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가족들 곁을 떠나 낯선 땅 순천에 내려온 지도 언 4년.
순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에 조그만 방을 하나 얻어 자취 생활을 시작한 지도 벌써 3년째. 서른 한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만 생각해도 혼자서 밥해 먹고, 빨래하며 직장 생활을 해야하는 어려움이 이제쯤 싫증이 날 법도 한데 난 아직껏 이 생활에 그다지 싫증을 느껴보지 못했다. 아마도 그것은 대부분의 도시인들이 불편해 하고 답답해 할 이곳의 생활에 나 나름대로 위안을 얻고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어떤 요소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우선 나의 자취집을 둘러싼 자연 환경이 나로 하여금 마음 편하게 해준다.
집 뒤로는 조그만 배밭이 있고, 그 뒤로는 구릉에 가까운 작은 산이 있어 내 자취집과 배 밭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데, 봄에는 하얀 배꽃을 보는 즐거움이 있고, 가을에는 담 너머로 손을 내밀어 맛있는 배를 사먹는 즐거움이 있다.
집 앞에는 작은 저수지가 있고, 집 앞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산골마을 쪽으로 500m쯤 가다보면 제법 커다란 저수지가 있어서, 평온한 수면과 그림 같은 저수지 건너편의 마을을 바라보며, 낚시를 드리우고 앉아 간혹 올라오는 물고기의 싱싱한 몸부림을 손 끝으로 느껴보는 것도 즐겁거니와, 비록 빈 광주리일망정 감히 월산대군과 나를 견주어 보며 ‘석양에 밤이 드니’로 시작되는 그의 시조를 읊조리며, 저수지 속에 드리워져 있는 낙조를 바라보는 것 또한 그 즐거움이 제법이다.
마당에 나서면 왼편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400여 미터 높이의 뾰족한 ‘첨산’이 우뚝 서 있고, 간혹 그 산 정상에 올라 보면 주위산과 두 개의 저수지와 어우러진 나의 자취집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데, 다시 순천만을 따라 내 눈길이 남해안에 닿으면, 속살을 보이지 않으려는 여인네 심사처럼 살그머니 수평선을 가리고 있는 겹겹의 섬과 푸른 바다의 조화가 또한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거기에 쭈-욱 뻗은 철길을 따라 푸른 벌판을 가로질러 산 모퉁이를 돌아 사라져가는 기차의 모습과 긴 울음 소리에라도 접하노라면 진정 잠시나마 저 아래 세상에서의 짙은 시름과 어려움을 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이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의 나의 외롭고 힘든 자취 생활에 위로와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은, 창문을 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바라다 보이는, 첨산 끝자락에 사뿐히 내려앉은 그리 크지 않은 교회와 그 첨탑이며, 특히 운이 좋은 날 새벽이면 바람에 실려 높고 낮게 물결쳐 와서 잠결인 나를 일으켜 세워 창문을 열고 가슴 깊이 자기 소리를 들여 마시게 만드는 그 교회의 종소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결혼 초년에 얻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연이어 잃으신 나의 부모님께서는 행여 하는 마음으로 기독교에 귀의하셨고, 생명을 지키듯 열심이셨을 그때의 신앙 생활에서 아버지께서는 교회 종치기의 소인을 마다하지 않으셨으니, 남들이 모두 잠들어 있는 이른 새벽에 배부른 어머니를 자전거에 태우시고 새벽 예배 준비를 위해 종을 치러 나가시곤 하셨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기독교인들은 일요일을 그렇게 부른다.- 새벽, 여느 때처럼 아버지께서 새벽종을 치러 가시기 위해 준비하실 무렵, 어머님께서는 산고를 느끼셨고, 그렇게 태어난 사내아이를 부모님께서는 기꺼이 ‘주님의 종’으로 비치시기를 약속하시며 이름을 ‘주일’이라 지으셨다. 그 사내 아이가 지금의 나임은 물론이고.
