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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19일 (목)
촬영. 천호동 설경 / 1968년, 홍순태 촬영.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사진 재촬영)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성균관과 반촌이라는 전시회를 (1919년 11월8일~ 2020년 3월 1일)열고 있습니다. 전시를 열며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입니다. 반(泮)이란 글자는 나라의 학교라는 뜻으로 "반궁"은 성균관의 별칭입니다. 반궁을 감싸고 흐르는 물길이 반수(泮水), 그 주변의 마을이 반촌(泮村)입니다. 반인(泮人)들은 문묘를 맡아 지키고 유생을 보살피는 역(役)에 종사했던 성균관의 공노비로서 반촌에 모여 살았습니다. 이번 전시는 성균관과 반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성균관 유생과 공노비 반인들의 이야기입니다. <태학계첩>에는 응봉의 능선에 기대어 반수로 둘러싸인 성균관이 오롯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반궁도>를 펼쳐 18세기 성균관으로 들어서니 "명륜당"에 걸린 여러 개의 편액에 나라의 인재를 기리는 성균관의 뜻과 권면과 감동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반수교를 건너 반촌에서는 오직 성균관을 위해 살면서, 또한 반주인(泮主人)과 현방(懸房)의 주인으로 그리고 유생들의 벗 역할까지했던 반인의 이야기를 만납니다. 조선시대 교육의 중심 성균관과 하숙촌이자 문화공간 반촌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서울역사박물관장 옛 지도에 나타난 성균관의 명칭들입니다. 반, 태학, 문묘,성균관 등으로 표기한 부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기관, 사부학당. 조선은 유교 교육을 위해 한성부에는 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과 중등교육 기관에 해당하는 사부학당을 두었으며 지방 군현에는 향교를 두어 중등과정의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최고 관학으로서 성균관은 사부학당(중,동,서,남부의 四學)과 지방 향교들을 직간접으로 관할하였습니다. 사부학당은 성균관에 비해 규모가 작고 교육 수준이 낮았으나, 교육 내용 및 방법 등은 성균관과 비슷했어요 실제로 이곳의 교육은 성균관의 관원들이 전담하여 성균관의 부속기관과 같은 성격을 지녔습니다. 사부하당의 과시(科試)인 사학합제(四學合製)와 승보시(陞補試)는 사부학당의 유생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정기 평가였고 성균관 대사성의 책임하에 시행되었습니다. 성균관의 수장, 대사성. 성균관의 우두머리는 대사성(大司成)이었습니다. 대사성은 국자장(國子長), 반장(泮長), 반수(泮首), 사장(師長) 등으로 지칭되기도 했습니다. 직제상으로는 지사(知事)와 동지사(同知事)가 대사성보다 높았는데 타 관직과 겸직하는 명예직이었습니다. 이는 명목상 상위의 직책을 두어 성균관의 위상을 강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임(專任)하는 최고 관료인 대사성은 성균관의 실질적인 수장이었습니다. 대사성은 다른 명예직과 달리 성균관에 머무르며 성균관 유생들과 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성균관과 사부학당의 시험을 관장하는 등의 역할이 있었고 성균관 유생들의 잘못으로 인해 문책이나 파면을 당하는등의 책임이 따랐습니다. 오원 고신 (吳瑗 告身) 1737년(영조 13)에 오원(1700~1740)을 정3품 당상 통정대부의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한다는 교지입니다. 성균관 대사성은 행정실무직으로 최고의 책임자였습니다.
