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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난장 두번째 시간 함께 읽은 작품은 웹툰 <모두에게 완자가> 입니다.
http://comic.naver.com/webtoon/list.nhn?titleId=471283
모두에게 완자가> 를 읽고.
박희정
우선, 발제자를 맡은 주제에 글이 제일 늦은 점 죄송합니다.
발제문이라기 보다는 저도 쪽글이라 칭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펑크를 안낸 게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야 할 상황이라는 점을 말씀드리며.^^;;; 부족한 부분은 구두 발제로...
글이 늦다보니 공교롭게 안기옥님의 쪽글을 먼저 보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에게 완자가’가 연재를 시작했을 무렵, 저는 기옥님과 비슷한 이유로 몇 회 슬쩍 읽다가 읽기를 관둔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세미나가 아니었으면 다시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모완을 계속 읽어봤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상황 상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앞에서 40회 정도, 그리고 뒤에서 10회 정도를 읽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제 생각이 바뀌었을까요? 네. 기옥님의 의견에 대해 이 작품을 조금은 변호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모완의 시작은 야심찼지만, 그 야심만큼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실력은 따라주지 못했습니다. 그건 사실이지요. 단순히 그림 실력의 문제는 아닙니다. 만화는 회화가 아니니까요. 조형성이 떨어지는 그림이라도 이야기가 전달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모완은 그 이야기 전달이 덜컹거립니다. 물론, 처음 만화를 시작한 초짜 작가이고, 이 부분은 점차 연재회수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개선이 됩니다. 후반부의 모완은 훨씬 더 잘 읽히고 독자를 몰입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그 점까지를 고려하며 만화를 읽어야 하는 건 아니죠. 이 작가는 초짜니까 완성도가 떨어져도 감안하고 읽어줘야지? 그럴 의무는 독자에게 없습니다.
하지만 모완은 만화이면서, 세상에 대한 성소수자의 말걸기입니다. 모완 작가는 아예 첫회부터 그 의도를 걸고 시작하죠. 그럴 때 이 작품은 하나의 작품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저에게는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이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의무가 생깁니다. 그렇게 따라간 모완은, 제 첫인상보다 훨씬 괜찮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설명의 화법이 잘난체에서만 나온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일반’의 세상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로 가득합니다. 단지 상황만을 보여준다고 그 장면에서 읽어내야 하는 상황이 전달 될 거라 기대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는 말이지요. ‘새로운’ 것은 때로는 설명 없이는 전달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저는 모완이 그 설명을 위해 만화라는 언어를 택하고 비유라는 방식을 즐겨 활용하는 것이 참 영리한 선택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만화를 계속하고 싶어하는 사람으로서, 모완같은 형식의 만화는 참 쉽지 않은 만화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니까요. 가명을 쓰고, 만화 캐릭터의 얼굴을 하고 있어도 작가는 대중 앞에서 벌거벗는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모완 작가에게 자뻑의 기운이 보이는 걸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자뻑하지 않는 사람이 있나요. 어느 정도는 운 좋은 상황에서 성소수자가 당하는 공포스런 현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저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작품을 공개했을 때, 웹툰이라는 형식 상 작가는 댓글을 통해서 갖가지 반응을 접하게 됩니다. 게다가 모완 작가는 그걸 꼭 다 본다고도 하지요. 자신을 드러냄으로서 지게 되는 상황을 감안하고 그리는 겁니다. 그리고 이 작가는 그 책임이 자신의 것이라는 인식을 작품내외적으로 분명히 드러내죠. 저는 이 용기와 강인함이 어디서 나올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모완의 가장 큰 미덕은, 동성애가 ‘사랑’이라는 아주 단순한 진실을 잘 전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1년을 연애하고 결혼 해서 6년째인 저는, 참 공감가는 내용들이 많았답니다. 연애라는 건 남녀가 만나든 남남이 만나든 녀녀가 만나든 사람이 만나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간관계 중의 하나고, 우리는 그 본질적인 속성에 대해 주목해야 하죠. 모완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게 정말 네가 좋아하는 게 맞아?”라고 물어준 사람과의 동경과 존경이 지속시켜온 긴 관계도 끝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죠. 네. 사랑이란, 그런 거죠. 저에게는 이 작품이 삶과 사람과 사랑에 대한 거대한 서사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모두에게 완자를>
신재경
"이게 뭐야"를 봐야하나 쪽글을 써야하나.
