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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흔히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리운다.
선사시대 유적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영욕이 교차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즉 강화도는 수십 만 년이나 되는 인류 역사 속에서 우리 역사의 압축된 현장이라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우리역사 문화유적지 여행의 출발점으로 삼기에 손색이 없다.
주요 문화유적
-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를 한눈에 보는 강화역사관 ,
- ‘동방의 시호(詩豪)’ 이규보 무덤.
- 외세와 맞선 요충지:덕진진 ,초지진, 광성보, 분오리돈대,
-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사고 사찰:전등사.
- 산사의 고즈넉한 멋을 품고 저멀리 바다가 보이는 정수사,
- 광활한 갯벌의 장엄함을 연출하는 동막갯벌.
-서해바다의 시원함을 맛볼 수 있는 석모도 보문사, 마애석불좌상
- 청동기인들의 발자취: 부근리 고인돌- 몽고항전의 흔적:강화산성 서문(첨화루) ,고려궁지
단군이 나라를 열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마니산 참성단(좌측 사진)으로 인해 우리 나라 최고의 성지(聖
그 이유는 첫째로 우리 나라의 정중앙부에 위치한데다 제주, 거제, 진도, 남해에 이어 다섯 번째로 큰 섬으로 갯벌이 매우 잘 발달되어 있어 풍부한 해산물 채집이 쉬웠기 때문이다.
또한 강화도는 聖山이라 불리는 마니산과 강화의 진산인 고려산, 진강산, 길상산 등의 아름다운 산지들 사이사이로 비교적 넓고 기름진 농토가 자리잡고, 기후 또한 온화해 사람이 정착해 살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다.
특히 강화도는 한바퀴 돌아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외적으로부터 방비하기 좋은 천혜의 요새이다.
그러기에 신석기 시대인들이 살았던 흔적이 동막 해수욕장에서 발견되었고, 청동기 시대인들이 무리를 지어 산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인들의 무덤이 고인돌로, 당시의 문화를 대표하고 있는데 전세계적으로 7만여기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고인돌이 우리나라에 3만여기가 존재하니 가히 고인돌의 나라라고 칭할 만하다.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은 전라남도 화순, 고창 지역의 고인돌과 함께 우리나라를 세계에 고인돌의 나라로 알리는 동시에 세계문화유산(2000년 12월)으로 등재케 할 정도로 유명하다.
또한 강화도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는 삼랑성이 있고,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백제의 해전과 육전의 요충지였던 ‘혈구진’이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1232년)으로 고려왕조가 39년간 피난해 있으며 삼별초군이 몽고에 저항했던 곳이다.
이 사이에 고려왕조는 강화도에서 1236년부터 16년간에 걸쳐 팔만대장경(총 8만 1137매)판각사업을 완성한다. 책의 날인 10월 11일은 1251년 음력 9월 팔만대장경 판각사업이 완성된 날을 기념하여 정한 것도 새겨볼 만하다.
그러기에 강화도에는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의 이궁과 행궁의 자취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고스란히 남아있는 셈이다. 당대 인물들의 무덤이 곳곳에 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연산군 등 왕족의 유배지로 많이 이용되기도 했다.
한편으로 강화도는 지정학적으로 한강과 예성강, 임진강의 관문이자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관문인 만큼 외세의 침략과 수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감내한 비운의 땅이기도 하다.
근대에 들어서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운요호사건(1874년)을 치르면서 급기야는 일제 식민지 역사의 첫 장을 여는 조약(1876년 병자수호조약으로 강화도조약, 또는 조일수호조약이라 부름)을 체결하기도 한 곳이다.
이처럼 강화도는 선사시대 이래 우리 민족과 호흡을 같이해왔기에 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유물과 유적뿐만 아니라, 민족 저항의 역사를 일궈낸 ‘강화 정신’이 살아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때 성리학을 배척하는 양명학의 거두인 정제두(1649 ~ 1736, 영조 때 대사헌과 이조참판을 지내며 실학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의 강화학파가 둥지를 튼 곳이기도 하다.
