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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가수다!
“헤이! 미스 아가씨! 잠깐 나랑 얘기 좀 할까요?”
거리의 가로수 플라타너스 낙엽이 바람개비처럼 맴돌며 저만큼 보도 위에 추락한다. 넋이 빠진 듯 경황없이 걷던 나영은 마치 자신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바로 이때 누군가 그녀의 뒤에서 말을 건네 왔던 것이다.
“누구시죠? 전 지금 시간이 없다구요!”
나영은 낯선 남자에게 이렇게 대꾸했지만 말투는 당장 싸움이라도 걸듯이 사납게 쏘았다.
“하하! 내가 부른 미스 아가씨란 ‘미래 스타 아가씨’란 뜻이예요! 그러니까 잠깐 10분만! 아니 5분도 좋아요!”
“뭐라구요? 그럼 아저씨도 사기꾼 이예요?”
순간 나영은 남자의 앞으로 다가서며 날카롭게 외쳤다.
“뭐라구? 날더러 사기꾼...? 하하! 그걸 어찌 알았지? 좋아요! 그럼 잠깐만 사기꾼 얘길 들어봐요!”
그러자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앞장을 서며 나영을 바로 골목 안에 숨어 있는 <7080 추억호프>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래, 제게 하실 말씀이 뭐죠?”
이윽고 써빙하는 알바 생이 호프 500짜리 둘과 마른안주를 통짜나무 테이블에 내려놓고 가자 나영이 역시 날카로운 말투로 물었다.
“요즘 인터넷 세대들은 피망증(피해망상증) 세대인가 봐! 우선 한 잔 하고서 얘기하자구...!”
그가 먼저 호프 잔을 들어 기울이는 바람에 나영도 어쩔 수 없이 보조를 맞추었는데, 이윽고 빈 잔을 쾅 소리 나게 내려놓은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스 아가씨! 난 미스타 박! 박태성이란 가수 겸 작곡가 겸 매니저예요. 근데 내 경우 미스타란 ‘미수에 그친 스타’란 뜻이구...! 하하!”
그의 장황한 자기소개에 나영이 순발력 있게 받아쳤다.
“그러니까 절 미래의 스타로 만들어 주겠단 감언이설인가요?”
“어? 그리 감동 없이 말하는 걸 보니까, 정말로 미스 아가씬 사기꾼한테 당했나보군?”
그러자 박태성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침묵을 했다가 나영에게 엄숙한 어조로 질문을 해왔다.
“미스 아가씨! 또 한 번 속는 셈치고 ‘난가페’에 나가보지 않겠어요?”
“네에? ‘난가페’라구요?”
“으응! 목포에서 가을에 열리는 ‘난영 가요 페스티벌’인데, 내가 왕년에 MBC 대학가요제 은상 출신이걸랑! 그래서 신인 발굴을 하고 싶어서...!”
“흥! 어쩜 내가 만난 가짜 PD랑 똑같은 얘기네요?”
“아하! 그래서 아까 날더러 사기꾼이라고 했군? 암튼 좋아요! 그쪽 사기꾼한텐 어떻게 당했는지 모르지만 대신 나한테 복수해 봐요! 이번엔 미스 아가씨! 그래서 진짜 미래의 스타가 돼보라구! 하하!”
이곳에 따라올 땐 5분도 길다고 여겼는데 나영과 박태성은 벌써 20분 가까이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죠? 아저씨! 아니 박 가작매(가수.작곡가.매니저) 쌤에게 한 번 더 속아드릴께요! 호호!”
나영은 웃음으로 말끝을 맺으며 문득 지난 날 그 치욕스런 사기사건의 추억에 잠겼다.
* * * * * * * * * *
“공부는 천재가 아니라도 노력만 하면 우등생은 되는 겨! 그래서 에디슨도 말했잖니? 자신의 성공은 99%의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지만 가수는 달라! 타고난 소질이 있어야지!”
바로 나영이 중학교 때부터 하란 공부는 안 하고 가수의 꿈에 미쳐 날뛰자, 그녀의 어머니가 마치 계모처럼 미워하며 꾸중하는 말이었다.
“엄마! 바로 내가 가수의 소질을 타고 났다구요! 한번 해볼까?”
하면서 나영은 중학교 때 한창 인기가수이던 보아의 노래 ‘넘버원’을 부르며 춤까지 추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기가 막혀 소리쳤다.
“이 년아! 가수는 아무나 하는 줄 알아? 잘못 하면 돈 날리고 몸 더럽히는 게 가수란 말야!”
하고 이런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예언 탓이었을까? 기어이 그녀가 어머니의 뜻을 꺾고 예대藝大 실용음악과에 입학하여 가수의 꿈에 넋이 빠졌을 때 가짜 PD가 그물을 쳐온 것이었다.
“이나영 학생! 나 이런 사람인데...!”