이 거대한 커밍 아웃이라니.
스스로를 "모두에게" 드러내려는 의지인가.
처음부터 그런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웹툰 연재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한 개인의 일상에는 큰 파장이었으리라.
인터넷을 통한 훔쳐보기와 손가락질하기의 시대에 보인 작가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거대한 우주에서 인간의 생물학적 성정체성과 사회심리적 성지향성이 뭘 대수라 굳이 타인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나 싶기도 하다.
역사가 기록된 이래 흔히 말하는 성소수자가 없었던 적이 있었나.
폭력의 근저에 늘 불안이 있다.
성소수자를 향한 폭력적 언행 뒷면에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감이 존재하고 있기 마련이다.
<아메리칸 뷰티>의 소년의 아버지도 그러했다.
웹툰 연재 과정에서 여러가지 피드백을 받는 작가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도 '정치적 올바름'이나 '공적 영역에서의 윤리', '예술에서의 엄숙주의'가 이다지도 가혹한가.
획일적 성정체성을 넘어선다고 해도 우리는 얼마 가지 못하고 있구나.
잘못된 부분에 대한 지적과 염려이었을 것이고,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오해로 인한 비난과 편견을 피하겠다는 시도였겠지만 서글펐다.
1993년에 스웨덴 모라라는 도시에 묵은 적이 있다.
소개를 받아 한 레즈비언 할머니 커플 집에서 민박을 했다.
두 분은 각자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린 적이 있으나 후에 원 정체성을 따라 같이 지내게 되었다는 얘기를 건너 들었다.
한 분은 주로 바깥에서 화단을 가꾸고 다른 분은 집에서 주로 요리를 하는 체계였다.
말이 안 통해 자세히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뭔가 대안적 관계라는 생각과 함께 그냥 참 자연스럽고 좋아보였다.
좀 더 솔직하자면 당시엔 어려서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판타지를 가지고 찾아간 터라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모완'을 보면서는 그분들을 떠올렸다.
이성애 커플이든 동성애 커플이든 절대 안 읽었을 웹툰을 끝까지 읽어내서 새로운 경험이었다.
죄송합니다, 작가님.
알콩달콩한 이야기는 제 체질이 아니라 두 번은 못봤습니다.
그래도 혹시 뵙게 되면 맛있는 것이라도 대접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모두에게 완자가를 만나는 방법>
공기
들어가며
- 내가 모두에게 완자가를 처음 알게 됐던 건 네이버에서 정식연재를 시작한 당일이었다. 주변에 몇 없는 퀴어 지인들은 SNS에서 레즈비언 연애 일상물이 그것도 네이버에서 정식연재를 시작했다는 공유가 이어졌고, 나는 게이 웹툰도 아니고 레즈비언 연애 웹툰이라니 한편으론 지지하고 응원했지만 마음 한구석엔 걱정이 자리 잡았다. 내가 우려했던 건 흔히 미디어에서 ‘게이’를 소재로써 이용한 경우는 많이 봐왔지만 금단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는 레즈비언의 이야기가 웹툰에 등장한 건 사실상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전에 연재됐던 <어서오세요 305호에>는 사실상 동성애자와 살아가는 이성애자가 편견을 깨는 이야기였고, 지금 다음에서 연재되고 있는 <이게 뭐야?>는 모완(줄여서 모두에게 완자가) 다음으로 레즈비언이 아닌 게이연애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웹툰이었다. 이처럼 성소수자의 이야기는 그것이 편견을 깨는 이야기든 실제로 연애 일상툰 이든 많은 논란거리가 된다. 내 주변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사람들이 버젓이 웹툰에 자기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리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모완이 연재될 때는 일반 대중들의 혐오가 댓글이란 시스템을 통해 직접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댓글테러나 별점테러는 가벼운 수준이고, 작가의 아웃팅까지 염려했었다. 물론 다른 웹툰을 볼 때는 작가가 혐오나 아웃팅 당할까봐 우려했었던 적은 없었고, 또 우려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유독 모완이 그랬던 건 네이버(국내 포탈1위)에서 연재됨으로 불특정 몇 백만 명의 독자들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압도적인 공격을 받을까봐 그랬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모완 이전에 퀴어가 나왔던 <어서오세요 305호에>와 현재 다음에서 연재가 되고 있는 <이게 뭐야?>도 마찬가지다. 다행히도 세 작품 다 내 기준으로 귀여운 그림체와 안정화 된 스토리 등으로 연재가 잘 마무리 되었고, 끝난 이 시점에서는 초기의 댓글테러와 별점테러 보다는 함께 공감하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이게 뭐야?는 연재중이다.)