강화역사관, 갑곶돈대,갑곶리 탱자나무
‘손돌목의 아이 목숨’이라는 염하를 가로지르는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만나게 되는 강화역사관은 갑곶돈대 내에 자리잡고 있어 강화 답사전에 꼭 한번은 들러보아야 할 곳이다.
강화도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두었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바깥 뜰에는 각종 비석들을 전시해 강화 전체를 머릿속에 그리며 답사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갑곶돈은 1232년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한 이래 1270년까지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관문으로 건너편인 문수산성의 서쪽문인 취예루와 마주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강화도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는 이곳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초병들이 강물만 믿고 낮잠을 자다가 함락되면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 굴욕을 치르게 한 곳이다.
갑곶돈내에는 정묘호란(1627) 때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한 뒤 적의 침입을 막을 보호수로 성 외곽에 촘촘히 심었다는 탱자나무가 아직까지 남아 천연기념물 78호로 대접받고 있다. 정수사 근처의 사기리 탱자나무 또한 천연기념물 79호로 탱자나무 생육의 북방 한계선을 이루고 있다.
몽고군(원나라)의 강제에 의해 고려시대의 흔적은 거의 파괴된 것으로 알려졌고,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진(鎭), 보(堡), 돈(墩) 등을 비롯한 강화도의 방어시설물의 기초는 숙종임금 때 강화도의 모든 해안가를 따라 대대적으로 재설치한 것이다.
진(鎭)은 오늘날의 대대병력이, 보(堡)는 중대병력이 주둔하던 곳이며 아울러 포대가 소속되어 있다.
돈(墩)은 일종의 초소로 돈대라고도 한며 1977년 박정희 대통령 때 강화전적지 보수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다시 지었으며 동막갯벌에 있는 분오리돈은 거의 옛 모습 그대로이다.
이규보(李奎報) 묘
이규보(1168~1241)는 고려 무신정권이 시작되기 2년전인 극도의 혼란기에 태어나 무신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당대의 뛰어난 문사로, ‘동방의 시호(詩豪)’로 일컬어진다.
자신에 대해 실망이 큰 나머지 술과 풍류로 세월을 보내다가 22살 때 꿈속에 규성(奎星)이란 현인이 나타나 ‘다음 번에는 반드시 장원급제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사마시에 응시, 장원급제를 하였다. 그래서 이름도 ‘인저(仁低)’에서 규성이 알려주었다는 뜻의 ‘규보(奎報)로 바꾼다.
하지만 중앙정치무대로의 진출은 번번이 실패하고 나이 40이 되어서야 최충헌의 눈에 띄어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고려가 강화로 천도하고 팔만대장경 판각을 시작했을 때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을 지을 정도로 불교에 심취했다. 이규보는 대장경이 완성되는 것도 고려가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도 못 본 채 74세를 일기로 강화도에서 영면한다.
그가 남긴 업적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백운소설(白雲小說) 등 55권에 이르고 있는데 그 중 최고의 작품은 민족의 대서사시인 「동명왕편(東明王篇)」이다. 24세 때 부친을 잃고 상심해 천마산에 들어가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칭하며 지은 글이다.
<사진 : 이규보의 글씨>
이규보는 「동명왕편(東明王篇)」서문에서 자신은 신화나 전설같은 황당기괴한 이야기는 믿지 않으나, 중국의 위서와 통전등의 문헌으로 보아 ‘동명왕의 탄생 신화’는 신화가 아닌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중국문헌에 그 내용이 간략하고 상세치 않게 기록된 것은 자기네 나라의 일은 소상하게 하고 외국의 것은 축소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이 아니었다면 고구려인의 기상을 부르는 길고 긴 그리움의 노래인 웅혼한 고구려 건국신화는 되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동명왕편(東明王篇)」은 고구려 이후 잠든 후예들의 혼을 깨우는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규보의 묘는 길직리 백운곡에 있는데 누가 보더라도 명당이다. 무덤 양 옆에 서있는 망주석과 문무인 석상은 당시의 기풍을 엿볼 수 있는 귀한 문화유적이다.
