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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本 書 紀 下
권 30 高天原廣野姬天皇 持統天皇
卽位前紀 朱鳥 원년(686) 겨울 10월 戊辰 초하루 己巳 皇子 大津이 반란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었다. 皇子 大津을 체포하고 아울러 皇子 大津을 잘못 인도한 直廣肆 八口朝臣音 , 小山下 壹伎連博德과 大舍人 中臣朝臣臣麻呂, 巨勢朝臣多益須, 新羅의 沙門 行心 및 帳內礪杵道作 등 30여 인을 체포했다.
丙申 또 조서를 내려 新羅의 沙門 行心이 皇子 大津이 반란을 꾀하는데 참여했으나, 짐이 차마 법을 더 적용하지 못하겠다. 飛 國의 伽藍으로 옮기라 고 하였다.
윤12월 筑紫의 大宰가 高麗 百濟 新羅 3國390)의 남녀 百姓과 僧尼 62명을 바쳤다.
持統天皇 원년(687) (봄 정월 丙寅 초하루) 甲申 直廣肆 田中朝臣法麻呂와 大貳守君예(艸+刈)田 등으로 하여금 新羅에 사신으로 가서 天皇의 喪을 알리게 했다.
3월 乙丑 초하루 己卯 投化한 高麗人 56명을 常陸國에 살게 했다. 땅을 나누어 주고 곡식을 주어 生業에 편안히 종사하게 했다.
丙戌 투화한 新羅人 14명을 下毛野國에 살게 했다. 땅을 나누어 주고 곡식을 주어 生業에 편안히 종사하게 했다.
여름 4월 甲午 초하루 癸卯 筑紫의 大宰가 투화한 新羅의 僧尼와 남녀 백성 22명을 바치니, 武藏國에 살게 했다. 땅을 나누어 주고 곡식을 주어 生業에 편안히 종사하게 했다.
(9월 壬戌 초하루) 甲申 新羅가 왕자 金霜林, 級飡 金薩慕와 級飡 金仁述, 大舍 蘇陽信 등을 보내 國政을 아뢰고 또 調賦를 바쳤다. 學問僧 智隆이 따라 왔다. 筑紫의 大宰가 바로 천황의 죽음을 霜林 등에게 알리니, 그날로 霜林 등이 모두 喪服을 입고 동쪽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세 번 哭을 하였다.
12월 辛卯 초하루 庚子 直廣參 路眞人迹見을 新羅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칙사로 삼았다.
2년(688) (봄 정월 庚申 초하루) 壬午 천황이 돌아가셨음을 新羅의 金霜林 등에게 조칙으로 말하니, 金霜林 등이 세 번 哭을 하였다.
2월 庚寅 초하루 辛卯 大宰가 新羅의 調賦를 바쳤는데, 金 銀 絹 布, 가죽, 구리, 철 따위의 10여 가지였으며, 아울러 따로 바친 불상과 여러가지 채색 비단, 새 말 따위 10여 가지, 그리고 霜林이 바친 金 銀 彩色391), 여러가지 진기한 물건 등 80여 가지 물건이었다.
己亥 霜林 등에게 筑紫館에서 연회를 베풀고 물건을 각각 차등있게 주었다.
戊午 霜林 등이 마치고 돌아갔다.
5월 戊午 초하루 乙丑 百濟의 敬須德那利를 甲斐國에 옮겼다.
(가을 7월 丁巳 초하루) 丙子 百濟의 沙門 道藏392)에게 명해 비가 내리기를 청하도록 했다. 오전이 지나지 않아 온 나라에 비가 두루 왔다.
(8월 丁亥 초하루) 辛亥 耽羅의 왕이 佐平 加羅를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9월 丙辰 초하루 戊寅 耽羅의 佐平 加羅 등에게 筑紫館에서 연회를 베풀고 물건을 각각 차등있게 주었다.
3년((689) (봄 정월 甲寅 초하루) 辛酉 新羅에 갔던 사신 田中朝臣法麻呂 등이 新羅로부터 돌아왔다.
여름 4월 癸未 초하루 庚寅 투화한 新羅人을 下毛野에 살게 했다.