실용음악과의 전통에 빛나는 음악동아리의 회원이 되어 노래 연습을 마치고, 마악 캠퍼스의 교문을 나선 그녀 앞에 30대 초반의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건네 왔다.
“네? 누구신데 저를 아세요?”
“아! 한국예대 실용음악과의 이나영을 모르는 방송국 PD라면 그건 가짜라구! 학생이 얼마나 노래 잘 한다구 방송가에 소문난 지 알아?”
“뭐라구요? 그게 정말예요?”
그때만 해도 나영은 순진하고도 어리석은 가수 지망생에 불과했다고나 할까? 이런 한 마디에 홀딱 넘어가 그 남자가 내미는 명함을 소중히 받아들고 그를 우러러 보았던 것이다.
“요즘 우리 케이블 TV에서 대박 난 프로 ‘슈퍼가수 M' 알지? 내가 그 프로의 PD라구! 그래서 은밀히 슈퍼가수로 띄울 후보를 찾고 있다구...?”
“네에? 그건 지망생들끼리 경합하는 프로가 아닌가요?”
“이런! 그런 지망생 애들은 모두 오합지졸이야! 진짜 산삼 같은 숨은 스타감은 나처럼 찾아다녀야 한다구...!”
“아! 그렇군요? PD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때 나영은 벌써 인기 연예인이라도 된 듯 PD라는 사람에게 허걱 덤벼들었던 것이다.
“근데 나영이를 슈퍼 가수로 띄우려면 충전비가 필요해!”
이윽고 귀신에 홀린 듯 몇 번 그와 만나는 동안에 나영은 정말로 전국 예선에서부터 계속해서 합격자로서 승승장구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가짜 PD는 케이블 TV방송국으로 불러 은밀한 지시와 정보를 줌으로써 나영에게 사이비 교주처럼 군림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요구를 아주 당당하게 해왔다.
“PD님! 충전비라뇨?”
“야! 풍선이 그냥 하늘로 떠오르냐? 가스를 넣어야지! 슈퍼가수도 마찬가지란 말야!”
“아아! 네에! PD님!”
결국 나영은 평소에 남몰래 저축했던 비자금과 어머니에게 최대한 이쁜 딸 도둑년이 되어 털어낸 거금을 홀딱 날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석 달이나 지났지만 나영은 아직도 충격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데 또 이 남자의 유혹에 빠져드는 건 아닐까? 나영은 벌써 두 잔째의 호프를 입안에 쏟아 붓고 나자 알콜의 반응을 느끼면서 박태성을 쏘아보았다.
“하하! 왜...? 이번엔 절대로 안 속겠단 말이지? 하지만 예술가는...! 아니 가수가 되려면 바보가 돼야 한다구! 누가 뭐래도 가수가 될 수 있다면 무조건 미쳐야 그 꿈을 이룰 수 있단 말야! 내가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해서 은상을 받을 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 그때 나도 한 사기꾼! 아니 선배를 만났는데...!”
하면서 박태성은 그녀 앞에서 20여년 가까운 세월 너머로 멀어진 대학시절의 캠퍼스 추억 속으로 달려갔다.
* * * * * * * * * *
‘아! 난 언제나 저 탑에서 날아볼 수 있을까?’
태성은 캠퍼스의 벤치에 앉아 남산 타워를 바라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바로 그가 다니는 대학의 뒷산이 남산이요, 그곳에 우뚝 서 있는 남산 타워에는 각 방송국의 송신탑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태성이 가수가 된다면, 그는 전파가 되어 남산 타워에서 쏘아질 것이 아닌가? 이런 상상에 빠져 있는 태성에게 뒤에서 어깨를 툭 치는 선배는 <남도(남산 도깨비)>란 별명을 가진 실용음악과의 늦깎이 복학생이었다. 그래서 그는 외모로만 보면 강사, 아니 교수님으로 착각할 만 했다.
“야! 아후(아끼는 후배)야! 뭘 그리 보나? 하늘에 UFO라도 떴냐?”
<남도> 선배의 말에 태성은 그제야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형! 대낮부터 웬일이세요?”
“하하! 짜샤! 낮도깨비도 있잖냐?”
“하긴 금방 비가 내릴 것 같네요! ...근데, 형은 강의 없으세요?”
“얌마! 10년 도깨비가 강의 받을 게 뭐 있겠노? 너도 공강空講이면 날따라 온나!”
“땡큐! 써!”
태성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남도> 선배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이 대학 학생들의 아지트인 <동굴집>으로 향했다. 술을 사는 건 <남도> 선배지만, 태성이 앞장선 것은 그만큼 둘이는 여러 번 그곳에 함께 갔던 것이다.
“자! 앉으라잉!”
마침 올 때마다 같은 테이블이 비어 있어서, 오늘도 태성과 <남도> 선배는 똑같은 자리에 마주 앉았다.
“마담형! 여기 술과 안주 줘잉!”