하지만 연이어 두 아들을 더 얻으신 나의 부모님께서는, 기관지염이라는 지병의 악화로 농사일 같은 힘든 일을 할 수 없으셨던 아버지께서 이후 자주 도회지를 겉도시게 됨으로써 많은 시간을 떨어져 사셔야 했고, 그같은 생활은 우리 가족 모두가 서울로 이사를 했던 내 국민학교 6학년 때까지 계속 되었던 것 같다.
그사이, 지아비도 없이 사실상 혼자서 세 아들을 키우셔야 했던 내 어머님께서는 오직 신앙심 하나로 낮의 힘든 농사일과 밤의 외로움을 견디어 내셨으리라!
지금 생각하면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분명치 않지만 거의 매일 밤, 어머님께서는 우리 세 아들을 단정히 무릎 꿇게 하시고, 찬송가 한 곡에 성경 한 구절을 읽고 어머님의 기도로 마무리하는 간단한 예배를 보고서야 잠자리에 들게 하셨다. 종종 어머님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두 동생은 방바닥에 그대로 엎드려 잠이 들곤 했으며 나 또한 어머님의 기도 소리가 아련히 멀어짐을 느끼며 그만 잠이 들어버린 때가 많이 있었다. 어머님의 기도가 무엇을 절규하고 계신 지는 아랑곳없이 ‧‧‧‧‧‧.
그때 눈물 반, 기도 반 하시던 어머님의 기도는 지금도 내가 뚜렷하게 기억할 정도로 거의 일관된 내용이었으니
“객지에 나가 계신 이 집안 호주를 주께서 지켜주시고, 건강을 회복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여기 이 세 자녀를 돌보아 주셔서 건강하고 똑똑하게 자라서 남의 머리가 될 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나아가 이 집의 경제적 형편도 주께서 돌보아 주셔서 넉넉하게 해 주시고, ‧‧‧‧‧‧!”
또한 많은 날을, 어머님께서 울면서 기도하시는 소리와 함께 새벽 잠을 깼어야했는데 어린 나이였지만 나 또한 어머님의 울부짖음 따라 아무도 모르게 내 베개를 흠뻑 적시곤 했다. 그때쯤이면 으레 새벽 예배가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 왔으며, 문을 열고 나가시는 어머님의 인기척을 들으며 나는 다시 잠이 들곤 했다.
한편, 평상시 어머님께서는 시간이 있으실 때마다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넌 크면 꼭 목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에 한번이라도 빠지면 안되고, 술 담배 같은 나쁜 것은 절대 배우면 안된다. 그리고 거짓말이나 도둑질 같은 나쁜 짓도 하면 안되고 꼭 착한 일만 하도록 해야 한다.”
생각해 보면 많은 시간, 내 베개를 흠뻑 적시며 들어야 했던 어머님의 눈물 어린 기도와 어머님의 애타는 당부와 희망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하신 것 같다. 하지만 술, 담배를 배우지 않은 것 외에 결국 나는 어머님의 소원을 들어 드리지 못했다. 그토록 당부하셨던 목사가 되기는커녕 어머님의 ‘주님’을 철저히 부정하고 있으며 더나아가 오늘 나이 드신 어머님을 가까이서 모시기는 커녕 이처럼 어머님 곁을 멀리 떠나와 또다시 어머님으로 하여금 ‘주님’께 매달리시며, 새벽 예배에 열심이시도록 하고 있으니…….
이 밤도 내 귓가에 어머님의 기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밤도 늦었으니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베개를 바로 놓아야겠다. 내 어릴 적, 어머님의 기도 소리와 함께 들었던 그 종소리를 내일 새벽에도 들을 수 있게 되길 바라며‧‧‧‧‧‧.
첫댓글 그리 태어 나셨군요. 교회의 연을 바탕으로 태어나신 선생님이 셨군요. 저완 사뭇 다르지만 공감되는 부분 입니다..^^*. 언젠가 어린시절 저의 어머님의 모습을 잠시 떠올려 보게되는 ... 어머님, 건강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