한양도성도 / 18세기말, 개인소장 반궁과 반촌의 터 조선시대 한양 도성 내 동북방에 위치한 숭교방은 북쪽으로는 산으로 둘러싸이고 남쪽으로는 물이 흐르는 풍수와 경관이 매우 좋은 곳이었습니다. "교육을 숭상한다"는 의미를 지닌 "숭교"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이 자리잡은 데서 유래하였습니다. 조선이 건국되고 수도가 한양으로 정해지자 제일 먼저 궁궐과 좀묘, 사직이 건립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은 1398년(태조 7) 이곳에 성균관이 건립되었습니다. 성균관은 다른 말로 반궁이라고도 불렀으며 그 주변지역은 흔히 반촌이라고 하였습니다. 반촌에는 반인, 즉 성균관에 소속된 공노비 들이 살면서 성균관에서의 각종 잡역을 맡아 처리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반인들은 성균관에서 문묘를 받드는 일을 수행하는 것에 강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또한 반촌은 일종의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등 독특한 지역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묘와 같은 지위를 이어받은 반촌 역시 순라를 도는 군졸과 의금부 형조의 형리조차도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반수가 흐르는 반촌. 성균관은 다른 말로 반궁이라 불렸는데, 이는 제후국의 학교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천자의 국학(國學)기관을 벽옹이라 부르는 것과 구분됩니다. "벽옹"에는 벽(璧)과 같이 사방에 물이 흐른다면, "반궁"에는 반달 모양의 연못인 반수가 흐릅니다. 성균관을 둘러싸고 흐르는 반수는 일종의 금천이었습니다. 공자와 성현에게 제사 지내는 곳이자 국가의
인재를 기르는 신성한 곳이었으므로 반수를
통해 주변 지역과 공간적으로 구분되었던 것입니다. <벽옹><연행도첩>. 18세기 연행의 주요과정을 그림으로 남긴 <연행도첩>중 청의 국자감 벽옹을 그린 그림입니다. 북경 국자감에 벽옹이 지어진 1784년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됩니다. 벽옹은 주(周)대에 천자가 도성에 건립한 태학으로 주위의
형상이 구슬과 같이 둥굴고 물이둘러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전,詩轉 /1810. <시경>의 주요 구절을 간략하게 해설한 책입니다. 벽옹과 반궁의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그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벽옹은
천자의 학관이며 반궁은 제후의 학관이라 적혀 있습니다. 도성도,都城圖. 도성의 모습을 도로와 수로를 중심으로 그린 지도입니다. 성균관에 "반,泮"이라 표시되어 있고 그 앞으로 흐르는 반수가 보이며 그 뒤로는 소나무가 그려져 있습니다. 벽송정과
반수로 둘러싸인 반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지도입니다. 태학 법전의 완성. <태학계첩, 1747>에는 성균관의 가장 오래된 모습을 보여주는 <반궁도>와 계첩의 제작 의도를 담은 발문이 실려 있습니다. 발문을 통해 성균관 대사성 이정보(1693~1766)가 1747년에 <태학성전보유.太學成典補遺>를 편찬한 것을 기념하며 <반궁도>를 그리고 계회를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만부(李萬敷,1664~1732)가 <태학성전,1689>을 편찬하고 이후 60년 만에 다시 속록(續錄)을 편찬하기로 하고 여러 태학생과 더불어 편찬한 것이 <태학성전보유>입니다. 이렇듯 성균관은 법전을 편찬하고 보관하여 운영의 지침으로 활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정조의 어명으로 태학에 대한 것을 집대성하였는데 이것이
1785년(정조9) 성균관 대사성 민종현(閔種顯,1735~1798)이
편찬한 태학지(太學志)입니다. <반궁도><태학계첩>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74호 성균관대사성 이정보가 성균관 유생들과 계회를 하고 만든 계첩으로, 유일하게 현존하는 성균관 유생들의 계첩입니다. 특히 <반궁도>는 성균관의 건물 구조와 배치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자료입니다. 당시 성균관 건물의 위치와 구조 내부의 길과 조경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한 반수의 모습과 반수 주변으로 반촌의 모습들이 표현되어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신석규 발문, (태학계첩) 태학은 수선(首善)하는 곳이니, 나라에 성인을 높이고 선비를 기르는 절목(節目)이 있다면 명물(名物,명목과 실제)과 품식(品式,푸메와 겨식)에 의당 성전(成典)이 있어야 한다. 발문은 이 계첩을 만들게 된 경위와 연대 등이 기록한 것입니다. 발문을 보면 기왕에 <태학성전>이 있지만 변화하는 동안 마땅히 속전(續典)의 필요성이 있어 초본을 여러 유생들이 증손(增損) 편찬하고 이정보가