주인이 <남도> 선배와 나이가 비슷한 터여서 <남도> 선배는 이렇게 주문했다.
“오우! 예스! <송강주>로 할까잉?”
여기서 <송강주>란 국문학사에 나오는 송강 정철이 <장진주사>에서 <꽃꺾어 산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한 것처럼, 술을 여러 병 마시겠느냐는 뜻이었다.
“아후(아끼는 후배)랑 왔으니까, 물론이지잉!”
두 사람은 말꼬리마다 ㅇ(이응)을 붙여 주고받았다. 그리고 술이 오기가 바쁘게 서로 상대방의 잔에 따라서 마치 시합이라도 하듯이 들이켰던 것이다.
“헤이! 태성아! 너 그리도 빨리 가수가 되고 싶냐?”
술잔이 서너번 오갔을 때, <남도> 선배가 태성의 눈을 쏘듯이 바라보며 물어왔다.
“형처럼 7수 8수 할 수는 없다구요!”
<남도> 선배는 군대에 있을 때를 빼놓고,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했다지 않던가? 그래서 태성이 이렇게 야유성 대꾸를 했지만, <남도> 선배는 오히려 기다린 대답이었다는 듯이 미소로 받아주었다.
“좋았어! 그럼 우리 합작 한번 해볼래잉?”
“합작이라뇨? 형이랑 나랑 듀엣? ...음! 그럼 팀 이름을 뭐라고 짓죠? <낮도깨비와 테리우스>?”
태성이 이렇게 대답하자, <남도> 선배는 팔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얌마! 칠전팔기七顚八起는 복싱에서나 써먹는 말이구! 가수 스물아홉은 환갑이야! 그러니까 난 노래를 만들고, 네가 싱어로 출전하란 말야!”
“우와! <남도>형! 저를 그리 평가하시는 걸 보니까, 벌써 꽤나 취해셨나봐잉!”
태성은 기쁜 마음이면서도, 짐짓 <남도> 선배의 말투를 흉내 내어 대답했다.
“짜슥! 이제부턴 내 말을 하느님으로 알고 복종해! 알았제잉?”
그러면서 <남도> 선배는 갑자기 엄숙한 얼굴로 태성의 잔에 술을 따랐고, 태성 역시 진지한 태도로 <남도> 선배의 잔을 채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정철처럼 <송강주>로 마셔댔다. 태성은 결국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도> 선배의 자취방에서 하룻밤 묵는 신세를 졌다.
“...내 자취방이자 작업실이라서 엉망이다! 흉보지 말라잉!”
<남도> 선배는 무척 취했으면서도 이렇게 태성에게 양해를 구했고,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자취방은 마치 이삿짐을 풀어놓은 것처럼 난장판이었다.
“아휴! 형! 정말 도깨비네잉! 하하!”
너무 기가 막혀 웃는 태성에게 갑자기 <남도> 선배가 달려들면서 소리쳤다.
“야! 이 짜슥아! 넌 꼭 대학가요제에 입상해야 한다잉! 그래서 내 지난 날의 꿈을 네가 대신...! 으흐흑!”
<남도> 선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려, 태성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때 태성도 왠지 가슴이 북받혀서 마주 <남도> 선배를 끌어안고 이렇게 외쳐댔다.
“그래! 형! 나 기어이 금년 대학가요제에 출전해서 입상을 할 거야! 그러니까 형이 좋은 노래만 만들어 줘요!”
“좋은 노래? 그건 내가 만드는 게 아니야!”
그런데 이때 <남도> 선배는 뜻밖에도 이런 대꾸를 하는 게 아닌가?
“아니! 형! 아까 <동굴집>에서 분명히 형이 내 출전 곡을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요?”
“물론 그랬지! 하지만 아기를 낳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으응? 그건 또 무슨 얘기우?”
의아해서 묻는 태성에게 <남도> 선배가 옷을 훌훌 벗어던지면서 대답했다.
“에헴! 그건 샤워 하고 와서 가르쳐줄게!”
그러면서 <남도> 선배는 그의 버릇인 듯 나체로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태성은 어지러움에 하나뿐인 침대로 가서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얌마! 너도 씻고 오라잉! 어린 게 웬 수컷 냄새람!”
별수 없이 태성도 샤워를 하고, 두 사람은 한 침대에 누워 수면용 조명등을 켰다. 갑자기 방안이 푸른 세상으로 바뀌자, <남도> 선배가 정말로 <남산 도깨비>처럼 기괴한 모습으로 변했다.
“와아! 형이 왜 <남도>인가 했더니, 이제 보니 정말이네? 히히!”
그래서 태성이 이렇게 놀려대자, <남도> 선배는 두 팔을 뻗어 태성의 얼굴을 끌어당기고는 마치 주문을 외듯이 속삭였다.
“노래가 뭔지 알아? ...그건 죽음이야!”
그의 눈빛은 SF영화의 외계인처럼 번뜩였다.
