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택 '연극소설-궁리(窮理)'-장영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4>
국제신문 2012-04-17
2장. 내 다시 그 수레를 타리라
<사진설명: 세종은 종합병원-
연극 속의 세종은 몸집이 컸고 육식을 즐겨하는 대신 운동을 싫어해서 몸무게 110~120㎏ 정도로 추정되는 전형적인 고도 비만형이었다. 그래서 세종이 달고 다니는 병은 등창, 안질, 관절염, 당뇨 등 전신이 성한 곳이 없었다. 45세 되던 해 3월 초 세종이 강원도 이천온천으로 2개월 간 온천 요양을 떠난 것도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세종 역을 맡은 신인배우 이원희(30)는 비대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춤추며
광대들과 어울리는 연기를 보여 준다. 지적인 유머와 재치가 번뜩이는 화술을 갖춘 배우다.
그러나 긴 대사를 육중한 톤으로 밀어붙이는 카리스마 넘치는 화술을 구사하기도 한다.
이런 변화야말로 작가 이윤택이 그리는 세종의 모습이다.>
- 이제 돌아갈 때 영실이 만든 안여를 타고 가는 일만 남았다
- 그래야 주위의 입방아가 사라질 것이다 - (1442 임술/세종 24년, 3월 16일)
경기도 가사평 부근 쯤에서 개울을 건널까 언덕길을 오를까 결정하지 못했다.
비가 온 뒤라 개울을 건너려면 위험하다기에 언덕길을 택했는데,
숨가쁘게 오르던 안여가 옆으로 기울었다.
나는 볼썽사납게 가마 문짝을 붙들었는데도 주르륵 미끄러져서
땅바닥에 내 오른쪽 팔꿈치가 닿고 만 것이다.
급히 옷자락을 털고 일어서려는데 팔꿈치가 시큰거렸다.
젠장,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초현실주의적 미장센-
실제 소설에서 장영실과 세종은 만나지 못 한다.
영실은 옥에 갇혀 있고, 세종은 멀리 강원도 온천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인물의 관계는 꿈을 통해 이루어진다.
영실은 감옥에서 자신을 키워준 스승 이천을 만나고,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를 만나고, 주군 세종을 만난다. 연극 '궁리'는 꿈의 장면을 통해 이윤택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미장센을 만나볼 수 있다.
이때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이천이 내 겨드랑이를 받쳐 올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수레에서 빠져 달아난 쇠 바퀴 서너 개가 고갯길 밑 풀밭에 내던져져 있었다.
나는 짐짓 태연한 척 이천이 타고 가던 백마 등에 올라 앉았다.
놀라서 눈만 휘둥그레 뜨고 지켜 보던 눈길들이 그제서야 숨을 내쉬며 탄성을 내질렀다.
이천은 화가 나서 수레를 끄는 역졸들에게 무어라 큰 소리를 질러댔고,
내시들이 옷자락을 허우적거리며 돌아 다녔다.
"그냥 이대로 가자 큰 소리 치지 말고."
"임금이 행차 중에 변을 당했으니 궁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내복시가 울상을 지으며 엎드렸고,
"바로 저 고개만 넘으면 온천이다 어서 가자."
그러면서 말고삐를 당겼는데, 이번에는 말이 놀라 앞발을 높이 쳐들고 울었다.
이천이 깜짝 놀라 말고삐를 잡았다.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저는 먼저 부서진 수레를 수습하고 서울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천의 목소리는 떨렸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백발의 대장군이 그렇게 겁을 집어 먹다니….
이 일이 앞으로 예사롭지는 않을 모양이다.
그 지독하고 비열한 명나라 사신 오양을 돌려 보내었고, 이제 일을 진행할 참이었는데….
"안여가 왜 부서졌는지 분명히 알고 가게.
가마꾼 수가 적어서 그대로 주저 앉으면서 수레바퀴가 빠졌는지,
수레바퀴가 빠져 달아나자 가마꾼이 주저 앉았는지 그것부터 알아 보게.
서울에 닿으면 곧장 숭록대부 조말생을 찾아가 이 일을 의논하게."
24년 째 임금 노릇을 하면서 내가 넘었던 고갯길이
봄 기운 아지랑이 속에 흐릿하게 흘러 지나간다.
내 눈에 아지랑이가 끼어서 세상이 모두 흐릿한 안개 속 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20년 이상을 함께 한 노 대신들은 근래 복지부동(伏地不動)이다.
그들은 내가 준비하는 일을 모두 알고 있다.
모른 척 능청을 부릴 뿐이다.
3, 40대 젊은 것들은 용맹심에 불탄다.
어떻게든 임금에게 바른 소리를 한 두 번 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 젊은 용맹심이 조선의 힘이라 생각하지만,
이제 젊은 것들과 부딪치는 일에 지칠 만큼 지쳤다.
만사 귀찮아지면서 온천을 찾는다.
서울은 지금 황희가 지키고 있다.
그 뒤에 조말생이 있다.
아버지가 내게 붙여주신 수호자다.
(1442 임술/세종 24년, 3월 18일)
이천행궁에 도착하자 나를 따라온 좌참찬 황보인, 예조판서 김종서, 도승지 조서강에게 일렀다.
"여기 와서 보니 행궁이 생각보다 크다.
이렇게 큰 집에서 마음 편하게 지낼 수가 없구나.
내가 이번 오는 길에 보니 마당에 곡식이 쌓여 있는 집이 별로 없더라.
곤궁한 백성이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을 구제할 방법을 의논하여 아뢰어라.
나도 여기서 한 사나흘 머물면서 온천욕을 해 보고,
내 병에 효험이 있으면 이번 단오절까지 서울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고,
효험이 없다면 바로 돌아갈 것이다.
수레바퀴가 빠진 안여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천 장군이 이미 고쳐 놓았습니다."
도승지 조서강이 마침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돌아갈 때는 평강 이남까지는 안여를 타고 갈 수 있을 것 같고,
평강 이북은 아무래도 길이 험하고 산이 막혀 안여를 타지 못할 것 같다.
안여를 잘 제작하지 못하여 오는 도중에 부서졌다고 말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고갯길을 안여가 오르기는 무리가 따랐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지형을 사전에 알아 보고, 그렇게 망가지는 일이 없도록 잘 대비하라."
나는 이번 일을 이런 식으로 사전에 정리해 버리기로 한다.
이제 돌아갈 때 영실이 만든 안여를 타고 가는 일만 남았다.
내 다시 그 안여를 탈 것이다.
그래야 주위의 입방아가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일단 한숨 놓인다.
문득 기분이 가벼워져서 도승지 조서강에게 이른다.
"나를 따라온 대신들 중에 병이 있는 자는 관문 온천에서 목욕해도 좋다고 일러라.
김종서 대감도 좌참찬도 도승지도 같이 온천을 즐기시지 그래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그들에게 히죽 웃음을 날려 보내 주었다.
<사진설명: 유머와 카리스마를 겸비한 세종은 누구인가?-
작가 이윤택은 일반인의 상상과 전혀 다른 세종의 실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하여
파격적인 배우 캐스팅을 했다.
동국대 연극학과 교수 시절 직접 가르친 제자 이원희를 전격 캐스팅한 것이다.
이원희는 재학시 이미 연극과 뮤지컬에 재능을 보였고,
졸업공연 '바냐 아저씨'(이윤택 지도 교수)에서 바냐 역을 맡아
일찌감치 대성할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이원희는 '궁리' 세종 역을 맡으면서도 MBC TV 드라마 '오늘만 같아라'에 출연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