이를 태학속전으로 완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출처, 위키백과- <반궁도><태학지> 정조의 명으로 당시 대사성 민종현이 편찬한 책입니다. 제도, 변천과정, 교학과목, 학생 선발요령, 학생 생활양식, 자치활동, 사회참여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건물배치를 알 수 있는 <반궁도>와 함께 성균관을 묘우와 학사의 공간으로 나누어 각 건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성균관에 관한 연구 자료로 많이 이용될 뿐 아니라 사학, 향교, 서원에 관한 내용까지 포괄하고
있어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됩니다. 문묘 중건의 기록, 묘정비. 성균관의 건물 배치는 전묘후하의 체계를 따랐습니다.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위패를 봉안해 둔 대성전을 중심으로 묘우(廟宇) 공간을 마련하고 , 그 뒤로 강하과 시험이 실시되는 명륜당 등의 학사(學舍) 공간을 배치하였습니다 대성전 마당에 있는 묘정비에는 문묘의 창건과 중건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훼손된 비석과 비각을 1626년(인조 4)에 다시 세우며 변계량(1369~1430)의 옛 글을 다시 새기고 비석 뒷면에 이정구(1564~1635)의 글을 새겼습니다. 이정구의 <문묘비음기,文廟碑陰記>를 통해 임진왜란 등 전란으로 훼손된 태학을 다시 일으키는 과정과 의미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문묘, 의례의 장소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문묘는 공자와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이념과 국가의 토대를 단단히 다지는 곳이였습니다.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석전대제는 종묘제례 다음가는 대규모의 국가의례였습니다. 석전에 올리는 희생(犧牲)은 종묘제례에 버금가는 대뢰(大牢,소,양,돼지)였으며 이를 위해 성균관 내부에 포주를 지어 깨끗하게 제물을 바치도록 했습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영조는 성종과 현종 이후 처음으로 친히 석전대제에 참석하였습니다. 석전대제 외의 성균관 의례로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활을 쏘았던 대사례(大射禮)와 왕세자와 왕세손이 성균관에 입학하는 입학례가 있었습니다. 의례 참석을 위해 왕과 왕세자가 성균관에 오면 유학을 전한 선현들을 존경하는 뜻으로 가장 먼저 대성전을 찾아 예를 행하였는데, 이는 예악정치(禮樂政治)를 펴겠다는 의미로 신하와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한 것이였습니다. 문묘, 공자와 성현을 배향한 곳. 문묘는 문선왕(文宣王) 공자 묘의 준말로 배향(配享), 즉 공자를 중심으로 유학의 도통을 이룬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이에 제사를 지내는 향사의 공간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공자를 정위(正位)로 하여 4성(四聖)과 공문10철(孔門十哲), 송조6현(宋朝六賢)을 대성전에 배열, 배향하고 대성전 좌우에 있는 동무와 서무에 중국 명현 94위와 우리나라 명현 18위를 모셨습니다. 그러다가 1949년 문묘매안(文廟埋安,동 서무의 중국 성현의 위패를 땅에 묻은 것)을 계기로 동,서무는 비게 되고 공자와 4성, 공문10철, 송조6현, 동방18현의 위패
39위만이 대성전에 봉안되었습니다. 공자초상 서원이나 향교, 사당 등에 모셔졌던 공자초상입니다. 공자는 유교 교육을 통해 추구하는 이상적 인간상인 성인, 군자입니다. 당(唐) 현종대에는 공자를 왕으로 추봉하여 문선왕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원(元)대에는 공자의 학문과 성스러운 인격을 기리며 대성지성문선왕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이에
