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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와 그리스 성지순례(5)
6월 28일 고대 고린도 박물관과 유적지, 메테오라 수도원
이스미아(Isthmia)지역 겐그레아항구에 있는 KALAMAKI Beach Hotel에서 멋있는 일출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마침 아침 산책을 나와 밖을 보니 바다건너 앞 언덕위로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성지순례 중에 보는 일출은 남다르다. 이집트-이스라엘 성지순례 때에는 시내산의 일출과 갈릴리 호수의 일출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향하신 사랑을 확신하는 기회가 되었었다.
(1) 고대 고린도 박물관
아침 일찍 고린도박물관과 고린도유적지를 답사하였다. 고대 고린도 박물관에서는 맨 먼저 아스클레피오스방을 찾았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아폴로신의 아들로서 이 지역 사람들도 치료의 신으로 섬겼다. 이 숭배사상이 극에 달했던 기원전 470-250년에는,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치료받은 부분을 만들어 신전에 봉헌했다고 한다. 남근, 유방, 팔, 다리 등 고침을 받고 감사해서 신전에 봉헌한 물건들이 발굴되어 있다.
<환자들이 치료받은 부분을 만들어 신전에 봉헌한 기념물>
또 다른 방에는 네로를 비롯한 황제들의 모습과 로마시대 건축물에서 발견된 모자이크가 전시되어 있다. 또한 유약을 입힌 토기로 된 잔은 겐그레아에서 출토된 것인데 포도나무 올리브나무, 날아드는 새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박물관 안뜰에는 로마시대의 석상들로 목이 부러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몇 개는 목이 빠진 석상도 있는데 이것은 아래 부분을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윗부분은 무슨 경기에 이겼다거나 할 때 해당 인물들의 두상을 제작하여 끼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스 항아리> <고린도 박물관 뜰의 목이 없는 석상들>
다른 한쪽에는 유대인을 상징하는 일곱 촛대와 올리브나무의 잎사귀와 열매가 새겨져있으며 벽 쪽에는 유대인들의 회당이라는 뜻의 글귀가 일부 남아 있어 초대교회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유대인 회당이었음을 증명하는 일곱촛대>
여자들의 석상들은 대부분 아래 배가 불룩한데 거기에는 성욕이 가득하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성행위가 식사나 차 마시는 것처럼 일상생활의 한 부분으로 부끄럽거나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거리였다고 한다.
또한 쪽에는 사자+독수리+사람의 세 가지 모습이 조합된 스핑크스가 있는데, 3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스핑크스는 완전한 존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스핑크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떡하든 못 맞추는 퀴즈를 내어 잡아먹었다고 한다. 스핑크스는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전형적인 사탄이라 할 것이다.
<고린도에서 출토된 스핑크스> <고린도에서 발굴된 여자석상>
(2) 고린도 유적지
박물관 가까이에 있는 유적지에는, AD1세기에 건립된 큰 음악당으로 225년에 이르러서는 맹수들과 싸움을 벌이는 검투장으로 쓰였던 곳이 발굴되어 있다. 아폴로신전, 비마(Bema: 강단), 큰 도로와 도로변 가게 터, 피리니(Peirene)우물 터 등이 있다. 이 우물은 AD2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19세기 말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고린도전서 5:1-2에 기록된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비도덕적인 행위는 신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음행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고대 신전의 제관들과 신녀들은 창녀와 남창의 역할을 하였으며, 시장에 나온 고기는 일단 신전에 제물로 바쳤던 고기였기 때문에, 당시에 교회가 우상의 제물로 드렸던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 여부의 논쟁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의 아크로폴리스에는 외침을 막기 위한 성채가 있고 성채 안에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다. 이곳 신전 역시 천여명이 넘는 신녀들이 있어 일종의 창녀촌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바울 설교하던 비마와 멀리 보이는 아크로폴리스> <고린도 아폴로신전 터>
비마(Bema)는 광장 중앙에 돌더미로 갈리오 총독이 유대인들의 고소로 바울을 재판했던 자리다(행 18장). AD5세기에 이곳을 교회로 사용하였으며 비마의 돌판에 고린도 후서 4:17절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輕)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重)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는 말이 그리스어와 영어로 새겨져 있다. 고린도 박물관과 유적지를 살펴보고 신고린도의 바울기념교회에 인사를 한 후 메테오라로 긴긴 여행을 출발하였다.