“형! 노래가 죽음이라뇨?”
어처구니가 없어 묻는 태성에게 <남도> 선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목숨을 걸고 도전해야 하는 것이 노래니까! 그런데 난 소질만 믿고, 겨우 취미삼아서 했으니까 여지껏 안 됐지!”
그러면서 <남도> 선배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의 이런 처참한 모습은 태성에게 정말로 도깨비를 만난 듯 황당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태성 역시 그의 심정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냥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형! 이제 그만 자요!”
이윽고 태성이 <남도> 선배를 향해 애원하듯 말하자, 그제야 다시 침대에 그의 알몸을 눕혔다.
“태성아! 오늘밤 나의 모습을 기억해둬! 넌 나와 같은 아픔을 되풀이해선 안 되니까...!”
“...참! 형! 아까 샤워하고서 가르쳐 준다던 건 뭐지?”
이윽고 태성이 궁금증이 생각나서 묻자, 그제야 마음이 진정된 듯 <남도> 선배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내가 노래를 만들지만, 그 노래를 부를 태성이 얼마나 열망하느냐에 따라, 내 안에서 작사와 작곡이 나오게 된단 말야!”
“.....?”
“아직도 이해가 안 가니? 노랫말과 작곡과 노래는 따로 떨어진 게 아니라 하나라구! 즉 생명체와 같단 말야! 그러니까 남녀가 아기를 만들 때처럼, 너와 나는 한 마음 한 몸이 돼야 하는 거지!”
“점점 어려워요!”
“바보 같은 짜슥! 얌마! 너의 노래에 대한 목숨 건 처절한 열망이 내 마음속에 전달돼야만, 내가 그와 같은 작사와 작곡을 해낼 수 있을 게 아냐?”
“아! 이제야 알 것 같아요! 형의 말뜻을...!”
그 순간 태성은 <남도> 선배의 마음! 아니 그의 영혼이 만신창이가 되어 몸부림치는 걸 보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도 같은 모습이 되어 나뒹굴었다.
“사랑한다잉! 너의 노래를...!”
“저두요! 형의 모든 것을...!”
이윽고 두 사람은 떨리는 목소리로 주고받으며, 서서히 한 마음 한 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태성이 난생 처음 하는 야릇한 체험이었다. 그런 탓인지 밤새도록 꿈도 이상스럽게 꾸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 꿈의 내용이 모조리 잊혀져서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암튼 황홀하고도 행복했던 것만은 분명하다고나 할까?
“태성아! 너 오늘부터 나랑 <영혼 주고받기>를 해야 한다잉!”
다음 날 태성이 눈을 떴을 때, <남도> 선배는 이미 아침식사까지 다 챙겨 놓고 활기에 넘치는 목소리로 건네 왔다.
“어떻게요?”
“대학가요제에 출전할 너의 노래가 빨리 만들어지도록 재촉하는 메시지를 나의 삐삐에 수시로 보내는 거야!”
“아니! 형은 아직두 삐삐를 쓰우?”
“으응! 핸드폰은 내 작업을 방해할 수가 있거든! 019-233-4540이니까, 알았지?”
“오케이! 밤낮 불문하고 지겹도록 할 테니까, 빨리 작업이나 끝내줘요잉?”
태성은 이렇게 약속하고, <남도> 선배가 차린 아침식사를 후딱 비워버렸다. 그리고 오전 강의가 첫 시간부터 있어서 먼저 학교로 왔던 것이다.
<형! 어젯밤에 교향악을 연주했어요! 무슨 코를 그리 골우? ...참! 나 삐삐친 사연 아시지잉? 내 노래! 우리 이미 한 마음 한 몸이 됐으니까, 작사 작곡이란 쌍둥이를 임신할 수 있겠죠잉? 히히! 형을 무지 러브하는 태성이 띄웁니다! 하하! 참 제 핸드폰은 아시죠? 답신도 부탁해요잉!>
첫 번째 메시지라서 무척 고심하다가, 태성은 낯이 좀 뜨거웠지만 <남도> 선배의 삐삐에 이런 내용을 되도록 분위기를 잡고 목소리를 깔아 전송했다. 한데 이상하게도 <남도> 선배는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록 태성에게 아무런 답신이 없었다.
<형! 뭐야잉! 외로운 나 혼자 놔두고 무슨 딴 꿈을 꿔요? 내 노래는 어찌 되고 있어요잉?>
짐짓 화가 난 투로 태성이 다시 <남도> 선배의 삐삐에 메시지를 입력시켰지만, 역시 무소식이었다. 그뿐 아니라 <남도> 선배가 수강하는 실용음악과의 강의시간에도 찾아가 보았으나, 그의 모습조차 사라져 버렸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태성은 불길한 예감까지 들었지만, 그렇다고 불쑥 <남도> 선배의 자취방까지 찾아 갈 수는 없었다.
