 때까지는 꽃구경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설도와 원진의 사랑 이야기 >

설도는 唐대의 명기.여류 시인이란 사실을 모르는 이가 많지만 송나라 때의 이청조와 함께 중국 여류 시단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당시의 일류 문인들과 교류가 많았는데 백거이,원진, 유우석,두목 등이 바로 그들이다.
설도를 이야기 할 때 원진(779-831)을 기억 해야 한다.왜냐하면 그녀가 원진을 사모하여 지은 춘망사(春望詞)란 시가 바로 우리가 즐겨 부르는 동심초의 가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설도가 태어난 해와 죽은 연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770-832 쯤인 것 같다. 때로는 768-841로 보기도 한다. 일설에는 고구려아 티베트와 싸우고 신라군에 패전한 당의 명장 설인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어렸을 때 하급 관리였던 아버지가 성도(成都)에서 근무하게 되어 그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8, 9세에 능히 시를 지을 줄 알았으며 아버지가 죽자 가세가 기울어서 16세에 樂籍(악적 : 고급기생 명부)에 올랐다고 한다. 어릴 적에 아버지와 함께 정원에 앉아 있을 때 아버지가 작은 나무 한 그루를 가리키며 시를 읊었다고 한다.
<마당의 오동 한그루 (庭 除 一古桐 ,)
줄기가 구름을 치솟았구나(聳于 入雪中)>
그리고 어린 딸에게 댓구를 지으라 했더니
<가지는 남쪽과 북쪽에서 오는 새들을 맞고( 枝迎 南北 鳥)
잎은 오고 가는 바람을 보내는 구나( 葉 送 往來風)>
라고 댓글을 지다고 한다. 이것을 보고 아버지는 슬퍼했다고 한다. 새와 바람이 오고 간다는 것은 고급 기생에 대한 시적인 표현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운명을 예견한 것이 아닐까하고 걱정했던 것이다.
설도는 이미 14세 때부터 詩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전당서 소전>에 설도 18세에 위고가 검남서천 절도사로 부임해 왔는데 설도를 불러 악적 (음악을 담당하는 기생)에 올려 관청 기생이 되게 하였고 위고는 죽을 때까지 20여년동안 ,부모를 졸지에 잃은 설도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여인이지만 박학한 그녀에게 책 교정과 열람의 소임을 담당하는 교서 직책을 부여하여 그뒤로 설도는 '교서'라고 불렸다.
원진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으로 아내를 잃고 또 올 곧은 성품으로 부패한 정권과 맞서다가 몇번이나 좌천을 갔다고 한다. 세상의 냉혹함에 아내를 먼저 보내야 했던 그는 삶의 고달픔을 설도라고 하는 기생 시인과 정을 나누며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설도는 또한 그러한 원진에게 애련한 감정을 품었을 것이다.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남녀간의 지순한 사랑, 그것도 서로 같은 하늘아래 살면서 헤어져야 하는 비련의 사랑이란 시공을 초월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마력이 있다. 그 것이 또한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고양시키겠는가?
원진의 字는 微之이다.9세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고 15세때 과거에 급제한 수제였다. 그는 백거이와 아주 절친한 관계였는데 그는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서 동천, 혹은 통주로 좌천되었는데 5년 후에 백거이도 강주라는 곳으로 귀양을 갔다. 809년 설도와 원진이 이곳에서 서로 처음 만난다. 당시 원진은 동천에 좌천되어와 있었는데 설도의 文名을 듣고 그녀를 찾아 간 것이다. 설도 역시 원진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 했다.
설도는 39세에 12세 연하의 원진을 만났고 둘은 평생을 서로 그리워 하는 연인이 되었다고 한다. 원진은 나중에 옛날 은사였던 위하경을 만났는데 원진이 기생을 만난다고 책망하며 자기의 질녀를 소개 했다고 한다. 원진과 설도는 벼루를 반으로 나누어 사랑의 징표로 나누어 가졌으나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사람 때문에 그 벼루를 개울에 빠뜨려 잊어버리고 만다. 모두 그둘의 사랑을 방해한 그녀로 인하여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춘망사가 생겨나고 ,김억 번안 , 김성태 곡의 동심초가 생겨난다.
꽃 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을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갖 되이 풀잎만 맺으려 는고
설도는 자기가 직접 만든 아름다운 색종이( 설도전)에 백여편의 시를 써서 원진에게 보여 주며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고 , 원진 역시 설도에게 향한 詩로서 화답을 했다. 그들은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있었을 까? 두사람의 시를 감상 해 보자.