(3) 메솔롱기와 니고볼리
메테오라로 가는 길에 13:00시경 유황온천에 발을 담갔다. 세르모삘레스 지역의 라미아(Lamia) 가까이에 있는 야외 온천이다. 온천족욕을 끝내고 메터오라로 가는 버스속에서, 그리스에서 중요한 지역이지만 가보지 못하는 서쪽 지역의 메솔롱기와 니고볼리에 대한 이야기를 선교사로부터 들었다. 우리 순례단은 그리스 동쪽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메솔롱기(Messolongi)는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그리스를 독립시키는 것이 유럽의 자존심”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여하다 1824년 병사한 곳이다. 특히 메솔롱기는 그리스의 독립전쟁에 있어서 영웅적인 도시로 알려져 있다. 1821년 메솔롱기 사람들이 개와 고양이는 물론 쥐까지 잡아먹으며 터키 군인들에게 항거하다 결국 탈출하려 하지만, 계획이 탄로나 포로로 잡혀갈 위기에 처하자 화약고에 불을 질러 터키 군인과 함께 타 죽었다. 바이런이 묵었던 집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가 죽은 자리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니고볼리(Nicopolis)는 승리라는 뜻의 도시로, BC31년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승리를 이끌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가 세웠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잠시 풀려났을 때 이곳에서 겨울을 보냈으며, 그레데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디도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외투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디도는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헬라 사람으로(갈2:3, 딛1:4), 바울과 함께 그레데 사람들에게 전도하였으며, 그곳에 남겨져 장로들을 세우고 교회를 돌보는 일을 하였다(딛1:5). 그 후 바울의 부름으로 니고볼리에 왔으며(딛3:12) 달마디아(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딤후4:10).
니고볼리 역시 우리가 가는 방향과 반대쪽에 있어 다음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순례단은 동쪽 고속도로를 타고 메테오라로 향하고 있으나 메솔롱기와 니고볼리는 서쪽 해안지역에 위치해 있다.
(5) 메테오라
14:30분에 점심식사를 하고 메테오라 수도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문을 닫기 전인 4시 반에 도착하였다. 메테오라 수도원은 외부인들에게 오픈하는 요일도 각기 다르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성 스테파노스 수도원만 내부를 보고 나머지는 멀리서 보았다. 여기에 있는 수도원들은 그리스 정교회 소속 수도원들이다. 앞쪽에서 볼 때에는 높은 산꼭대기에 위험스럽게 서있었는데, 뒤로 꼬불꼬불 돌아서 버스도 올라갈 수 있었다. 몇몇 수도원들은 차로 갈 수 없어서 큰 밧줄 같은 것을 연결시켜 마치 케이블카처럼 물건을 나른다고 한다.
메테오라(Meteora)는 ‘공중에 떠있는’이라는 뜻이다. 옛날에는 여기가 바다였다는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 메테오라 산 정상에서 많은 물고기 및 바다생물의 뼈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곳의 기암괴석들은 바닷물이 급격하게 빠져 나가면서 지층의 변동으로 급하게 솟아올랐다고 한다. 또한 신화에 따르면 천상에서 열받은 제우스가 던진 벼락이 이곳에 떨어져 만들어졌다고 한다.
최근 발견된 건축 및 벽화 자료에 의하면 메테오라에는 1200년경부터 수도원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성기 때는 13개의 공동수도원과 20여개의 작은 거주처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6개의 수도원이 남아있다.