공자의 사당을 문선왕묘라 하고 이를 줄여 문묘라 했습니다. 대성전에는 공자의 위패가 모셔 있습니다 어제양성헌연보,御製良性軒年譜 영조가 76세 되던 1769년(영조 45) 6월 15일에 지은 자신의 연보입니다. "양성헌"은 1712년(숙종 38) 2월 창의궁(彰義宮) 사제로 나갈 때 숙종이 직접 써서 준 헌호(軒號)입니다. 1694년(숙종 20) 9월 13일 보경당에서 태어난 때부터 76세인 1769년(영조 45) 6월 15일까지의 일을 기술하였습니다. 특히
석채례, 대사례 등 조선초기 이후 성균관에서 처음 행하거나 다시 행한 의례를 밝혀 놓았습니다. 영조의 탕평비와 대사례 영조는 1740년(영조 16) 석전에 참석한 후 논어의 구절을 인용한 글을 성균관에 내렸습니다. "주이불비 기불재서,周而不比 豈不載書(두루 사랑하고 편을 나누지 않는다는 말이 책에 적혀 있지 않은가)" 이 글에서 두루 사랑하고 편을 나누지 않는다는 말은 이후 2년 뒤에 사도세자의 성균관 입학을 기념하며 내린 글의 시초가 되었고, 이글을 새겨 세운 비석이 탕평비입니다. 영조가 붕당의 폐단을 극복하고 왕권을 정점으로한 관료 국가를 꿈꿨던 탕평군주였음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또한 영조는 1743년(영조 19)에 정치적 안정과 군신의 화합을 이루기 위해 대사례(大射禮)를 200년만에 부활시켰습니다. 하연대에서 행해진 대사례를 마치고 당시에 사용된 활과 화살을 보관하기 위해 육일각(六一閣)을 지었고 대사례기를 지어 명륜당 현판에 걸었으며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를 편찬하도록 하였습니다. 대사례도 1743년(영조 19)에 시행된 대사례 절차를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렸습니다. 어사의례(御射儀禮), 시사의례(侍射儀禮), 시사관상벌의례(侍射官賞罰儀禮)입니다. 그림 뒤에는 어사삼획(御射三獲)이라 하여 영조의 활쏘기를 기록하고 시사관 30명의 성적, 병조판서 서종옥이 쓴<대사례도서,大射禮圖序>를 차례로 수록하였습니다. 의례의 사실적 묘사뿐 아니라 성균관 주요 건물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히 화면 우측 가장자리에 흐르는 반수, 그 위에 놓여 있는 반수교, 반수교 앞의 탕평비각이 보입니다. 위 그림은 대사례(大射禮)시 영조 임금이 활을 쏘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과녁이 붉은 색이고 명중 여부를 알리는 방법도 신하들이 도열한 앞쪽 오른편에 북을 치는 사람을 배치해 북을 처서 알렸습니다. 아래
신하들이 활을 쏘는 그림과 무엇이 다른지 찾아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신하들이 활을 쏘는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과녁의 색이 푸른 색 입니다.
명중 여부는 과녘옆에 기수들이 깃발을 들어 알렸습니다. 또 다른 곳은... 왕세자 입학도첩 / 고궁박물관, 복제 효명세자가 1817년(순조 17)에 성균관에 입학하는 모습을 절차에 따라 기록한 그림입니다. 입학례 순서에 따라 <출궁의>, <작헌의>, <왕복의>, <수폐의>, <입학의>, <수하의>에 이르기까지 여섯 장면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세자시강원 관원 13명이 입학례를 경하하는 뜻에서 지은 찬시가 실려 있으며 마지막으로
남공철(南公轍,1760~1840)이 쓴 발문은 이 화첩의 제작 경위를 말해줍니다.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례. 왕세자는 8세가 되면 성균관의 학생이 되는 입학례를 치룹니다. 왕세제의 교육은 시강원(侍講院)에서 주로 이루어졌으나 입학례는 성균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는 왕세자가 유교사회의 지도자로서 모범을 보이고, 차기 왕위계승자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왕위계승자가 성균관에서 문묘를 배향하고, 학생의 신분으로서 박사에게 배움을 청한다는 것은 "학문을하려면 먼저 스승을 존엄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1809~1830)는 1817년(순조 17)에 입학례를 치렀습니다. 순조는 효명세자가 궁을 나서는 경로에 있어, 자신의 아버지인 정조가 1761년(영조 37)에 치른 왕세손 입학례의 절차를 계승하도록 하였습니다. 성균관에서
이루어진 입학례는 대성전과