고려 외성의 요새 구실을 하였던 곳으로 조선 광해군 때 보수하고, 효종 때 보로 설치했으며 숙종 때에 이르러 오늘날의 모습을 완성하였다(사적 제227호).
광성보에는 강화도 돈대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용두돈과 반원형의 광성돈이 있으며, 안해루(按海樓)란 성문은 영조 때 성을 개축하면서 세웠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공방전을 벌였고, 신미양요(1871년) 때는 어재연 장군과 동생인 어재순 이하 2백여명의 군사가 4월 23일부터 48시간 미군과 사투를 벌이다가 모두 장렬하게 전사한 곳이다.
어씨 문중이 그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광성보 내에 쌍충비를 세우고, 신원파악이 안되는 51명을 7기의 분묘에 나누어 매장한 ‘신미순의총’을 조성하고는 해마다 제사를 드리고 있다.
용두돈 건너편으로는 고려 고종임금의 강화도 피난과 관련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손돌의 묘가 보이고, 용두돈대 조금 못미친 곳에는 강화도내의 돈대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손돌목 돈대가 있어 이곳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덕진진, 초지진
덕진진은 원래 고려시대 때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였다. 이곳에 조선 숙종 때 축조된 용두돈대, 덕진돈대와 강화 제일의 포대였던 남장포대 그리고 대포 10문이 설치된 덕진포대가 있다.
숙종 3년에는 만호(萬戶)를 두고 군관 26명, 병력 100명, 돈군 12명, 군선 2척이 주둔하고 있었다.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 장군의 부대가 덕진진으로 정족산성에 들어가 프랑스군을 섬멸했고, 신미양요 때는 미군함대와 격전을 벌여 큰 피해를 준 곳이기도 하다.
미군이 “남북전쟁 때도 이와 같이 짧은 시간내에 맹렬한 포격을 받아보지 못했다”고 기록할 정도로 덕진진 전투가 매우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바다를 향한 성곽 아래쪽에는‘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바다를 지키는 문으로 다른 나라의 배는 함부로 지나갈 수 없다)는 경고비(사적 제226호)가 있다.
효종 때 구축한 요새인 초지진 역시 다른 진과 마찬가지로 두 차례의 양요와 일본 군함 운요호사건 등을 겪은 격전지이다. 결국 초지진은 1876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시련의 역사 현장이 되었다. 당시의 전투를 증언이라도 하듯 외세가 쏘아댔던 포탄의 흔적이 노송 큰 줄기에 남아있다. 사적 제225호.
전등사(傳燈寺)
강화도에서 가장 큰 절로, 단군의 세 아들이 세웠다는 정족산(鼎足山) 삼랑성(三郞城)안에 자리잡고 있는 절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아도화상이 진종사(眞宗寺)를 연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은 백제 땅이었는데 아도화상이 전등사를 신라 포교를 위한 통로로 삼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고려 고종 때 이곳 삼랑성과 신니동에 궁궐을 지었으며,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가 불전에 옥으로 된 등잔을 올린 뒤부터‘傳燈寺’란 이름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조선 현종 때 왕실의 지원과 보호하에 향산으로부터 선원보각과 장사각을 이곳으로 옮겨짓고는, 숙종 때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시작함으로써 전등사는 사고(史庫, 정족산사고)를 지키는 사찰로 유명해졌다.
1707년에 사각을 고쳐짓고 별관을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칭하고는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선원보각과 장사각을 하나로 묶어 왕조실록과 왕실의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란 의미)로 지정했다.
외세침략을 방어한다는 차원에서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주지 스님에게 도총섭이란 지위를 부여하였다. 1749년에는 영조임금의 시주로 중창 불사를 하면서 대조루(對潮樓)가 건립되었다.
고종 때에는 전쟁에 대비해 포량고(砲糧庫)를 두었으며, 왕실에 진상하는 약초를 보관하기 위해 진상약애고, 종9품 무관이 주둔하는 산성수비 별장소를 두는 등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격퇴시킨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도도 이곳에 있다.