성 스테파노스 수도원은 1192년에 수도사 예레미아스가 살고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12세기에 이미 수도사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성당인 성 스테파노스 성당은 1350년에 건립되었으며, 1798년 건립된 새로운 성당에는 1398년에 이 수도원에 모신 성 샤라람보스의 기적의 두개골이 안치되어 있다. 샤라람보스는 스테파노스에 이어 이 수도원의 제2의 수호성인이 된 인물이다. 1961년에는 여자수도원으로 바뀌었다.
<성 스테파노스 수도원 전경> <성 스테파노스 수도원 내부>
DIVANI METEORA 호텔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앞뒤로 바닷가가 보이는 좋은 호텔이다. 이번 여행길에서 두 번째로 일출을 보았다. 아침 산책을 위해 나서는데 호텔 뒤편 바닷가에서 동쪽 하늘이 아름답게 비쳐왔다.
6월 29일 베뢰아, 데살로니가, 아볼로니아, 빌립보, 까발라(네압볼리)
(1) 베뢰아
아침 일찍 Divani Meteora 호텔을 나와 베뢰아(Veria) 지역으로 가는 버스속에서 화려한 무지개를 보았다. 이번 여행에는 무지개도 보고, 바닷가 호텔에 머물게 되어 일출도 두 번씩이나 보게 되었다. 일출과 무지개는 우리 순례단을 들뜨게 만들기에 족했다.
호텔에서 7시반에 출발하여 베뢰아까지 버스로 3시간 거리였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Thessaloniki)에서 남쪽으로 약 80Km정도 떨어져 있다. 바울이 2차선교여행 때 실라와 함께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믿는 사람이 많고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아니하”였다(행 17:10-13).
주민 6만여명이 사는 베뢰아에는 에그나티아라는 로마시대 도로 흔적이 남아 있다. 네모난 돌들로 만들어진 길로서 바울이 이 길로 하루에 40km를 걸어 전도여행을 했다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고대 로마시대에 건설된 도로망(道路網)은 수도(水道)와 함께 고대 로마 토목기술의 최대 유산으로 꼽힌다. 식민지를 포함한 전 영토에 걸쳐 건설된 로마 도로는 군대와 물자의 이동을 편리하게 하여 로마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에그나티아(Via Egnatia) 가도는 BC 2세기 후반 발칸반도에 건설된 고대 로마의 군사도로로, 아드리아해 연안의 디라키움, 아폴로니아에서 출발하여 일리리아 ·마게도니아의 산악지를 동쪽으로 관주하여 데살로니카 지역에 이른다. 뒤에 더욱 연장되어 트라키아 지방의 키프세라까지 연장되었다.
베뢰아에 그리스 정교회가 바울이 말씀을 증거한 강단 터에 기념물을 세웠다. 강단터 우측 벽화에는 열심히 설교를 듣고 있는 성도(맨 뒤에는 여성도 보인다)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좌측 벽화에는 바울이 드로아에서 본 환상을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강단터 옆 기념비에는 윗부분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랫부분에는 바울의 모습이 담겨있다.
현재 기념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회교사원이 보인다. 옛 바울기념교회가 있던 곳에 세워진 것이며 지금은 빈 건물이라고 한다. 그리스의 국교는 희랍정교이며, 회교는 금지되어 있으나 가톨릭과 개신교는 허락되고 있다.
6월 29일은 바울이 이곳에 도착한 날을 기념한 축제일이라고 하여 도로 여기 저기 행사를 알리는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바울 강단 터 앞 길 건너에는 간판이 없는 다방이 있는데, 오직 늙은 남자들만 모여 카드놀이를 하거나 신문을 뒤적이며 앉아 있다. 우리 순례단은 여기에 있는 화장실을 무료로 사용하기 위해 들렸으며, 노인들과 반갑게 사진도 찍었다. 그리스는 복지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 노후가 크게 걱정되지 않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최근 과다한 복지 지출로 인해 그리스 정부가 부도위기에 휩싸여 세계 금융시장이 휘청거리고 있다.