이 작품은 현실을 얼마나 적절하게 반영/해석하고 있는가?
모완이나 이게 뭐야? 에서 다뤄지는 성소수자의 얘기는 일종의 재미나 극적인 장치로써 존재하는 게 아니라 둘 다 현실 속에서 동성애자인 자기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동성애자들의 연애라고 해서 유별난 연애를 하는 게 아니라 이성애자들이 연애를 하듯이 동성애자들도 보통의 연애를 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소재로 그 대상이 이성이 아닌 동성일 뿐이라는 얘기가 가장 핵심적이다. 웹툰에 이입하다보면 동성 간 연애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연애이야기로 인식하게 된다. 내가 봤을 땐 충분히 한국사회 안에서 동성애자로서 살아가는 현실이 녹록지 않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독자들과 오랜 소통을 했고, 꽤나 성공적으로 끝맺음을 했던 작품이라 볼 수 있었다.
이 작품의 재미/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모완이나 이게뭐야?는 귀여운 캐릭터와(모완같은 경우엔 초기에 작화논란이 있었다.) 소소한 에피소드로 연애하는 독자들에게 ‘공감’할 수 있을 만한 소재로 다가갔다. 공감 할 수 없을 것 같던 동성애자들의 연애가 이 만화를 보면서 다르지 않음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싶다. 또한 내가 아는 범위에서 '레즈비언 창작물'은 소비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정확히는 레즈비언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은 아예 만들어질 기회가 없었던 것으로 봐도 무방해 보인다. 최근을 예로 들자면 얼마 전 <선암여고 탐정단>이라는 종편드라마에서 여성의 키스장면을 두고 한참이나 화제가 됐었다. 그 장면을 두고 방통위와 학부모들은 동성 키스신이 교육상 좋니 안 좋니 선정적이니 아니니를 가지고 호들갑떨기에 급급했는데 작품 속 그녀들의 아픔이나 사회적 시선으로 인한 고통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더럽고, 사회적 합의가 안된 얘기라는 주장만으로 성소수자를 다룬 작품들이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은연중에 레즈비언을 다룬 얘기였기 때문에 더 반감을 샀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흥미로운 지점은 게이를 대상으로 하는 창작물들은 게이에 대한 혐오가 존재함에도 꾸준히 BL물로 소비되어 왔으나 레즈비언을 다룬 얘기는 희소하다. 이게 뭐야?는 기존에 BL물을 보는 소비층에겐 익숙한 소재 일 것이고, BL을 보지 않는 독자들이라도 미디어에 꾸준히 노출됨으로써 이제는 ‘게이’가 그리 어색하고 놀라운 얘기가 아니다. 그렇기에 반대로 모완이 레즈비언의 성적 코드를 보여주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을 해봤다. 만약 모완이 그랬었다면 사람들의 재미를 얻어 낼 수 있었을까?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
간단하게 우리의 연애가 이상해? 혹은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게 연애하고 살아가 와 같은 이야기였다고 보인다. 물론 완자 같은 경우는 1화에서 만화로 세상을 바꿀거야! 라고 포부를 밝혔지만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ㅜㅜ 지금과 같은 사회분위기 속에서 내가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비밀이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와 같은 물음이지 않았을까?
작품이 비판/연대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모완의 한겨레 인터뷰에서 야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끙끙 앓고 있는 벽장 속 청소년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을 모아 보듬고 쓰다듬는 장을 만들었으면 해요.” 사실 작품을 보면서 이들이 연대하고자 하는 대상이 청소년 성소수자라는 것이 잘 드러나진 않지만 완자라는 캐릭터는 고등학생 때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왕따를 당했던 경험적인 에피소드를 그렸었다. 작가가 자기 경험을 통해 생각했던 한국사회의 약자는 ‘청소년 성소수자’였던 것이고, 어디에 말 못하고, 지지 받지 못하며, 자기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청소년들에게 말을 걸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끝으로
사실 별 생각 없이 보던 웹툰이었다. 모완도 그렇고 이게 뭐야?도 마찬가지였다. 작품을 읽어내면서 질문을 하고 내 나름의 해석을 하는 과정이 다 어색했다. 그리고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연대하고자 하는 것을 읽어내는 것은 더 어렵다고 느껴졌다. 분발해야 겠다. 흑
오늘은 쪽글은...정말 쪽글답게 썼습니다.