壬寅 新羅가 級飡 金道那 등을 보내 瀛眞人天皇(天武天皇)의 죽음에 조문하고 아울러 學問僧 明聰 觀智 등을 보냈다. 따로 金銅阿彌陀像 金銅觀世音菩薩像 大勢至菩薩像 각 1軀와 綵帛 錦 綾을 바쳤다.
5월 癸丑 초하루 甲戌 土師宿 根麻呂에게 명해 新羅의 弔使 級飡 金道那 등에게 조칙을 내리기를 太政官의 卿 등이 칙명을 받들어 2년393)에 田中朝臣法麻呂 등을 보내 大行天皇(天武天皇)의 죽음을 알렸다. 당시에 新羅人이 말하기를 新羅의 칙명을 받드는 사람은 원래 蘇判394)의 지위에 있는 사람을 썼다. 이제 다시 그렇게 하려 한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法麻呂 등이 천황의 죽음을 알리는 조서를 선포하지 못하였다. 만약 그 전의 일을 말하자면, 옛날 難波宮治天下天皇(孝德天皇)이 돌아가셨을 때 巨勢稻持 등을 보내 喪을 알리던 날에395) 飡396) 金春秋가 칙명을 받들었다. 그런데 蘇判으로 하여금 칙명을 받들게 했다는 것은 이전의 일에 어긋난다. 또
近江宮治天下天皇(天智天皇)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一吉飡397) 金薩儒398)를 보내 조문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級飡399)을 보내 조문하니, 또한 이전의 일에 어긋난다. 또 新羅가 원래 우리나라는 日本의 먼 조상 때부터 배를 나란히 하고 노를 말리지 않으며 받드는 나라가 되었습니다400)'고 아뢰었는데, 지금은 1척의 배 뿐이니 또한 옛 법도에 어긋난다. 또 日本의 먼 조상 때부터 깨끗한 마음으로 받들었습니다'고 아뢰었는데, 충성을 다하여 본래의 직분을 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깨끗한 마음을 해쳐 거짓되이 요행히 잘 보이기를 구하였다. 그러므로 調賦와 따로 바친 것들은 모두 封해 돌려보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먼 조상 때부터 너희들에게 널리 자비를 끼친 덕은 끊어서는 안될 것이니, 더욱 부지런하고 삼가하며 두려워하며 그 職任을 거행하여 법도를 따른다면 조정에서 다시 널리 자비롭게 대할 것이다. 너 道那 등은 이제 칙명을 받들어 너희 왕에게 잘 말하라 고 하였다.
(6월 壬午 초하루) 辛丑 筑紫의 大宰 粟田眞人朝臣 등에게 명령하여 學問僧 明聰 觀智 등이 新羅의 師友에게 보낼 綿 각 140斤을 주었다.
乙巳 筑紫의 小郡에서 新羅의 조문사 金道那 등에게 (연회를) 베풀고, 물건을 각각 차등있게 주었다.
가을 7월 壬子 초하루 이 날 新羅의 조문사 金道那 등이 마치고 돌아갔다.
4년(690) (2월 戊申 초하루) 戊午 新羅의 沙門 詮吉과 級飡 北助知 등 50명이 귀화하였다.
壬申 귀화한 新羅의 韓奈末 許滿 등 12명을 武藏國에 살게 했다.
(5월 丙子 초하루) 乙酉 百濟의 남녀 21명이 귀화했다.
(8월 乙巳 초하루) 乙卯 귀화한 新羅人들을 下毛野國에 살게 했다.
(9월 乙亥 초하루) 丁酉 唐에 갔던 學問僧 智宗 義德 淨願과 軍丁인 筑紫國 上陽 郡의 사람 大伴部博麻401)가 新羅의 送使 大奈麻 金高訓 등을 따라 돌아와 筑紫에 이르렀다.