<베뢰아 바울 강단 터 기념물> <베뢰아 바울 강단터 앞 노인다방>
(2) 데살로니가(Thessaloniki)
베뢰아에서 데살로가에 도착하니 12시가 다 되었다. 데살로니카는 인구가 1백만여에 이르는 마게도니아지방의 항구도시로 그리스 제2의 도시다. 비잔틴 시대에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고 알렉산더 대왕의 고향이기도 하다. 로마제국시대에는 마게도냐의 정치적 중심지였으며, 비잔틴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플 다음가는 큰 도시로 지금도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교회들이 남아있으나 바울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바울당시 교회는 아름다운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교회였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 디미트리우스 기념교회>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 회당에서 성경을 강론하며 ‘내가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를 시기하여 바울을 해치기 위해 바울에게 숙소를 제공한 야손의 집을 급습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에 야손과 그 형제들을 잡아 ‘로마 황제가 아닌 다른 임금 예수를 섬기고 있다’고 반역죄로 고소한다. 그러나 관원들은 야손 일가를 보석으로 풀어주었고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낸다(행 17:1-9).
데살로니가 전서는 바울이 2차선교여행 중 고린도에 있을 때에 디모데와 실라로부터 데살로니가 지방 성도들의 형편을 듣고,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전한 편지이다. 핵심은 종말론에 관한 것으로 주님 재림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데전 4:14-18). 또한 하나님의 뜻이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데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데전 5:16-18).
데살로니가 후서는 데살로니가 전서를 기록한 5-6개월 후에 쓰여진 것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에 대한 찬사와 격려, 그리스도 재림을 대망하는 성도들의 성결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릇된 종말론에 휩쓸리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가 현재 부도위기로 정부에서 복지관련 예산을 삭감하려고 하여 노동자들이 연일 데모를 하고 있다. 오늘도 데모하는 사람들로 인해 북적대어 데살로니가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소속 성 디미트리우스 기념교회(St. Demitrios Church)는 내부를 구경하지 못하고 곁에서 사진만 찍고 지나가야 했다. 디미트리우스 교회는 정교회 종교 교육의 체험장으로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5세기 경에 건축된 바실리카 양식으로 건축된 그리스에서 가장 큰 교회였으나 1917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남은 자재를 활용하여 1926-48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지하에 내려가면 지금도 옛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디미트리우스(Demitrios)는 갈레리우스 황제에 의해 순교하였으며, 후에 데살로니카 수호성인으로 추앙되었다. 이 성인의 놀라운 기적으로 여러번 야만인의 침입을 방어하게 되었으며, 그의 무덤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은 병자들을 치료하는 놀라운 기적을 행한다고 믿고 있다.
(3) 아볼로니아의 바울 설교 터와 유대교 회당터
데살로니가 시내에서 두 개의 볼비 호수를 지나 조그만 마을인 옛 아볼로니아로 가는 길가에는 해바라기 농장들이 즐비하여 노란 꽃들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강론하며, 그리스도가 해(害)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할 것을 증명하고,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행 17:1-3)라고 설교한 현장에 이를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 있고, 10여미터 떨어진 곳에 유대교 회당 터가 폐허로 남아 있다. 마침 바울이 6월29일 여기에 도착한 기념일이라, 설교단(비마)과 회당터 사이의 넓은 평지에, 많은 의자와 마이크 등 마을 축제 준비에 바쁜 그리스 정교회 신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스테파노 신부와 함께 사진도 찍었다.
<아볼로니아 바울 설교 터 표지판> <바울 설교 터에서 스테파노 신부와 함께, 뒤로 유대인 회당이 보인다>
(4) 빌립보
아볼로니아에서 암비볼리에 가는 중간지점 바닷가 휴양지인 아스프로발타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넓고 푸른 바다를 보며 휴식을 취하였다. 비키니 차림의 붉은 살결들과 푸른 바다가 작열하는 태양아래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순례단은 모두들 더 쉬고 싶어했으나 다음 일정때문에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했다.