사찰 고유의 문화재로는 대조루와 대웅전(보물 제178호), 약사전(보물 제179호), 범종(보물 제393호, 중국 송나라 때의 동종으로 용두에 음통이 없고 종모양의 아래 모습이 우리나라 전통 종과는 확연히 구별됨) 등이 있다.
분오리돈대
초지의 외곽 포대인 분오리 돈대는 포좌 4문을 설치하고, 영문에 돈장을 따로 주둔케 할 정도로 요충지였다.
분오리 돈대에 올라 약간 왼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면 ‘각시의 서’라고 부르는 자그마한 돌섬이 있는데 애처로운 전설을 갖고 있다.
정수사에 주석했던 함허대사의 부인이 수도에 열중한 남편을 찾아와 3일간을 울며 집으로 돌아가자고 애걸했지만 본 척도 하지 않자, 부인이 삶의 의미를 잃고 바닷물에 뛰어들었는데 그때 생겨난 돌섬이라고 한다.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범할 때 한때 잠수함으로 착각했다는 섬이기도 하다.
정수사(淨水寺)
마니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때 회정(懷正) 대사가 창건할 때 정수사(精修寺)라 이름지을 정도로 고즈넉하면서도 탁트인 서해바다 전망을 지닌 명당에 위피해 있다.
서해바다 전망이 삼매정수(三昧精修)에 들 정도이다.
지금의 淨水寺란 이름은 함허대사(1376-1433, 무학대사의 제자로 21세에 출가하여 선종과 교종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후학을 지도할 정도로 뛰어난 스님이다.)가 세종 8년(1426)에 중창할 때 법당 서쪽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 고쳐 부른 것이다.
인근에는 함허대사와 관련된 일화가 많이 있으며, 그의 부도가 요사채 뒤쪽 100m 지점에 있다.
앞면의 한 칸이 후대에 증축된 것으로 몸체와 툇칸 부분의 공포가 다른 점이 특이하다. 몸체는 조선 초기 주심포계의 전형으로 간결한 모습이지만 툇칸의 공포는 조선 후기의 장식적 경향이 뚜렷하다.
가운데 칸의 사분합문은 청자와 진사 도자기에 소담스럽게 담긴 목단이 한창 피어오른 모습을 조각해 창살로 사용했다. 좌우 양쪽의 문이 격자무늬의 문살이라 화려하되 정갈하면서도 엄격한 맛을 준다. 참고로 정수사 주변은 이별초, 곧 상사화의 자생군락지이다.
동막갯벌
강화도 화도면 동막리 해안은 물이 빠질 경우 2천9백만평에 달하는 갯벌이 드러날 정도로 광대하다.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큰 음력 보름과 그믐께쯤에 가장 넓은 갯벌을 볼 수 있다.
이 동막해안에서 우리 나라 서해 도서 중 최초로 신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1916년 일본인에 의해 빗살무늬(어골문, 魚骨文)토기가 발견되면서 머드해수욕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선사시대 유적지로 유명해졌다. 고인돌과 함께 청동기 시대인들이 썼던 무문토기 조각이 발견됨으로써 청동기 문화가 꽃핀 곳임을 알 수 있다.
석모도 보문사
동막 해수욕장을 지나 석포선착장에서 10여분 배를 타고 들어가면 석모도이다. 이곳에는 남해 보리암, 낙산사 홍련암과 함께 우리 나라 3대 관음도량의 하나인 낙가산 보문사가 있다.
불경에 따르면 관음보살이 머무는 남해의 섬이 낙가(洛迦)이고, 광대무변한 서원을 실천하는 몸과 장(場)이 보문(普門)이라고 한다.
낙가산 보문산이란 이름 그대로 관음보살의 터전이고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보문사는 ‘경기도 석굴암’이라고 일컫는 석굴법당이 있고, 그 뒤 6백여 계단을 올라가면 가파른 벼랑 눈썹바위 밑에 거대한 관세음보살이 부조되어 있다.
전등사, 정수사와 함께 강화도 3대 고찰의 하나인 보문사는 금강산에서 내려온 회정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창건설화가 전해진다.