“아후(아끼는 후배)야! 네 맘대로 다시 여기에 와선 안돼! 닭도 알을 낳을 때에는 혼자 있어야 한다구! 알았지잉?”
그날 아침에 태성이 <남도> 선배의 자취방을 나설 때, 그는 다짐하듯 이런 당부를 해왔던 것이다.
<혀엉! 너무해! 날 잊었우? 아니면 버린 거야? 노래는 나중 문제고, 핸드폰이나 한 번만 때려줘요잉! 흐흑!>
정말 태성은 화도 나고 걱정을 지나 의혹도 생겨서, <남도> 선배의 삐삐에 이렇게 아우성을 쳐댔다. 그리고 <남도> 선배가 태성의 핸드폰을 타고 달려온 것은 그때였다.
“태성이니? 오래 기다렸지잉?”
“와아! 심했어잉? 형! 살아는 있었구려!”
“미안해! 근데 큰일 났다!”
“무슨 큰일?”
“짜샤! 좋은 노래를 만들려면, 너의 삐삐를 백번쯤은 받아야 하는데, 오십 번도 안 받았으니, 작품이 미숙아가 됐지 뭐노? 안 그래?”
“왓? 벌써 노래가 완성됐단 말이우? 거기 어디예요? 형 자췻방...? 당장 갈께요!”
그러나 태성은 조급한 마음에 이렇게 외치며, 핸드폰을 끄고 캠퍼스 교문을 향했다. 그리고 택시를 잡아타고 단숨에 <남도> 선배의 자췻방으로 달려갔다.
“얌마! 너 총알이냐? 하하!”
태성이 곧장 <남도> 선배의 자췻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남도> 선배는 말은 그리 하면서도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형! 악보나 봐요!”
“얌마! 테리우스! 성질도 급하긴...! ...그래! 이 작품은 네가 쓴 거나 마찬가지야! 너의 간절한 소망이 내게로 왔으니까!”
다음 순간 <남도> 선배는 한 손으로는 태성을 얼싸안고, 다른 손으로는 악보를 들고 기타를 찾았다. 태성은 빼앗듯이 악보를 받아서 <신입생>이란 노래의 가사를 읽어보았다.
그애와 내가 만난 건 정말 우연이었네! /
그날은 대학입시 발표하던 날!
새벽부터 떨리는 조급한 가슴을 안고 /
흰 눈 내리는 학교길을 걸어서 갔네!
학교로 독서실로 혹은 도서관으로 /
지나간 학창시절 3년 동안은
정말로 바쁘고 고달팠었네! / 아! 가슴 뛰는 입시의 관문!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
함박눈 쏟는 하늘에 합격을 빌며 걸을 때
아차차! 우린 서로 맞부딪쳤네! 하! /
아차차! 우린 서로 맞부딪쳤네!
그애와 내가 만난 건 정말 기쁨이었네! /
그날은 처음으로 미팅하던 날!
아침부터 설레던 들뜬 가슴을 안고 /
꽃바람 부는 거리를 달려서 갔네!
어엿한 신입생된 그애의 모습을 /
이렇게 또다시 만날 줄이야!
정말로 기쁘고 반가웠었네! /
아! 가슴 벅찬 사랑의 느낌!
하지만 그애도 나와 같을까? /
가로등 불빛 아래 서로 마음 전할 때
아차차! 우린 그만 포옹을 했네! 하! /
아차차! 우린 그만 포옹을 했네!
“형! 바로 제가 신입생된 추억과 딱이야! 너무 가슴에 와 닿아요! 고마워잉! 혀엉!”
그때 태성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남도> 선배를 와락 끌어안고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 * * * * * * * * *
“그런데 그때 놀라웠던 일은 <남도> 형이 내가 MBC 대학가요제에서 무슨 상을 받을 것인지도 귀신같이 알아맞혔단 말야!”
이윽고 대학시절 가요제에 출전했던 추억에서 돌아온 박태성은 아직도 마술에서 풀리지 않은 해리포터의 주인공 같은 표정으로 나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에? 정말요? 어떻게요?”
“글쎄 본선에 뽑힌 출전자들이 한 달 가까이 합동연습을 했는데, 날더러 누가 노랠 제일 잘하냐구 묻더라구...?”
“그래서요?”
“당시 내 생각엔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를 부른 유열과 ”첫눈이 온다구요’의 이정석이 아무래도 큰 상을 받을 것 같았는데, 드디어 잠실 체육관에서 생방송으로 MBC 대학가요제가 열리던 날 <남도> 선배가 응원차 나온 거야!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무대로 나가려는 순간 대기실에서 매니저 노릇을 하던 <남도> 형이 글쎄 나에게 종이쪽지를 쥐어주면서 ‘넌 무조건 상을 탈 테니까 걱정 말고 이 부적을 꼭 쥐고 노래를 부르라’는 거였어.”