다음 행선지는 담배와 목화가 유명하여 우리나라 담배인삼공사 지사도 있다는 암비볼리(Amfipoli)에 있는 사자상을 멀리 보고, 빌립보(Filippoi)에 이르렀다. 맨 먼저 루디아기념교회를 찾았으며, 다음으로 빌립보 유적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압볼리(까발라)에서 그리스 정교회 소속인 바울기념교회를 방문한 후, 아름다운 해변에 있는 Lucy 호텔에서 짐을 풀었다.
빌립보는 로마 4대 성곽도시 중의 하나로 BC356년 경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왕이 건설하였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이곳에 들려 복음을 전하였다(행 61:12). 여기에서 터키 두아디라 Thyatira (현재 지명은 아키사르 Akhisar) 지방 출신인 자주색옷감장사 루디아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유럽에서 예수를 믿게 된 최초의 결신자이며 지각티스(Zigaktis) 강가에서 세례를 받는다. 현재 루디아 기념교회 및 세례터가 있다. 루디아의 고향 두아디라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초대 교회 가운데 하나가 있던 곳이다. 중국과 유럽을 잇는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어, 그리스의 도시가 되었다가 BC190년경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루디아는 중국산 비단을 가져다가 자주색으로 물을 들여 판매했는데, 자주색 염료가 값이 비싸 로마 귀족들이 선호했던 옷감이다. 루디아는 세례를 받고 바울 일행을 강권하여 자기 집에 머물게 하였다(행 16:15).
<루디아 기념교회> <루디아 세례터>
빌립보 유적지에는 빌립보 성의 과거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고 성안에는 특히 빌립보의 원형극장과 바울과 실라가 갇혔던 감옥이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빌립2세때 건립한 3천석 규모의 원형극장은 소리의 공명상태가 완벽하게 설계되어 있음을 지금도 시험해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바울과 실라가 갇혔던 감옥은 빌립보 성안의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귀신에 사로잡혀 점을 치고 있던 여종이, 바울과 실라가 귀신을 쫓아내자 신통력이 없어졌다. 주인들은 점으로 얻는 자기 수입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관리들에게 고발하였다. 죄수가 된 두 사람이 착고에 든든히 묶여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갑자기 큰 지진으로 착고가 벗어지고 옥문이 열리게 되자, 이를 본 간수가 자결하려하였다. 바울이 큰 소리로 말렸고(행 16:16-34), 간수가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말하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구원을 얻으리이까”하니 바울이 말하기를 “주 예수를 믿으면 네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하자, 그 밤에 간수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로서 유럽 지역에 복음 전파가 시작되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에게 감사하며 여러 차례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에 감탄한 바울은 로마감옥에서 감사와 사랑의 편지를 남기는데 이것이 <빌립보서>이다. <빌립보서>에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 빌립보 기념교회 터 앞 원형극장> <빌립보에 있는 바울이 갇혔던 감옥>
(5) 네압볼리(까발라 Kavala)
네압볼리는 에게해의 북쪽 즉 마게도니아 남부에 있는 항구도시로 빌립보 성 남동쪽 14Km지역에 있다. 이곳은 바울이 환상을 보고 처음 도착한 유럽의 땅이다(행16:11). 환상 중에 마게도니아 사람하나가 자기에게 건너와 도와달라 하자, 이는 하나님이 마게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바울일행을 부르신 줄로 받아들였다(행 16:9-10). 터키의 드로아에서 사도바울의 일행(바울, 실라, 디모데, 누가)은 그리스 섬인 사모드라게를 지나 유럽전도의 시발점인 네압볼리 항구에 도착하였다.
바울도착기념교회(공식명칭: St. Nicolas Church)는 16세기에 옛날 기독교 회당(Old Christian Bacilica) 터 위에 이슬람의 모스크로 지어졌으나, 지금은 그리스 정교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이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가는 모습의 성화가 앞 마당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네압볼리 바울 도착기념교회 앞 벽화> <바울 도착기념교회 전경>
바울도착기념교회 부근 바닷가 카페에서 우리 순례단은 단원중 한분이 아이스크림과 차를 대접한다하여 환담을 나누고 숙소로 향하였다. 숙소는 깨끗한 해변가에 자리한 Lucy Hotel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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