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욕의 삶이 빚어낸 아름다운 시 세계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고 하늘로 돌아간 시인 천상병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은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대한민국에서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교육을 받으며 간첩 활동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중앙정보부가 간첩으로 지목한 인물 중에는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던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천상병의 서울대 상대 동기생인 친구 강빈구도 간첩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독일(통일 전 서독) 유학을 마치고 와서 서울대학교에 전임교수로 있었는데 천상병과 자주 어울렸다. 강빈구는 은행가의 아들로 돈 씀씀이가 좋아서 대학 시절부터 천상병이 하숙비도 얻어 쓰는 사이였다. 천상병을 특별히 좋아하고 믿어서 숨기는 것이 없는 그는 어느 날 술자리에서 동베를린에 다녀왔다고 자랑했다.
천상병은 강빈구한테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막걸리 값으로 오백 원에서 천 원씩 받았다. 이런 일들이 중앙정보부 자료에는 천상병이 강빈구가 간첩인 줄 알면서도 돈을 받고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둔갑했다. 천상병의 죄명은 반공법상 불고지죄와 형사법상 공갈죄였다. 친구가 북한의 간첩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아서 불고지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또 절친한 친구를 간첩으로 신고하겠다고 협박해서 일주일에 한두 번 술값으로 100원 또는 500원씩, 2년 동안 모두 3만여 원을 뜯어냈다는 것이다.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세 달 동안 물고문과 성기에 전기 충격을 가하는 고문을 당한다. 결국 그는 전기고문 세 번으로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풀려난 천상병은 다시 세 달 동안 교도소에 갇혀 있다가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로 나왔다.
천상병은 6개월간 모진 고문을 받아 거의 폐인이 되어 출소했다. 그 총명하던 재주도 언어도 어눌해지기 시작했다. 동백림사건 이전에 천상병은 독설로 선배 문인들을 곧잘 골탕 먹이는 날카로운 신예 비평가였다. 시도 쓰고 비평문도 쓰고 짧은 번역도 해서 더러는 친구들 밥값이며 술값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뒤로 그는 사람이 달라졌다. 신경림 시인은 당시의 천상병 시인에 대해 술은 여전했으나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목순옥의 오빠 목순복은 천상병의 친구였다. 목순옥이 여고 2학년 때 오빠의 소개로 명동의 갈채다방에서 천상병을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곧 스스럼없는 사이가 된다. 천상병은 목순옥을 친동생처럼 데리고 다녔다. 연극이나 영화 표가 생기면 함께 구경했고 빈털터리가 되면 목순옥에게 차비를 받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목순옥은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동백림사건이 터지고 천상병이 실종되었을 때 비로소 그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목순옥은 일주일에 두 번씩 빠짐없이 면회를 갔다.
천상병은 고문의 후유증에다 잦은 폭음으로 건강이 엉망이 되어서 부산의 형님 댁에 내려갔다가 1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목순옥을 찾아왔는데 얼굴이 까맣게 변해 있었다. 커피숍에서 문학 이야기를 하다 내일 보자며 헤어졌는데, 그날 갑자기 천상병이 사라졌다.
목순옥과 헤어진 날 밤에 술에 취해서 거리에 쓰러져 있는 그를 경찰이 발견했다. 자신을 시인 천상병이라 말하면서도 시를 한 줄도 못 외우는 것이 경찰로서는 너무 이상했다.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하는 그를 경찰은 행려병자로 간주하여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천상병은 넋이 반쯤 나간 상태로 1971년 여름부터 몇 달 동안 입원해 있었다.
그가 보이지 않자 친구들이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친구들은 천상병이 길에서 쓰러져 죽었다고 여겨 그의 작품들을 모아 유고시집 《새》를 발간하였다. 천상병은 살아 있으면서 유고시집을 낸 유일무이한 시인이 되었다. 담당 의사는 이 유고시집을 소개하는 신문기사를 보고 자신이 돌보는 환자가 천상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친구들에게 연락해 주었다.
목순옥은 천상병이 실종 기간 내내 병원에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그를 찾아간다. 그녀가 매일 병문안을 하며 간호한 덕분에 고문의 충격과 술병으로 40킬로그램이었던 천상병의 몸무게는 60킬로그램으로 불어났다. 시립병원장 김광해(담당 의사)는 목순옥이 천상병 시인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모습을 지켜보고, “저 사람이 글을 쓰고 못 쓰고는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두 분이 결혼하면 어떨까요?”라고 권유한다.