“네에? 부적이라고요? 호호!“
“으응! 근데 노래를 마치고 내려와서 살짝 종이쪽지를 펴보니까 뭐라 쓰였는지 알아? 세상에! ‘금상 아니면 은상’!”
“그래 맞았나요?”
“아암! 난 은상을 받았거든!”
“그럼 대상과 금상은요?”
“대상은 유열의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였고, 금상은 이정석의 ‘첫눈이 온다구요’였는데, <남도> 형이 말한 이유가 또 기가 막혔어요. 유열이 대상인 것은 그 해 MBC 대학가요제가 10회였는데 열과 열이 만났으니 장땡이라서 최고상인 대상이 된 거고, 이정석이 금상인 것은 노래 제목이 ‘첫눈이 온다구요’인데 그날 정말로 체육관 창밖으로 첫눈이 펑펑 내리는 게 보이는 거야! 그러니까 이정석 노래 제목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던 거지! 결국 그런 천우신조天佑神助! 아니 천우이치天佑理致로 대상과 금상이 정해졌고, 나는 작사 작곡자인 <남도> 선배의 본명인 최은휴崔銀休란 이름에 은銀짜가 들어가 은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대나...?”
* * * * * * * * * *
이러한 별난 사연을 가진 박태성을 만난 덕택에 나영은 사기를 당하고도 또다시 <난영 가요 페스티벌>에 출전하게 되었는데, 과연 결과는 어찌되었던가? 바로 다음 날부터 출전일이 100여일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100일 작전>에 들어간 두 사람은 매일 박태성의 기획사에서 고시 공부하듯 스파르타식의 훈련에 돌입했던 것이다.
“노래가 뭔지 알아? 스포츠야! 그러니까 체력부터 키워야 해!”
하면서 헬스장에 데리고 가서 체력을 다졌다.
“노래는 수영 같아! 노래를 잘 하려면 호흡이 짧아선 안 돼!”
하면서 노래 일절을 다 부르도록 숨을 쉬지 않는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가수는 개성이야! 너만의 색깔을 가지라구!”
하면서 가수 싸이가 ‘챔피언’을 부를 때처럼 오두방정을 떨던지 미친 지랄을 해도 좋다고 했다.
“가수는 매력 있어야 해! 걸그룹처럼 예쁘던지 방실이처럼 뚱땡이라도 뭔가 사람 끄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구!”
하면서 온갖 느끼한 표정과 몸짓도 서슴지 말라고 가르쳤다. “가수는 혼이 담겨야 최고수 가수가 되는 거야! 온갖 고통과 절망을 겪은 후에 부르는 노래! 그런 혼이 담겨야 관객을 감동 시킨 다구!”
하면서 소리꾼 장사익의 공연을 관람시키기도 했고, 피를 토하듯 열창하는 조용필의 ‘한오백년’과 임재범이 ‘나가수’에서 부른 윤복희의 노래 ‘여러분’을 들려주기도 했다. 이때 노래를 듣던 나영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자 그제야 제대로 노래의 교육이 됐다며 흡족해했던 것이다.
“미스(미래 스타)야! 이젠 현장답사를 나가자!”
<난가페>가 한 달쯤 남았을 때 갑자기 박태성이 나영에게 말했다.
“네에? 현장답사라뇨?”
“이번 행사가 목포에서 열리잖냐? 그러니까 목포로 현장답사를 가잔 말이야!”
그리하여 나영은 박태성과 서울 반포터미널에서 고속버스로 목포를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서해안고속도로로 달리니까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물론 나영에게 목포는 초행이었다. 가수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과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목포의 노적봉으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얘기 정도밖에 모르는 그녀였지만, 서해와 남해의 남단에 위치한 목포는 너무나 아름다운 항구였다.
목포에 도착하여 택시를 불러 관광지를 부탁했더니, 유달산 조각공원, 낙조대, 갓바위, 삼학도, 유달산 유원지, 춤추는 바다분수, 유달산 예술공원 등을 두루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기사 아저씨! 목포란 이름에 포浦짜가 들었으니 항구인 줄은 알겠는데요, 목포란 지명의 유래는 어디서 온 겁니까?”
이윽고 관광을 마치고 숙박할 모텔로 오면서 묻자 택시 기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예! 목포란 이름은 나무가 많아서라우! 또 목화가 많이 나서 그리 불렀다는 얘기도 있지라우! 하지만 서해 끄트머리에서 육지로 들어오는 중요한 길목이라서 목포라고 했다는 게 아무래도 가장 정설이지라우!”