명륜당에서 거행되었으며, 성균관 유생과 수복도 참석하였습니다. 성균관의 입학. 성균관 유생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생원진사과인 소과에 합격해야 합니다. 전국에서 200명 안에 들어 선발된 유생들은 성균관에서 기숙하며 대과를 준비하였습니다. 대과는 33명 정도만 합격하는 어려운 시험으로 수년에서 수십년을 성균관에 머무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성균관 입학 연령은 15세 이상으로 제한되었으나, 50세 장년도 있었기에 연령 제한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생들의 평균 연령은 조선후기 생원진사시 합격자의 평균 연령인 34.5세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생원진사시를 합격하여 처음 성균관 기숙사에 들어온 성균관 유생들은 신입생 환영회인 신방례(新榜禮)를 했습니다. 신입생은 자신의 재력에 따라 음식을 마련하여 잔치를 했고 이때 같이
들어온 동기 중 친한 사람과
함께 거처하기도 했습니다. 심명섭 시권, 沈明燮 試券 / 1888, 심명섭,1853~? 심명섭의 소과 응시 답안지로, 그는 1888년(고종 25) 진사시에 응시하여 차하(次下)의 성적을 거두고 3등 97위로 입격하였습니다. 가로로 종이를 이어서 사용하는 시권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차하"라는 붉은 글자로 채점되어 있습니다. 시권의 우측 부분은 접혀 끈으로 묶여 있는데, 이는 공정한 채점을위해 시험 채점관이 응시자의 신상을 볼 수 없도록 가리는
것입니다. 좌) 이담명 백패,李聃命 白牌 / 1666. 조선시대 과거의 생원진사과 복시(覆試) 합격자에게 발급한 합격증서입니다. 백패를 받은 생원과 진사는 각종 역을 면제받을 수 있는 특권을 얻는 것과 동시에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받았습니다. 소과에 합격하는 것을 입격이라 했습니다. 대과 합격증서인 홍패에 급제라 되어있는 것과 다릅니다. 우) 이담명 홍패,李聃明 紅牌 /1670. 이담명(1646~1701)이 1670년(현종 11) 문과에 합격하면서 국왕에게 받은 합격증서입니다. 당시 이담명은 생원 신분으로 응시하여 을과 제1인의 성적으로 합격하였습니다. 별시로 치러졌는데 이때
합격자는 10명에 불과하였고 갑과도 1인에 그처서 차석으로
합격하였습니다. 성균관에 걸린 35개 현판 중 하나입니다.(백록동규, 송준길의 글씨) 폭넓게
배우고, 의심나면 묻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분명하게 구별하고, 독실하게 실천한다. 성균관의 수복청 건물은 유생의 생활을 도와주는 수복의 거처입니다. 건물 외벽 기둥에 주련들이 걸려 있는데요, 총 8개의
주련에있는 시구는 수복의 문묘를 수호하고 유생을 기르는 임무를 알려줍니다. 성균관의 실무자, 반인 성균관에는 대사성 이하 관리와 유생 외에, 반인이 있었습니다. 반인들은 문묘를 살피고 제향을 하며 성균관의 건물을 관리하고 기숙사와 식당의 일들을 전담하며 성균관의 재정과 경비 등을 담당하는 실무자였습니다. 반인은 어렸을 때부터 재직(齋直,직동)이라 불리며 동재와 서재의 각 방에 소속돼 유생들의 심부름을 했고 때로는 유생에게 혼이 나거나 벌을 서기도 하였습니다. 부목(負木,아방사령)은 동재, 서재에 총 8인이 배치되어, 땔나무를 바치고 심부름을 하였고, 식사시간에 큰소리로 유생들의 움직임을 지휘하였습니다. 수복(守僕)들은 문묘 관리 및 제향 업무를 담당하며 성균관의 예식과 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수복은 가장 높은 지위로서 반인을 대표하고 그 자부심이 대단하였는데, 각
기관에도 수복이 있었으나 성균관 수복이 가장 위세가 높고 명예로웠다고 합니다. 안향의 노비가 자리잡은 마을. 반인은 고려후기 유학자 안향(安珦, 1243~1306)이 개성에 있던 성균관에 기증한 노비의 후예입니다. 조선왕조가 개창되고 수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되자 이들 역시 한양으로 이주하여 또다시 성균관에 입역하면서 살았습니다. 18세기 윤기의 기록을 보면 "반인들은 원래 개성 출신으로 그 언어와 극성이 개성 사람과 같고 남자의 복색도 화려하고 특이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개성 이주자이자 고려의 유민이라는 의식으로 결속력을 가지고 있었고 기개를 숭상하였으며 의협심이 강했습니다. 성균관에서 문묘를 받들고 유생을 기른다는 자부심이 강했으며, 국가의 대소사에 적극 참여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곤 하였습니다. 반인은 조선 초기에는 약 300여명 이었으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2000여명 정도로 증가했습니다. 반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반촌의 영역도 갈수록 확장되었습니다. 동반촌과 서반촌. 반촌은 반수의 물줄기로 인하여 동반촌, 서반촌으로 나누어졌으며, 반수의 다리 위치로 그 하한경계선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관기교에서 혜화문에 이르는 길이 반촌의 하한선이었으나 조선후기에 경모궁이 조성되면서 그 영역은 응란교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경모궁은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1776년(정조 1)에 조성한 장헌세자(1735~1762)의 사당입니다. 이 사당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세자로 올리고 그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기 위해 숭교방에 조성한 곳으로서 그 위치는 현재 서울대학교 내부입니다. 1782년(정조 6) 봄에는경모궁 담장 북쪽에 궁지가 완성되었습니다. 현재