1). <설도의 춘망사( 春望詞)>
花開不同賞 花落 不同悲 ( 화개 부동상 화락 부동비)
欲問 相思處 花開花落時 (욕문 상사처 화개 화락시 )
攬草 結 同心 將以 遺 知音 (람초 결 동심 장이 유 지음 )
春愁 正斷絶 春鳥 復 哀吟 (춘 수 정단절 춘 조 부애음)
花落日將老 佳期 猶渺渺 (화 락 일 장노 가기 유 묘묘 )
不結同心人 空結同心草 (불결 동 심인 공결 동심 초 )
那堪 花滿枝 飜作 兩相思 (나감 화 만지 번작 양 상사 )
玉箸 垂朝鏡 春風 知不知 (옥저 수 조경 춘풍 지 부지 )
꽃 피어도 함께 즐 길 이 없고 꽃져도 함께 슬퍼할 이 없네
묻노니 그 대 어디에 계시는가 꽃 피고 꽃 지는 이 게절에
풀을 따서 한마음으로 맺어 날 알아주시는 임에게 보내어
봄 시름 그렇게 끊으려 하는데 봄 새가 다시 슬피우네
꽃잎은 바람에 시들어가고 만날날은 아득히 멀어져 가네
마음과 마음을 맺지 못하고 헛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어찌 견디리 꽃 가득한 나무가지 바람에 날려 그리움으로 변하네
옥같은 눈물이 아침 거울에 떨어지는데 봄 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2). 원앙초(鴛鴦草)
綠英 滿香砦 兩兩 鴛鴦小 (녹영 만향채 양양 원앙소)
但娛 春日長 不管 秋風早 (단 오 춘일장 불간추풍사 )
싱그러운 꽃봉오리 향기로운 섬돌에 가득하고
둘씩 둘씩 어울린 어린 원앙이어라
오직 긴 봄을 즐거워 할 뿐이니
가을 바람이야 무에 걱정 할 것 있으리
3). <元鎭>( 원진 )
錦江 滑 賦 娥眉 秀 幻出文君 與 薛濤 (금강 활부 아미수 환출 문군 여 설도 )
言語巧 愉 鸚鵡舌 文章 分得 鳳皇毛 (언어 교유 앵무 설 문장 분득 봉황모 )
紛紛 辭客 多停筆 個個 分卿 欲夢刀 (분분 사객 다정필 개개분경 욕몽도 )
別後 相思 隔煙水 菖蒲 花發 五雲高 (별후 상사 격연수 창포 화발 오운고 )
금강의 매끄러움과 아미산의 빼어남이 변하여 탁문군과 설도가 되었구나
말씨는 앵무새의 혀와 같고 문장은 봉황의 깃털같이 화려하네
詩人들 부끄러워 붓을 멈춤이 많고 공경 대부들 꿈속에서라도
그대와 같은 시를 쓰고 싶어하네
헤어져 그리운데 아득한 강 저편이라 창포꽃 피고 오색 구름 높구나
4).유서(柳絮)/薛濤
二月楊花 輕復微 春風搖蕩 惹人依 (이월 양화 경복미 춘풍 요탕 야인의 )
他家 本是 無情物 一向 南飛又北飛 ( 타가 본시 무정물 일향 남비 우 북비 )
이월의 버들 강아지 가볍고도 작아 봄바람에 하늘 거리며 옷깃을 스치네
버들 강아지야 무정한 꽃잎이지만 남쪽으로 날리고 또 북으로도 날리네
5). 離思( 리사)/元鎭
曾經 滄海 難爲水 除却 巫山 不是雲 (증경 창해 난위수 제각 무산 불시운 )
取次 花叢 懶回顧 半緣 修道 半緣 君 ( 취차화총 라회고 반연 수도 반연 군 )
창해를 보고나선 세상의 강이다 대수롭지 않고
무산을 보고나면 다른 것은 구름이라 할 것이 없네
아름다운 꽃을 봐도 즐겁지 않은 것은
반은 수도 때문이고 반은 님을 그리기 때문이라오
6).許均이쓴 설도
燈暗 芙蓉 帳 香殘 翡翠 裙 (등암 부용장 향잔 비취군 )
明年 小挑發 誰過 薛濤墳 ( 명년 소도발 수과 설도분 )
부용 꽃 휘장에 불빛이 희미한데
비취색 치마엔 향기 아직 남았구나
명년에도 복사꽃 활짝피면 누가 또
설도의 무덤을 찾을 건가
39세의 정상을 달리던 이름난 시인이요 명기였는데 12살 연하의 불운한 천재 연인 원진을 만나 주고 받은 애틋한 사연을 대하니 동심초 노래가 떠오르네요
꽃 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을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갖 되이 풀잎만 맺으려 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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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시인 이었던 원진은 여자문제에서만은 花花公子였다고 한다.최앵앵과 결혼 약속을 못지키고 기생 유재춘을 농락하여 자살하게 하고 자신은 재상의 딸과 결혼하고 설도와 사랑을 하게 되었으니..이런 소문을 듣고 설도는 풍류객 시인 두목과도 사랑을 하게되나 자기의 나이가 연상인 것을 생각하고 결별을 선언했다고 한다. 설도는 여러모로 황진이와 유사한 삶을 살았다.
만년에는 완화계에서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완화계는 두보가 살았던 두보 초당과 사마상여와 탁문군이 함께 살았던 탄금대가 있던 근처로 현재는 공원으로 꾸며져 있고 ,지금도 성도에는 그를 기리는 유적이 많이 있다고 한다. 설도전을 만들 때 사용하던 우물이 설도정으로 명명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묘도 잘 관리되고 있고 설도의 詩에 대나무가 자주 등장하기에 그녀의 遺墟地인 望江樓 공원에는 대나무 140여 종이 숲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설도를 기념하여 세운 望江 樓( 성도의 동남쪽 장강의 지류인 금강변 대나무 무성한 곳에 여류 기생 설도를 기리는 망강루가 있음)를 방문한 어떤 풍류객이 읊기를
< 망강루 아래 강물은 천고에 흐르고
비록 사랑에 울던 설도였지만
천년 세월에도 그녀의 명성 여전하구나>

< 薛 濤 井>

< 望 江 樓>

< 望 江 樓 대숲속의 薛 濤 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