목포에서 과히 크지는 않으나 친절하고 청결한 모텔에서 일박을 하고 난 나영과 박태성은 아침식사 후에 목포에서 태어난 ‘눈물의 가수’ 이난영(1916년-1965) 여사를 기념하는 난영공원 대삼학도로 갔다. 약 1천여평의 부지에 조성된 공원에는 ‘목포의 눈물’과 ‘목포는 항구다’의 노래비와 우리나라 수목장 1호라는 이난영 가수의 수목장이 있었다. 수목장이란 죽은 유해를 화장한 뒤 뼛가루를 나무뿌리에 묻어 자연친화적인 장례 방식이라 하겠다. 2006년에 경기도 파주 공원묘지에 있던 이난영 여사의 묘를 이장한 후 유해를 목포로 운구해 삼학도의 20년생 백일홍 나무 밑에 화장한 유골을 묻는 절차로 수목장 안장식을 했다고 한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41년 만에 수목장으로 안장식을 하고 기념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이난영 가수의 혼이 살아 숨쉬고, 넓고 쾌적한 녹지공간과 시민의 편의시설 등이 설치된 이 공원은 목포의 관광명소로 자리잡았다.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목포공립보통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조선면화주식회사에서 여공생활을 하다가 16세가 되던 해에 태양극단에 입단하여 무명가수로 활동했다고 해! 그러던 중 1934년에 OK레코드사에 발탁되어 전속가수가 되었는데, 손목인이 작곡한 ‘불사조不死鳥’를 취입함으로써 가요계에 데뷔한 요즘 말로 하면 전설의 가수야!”
“황금심, 백설희 같은 우리나라 1세대 가수죠?”
“으응! 나영인 역시 트롯가수 체질인가 봐? 그런 왕선배 가수들을 꿰고 있는걸 보니...! 하하! 암튼 그때부터 차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도쿄 히비야공회당에서 열린 ‘전국 명가수대회’에서 다시 한 번 재능을 인정받게 됐는데, 특히 이난영이 <목포의 눈물>을 발표했을 때는 삽시간에 선풍적인 인기로 전국을 휩쓸게 됐어요! 지금도 ‘목포의 눈물’은 아마 가요무대 프로에서 단골 레퍼토리가 될걸?”
그 순간 나영은 서울에서 태어나 햄버거나 피자를 즐겨 먹고 고생이라곤 등하교 때 버스나 전철에서 승객들에게 떠밀린 기억밖에 없으니, 이난영이 여고생 나이에 여공을 하면서 가수를 꿈꾸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상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난영의 노래비에서 흘러나오는 ‘목포의 눈물’을 듣는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어찌나 애조를 띄었는지, 가슴을 에이듯 스며 들어와서 나영은 눈시울이 시큰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 * * * * * * * * *
목포에서 1박2일의 현장답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박태성과 나영은 <나가페>에 출전할 곡목을 결정하기 위하여 토론을 벌였다.
“이난영의 노래로만 출전할 수 있으니까, 기왕이면 잘 알려진 ‘목포의 눈물’이 어때요?”
먼저 난영이 묻자 박태성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 대꾸했다.
“얌마! 수많은 출전자 중에 그 노래 선택할 사람은 너무 많을 거야!”
“그럼 잘 안 알려진 노래를 찾아봐요?”
“그것도 불리해! 사람들이 모르는 노래는 막상 본선에 나갔을 때 청중들의 반응이 시원찮을 테니까...!”
“그럼 어떤 노래로 하죠?”
“얌마! ‘목포는 항구다’가 있잖아?”
“그건 또 왜요?”
“요즘 ‘나는 가수다!’! 즉 ‘이거는 저거다’가 대세잖아? 하하하!”
이리하여 나영의 출전곡은 ‘목포는 항구다’로 정했는데, 인터넷에서 이난영의 노래를 들어본 나영과 박태성은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대체 어쩌면 저리도 노래의 맛과 멋을 그처럼 가슴 저린 슬픔과 한으로 표현할 수가 있단 말인가? 요즘 K-POP 세대인 그녀로서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영은 20여년의 삶속에서 아픔을 끄집어내려 애써 보았으나 허사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중퇴할 만큼 가난했던 소녀가 가수로 데뷔하여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결혼도 두 번씩이나 했던 아픔은 얼마나 컸을까? 그런 그녀에게 어쩌면 노래는 구원이었을지 몰라! 바로 그 처절했을 이난영처럼 나영도 노래를 생명줄로 여기고 붙잡아 보라구! 그리고 보니 이름도 받침 하나만 틀리네! 하하하!”
박태성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나영에겐 비수처럼 파고드는 질책이었다. 결국 그런 고통스러운 과정 끝에 어느덧 <난가페> 행사날을 맞게 되었고, 노적봉 예술공원 특설무대에서 KMS TV의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다.
“남도의 예향! KMS TV 주최로 서남해안 시대의 관문인 목포에서 화려하게 펼쳐드리는 <난영 가요 페스티벌>! 정말 뜨거운 열기 속에 진행되고 있는데요,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출연잡니다. 걸그룹의 멤버로 착각할 만큼 미모와 댄스 실력을 겸비했는데요, 우리의 전통가요에 푹 빠졌다고 하네요! <목포는 항구다>를 부를 이나영 양입니다. ...어? 근데 이난영 가수와 너무 비슷한 이름이죠? 하하!”