(겨울 10월 甲辰 초하루) 戊午 사자를 보내 筑紫의 大宰 河內王 등에게 조서를 내려 新羅의 送使 大奈麻 金高訓 등에게 연회를 베풀되, 學生 土師宿 등을 보내주었던 送使402)의 예에 따르라. 그들을 위로하여 물건을 주는 것은 한결같이 조서에 의거하라 고 하였다
乙丑 軍丁인 筑後國403)의 上陽 郡人 大伴部博麻에게 조서를 내려 天豊財重日足姬天皇(齊明天皇) 7년 百濟를 구원하기 위한 싸움에서, 너는 唐軍의 포로가 되었다. 天明開別天皇(天智天皇) 3년404)에 이르러 土師連富 氷連老 筑紫君薩夜麻 弓削連元寶의 아들 등 4명이 唐나라 사람들이 꾀하는 바를 아뢰려고 생각했지만, 옷과 식량이 없었기 때문에 이룰 수 없음을 걱정하였다. 이 때 博麻가 土師富 등에게 나는 너희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옷과 식량이 없기 때문에 함께 갈 수 가 없다. 원컨대 내 몸을 팔아 옷과 식량에 충당하라'고 하였다. 富 등이 博麻의 계책에 따라 조정에 돌아올 수 있었다. 너 홀로 다른나라에 머문 것이 지금까지 30년이었다. 짐은 (그대가) 조정을 높이고 나라를 사랑하며 자신을 팔아 충성을 드러낸 것을 아름답게 여겨 務大肆405) 및 5필, 綿 10屯, 布 30端, 稻 1천 束, 水田 4町을 준다. 그 水田은 증손에게까지 미칠 것이며, 3族의 課役을 면제하여 그 공을 드러낸다 고 하였다.
11월 甲戌 초하루 庚辰 送使 金高訓 등에게 상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12월 癸卯 초하루 乙巳 送使 金高訓 등이 마치고 돌아갔다.
5년(691) (봄 정월 癸酉 초하루) 己卯 公卿에게 음식과 의상을 주었다. 正廣肆 百濟王余禪廣406), 直大肆 遠寶407) 良虞408) 南典409)에게는 넉넉히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乙酉 封을 더해주었는데, 皇子高市는 2,000戶로 앞의 것과 합하면 3,000호 正廣肆百濟王禪廣은 100호로 앞의 것과 합하면 200호, 直大壹布勢御主人朝臣과 大伴御行宿 는 80호로 전과 합하면 300호이다. 그 나머지 사람에게도 封을 더해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여름 4월 辛丑 초하루 大學博士 上村主 百濟大稅410)에게 1천束을 주어 학업을 권면하였다.
5월 辛未 초하루 辛卯 百濟淳武微子411)의 壬申年의 공을 포상하여 直大參을 주었다. 그리고 布를 주었다.
9월 己巳 초하루 壬申 音博士인 唐나라 사람 續守言 薩弘恪, 書博士인 百濟 사람 末士善信에게 은 20兩을 사람마다 주었다.
? 12월 戊戌 초하루 己亥 醫博士 務大參德自珍, 呪禁博士 木素丁武 沙宅萬首에게 사람마다 은 20兩을 주었다.
6년(692) 2월 丁酉 초하루 丁未 관리들에게 조서를 내려 3월 3일을 맞아 伊勢에 가려고 하니, 이 뜻을 잘 알아 옷과 물건들을 마련하라. 고 하였다. 陰陽博士 沙
門 法藏412)과 道基에게 은 20兩을 주었다.
겨울 10월 壬戌 초하루 壬申 山田史御形에게 務廣肆를 제수했다. (그는) 전에 沙門이 되어 新羅에서 학문을 배웠다.
11월 辛卯 초하루 戊戌 新羅가 級飡 朴億德 金深薩 등을 보내 調를 바쳤다. 新羅에 보내는 사신 直廣肆 息長眞人老 務大貳 川內忌寸連 등에게 祿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辛丑 新羅의 朴憶德에게 難波館에서 연회를 베풀고 祿을 주었다.
(12월 辛酉 초하루) 甲申 大夫 등을 보내 新羅의 調를 伊勢, 住吉, 紀伊, 大倭, 名足 5社에 바쳤다.
7년(693) (봄 정월 辛卯 초하루) 乙巳 正廣參을 百濟王善光에게 추증하고 아울러 賻儀 물건을 주었다.
2월 庚申 초하루 壬戌 新羅가 沙飡 金江南과 韓奈麻 金陽元 등을 보내, 와서 왕의 喪413)을 알렸다.
己丑 표류해 온 新羅人 牟子毛禮 등 37명을 憶德 등에게 딸려 주었다.
(3월 庚寅 초하루) 甲午 大學博士 勤廣貳 上村主百濟에게 食封 30戶를 주었다. 儒道에 뛰어났기 때문이다.