그때 목순옥은 천상병과 결혼할 결심을 한다. 나중에 목순옥은 “가진 것은 병과 가난밖에 없는 남자, 그것도 철없는 아이 같은 남자와 왜 결혼할 생각을 하셨습니까?”라는 질문에 “다시 만났을 때 고문 후유증으로 기저귀를 차고 있었는데 대소변을 못 가리는 것도 하나도 힘들지 않고, 그의 시만큼 그의 성정도 정말 맑고 천진한 사람이어서 미워할 수가 없었어요. 그냥 제가 돌봐 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라고 대답했다.
마흔세 살 노총각 천상병과 서른여섯 살 노처녀 목순옥은 1972년 5월 14일에 김동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린다. 술과 담배, 친구를 좋아하는 천상병의 성품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살림형편이 어려워져 생계 걱정을 할 때 천상병의 친구인 강태열 시인이 300만 원을 빌려줘서 인사동 골목에 ‘귀천’이란 찻집을 열었다. 천상병 시인의 작품 제목을 따서 이름을 지은 ‘귀천’은 예술인, 작가, 언론인, 지식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남편과 사별할 때까지 21년간 부부였지만 천상병은 목순옥에겐 아기였고 천사였다. 매일 아침 세수시키고 손발톱도 깎아주고 목욕을 시켜주면서도 고통스럽다기보다는 자신에게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모든 것을 다 바칠 대상이 있다는 게 행복했다.
1988년 천상병은 간경화증이 악화되어 친구가 의사로 근무하는 춘천의료원에 입원하는데 회복될 가망이 전혀 없다는 얘기를 듣는다. 목순옥은 병원에서 천상병에게 아침을 먹이고 서울로 돌아와 찻집 일을 마치면 다시 춘천으로 향했다.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차 안에서 목순옥은 매일 기도했다. ‘5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딱 5년만요.’ 천상병은 거짓말처럼 병을 털고 일어나더니 정확히 5년 뒤에 다시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천상병의 장모는 장례 때 받은 조의금 840여만 원을 어디에 둘지 몰라 고민하다가 아궁이에 숨긴다. 그곳에 숨겨두면 도둑이 훔쳐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바로 여름이 그다지 멀지 않은 4월 말이었다. 그런데 목순옥은 하늘나라로 간 남편이 추울까봐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다음 날 아침에 천상병 시인의 장모는 돈이 잘 있나 확인하려고 부엌으로 가서 아궁이를 뒤적였다. 거기에는 불에 탄 돈 쪼가리 흔적만 남아 있었다. 한동안 넋을 잃고 있던 두 사람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타다 남은 돈 쪼가리와 재를 긁어모아 한국은행으로 갔다. 한국은행에서는 실수로 조의금이 불에 탄 사실을 인정해 400여만 원을 되돌려주었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욕을 얘기하듯이 이 세상을 떠나면서 천상병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시 <귀천>을 선물로 남겨주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 <귀천>
1996년 5월에 천상병의 <귀천>을 읽다가 멈칫했다. 죽는 일을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간다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죽음을 이토록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게 참으로 놀라웠다. 시인의 말은 내게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맞이하기 위해서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음껏 사랑하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시를 읽고 나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의 말줄임표를 멋진 삶으로 채워 넣고 싶어졌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에서 시인은 생명을 빼앗기거나 잃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명을 다른 곳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표현했다. 또한 인생은 아름다운 세상으로 소풍 온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귀천>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지닌 천상병 시인이 아니고서는 쓰기 어려운 시이다.
오철수 시인은 《시가 사는 마을》에서 <귀천>을 이렇게 평하였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며 무욕의 삶이 빚어낸 아름다운 시 세계를 느꼈습니다. 어쩌면 삶 자체가 욕심 덩어리일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래서 그 욕심을 하나 둘 버릴 때 사람은 점점 순수해지고 맑아지고, 나와 세계의 거리는 점점 투명해져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되나 봅니다. 이 시에서처럼 인간에게 가장 힘든 고통이라는 죽음마저도 소풍쯤의 거리로 되어버리니 말입니다.”
1993년 4월 28일, 천상병 시인이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던 그날은 뿌연 안개 속에 찬비가 내렸다.
- 《시인의 가슴을 물들인 만남/고광석 지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