“선덕여왕” 4년 4월에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처럼 생긴 돌덩이 22개가 올라왔다. 어부는 실망해 돌덩이를 바다에 던져 넣었는데 또다시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이러기를 두세 차례 했는데 그날 밤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책망하면서 다음날 다시 한 번 건져 올려 명산에 잘 모셔달라고 당부했다.
다음날 어부는 꿈속에서처럼 22개의 돌덩어리들을 건져 올려 지금의 석굴 부근에 옮겨놓았는데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 더 이상 옮길 수가 없어 그곳에 단을 만들어 그 돌 인형들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의 나한석굴에 모셔진 나한들로 지금은 21분이다. 그다지 잘된 조각은 아니지만 나한 특유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서해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절경에 위치한 마애석불좌상은 1928년에 금강산 표훈사 주지 이화응 스님과 당시 보문사 주지였던 배선주 스님이 함께 조성한 불상이다.
기도하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해 낙조는 장관이다.
부근리 고인돌
고인돌은 선사시대 돌무덤의 일종으로 지석묘라고도 부르며, 영어로는 돌멘(Dolmen)이라고 한다. 고인돌은 거석(巨石)기념물의 하나이다.
피라미드(Pyramid), 오벨리스크(Obelisk) 등의 이집트나 아프리카 대륙의 각종 석조물과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 카르낙의 열석(列石)등이 모두 거석문화의 산물이다.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137호인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은 비스듬히 경사진 굄돌 위에 50톤이 넘는 화강암 덮개돌을 올린 것으로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생긴 고인돌의 하나로 꼽힌다.
강화도에서 발견된 고인돌만도 120여기에 달한다. 부근리 743의 4번지 점골 고인돌 무덤에서 북쪽으로 70여 미터 지점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집터가 발굴되었다. 50톤에 달하는 덮개돌(높이 2.6m, 길이 7.1m, 너비 5.5m)을 얹기 위해서는 적어도 장정 5백여 명이 동원되어야 한다.
당시 장정 한 사람이 거느린 가족이 5명이라고 할 때, 이 무덤의 주인은 최소 2,500명 이상을 거느린 부족장이었다는 의미이다.
강화산성 서문(첨화루), 고려궁터, 조선행궁터, 용흥궁
1232년에 축성한 강화산성(사적 제32호)에서 고려왕조는 39년간 몽고의 침략에 대항해 싸웠다. 강화산성은 당초에 내성, 중성, 외성으로 쌓았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돌로 쌓은 내성 뿐이다.
내성의 둘레는 약 1.2km이며 중성은 약 9km의 토성이었고, 외성은 강화의 동쪽 해협을 따라 3만 77척에 달하는 거대한 토성이었다.
1259년 내.외성을 모두 헐어야 한다는 몽고의 화친 조건으로 강화산성은 헐리고 만다. 조선초에 다시 축성한 외성은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석축으로 복원한 몇 곳 말고는 현재 외성의 흔적은 거의 없다.
성의 남문을 안파루(晏波樓), 서문을 첨화루(瞻華樓), 동문을 망한루(望漢樓), 북문을 진송루(鎭松樓)라 불렀으나 동문은 아예 없어졌다.
현재 서문에는 역사적 현장의 증언으로 옛 연무당터 기념비가 서 있고, 남문에 있던 김상용 선생 순의비는 관청리의 고려궁터 들목으로 옮겨졌다.
고려궁터, 조선행궁터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략 때 고려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39년간 고려왕조가 머물렀던 궁터라 흔히 고려궁지로 불리우는 이곳은 조선의 행궁터이기도 하다.
고려궁터는 환도할 때 모두 허물어졌고, 조선 인조때 건립된 조선 행궁 역시 프랑스군에 의해 외규장각과 함께 완전히 불태워지는 비운을 겪는다.
이곳에는 최근에 새로 중건한 조선 양식의 건물 하나와, 강화유수부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 있어 몰락한 왕조의 비감함을 느낄 수 있다.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 동종이 비각 안에 있는데 진품은 강화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출처 : 2004년 家苑 어린이.학부모 문화유적답사 안내 프로그램 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