궁지의 북쪽을 "반계"로 표시한 그림과 지도가 전해지고 있어 반촌의 영역을 알 수 있습니다. 문묘의 행랑, 반촌 문묘를 수호하는 반인들의 입역은 대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안향 노비의 후손이자 병자호란 때 문묘의 위판(位版,목주木主)을 남한산성으로 옮겨 보호한 수복 정신국(鄭信國)과 박잠미(朴潛美)의 후손이었습니다. 반인들은 이들을 기리는 정려문을 동반촌 입구에 세워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토록 그들은 자신의 특수한 임무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고, 국가에서도 그들의 임무를 인정하여 다른 관청으로 소속을 바꾸지도 않았습니다. 반인의 특수한 임무만큼이나 그들의 거주지인 반촌 역시 그 특수성이 인정되었습니다. "반촌은 문묘의 행랑"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문묘에 적용되는 치외법권적 권위가 확대 적용되었습니다. 반촌 일대는 형리와 포졸이 마음대로 출입하며 범인을
색출하지 못했기에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한양
유일의 특수지역 이었습니다. 우경도 / 19세기,양기훈(楊基薰,1843~?),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농사에서 소는 농사의 성패를 가를 정도로 매우 중요했습니다. 시기와 토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개 소 1마리가 장정 5~10명의 몫을 했고, 조선후기에는 우경(牛耕)이 확대되면서 그 중요성이 더욱 증대되었습니다. 이에 조선시대에는 함부로 술을 빚거나 팔지 못하고(酒禁), 소나무를 베지 못하는(松禁), 것을 비롯해 소를 도살하지 못하는(牛禁) "3금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또 이러한 우금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소 도살을 단속하는 관원을 따로 두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를 정당한 이유없이 도살한 사람은 가족과 함께 변방으로 강제 이주 당하는 엄한 형벌에 처해졌고, 살인죄와 동일하게 처벌하려 했던 데에서 당시 소의 중요성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말과 소의 도살을 지시한 사람은 장,杖 100대, 전가지율,全家之律에 처하고 (직접) 도살한 사람은 영원히 관노로 외딴 섬에 속하게 하고, 변경(邊境)에 온가족을 이주시킨다. 도망친
죄수를 숨기어 묵게 한 자는 장 100대, 징역 3년형에 처한다. 도사에서 현방으로 조선시대의 우금정책에도 예외인 곳이 있었으니, 바로 "포주"라고 불린 성균관 내 "도사(屠肆)"였습니다. 국가에서는 조선전기부터 반인들이 이곳에서 직접 소 도살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이는 제례에서의 제물과 유생들의 식재료로 소고기가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반인들은 쓰고 남는 소고기와 부속을 팔아 남는 이윤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양반층 뿐만 아니라 중인, 상민층에서도 소고기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불법 밀도살이 빈번해졌습니다. 또한 양난 이후 성균관에 신공(身貢)을 바치던노비가 도망해 줄고, 성균관에 소속되어 세금을 납부하던 논과 밭이 전쟁으로 황폐해져 성균관의 재정이 악화되었습니다. 국가에서는 성균관 도사를 "현방,懸房"으로 재편해 소 도살과 판매의 독점권을 부여하고 수익의 일부를 성균관에
