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딸과 함께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봤다. 딸이 행복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지만 자신만 아는 삶이 아닌 이타적인 삶을 살기를 바란다. 심장병 때문에 실업급여를 받아야 삶을 영위하는 목수 다니엘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고단한 삶 가운데서도 남을 돕는 이타적 인물이었다. 켄 로치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 될 ‘나 다이엘 블레이크’는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여운이 오래 남는다. 개인적으로 켄 로치의 영화 중 가장 감동적인 작품은 스페인 내전을 다룬 ‘랜드 앤 프리덤’이다. 파시스트에 맞서 싸우기 위해 영국인 데이빗은 스페인 내전에 국제 의용군으로 참전한다. 첫 번째 전투가 끝나고 나서 동료의 장례식 때 인터내셔널가(歌)를 부르는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다. 스페인 민중들과 영국, 아일랜드, 프랑스 등에서 참전한 국제여단은 대의를 위해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대에 항전했다. 물론 스페인 내전은 프랑코의 승리로 끝났고 공화파와 국제의용군은 패배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한 그들의 여정은 역사의 승리자로 기록됐다.
오직 정의의 신념 하나로 전 세계의 용사들이 국제여단을 결성했듯, 오직 와인에 대한 열정 하나로 스페인 와인에 몰입했던 남녀가 있었다. 그중 여자는 스페인 와인을 판매하는 와인바를 개업했고, 남자는 그 집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은 사랑했고 마침내 결혼했다. 신혼여행은 당연히 스페인 와인 순례로 다녀왔다. 부부가 운영했던 와인바에서는 소고기 스테이크를 함께 판매했다. 와인도 고가였지만 안주에 해당하는 스테이크 가격도 비쌌다. 꽤 맛좋은 스페인 와인을 널리 알리고 싶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가격의 문턱 때문에 오지 못했다. 여기에 부부의 고민이 있었다. 생각 끝에 문턱을 낮추기로 했다.
비싼 와인은 정리해서 가성비 높은 와인 몇 가지만 남겼다. 소고기 스테이크는 과감히 치우고 대신 생갈비, 목살, 삼겹살을 그 자리에 놓았다. 점포 이름도 <까사생갈비>로 바꿨다. 고급스런 와인바에서 서민들도 와인에 생갈비를 즐길 수 있는 고깃집이 됐다. 작은 혁명이었다.
한국 생갈비와 가성비 높은 스페인 와인의 만남
저렴한 가격에 와인과 생갈비를 먹을 수 있는 고깃집으로 바뀌었지만 스페인풍을 표방하는 건 그대로다.
빨간 외벽과 정문에서 강렬한 스페인의 이미지가 엿보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카페나 레스토랑 같은 실내가 아늑했다. 벽에는 라 만차의 돈키호테가 우릴 반갑게 맞이했다. 이 집은 실내가 약간 높은데다 밖으로 확장된 구조여서 통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조망이 일품이다.
메뉴판 표지에 새겨진 아라베스크를 연상케 하는 기하학적 무늬가 이국적이고 인상적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이슬람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이베리아반도의 잔영을 이 집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주인장이 추천해주는 스페인 와인 ‘레이시스 에스페샬 크리안자(2만4000원)와 함께 생갈비(180g 1만4000원) 2인분을 주문했다. 일행이 모두 4명이었지만 다른 스페인 요리도 골고루 맛보고 싶었다. 사실 이 집은 스페인 요리를 생갈비와 와인에 곁들여 먹는 콘셉트이기도 하다.
주인장이 이 장소에서 13년 넘게 와인바를 운영했던 전문가여서 와인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다. 한국인 입맛에 맞고 저렴하면서 질이 괜찮은 와인만 엄선했다고 한다. 한 병의 와인이 양이 많거나 가격이 부담스러우면 하우스 와인(글라스 단위로 판매하는 와인)도 좋다. 한 잔에 4000~6000원 사이여서 부담이 적다.