수다 버전인 MC의 소개가 끝나자 이난영 가수의 인기 절정때 모습인 흰색 저고리와 검정치마로 분장한 나영이 역시 이난영이 부른 원곡 버전의 반주로 다소곳이 무대에 나와 <목포는 항구다>의 1절을 불렀다.
영산강 안개 속에 기적이 울고 / 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그런데 노래의 1절이 끝나고 간주로 접어들자, 갑자기 현대적 감각의 트롯메들리 반주로 바뀌면서 무대복도 앙드레 킴의 화려한 한복의상으로 순식간에 갈아입고 나와 <신사동 그 사람>의 주현미와 <밧줄로 꽁꽁>의 김용임을 섞어찌개한 듯한 버전으로 신바람 나게 불러 제쳤던 것이다.
유달산 잔디 위에 놀던 옛날도 / 동백꽃 쓸어 안고 울던 옛날도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 목포는 항구다 추억의 고향
그러자 잠시 어리둥절했던 관중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2절이 끝나고 다시 시작된 간주는 정말로 상상을 초월했으니, 글쎄 이번엔 걸그룹 ‘소녀시대’의 멤버 같은 하의실종과 파격노출로 바꾸어 떼거리 아이돌 무용팀과 함께 K-POP으로 편곡된 3절을 불렀던 것이다.
여주로 떠나갈까 제주로 갈까(말까 갈까) /
비 젖은 선창 머리 돛대를 달고(내리고 달고)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아름다운 항구다) /
목포는 항구다 이별의 고향(타향 고향)
이렇게 노래가 반전되자 행사장은 발칵 뒤집어질 정도로 폭소와 박수와 함께 함성이 쏟아졌고, 이윽고 불꽃조명과 꽃종이폭탄이 터지는 가운데 나영의 엔딩춤이 마무리되자 마치 대상 수상자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하지만 요즘 최고 인기 절정인 아이돌그룹과 걸그룹 그리고 인순이의 축하공연이 끝나고 막상 심사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인기상, 특별상, 동상, 은상, 금상 수상자가 호명될 때까지 제발 자신의 이름이 불리워지지 않기를 기도했던 나영은 드디어 대상이 발표되는 순간 하마터면 졸도할 뻔했다.
“오늘의 대상은... KMS TV 주최 <난영 가요 페스티벌>! 한국가요 100년 ‘가요계의 여왕’ 이난영을 추모하는 오늘의 대상은...! 첫 번째 출연자인 황금산 군입니다! ...아! 좀 의외인데요! 남자 가수가 ‘난영 가요 페스티벌’의 대상을 먹었으니까요! 하하!”
MC가 그 뒤에도 뭐라고 떠들었지만 나영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눈물 속에 비틀비틀 무대를 내려왔을 뿐이었다. 이윽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 많던 관중들이 마치 목포 앞바다의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스산한 가을 밤바람만 행사장을 휩쓸어갔을 때 누군가 나영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조용히 속삭여왔다.
“나영아! 슬퍼하지 마라!”
“선생님! 으흐흑! 허억! 크크크윽! 죄송해요! 으흐흑!”
그녀는 박태성의 가슴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이제야 나라를 빼앗기고 사랑에 상처받으며 노래 부른 이난영 가수의 아픔과 슬픔을 이해할 수 있겠니? 바로 그걸 깨달았다면 넌 진정한 가수가 된 거야! 그러니까 ‘너는 가수다.’!”
“제가 가수라고요? 이렇게 처참하게 떨어졌는데두요?”
나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이렇게 묻자 박태성이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으응! 이제야 내가 MBC 대학가요제에 나갔을 때 <남도> 선배가 은상을 받을 걸 예언한 이유를 알겠다. 오늘 대상을 받은 황금산은 이름이 좋았던 거야. 황금으로 산...! 그렇잖니?”
“...아! 이젠 아무래도 좋아요! 선생님이 저를 가수로 인정해 주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무대에서 내 스타일대로 개성과 매력과 혼을 담아 원 없이 노래를 불렀으니까요.”
“그래서 ‘너는 가수다’!”
“맞아요! ‘나는 가수다!’ ...전 오늘 진정한 가수로 태어났다구요!”
얼굴은 웃고 있어도 눈물범벅이 된 나영이 이렇게 대답하자, 박태성이 저 멀리 검푸른 밤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영아! 지금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니? 이난영의 ‘목포는 항구다!’! 바로 네가 부른 그 노래가...!”
두 사람은 함께 귀를 기울였고 분명히 아까 나영이 부른 노랫소리가 메아리 되어 굽이쳐왔다.*
이은집❙충남 청양 출생. 1971년 등단. 한국문협 저작권옹호위원장.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전 상임이사.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원. 일붕문학상. 충청문학상. 청하문학상. 한국문학신문 문학상.등 수상다수 작품집 후예 등 30권 여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