안기옥
작품은 정확히 30회까지 봤습니다.
더 이상 읽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작품이 형편없어서 읽을 가치를 못 느꼈습니다.
(사실 10회까지 읽는 것도 힘들었는데, 정해진 텍스트니까 꾸역꾸역 다 읽으려고 노력하다가… 30이 한계였어요.)
제대로 읽지도 않은 사람이 작품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지만,
몇 자 적어봤습니다.
읽기를 그만 둔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1) 30회씩이나 읽었는데도 그 이상 읽게 만드는 힘이 없다면, 이미 작품은 (그 독자에게만큼은) 실패한 것 아닌가.
2) 그림이 형편 없다. 나에게 자격이 있다면, 이 작가에게 ‘만화가’라는 전문가의 타이틀은 주지 않겠다.
3) ‘설명’의 화법을 쓰고 있다. 개인적으로 텍스트의 전달 방식에서 가장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가장 재미있는 예술 형식으로 꼽히는 ‘만화’를 가장 재미없는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다. (30회 이후에 내러티브 방식이 달라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여기까지도 길다) 정말 난감하다.
4) 작가 본인이 특별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난 일반인 너희와는 다른 생활을 하고 있어. 내 특별한 연애사를 이야기해 줄께”라는 식의, ‘고상한 다름’, ‘특별함’을 그리고 있다. ‘소수’라는 희귀성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뭔가 낸시랭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5) 4번에서 이어지는 건데, ‘성적소수자’라는 극히 민감한 주제로 작품을 만들면서 본인 스스로 그들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나는 굳이 레즈가 될 필요는 없었는데, 야부를 만나 어쨌거나 이렇게 되었다”라며 잘난 척을 하고 있다. 표현이 심할 수는 있는데 이건 잘난 척이 분명하다.
<모두에게, 완자가 : 우리 모두의 사랑 이야기>
이명선
여고를 나온 내게 좀 특별한 고교 동창생 한 명이 있다. 누구보다 여성스러운 이름을 지녔지만, 우리는 그녀를 '강군'이라 부른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다부진 몸을 지녔던 강군은 입학초부터 전교생의 관심거리였다. 강군의 트레이드 마크는 체육복 바지였다. 죽어도 치마를 입기 싫어했기에 강군은 매일 학생주임 선생님의 복장 단속을 피하고자 우리보다 한 시간이나 먼저 등교했다. 하지만 강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단아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이유는 역시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였다. 선생님들은 강군에게 여타 학생처럼 머리를 기를 것을 주문했고, 아이들은 그의 질병(?!)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청문회를 벌였다.
이질적인 존재는 늘 바이러스 취급을 받는 것일까? 특히 강군처럼 생물학적인 차이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더 배타적인 자세를 취한다. 얼마전 전세계를 파-검파와 흰-금파 두 부류로 나눴던 드레스 색깔 논란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거짓말이다, 장난치지마라"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이 보는 것에 대한 확신했다. 직접 보거나 느낀 것,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것은 불변의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다. 강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사상의 차이는 환경이나 교육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마저 생물학적인 요소들에 대해서는 본인이 체험한대로 믿곤 한다. 여자인 본인들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체험이, 그리고 수 십년간 지켜본 귀납적 결론이 확신을 주는 것이다. 이처럼 분명한 경험은 오히려 차이 인정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
만화 '모두에게 완자가'는 동성애 대한 두터운 사회적 편견에 균열을 냈다. 이 작품의 작가 완자도 작품을 시작할때부터 쉽지 않은일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자신의 연애담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풀어내 조금씩 성 소수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놓았다. 만화라는 장르의 장점도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우선 여자와 여자간의 사랑을 만화로 구성하므로서 사랑 그 자체의 이야기를 집중하도록 했다. 이성애자가 볼때 시각적으로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는 장면들을 캐릭터로 바꿔 표현하면서 좀더 순수하게 사랑 그 자체의 이야기에 접근하도록 했다. 또 작가의 고민이 매화마다 녹아들어가면서 작가의 진심이 독자들에게 조금씩 전이됐던 것 같다. 만화는 확실히 부드럽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동성애를 다룬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강렬하게 기억된다. 세 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간의 사랑은 밀도 있게 표현됐다. 소재만 성 소수자간의 사랑이었을 뿐 영화는 우리 모두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풋풋함과 설렘,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섹슈얼리티, 집착, 이별 등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히려 이성애자들간의 사랑에서 불거질 수 있는, 능력 외모 집안 등 상투적이고 피상적인 문제들이 완전히 제거되고 사랑 그 자체만을 다뤘기때문에 그들간의 사랑이 더 애뜻하고 순수해 보였다. 만화나 영화, 소설과 같은 예술의 영역은 마치 가랑비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씩 적시는 듯하다. 강압적이지도 일방적이지도 않게, 예술은 막혔던 소통에 물고가 트이도록 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여전하구나'와 '변했구나.' / '닮았구나'와 '다르구나’
조익상
"만약 동성애를 모르던 독자와 마주친다면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닮았다는 말. 그리고 두번째로는 다르다는 말."