납부하도록 해 소고기 수요 급증에 따른 밀도살과 성균관 재정 악화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현방, 소고기를 매달아놓고 파는집. 17세기 중반에 성균관 도사,屠肆는 "소고기를 매달아놓고 파는 집"인 현방,懸房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이곳은 도살이 합법화된 유일한 공간으로, 소고기 독점판매권까지 주어져 시전(市廛)과 유사하게 됐습니다. 이러한 현방은 17세기 말 도성 안에 총 20곳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부유한 양반층과 중인이 주로 거주하는 북부와 중부에 위치해 이들의 소고기 수요를 충족시켰고 이후 도성 주변과 외곽에도 생겨 경제적 부를 축적한 상민들도 소고기를 쉽게 구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인들은 현방을 통한 이익 증대를 위해 현방의 추가 설치를 꾸준하게 요구해 19세기 초에는 총 24곳이
되었습니다. 한경지략,漢京識略 / 1830, 유본예,柳本藝(1777~1842),추정. 조선휘 수도 한성부의 역사와 모습을 기록한 지방지리지로, 실학자 유득공(柳得恭,1748~1807)의 아들 유본예가
저술한것으로 추정됩니다.<시전>, <궐외각사> 편에 현방의 의미와 현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현방은 소고기를 파는 도사이다. 고기를 매달아놓고 팔아서 현방이라 한다. 도성 안팎에 모두 23곳이 있다. 모두 반민으로 하여금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게 하고, 납부하는
세육(稅肉)으로 성균관 학생들의 음식을 봉양하는 반찬을 짓게 한다. <한경지략> <시전> 현방. 목민심서 / 19세기 초,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정조 대 실학자 정약용이 당시 조선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하며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힌 책입니다. 전국을 통틀어 매일 500마리의 소를 도살했고 한양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푸주간이
있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소 500마리를 도살하고 있다. 국가의 제사나 호상에 사용하기 위해 도살하는데, 성균관과 한양 5부 안에 푸주간 24곳이 있고 360개 고을의 관아에서는 빠짐없이 소를 파는 고깃간을 열고 있다.... 서울과 지방에서 벌어지는 혼례, 잔치, 장례, 활쏘기 때 잡는 것과, 법을 어기고 사사로이 도살하는 것까지 포함해
그 수를 헤아려 보면 500마리 정도가 된다. -정약용
<목민심서>, <호전> 권농.- 지봉유설,芝峯類說 / 이수광,1563~1628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이수광이 쓴 조선시대 최초의 백과사전입니다. 수백여 종의 서적을 인용하면서 그에 대한 자신의 의견도 덧 붙였습니다. 이수광은 이 책에서 84세까지 살았던 조선중기 문신 원혼의 사례를 들며 당시 평균 수명이 50세가 되지 않았던 것에 비해 원혼이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소고기를 즐겨 먹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의림촬요,醫林撮要 선조 때 어의였던 양예수가 저술한 의서입니다. 몸의 정기와 기혈이 허약해진 병증에는 약재로 소고기와 우유를 처방했고, 힘을 기르는 식이요법으로도 소고기가 사용되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소고기가
음식 뿐만 아니라 약으로도 유용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팔환은배,八環銀杯 / 재현품,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정조는 1792년(정조 16) 3월 2일 성균관 비천당에서 시행된 제술시험의 합격자들을 창덕궁 희정당으로 불러 술과 음식을 내렸습니다. 팔환은배는
정조가 합격자들에게 술을 내리며 사용했던 은잔으로, 사료를 바탕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태학은배시집,太學恩杯詩集 / 1793. 1799년(정조 23) 심영석(1767~?)에게 내린 내사본입니다. 내사인인 규장지보가 날인되어 있습니다. 1798년(정조 22) 정조는 춘장대에서 친시(親試)를 연 다음 <시경,詩經><녹명장,鹿鳴章>에 나오는 아유가빈(我有嘉賓)을 새긴 은잔을 성균관에 하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제문(御製文)을 내리자 태학생(太學生) 32명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한 글을 모아 정조의 명으로 당시 규장각 직제학 이만수(1752~1820)가 간행한 책입니다. 아유가빈(我有嘉賓)은 당신은 나의 귀한
손님이라는 뜻입니다. 박물관 구내 식당에서 밥 먹었습니다. (5,000원)
출처:바위솔블로그 글쓴이:바위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