乙巳 新羅에 보내는 사신 直廣肆 息長眞人老 勤大貳 大伴宿 子君 등과 學問僧 辨通 神叡 등에게 綿 布를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또 新羅王에게 부의 물건을 주었다.
6월 己未 초하루 高麗의 沙門 福嘉에게 조서를 내려 환속시켰다.
(11월 丙戌 초하루) 壬辰 耽羅의 王子와 佐平 등에게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8년(694) (3월 甲申 초하루) 己亥 조서를 내려 7년 계사년에 醴泉이 近江國 益須郡 都賀山에서 솟았다. 병에 걸린 사람들이 益須寺에 머물러 묵으며 치료하여 차도가 있는 사람이 많았다. 처음 醴泉을 징험한 사람인 葛野羽衝과 百濟土羅羅女에게 각각 2필, 布 10端, 10口를 주었다.
9년(695) 3월 戊申 초하루 己酉 新羅가 王子 金良琳, 補命414) 薩飡 朴强國 등과 韓奈麻 金周漢, 金忠仙 등을 보내 國政을 아뢰었다. 또 調와 물건을 바쳤다.
(가을 7월 丙午 초하루) 辛未 新羅에 보내는 사신 直廣肆 小野朝臣毛野, 務大貳 伊吉連博德 등에게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9월 乙巳 초하루) 庚戌 小野朝臣毛野 등이 新羅를 향해 출발했다.
10년(696) (봄 정월 甲辰 초하루) 甲寅 直大肆를 百濟王南典에게 제수했다.
1) 意多郞; 다른 곳에 보이지 않는데 왜에 온 백제 왕족이 아닐까 추측된다.
2) 高田丘; 『大和志』에 의하면 意多郞의 묘가 大和國 葛下郡 岡崎村(지금의 大和 高田市 岡崎)에 있다고 한다.
3) 武寧王의 계보; 『三國史記』 권 26에는 武寧王의 諱는 斯摩(또는 隆)이고 牟大王 즉 東城王(479-501)의 第二子로서 동성왕이 재위 23년만에 죽자 즉위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동성왕은 文周王의 아우 昆支의 아들로서 三斤王이 죽자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文周王은 蓋鹵王(455-475)의 아들로 되어 있으며 문주왕의 아우 昆支는 문주왕 3년 4월에 內臣佐平이 되었다가 같은 해 7월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日本書紀』에는 무령왕이 문주왕의 아우 곤지의 아들로서 末多 즉 동성왕의 異母兄으로 되어 있고 『三國史記』에는 모대 즉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되어 있어 서로 다르다.
4) 各羅; 오늘날의 長崎縣 東松浦郡 鎭四町 加唐島가 이곳일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5) 調; 『日本書紀』에서 이웃나라에서 調를 바쳤다고 한 것은 『일본서기』의 일본 중심적인 독특한 표현으로 실상은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이 외교교섭시에 보낸 선물을 調를 바쳤다고 한 것이다. 주변의 국가들을 蕃國'으로 인식하고 그 번국'이 바치는 貢物의 의미로서 律令時代의 일본국내의 稅制用語인 調로 표기한 것이다.
6) 倭君; 다른 곳에 보이지 않는데 姓氏錄 左京諸蕃에 和朝臣 出自百濟國都慕王十八世孫武寧王也 라고 되어 있다. 和朝臣은 武寧王의 아들 純陀太子의 자손으로 보통 和史의 末이 되었다고 한다.
7) 耽羅人; 제주도를 지칭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三國志』 東夷傳 馬韓조에 의하면 州胡 곧 제주도 사람들이 배를 타고 육지를 왕래하며 무역한다고 하였는데 한때 제주도는 김해의 본가야 사람들에 의해서 개척된 하나의 무역 중계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三國史記』 권 26 文周王 2년(476) 4월에 탐라국이 方物을 바쳤다고 한 기록이 보이며 東城王 20년(498) 8월조에도 탐라와의 관계기사가 보인다.
8) 任那의 4縣; 왜가 백제에게 任那 4현을 割讓하였다는 기사와 뒤의 繼體紀 7년(513) 11월조에 보이는 己汶, 帶沙 두 곳의 할양 기사는 백제가 왜병의 지원을 얻어서 이 지방에 진출한 사실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4현의 위치 比定에 있어서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른데 金廷鶴은 이를 蟾津江 河口에서 洛東江 유역에 이르는 가야와 백제 사이의 완충지대로 보았고 千寬宇는 이를 낙동강 상,중류 방면에 비정하였으며 末松保和는 전남 서부로 보았다.