...
<모완>의 이야기 전략을 욕망으로 환치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모완>의 베댓 독자들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기분 좋게 받아들인다. 전적인 다름도 전적인 같음도 아닌, 다름과 같음의 적절한 혼합을 감각하며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어나간다. 이런저런 점은 동성애자의 연애도 이성애자의 연애와 다르지 않구나. 그들도 알콩달콩 사랑하는 이들이야. 하지만 이런저런 점은 동성애자의 연애가 이성애자의 연애와 다를 수밖에 없구나. 그들은 참 독특하게, 때로는 힘들게 사랑하는 이들이야. 하며.
보편성과 특수성을 가로지르며 이어간 <모완>은 그렇게 동성애에 대한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꾸었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을 잇닿게 하는 비유라는 설명법이 그 변화의 동력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거기에 하나를 더한다면, “중요한 정보만 강조되고 당연한 정보는 없었던” 이전 미디어의 동성애 재현에 대한 완자의 문제의식을 꼽을 수 있다. ‘중요한 정보’가 주로 다름의 강조에 해당한다면, ‘당연한 정보’는 ‘일반’과 ‘이반’이 같아서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던 부분과 다르지만 흥미롭지 않으므로 무시되었던 부분을 동시에 아우른다. <모완>의 미덕과 성공은 ‘당연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힘을 쏟았다는 데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소설보다는 수필에 가까운 ‘생활툰’이라는 형식을 채택했다는 점과 뗄 수 없다. <모완>은 일기와 편지와 회고록의 형식을 넘나들며 ‘자기’의 이야기를 써나간다. 그러면서 이 ‘자기’의 이야기는 온전히 자기의 것만이 아니라 여성의 것이자 동성애자의 것이라는 점을 또한 명확히 한다. 1920년대를 전후해 나혜석이 써나갔던 여성으로서의 자기 이야기처럼, 완자는 동성애자로서의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그렇기 때문에 아기자기하다. 시시콜콜하고 아기자기한 이야기 속에서, 완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그와 연결된 동성애자들의 삶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채로 대표한다. 독자들도 이를 지각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지루할 정도로 다양한 결을 자아내면서.
"만약에 헤어진 야부와 마주친다면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여전하다는 말. 그리고 두번째로는 변했다는 말."
그렇기에 4년에 걸쳐 268화 동안 이어진 이야기가 막을 내리기 전에, 그리고 10년에 걸친 야부와의 연애가 막을 내리기 전에, 완자가 했던 이 말은 내게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다름과 같음의 양가적인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다음 작품/다음 만남에서 여전하지만 달라진 자신을 여전하지만 달라진 눈으로 바라봐주길 바라는 완자의 욕망. 보편과 특수를 시간성 안에서 또한 서사 안에서 생각하게 하는 이 양가적 욕망을 감각하며, 성장소설(교양소설 bildungs roman)을 넘어서는 어떤 양식을 예감하게 된다. 더 살펴보고 더 생각해 보아야겠지만, <모완>은 충분히 흥미로운 타자로 우리 앞에 섰다가 떠났다. 흥미롭지 않은 타자는 만나보려고도 하지 않는 우리에게, 흥미의 색다른 지점을 언뜻 비추고서 이별과 함께 갑작스레 떠난 <모완>의 부재가운데, 완자를 다시 만날 때 바라볼 우리의 눈을 준비해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