생갈비 원육은 YBD(요크셔, 버크셔, 듀록 교배종으로 육질이 뛰어나다)로 숙성시켜 사용하고 있다. 직화 로스터에 생갈비와 대파를 올렸다. 생갈비 위에는 앞마당에서 방금 잘라온 로즈마리를 올려 향을 입힌다. 단지 로즈마리 줄기 하나 올렸을 뿐인데 한국식 생갈비 구이가 이국적 느낌이 난다.
갈비를 찍어먹는 소스는 모두 5종이다. 마늘소스, 순태젓갈, 쌈장, 흑소금, 스페인풍 로메스코 소스인데 모두 돼지고기와 잘 맞는다. 칼솟(Calsot, 카탈로니아 원산의 대파처럼 생긴 양파)으로 만든 스페인풍 소스도 의외로 돼지생갈비와 잘 맞는다. 대파김치, 오이피클, 갯잎 절임, 마늘종장아찌 등 전통적인 밑반찬도 넉넉하다.
요즘 삼겹살 생갈비 전문점이 포화상태라 이렇게 스페인풍 콘셉트로 차별화 한 것이 무척 신선해 보인다. 하향식 배기 시스템을 한 것도 이런 멋진 실내 풍광을 살리고자 하는 배려가 숨어있다. 어쨌든 배기관이 시야를 가리지 않고 고기 냄새가 옷에 배지 않아 손님 입장에서는 만족스러웠다.
‘감바스’ 등 스페인 요리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어
이 집은 스페인풍을 표방했듯 돼지고기와 함께 먹기에 좋은 간단한 스페인 요리들이 입을 즐겁게 한다.
가장 대표적인 요리가 불판에 올려서 먹는 감바스 알 아히요(6000원, 이하 감바스)다. 스페인에서 타파스(Tapas 스페인식 전채요리)의 메뉴로 먹는 음식이라고 한다. 생새우로 끓인 일종의 전골 요리다. 한국의 생갈비 구이와 컨버전스의 조합이 잘 맞는다. 생갈비에 감바스와 바게트를 곁들이니 나름 별미였다. 감바스에 마늘이 듬뿍 들어가서 그런 것 같다.
돈키호테 샐러드(4000원)는 샐러드 접시 한 가운데 칼이 꽂혀있어 스페인의 투우를 연상케 한다. 들깨소스 베이스에 양상추, 토마토, 베이컨, 견과류 등의 내용물이 와인과 잘 맞는다.
예전 분당 정자동에서 미트볼을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어 후식으로 스페인풍 미트볼(7000원)을 주문했다. 이 집은 일단 가격이 부담 없어서 좋다. 미트볼의 식감과 스스 맛이 김치 좋아하는 아저씨 입맛에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스페인 분위기를 좀 더 내보기 위해 메종 델 챔피언(6000원)도 주문했다. 양송이버섯을 식재료로 한 타파스 요리다. 사이드로 주문하면 별미로 맛있게 먹을 수 있지만 생갈비와 먹을 때는 감바스와의 조합이 더 잘 맞는 것 같다. 스페인풍 소스에 날배추를 찍어먹고 개운하게 마무리했다.
역시 이 집은 굳이 2차 갈 필요 없는 1.5차 느낌의 ‘생갈비집 & 와인바’다. 딸내미가 유럽에서 돌아오면 생갈비에 와인 한 잔 사줘야겠다. 지출(4인 기준) 크리안자(와인1병) 2만4000원+생갈비(1만4000원×2인분) 2만8000원+감바스 6000원+샐러드 4000원+미트볼 7000원+메종 델 챔피언 6000원 = 7만5000원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2길 15, 02-561-5705
글·사진 김현수 외식콘셉트 기획자·외식콘텐츠마케팅 연구소 (NAVER 블로그 '식당밥일기') 외식 관련 문화 사업과 콘텐츠 개발에 다년간 몸담고 있는 월간외식경영 발행인, ‘방방곡곡 서민식당 발굴기’는 저렴하고 인심 넉넉한 서민 음식점을 일상적인 ‘식당밥일기’ 형식으로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