9) 姐彌氏; 백제의 複姓으로 『三國史記』에는 祖彌'로 되어 있다. 즉 『三國史記』 권 25 蓋鹵王 21년조에 고구려 長壽王이 와서 漢城을 포위하자 文周는 木 滿致, 祖彌桀取와 함께 南으로 갔다고 한 기록이 그 예이다. 백제의 王妃族 眞씨는 姐彌의 漢譯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0) 段楊爾; 백제측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일찍이 漢城時代에 阿直岐, 王仁 등이 일본에 건너가 漢學과 儒學을 전하였는데, 武寧王 때 다시 段楊爾가 渡日하였으며 단양이는 繼體天皇 10년 9월에 高安茂와 교대되었다.
11) 伴跛國; 『三國志』 東夷傳 辰,弁韓條에 보이는 24國 가운데 弁辰半路國의 위치는 종래에 星州 또는 巨濟郡 長承浦에 비정되어 왔는데 이를 陜川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梁의 『職貢圖』에 백제의 旁小國'으로 나오는 叛波와 동일한 小國으로 생각되며 이를 本彼와 관련시켜 주로 星州에 比定해 왔으나 최근 이를 5세기 후반에 이르러 후기 가야연맹을 주도한 高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2) 己汶; 종래 『翰苑』 雍注 所引 括地志의 基汶河'를 蟾津江으로 보고 이를 섬진강 河口의 南原, 谷城에 비정해 왔으나 이와는 달리 『新撰姓氏錄』 左京皇別,吉田連조에 나오는 三己汶地'가 任那의 東北에 있고 신라와 相爭하는 위치에 있다고 한 것에 근거하여 洛東江 상,중류 방면에서 찾아 경북 金陵 開寧, 甘文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며 이를 종래와 같이 南原, 任實지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3) 淳陀; 우리측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데 『續日本紀』 延曆 8년 12월 丙申조에 皇太后 高野新笠의 傳에 后先出自百濟武寧王之子純陀太子 라는 기록이 보인다.
14) 汶得至; 다른 곳에 보이지 않으며 斯羅는 곧 신라를 가리키는 듯하다.
15) 安羅; 경남 咸安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가야의 한 나라.
16) 辛已奚와 賁巴委佐; 다른 곳에 보이지 않는다.
17) 旣殿奚; 欽明紀 2년 4월 조에 보이는 古殿奚와 동일인인지도 모르겠다.
18) 帶沙; 『三國史記』 권 34 지리지에 河東郡이 본래 韓多沙郡이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己汶과 함께 이를 대체로 蟾津江 河口의 河東으로 비정해 왔으나, 이를 낙동강 중류의 達城郡 多斯, 河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9) 이 기사는 종래 일본학계에서는 기록 그대로 倭가 백제에게 己汶, 帶沙의 두 곳을 賜與하였다고 보아 왔으나 이는 오히려 백제가 낙동강 상류 방면으로부터 대구 방면까지 깊숙이 침투하여 가야를 지배 점령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20) 子呑; 뒤의 滿奚와 함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경남 晋州 서쪽의 蟾津江 방면의 어느 곳이라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21) 推封; 경남 密陽의 옛이름인 推火와 관련시켜 밀양 부근으로 보기도 한다. 爾列比는 경북 慈仁 또는 경남 宜寧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며 麻須比는 경남 三嘉로 추정하는 설이 있고 麻且奚는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不明.
22) 沙都嶋; 巨濟島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23) 汶慕羅; 섬이름이라고 하였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蟾津江口 外의 섬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4) 前部; 백제의 王京의 행정구획은 上(東), 前(南), 中, 下(西), 後(北)의 5部로 구분되고 다시 部는 각기 5巷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前部는 바로 王京의 5部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것으로 믿어진다.
25) 斧鐵; 돈 또는 금전이 될 만한 재물을 뜻하는 듯하다.
26) 高安茂와의 交代; 段楊爾가 渡日한 것이 7년 6월이었고 10년 9월에 高安茂와 交代하였으므로 3년마다 교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27) 灼莫古將軍; 다른 곳에 보이지 않는다.
