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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과 귀신의 장군멍군>의 줄거리:
모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쫒아내시며 천국을 전파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은 한마디로 사탄의 지배력을 뿌리채 흔드는 결정적인 장군! 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항하는 귀신의 멍군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귀신의 멍군은 단순한 방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을 무력화하는 막강한 간교함으로 역공을 시도합니다. 교회는 이 귀신의 멍군에 너무 많은 것을 내주고 있음이 현실입니다.
예수님과 귀신의 장군멍군
(막1:29-34)
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과 귀신의 장군멍군>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의 ‘장군!’과 귀신의 ‘멍군!’ 이것이 바로 제목이 되겠습니다.
예수님과 귀신이 마치 장기판을 사이에 두고 장기를 두면서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귀신의 지배력을 뿌리째 흔들어버리는 치명타를 ‘장군!’ 하면서 공격을 가하자, 귀신이 그 예수님의 공격에 대해서 ‘멍군!’ 하면서 방어를 하는 장면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초장에서 마가에 의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런 대결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장기를 잘 못 두는 분들도 이 장군과 멍군이 무엇인지는 다 아실 겁니다.
장기를 두면서 우리 편 말이 상대방의 장을 먹을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될 때, 그러니까 최종공격이 되겠지요, 마지막 단계의 공격이 되었을 때 그걸 알려야 됩니다.
비겁하게 모르게 슬쩍 넘어가면서 상대방이 다른 데 신경을 쓰고 있는 동안 먹으면 안돼요.
물론 그것도 다 상대방의 실책입니다만, 하여간 최종단계의 공격이 이루어질 때 무엇으로 먹을 수 있건 간에 상대방의 장을 먹을 수 있는 단계가 되었을 때 ‘장군!’ 부르면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막아야 장기판이 계속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방어하는 측에서 그 장군에 대해서 방어를 할 때 ‘멍군!’ 하고 말합니다.
이 장기판의 장군과 멍군이 비유적으로, 예를 들어서 이대호 선수가 7회 말에 홈런을 쳤는데 8회 초에 최형우 선수가 다시 되받아서 홈런을 친다, 이걸 장군 멍군이라고 얘기하지요.
박지성 선수가 레알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한 골을 넣었는데, 넣자마자 30초 뒤에 호나우도가 또 골을 넣었습니다, 이게 바로 장군 멍군이라고 얘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분으로써 이 땅에 내려와서 메시아와 그리스도로서 존재하신다는 것 자체가 사탄의 지배하에 귀신의 활동이 활발한 이 세상에서는 사탄과 귀신에 대해서 ‘장군’을 외치신 겁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서 귀신들이 그냥 찌부러져 들어간 게 아니었어요, 귀신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다가 그 사람에게서 쫓겨나면서도 끝까지 저항하면서 ‘멍군’을 부릅니다.
그런데 이 ‘멍군’은 예수님의 공격적인 ‘장군’에 대해서 단순한 방어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분명히 방어인데 엄청난 간교함을 숨기고 공격해 들어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완전히 무효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멍군’을 불러댄 거예요.
이 예수님의 ‘장군’과 귀신의 ‘멍군’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 표현되어지고 있다는 얘깁니다.
지금 마가복음을 읽어가는 가운데, 앞부분의 25절에서도 예수님께서 같은 내용의 말씀을 하시지만 예수님을 보고 귀신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봅니다.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정체를 몰라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신 분으로서 그렇게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대망하고 있던 메시아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 때 귀신들이 알아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하는 이야기를 24절에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단지 예수님의 사역,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 나타나는 권세 그리고 병 고치는 기적의 능력과 귀신을 쫓아내시는 권세 앞에서 놀라고만 있을 뿐이지, 정작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신 분이고 그분이 그리스도요 메시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놀라고만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귀신들은 정확히 알아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입니다’란 말뜻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고 구약전체가 예언하고 있는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을 귀신들은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고,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 하신다’고 한 것처럼 25절에서도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정체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려고 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에게 금지명령을 내리십니다.