28) 고구려의 사신이 일본에 간 확실한 예로서 처음 보이는 기록이다.
29) 武寧王의 死亡; 『三國史記』 권 26 武寧王 23년(523)조에도 5월에 죽었다고 하였다.
30) 太子 明; 『三國史記』 권 26에 聖王의 이름은 明 이고 武寧王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며 『梁書』 諸夷傳 百濟조에는 諱를 明이라 하였고 『日本書紀』 권19 欽明紀에는 明王 혹은 聖明王이라 하였다.
31) 近江毛野臣; 繼體天皇 23년 安羅에 파견되었으나 民心을 잃어 이듬해 일본으로 소환되어 오던 도중에 대마도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近江毛野臣은 529년부터 530년까지 安羅에서 활약했는데 그는 大和조정이 가야지역에 파견한 최초의 倭臣'이었으며 원래 近江씨는 武內宿 의 후예씨족으로 近江毛野臣은 역사상 활약하는 최초의 近江씨라고 한다. 近江毛野臣에 관해서는 그를 大和王朝로부터 파견되어 加耶經營에 종사한 官人으로 보기도 하고, 또 大和王朝의 파견으로 出兵하여 安羅에 任那日本府를 성립시킨 공훈을 세운 인물로 보기도 하며, 大和王朝의 단순한 使臣이나 大和政權과는 별개의 倭로부터의 파견관으로 보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32) 新羅所破 南加羅, 己呑; 南加羅는 김해의 本加耶를 己呑은 경북 慶山 또는 경남 密陽,靈山으로 비정되는데 김해의 本加耶가 신라에 복속되는 것은 사실 532년이므로 『日本書紀』의 이 기사는 잘못된 것이고 부정확한 기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己呑이 신라에 항복한 것도 529년을 전후한 2-3년 사이의 어느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33) 多沙津; 경남 河東으로 보기도 하고 경북 達城의 多斯, 河濱으로 보기도 한다.
34) 扶余; 곧 백제를 지칭한다. 이보다 뒤인 聖王 16년(538)에 泗 로 遷都하고 국호를 南扶餘라 개칭하였는데, 사실 백제는 건국의 주체세력이 夫餘族 계통의 高句麗 流移民이었을 뿐만 아니라 왕실의 성씨를 夫餘씨라고 한 것으로 보아 왕실 스스로가 부여족의 한 갈래라고 확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5) 新羅와 加耶의 婚姻기사; 『三國史記』 권 4 法興王 9년(522) 3월에 加耶國王이 사신을 보내어 婚姻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伊飡 比助夫의 누이동생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의 가야국왕은 대개 大加耶의 王으로 보고 있는데 大加耶王이 522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신청한 것은, 512년에서 513년에 걸쳐 백제가 倭兵의 지원을 얻어서 이른바 任那의 4縣, 2地에 진출하였으므로 백제에 대한 견제를 목적으로 신라에 접근하기 위해서였다고 이해된다.
36) 阿利斯等; 뒤의 4월조에 보이는 任那王 己能末多干岐를 阿利斯等이라고 하였으므로 두 사람은 동일인으로 믿어지고 있다. 阿利斯等이라는 이름은 垂仁 2년조의 一書에 나오는 都怒我阿羅斯等의 傳說이 있고 敏達 12년 7월조에 火葦北國造 阿利斯登의 아들 百濟人 達率 日羅 등의 예가 있다. 阿利斯等과 己富利知伽를 동일인으로 보고 둘다 이름이 아닌 加羅王 또는 執權大臣의 位號 또는 尊稱으로 보는 설이 있으며, 己富利知伽를 加羅의 大邑君 또는 王으로 보고 阿利斯等을 加羅에 있던 日系官人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같은 계통의 位號를 쓰는 별개의 인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또한 阿利斯等은 繼體紀 24년 9월조에 보이는 阿利斯等과 동일 인물로 창원 일대에 있던 在地勢力家로서 卓淳國王 또는 그에 버금가는 유력자였을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37) 變服; 阿利斯等이 화를 내게 된 이유인 變服문제에 대해서는 원래 입고 있던 신라옷을 가야옷으로 바꾸어 입었다는 설과 신라옷을 固守한 것이라는 설, 그리고 가야옷을 신라옷으로 바꾸어 입었다는 설 등이 있는데 後者의 견해에 따르면 신라에서 따라온 從者들을 가야에서 받아들여 가야의 복장을 입게 하여 여러 곳에 나누어 있게 하였는데 신라측에서는 비밀리에 從者들에게 신라의 衣冠을 착용하게 했으므로 阿利斯等이 화를 내고 使者를 보내 되돌아가게 했다고 한다. 이 변복의 문제는 또한 법흥왕 7년(520) 律令의 반포 및 公服制定과 관련된 정치적 억압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38) 刀伽 古跛 布那牟羅의 3城과 5城; 대개 뒤의 24년 9월조에 나오는 백제 신라가 함락시킨 5城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이를 대구에서 昌寧에 걸치는 지역이라고 보아 왔으나 최근 3城과 5城을 昌原 북부지역으로부터 낙동강 對岸의 靈山, 密陽일대까지 이르는 지역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도 있다. 한편 이 시기의 일로서 『삼국사기』 권 4 법흥왕 11년(524)조에 왕이 남쪽 경계에 巡幸하여 地境을 개척하자 加耶國王이 來會하였다 고 하였다. 3城과 5城을 攻略한 主體를 신라가 아니라 加羅의 己富利知伽의 행위로 보는 설도 있다.