‘내가 누군지 말하지 말라’
이 점이 신약성경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시는 학자들에게 있어서도 보통 어려운 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메시아닉 시크릿’(messianic secret), 그러니까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이론을 만들어서 설명하기도 하고 뭐 아주 난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묵상해 보면, 대충 우리가 ‘아, 이때 메시아인 게 드러나면 사람들이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해하니까 그럴 수 있다’, 틀린 말은 아니에요,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장군’과 귀신의 ‘멍군’이 부딪히고 있는 불꽃 튀는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적인 내용들을 온전히 알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단순히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해한다, 이것만 가지고는 전모를 알 수 없다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오해를 꼭 제거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귀신이 예수님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귀신이 예수님을 저항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왜 예수님과 귀신이 ‘장군, 멍군’ 싸움이 가능하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싸움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예수님께 직접 대항할 수는 없는데 예수님이 위하여 사역하시는 사람들을 잘못 되게 인도함으로써 예수님께 저항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마치 이런 거예요.
제 원수가 저한테 참패를 당했습니다, 저를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원수가 내 아들을 유괴해 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한테 저항을 하는 겁니다.
나를 직접 이길 수는 없으니까 내가 사랑하는, 내가 위하여 살고 있는 무엇인가를 상실하게 하거나 빼앗아 가버리는 것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장군’과 귀신의 ‘멍군’이 이야기 될 수 있다는 거죠.
예수님께 직접 대항할 수가 없다는 사실은 귀신과 사탄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기억해야 될 사실입니다.
자, 그러면 귀신의 ‘멍군’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놀라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또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신들을 쫓아내고 계시는 그 예수님을 가리켜, 자기가 쫓겨나는 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다, 바로 저분이 너희가 그렇게 기다리고 있던 그리스도 메시아다’라고 말하는 것이 귀신의 ‘멍군’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최대의 방어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공격력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사역을 완전히 무효화 시킬 수 있는 공격이라는 거예요.
이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우선 이것이 이러한 방어요 공격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겁니다.
학자들도 이것을 볼 수가 없는 거예요.
마귀가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너희가 그렇게 기다리던 그리스도’라고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왜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엄청난 치명타가 될 수 있는 건지 그걸 우리가 찾아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금지시키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여기에 이상한 것이 또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하신 질문에 대해서 대답할 때였습니다.
무슨 질문이었냐 하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어보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마가복음에도 8장에 그것이 기록되어 있어요.
8장 29절에 보면 마태복음보다 간략하게 돼 있어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어쨌든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이 말이 귀신이 알고 있는 얘기이고, 귀신이 사람들 앞에서 말하려는 것이에요.
그런데 베드로가 고백했을 때는 예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하신 이는 하나님아버지이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알게 하셨다고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아버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계시니까 그걸 베드로에게 계시로 주신 것이죠.
그런데 똑같은 내용을 마귀가 얘기하는데 예수님께서 금지시키신 겁니다.
계속 금지시키십니다, 마귀가 얘기했건 베드로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얘기했건 간에 하여간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fact 아닙니까?
누가 말했든지 그 사실은 맞는 사실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 사실을 귀신이 얘기하는 것은 금지시키고 조바심을 태우면서 예수님께서 막으시는 겁니까?
이것을 우리가 알기 위해서는 시각 차이를 구별해내야 됩니다.
어떤 시각 차이인가?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 가서 베드로의 장모를 열병에서 놓이게 하고, 그 예수님 소문을 듣고 동네사람들이 그 집안에 다 몰려들었을 때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이 장면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마가가 기록한 그 시점에 비하면 과거입니다.
그런데 마가의 시점과 이 사건이 일어날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시각의 차이를 우리가 알면 된다는 거예요.
어떻게 차이가 날까요?
마가복음의 마지막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난 뒤에 승천하셔서 하늘에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이렇게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마가가 예수님 공생애의 초기 사건을 기록하고 있지만, 십자가사건이 일어났고, 주님께서 장사지내고 무덤에 계시다가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이 땅에서 제자들을 만나신 뒤에 승천하신 것을 경험한 입장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베드로 장모의 집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사역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하신 예수님을 경험한 마가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사역을 하시는 모양은 그분이 병을 고치시든 귀신을 쫓아내시든 간에 그 최종목적은 사람들의 마음 - 이 세상에 묶여서 인간사회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갖고 싶어서 그것들을 마음에 끌어당김으로써 더러워진 마음 - 그 마음들을 주님의 보혈로 십자가에서 씻어내고 그리고 부활승천하신 주님의 그 길을 따라서 사람의 마음을 낚아서 가까이 온 천국으로 끌고 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최종목적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어떤 병자를 고치시든 간에, 어떤 기적을 행하시든지 간에 그 마지막 목적은 사람들의 마음을 낚아채서 천국으로 끌고 올라가도록 한다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현장에 있는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열병에 걸린 베드로 장모를 일으켜 세우시고, 귀신을 쫓아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고 있는데, 이 놀라고 있는 사람들에게 귀신이 ‘너희가 놀라고 있는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너희가 기다리던 메시아요, 그리스도’라고 말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구원사역의 역류현상이 일어납니다.
지금 이 사람들은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몸에 붙어있고, 몸의 건강에 붙어있습니다, 그렇게 더러운 상태에 있는 거예요.
마음은 하나님을 모셔 들일 때만이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마치 김치는 김치 그릇에 담겨져 있을 때만 깨끗한 것처럼, 김치가 책상 위에 놓이면 더러워지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처럼 마음에는 건강에 관한 관심이 놓여 지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 병자를 고치는 그 예수님을 보며 놀라고 있는데, 귀신이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얘기를 해버릴 경우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마음이 이 세상 인간사회가 좋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붙잡고 있는 이 더러움의 상태 안으로 마치 머리 위에 자장면 그릇을 뒤집어쓰고 있고, 의자 위에 김치를 놓고 철퍼덕 주저앉은 상태에서 예수님을 더러운 방 안으로 끌어들이는 역류현상이 일어납니다.
마가가 느끼기에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 목적이 사람들의 세상에 묶여있는 마음을 빼내서 가까이 다가온 하늘나라, 때가 찬 하늘나라, 때가 찬 하늘나라라는 것은 이제 그 천국이 우리가 느끼는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들의 마음을 그 하늘나라로 데리고 들어가서 지금 현재 여기서 천국을 현실로 느끼도록 해야 되는데, 귀신들이 말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 선포는 어떤 효과를 내느냐 하면 세상의 더러움 속에 묻혀있고, 세상을 붙들고, 세상에 묶여있는 마음이 그리스도를 세상의 더러움 안으로 끌어들이는 역류현상이 벌어지는 결과가 된다는 겁니다.
마음이 그리스도를 따라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세상에 묶여있으면서 그리스도를 세상 안으로 끌어들이는 게 돼버린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귀신의 ‘멍군’이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여러분!
십자가를 경험하고 부활을 경험하고 승천을 경험한 이후의 시점에 살고 있는 교회가 귀신의 ‘멍군’에 지배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귀신이 선포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겁니다,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알려주신 그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께로 마음을 주면서 우리 마음이 천국으로 빠져나가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귀신이 선포하는 그리스도는 어떤 그리스도냐?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이 묶여있으면서 세상 안에서 우리가 이루고 싶은 게 많이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이 세상 안으로 끌어들이는 역류현상을 일으키게 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 신앙인들이.
귀신의 ‘멍군’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붙잡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장군’의 소리를 듣고 예수님께로 가는 게 아니라, 귀신의 ‘멍군’을 듣고 가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이런 거예요.
‘사업 잘 되게 해주세요, 하나님아버지!’ 이게 바로 귀신의 ‘멍군’에 지배돼버린 겁니다.
‘예수님, 건강하고 오래 살게 해주세요!’ 귀신의 멍군에 지배된 거예요.