39) 君尹貴 麻那甲背 麻鹵; 이들 세사람의 이름은 欽明紀 2년 4월조와 4년 12월조에도 보인다. 麻那는 武烈紀 6년 10월조에도 백제의 사신으로 온 기록이 보인다. 이들은 佐平級에 속하는 백제의 高位 官職者로서 聖王의 명령을 받아 安羅의 회의에 참석한 公式 使臣이엇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40) 夫智奈麻禮, 奚奈麻禮; 이들 두 사람의 이름은 다른 곳에 보이지 않으며 奈麻禮는 17관등 가운데 제11位의 奈麻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들은 大人이 아니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른바 大人은 최소한 奈麻 보다는 더 높은 관등을 가진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41) 高堂; 구체적으로 高堂에서 회의를 갖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불분명하나 혹 政廳을 의미하는 南堂과 비슷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42) 己能末多干岐; 任那王으로 나오는 己能末多를 金官加羅王인 仇衡王으로 보는 설도 있으며 日系의 加耶人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고, 또 昌原 일대의 卓淳國王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干岐는 小國의 王號로 생각된다.
43) 熊川; 경남 昌原의 熊川面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鎭海市로 보기도 한다.
44) 久斯牟羅; 屈自郡(또는 『三國遺事』 南白月二聖 努 夫得 朴朴조에 나오는 仇史郡) 부근으로 보고 있는데 오늘날의 昌原으로 보기도 하고 馬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45) 佐利遲; 당시 新羅王은 法興王으로 휘는 原宗인데 佐利는 原의 譯이고 遲는 智와 같이 人名에 많이 쓰이는 美稱으로 보고 있다. 이와는 달리 佐利遲는 법흥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신라의 第一 重臣이었던 哲夫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46) 久遲布禮; 그 音이 비슷한 居柒夫(또는 荒宗으로도 씀)로 보고 있다.
47) 彌騰利; 뒤에 나오는 등字의 표기가 다른 恩率 彌 利와 동일 인물일 것이다. 恩率은 백제 16관등 가운데 제4관등이다.
48) 伊叱夫禮智干岐; 당시 신라의 將軍 異斯夫(또는 笞宗으로도 쓴다)를 가리킨다.
49) 上臣; 단순히 大臣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나 구체적으로 어느 관등 또는 관직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다. 이와 비슷한 표기법으로 생각되는 것으로는 『三國遺事』 紀異 元聖大王조에 金敬信을 二宰, 金周元을 上宰라고 한 것이 있으며 「聖德大王神鐘銘」에 金邕을 上相 大角干이라 한 예가 있다. 특히 上相은 上大等, 侍中 등의 上位에 있는 最高執政官이 아닐까 추측하는 견해가 있다.
50) 己叱己利城; 앞에 나온 任那의 久斯牟羅(馬山에 比定하는 견해가 있음)와 같은 곳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지금의 昌原市로 보기도 한다.
51) 多多羅原; 부산의 多大浦로 보는 견해가 있다.