‘삼박자 축복’이라고 말한 그 내용, 귀신의 ‘멍군’에 넘어가버린 겁니다.
무게중심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천국이야기 하고, 구원 이야기 하고, 온갖 얘기는 다 하지만 마음의 중심의 액센트가 어디에 가 있습니까?
나를 속일 필요가 없잖아요?
‘사업 잘 되게 해주세요’ 귀신의 멍군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아내는 겁니다.
내가 마음으로 사업을 붙잡고 있습니다, 이미 마음이 더러워졌어요.
마음이 짜장면을 얼굴에 뒤집어쓴 거나 마찬가지예요, 거기서 그 더러움 안으로 예수님을 부르고 있는 겁니다.
‘아, 그러면 사업은 하지 말라는 거냐?’
하지 마세요!
사업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의지로 끌어가십니다.
이걸 경험해야 돼요.
그 사업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걸 내 멋대로 시작한 것이면 망하게 하실 수도 있어요.
‘아, 참 쉽게도 얘기한다!’
쉬우나 어려우나 사실은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것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고 그리고 예수님을 찾고 기도하면 바로 귀신의 ‘멍군’에 넘어간 겁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건강하고 싶은 마음에 예수님을 이 세상 안으로 끌어당깁니다.
그러나 너무너무 간교한 마귀의 계략인 것이에요.
자,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하나님아버지가 가르쳐주셔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걸 고백합니다.
똑같은 내용을 마귀가 말합니다, 이게 마귀의 방어 전략입니다.
교인들에게 마귀가 말해줍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야, 기적이 일어날 수 있어, 네가 마음에 원하는 건 다 이룰 수가 있어!’
이게 마귀의 ‘멍군’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그리스도의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무력화시키는 결정타가 바로 세상의 것을 붙잡고 있는 자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냥 구절구절만 따가지고 말해버리는 거예요.
열병을 앓던 베드로의 장모가 일어났습니다.
열병이 뭡니까, 고열이 나고 땀이 흐르는 겁니다.
죄짓고 저주받을 때 아담에게 내려진 말입니다, 얼굴에 땀이 흘러야 밥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그랬어요.
이 세상 것을 얻겠다고 전부 열병에 걸려 있는 거예요, 흥분된 상태이고 열이 납니다.
진짜 안식이 뭡니까?
예수님께 수종드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의 ‘장군’을 받아들여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면 십자가를 넘어서 승천해서 마음이 완전히 이 세상을 떠나서 천국으로 가세요.
아직도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이 세상 것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써먹고 있다면 귀신이 전파한 예수님을 받아들인 겁니다.
귀신의 ‘멍군’에 넘어간 겁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십시다.
안 믿으려면 안 믿는 거지만, 귀신의 ‘멍군’을 듣고 귀신에게 전도 받아서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은 절대 안 되는 겁니다.
아예 예수님의 이름을 안 믿는 것보다도 더 악한 일인지도 몰라요.
세상 것을 붙잡고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께 기도하는 게 귀신이 전한 예수를 믿는 거라는 사실을, 귀신의 ‘멍군’을 받아들인 거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가르쳐주셨다면 반드시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해 마음이 죽어 장사지내고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따라 하나님아버지께 가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 말씀을 무엇으로 표현하시느냐 하면,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
때가 찼다는 것은 그 말로만 듣던 천국, 그 말로만 듣던 아버지의 보좌, 그것이 바로 내 마음이 거하는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장군’을 따라가는 신앙인들이 되어서 귀신의 ‘멍군’의 지배력을 완전히 끝장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내 몸이 처한 삶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마음에 두고 계심을 믿게 해주시옵소서.
그리고 이제 내 마음은 예수님의 ‘장군’을 따라 십자가를 붙잡고 승천까지 같이 예수님과 동행하여 보좌가 있는 아버지 앞에 이르게 도와주시옵고, 다시는 이 세상에 붙들려 있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꾸로 이 세상 더러움 안으로 끌어들이는 귀신의 ‘멍군’에 지배된 삶을 살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