52) 金官, 背伐, 安多, 委陀 四村; 여기에 나오는 4개 村의 위치는 모두 洛東江口에 있는 지방으로 추정되는데 金官과 須那羅는 같은 곳으로 金海에, 安多와 多多羅는 多大浦에, 背伐과 費智는 熊川 부근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며, 委陀와 和多는 같은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53) 誓湯;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하여 沐浴齊戒하고 神에게 맹서하여 손을 熱湯에 집어 넣게 하여 나쁜 짓을 한 자는 그 손이 짓무르도록 함으로써 판결을 내리는 고대 재판의 한 방법이다.
54) 調吉士; 이름은 不明인데 近江毛野臣을 소환하는 조정의 使臣이었다. 調吉士는 백제에서 歸化한 씨족으로 보고 있으며 欽明 23년 7월 是月조에 調吉士伊企儺의 이름이 보인다.
55) 伊斯枳牟羅城; 어느 곳인지 未詳.
56) 久禮斯己母; 다른 곳에 보이지 않는다.
57) 奴須久利; 다른 곳에 보이지 않는다.
58) 背評; 어디를 가리키는지 자세하지 않으나 熊川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며 23년 4월 是月조에 나오는 신라가 빼앗은 4村 가운데 하나인 背伐과 같은 곳인지도 모르겠다.
59) 久禮牟羅城; 경북 達城郡 서쪽의 玄風 琵瑟山 일대로 보는 견해가 있고, 久斯牟羅를 지금의 昌原으로 比定하고 久禮牟羅城의 築城 주체는 백제였으므로 창원에서 咸安 사이의 어느 곳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60) 5城; 騰利枳牟羅 등 5성을 함락시킨 주체에 관해서는 이 기사를 앞의 23년 3월조에 보이는 3城과 5城의 공략사건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여 그 주체를 신라로 보는 견해가 있고 두 기사를 별개의 것으로 보고 여기서의 주체를 백제로 보는 설이 있다. 5성의 위치에 관해서는 대구에서 昌寧에 걸치는 지역으로 보기도 하고 창원 북부지역으로부터 靈山, 密陽 일대까지 이르는 지역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阿夫羅는 경북 서남부의 玄風 방면, 久知波多枳는 達城郡 求智面 城山洞이 아닐까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61) 乞 城;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지 잘 알 수 없으나 咸安 부근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三國史記』 地理志에 居 '로 나오는 晋州로 보는 견해도 있다.
62) 高麗王 安; 『三國史記』 권 19에 安臧王(519-531)의 諱를 興安이라 하였으며 13년 5월에 죽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안장왕의 죽음에 대하여 단지 죽었다고만 하였지 『日本書紀』 처럼 왕을 살해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63) 修德; 백제의 관등임에는 틀림없으나 『周書』 등에 나오는 백제 16관등에는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施德 또는 將德과 같은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修德의 관등을 가진 嫡德孫은 다른 곳에 보이지 않는다.
64) 都德; 백제의 관등임에는 틀림없으나 16관등 가운데 보이지 않으며 將德 또는 固德 혹은 對德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都德의 관등을 가진 己州己婁는 뒤의 欽明 4년 9월조에 백제의 사신 護德 己州己婁가 來朝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65) 狹手彦; 狹手彦은 欽明23년 8월조에도 고구려를 공격하는 장군으로 나오는데 『三代實錄』의 貞觀 3년 8월 19일조의 伴善男의 奏狀에도 金村의 3男으로 宣化, 欽明 兩朝에 두번 渡海하여 공을 세웠다고 나온다. 宣化紀의 任那 관계 기사는 이 때 大伴씨가 大連으로서 임나 문제를 주관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66)秦大津父 : 秦氏는 應神朝에 한반도에서 도래해 온 弓月君의 자손이라고 하는데, 중국계라고도 한다. 그들의 출자가 辰韓 즉 秦韓이었으므로 秦氏라 불렸던 것이다. 이 기사는 欽明天皇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百濟系의 도움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67)己知部 : 『新撰姓氏錄』 大和諸蕃에 己智 및 그 同族인 三林公 長岡忌寸 山村忌寸 棲田連의 이름이 보인다. 己智는 秦의 太子 胡亥의 후예라고도 한다.
68)大藏 : 欽明天皇 卽位前紀의 기사에 보이는 秦大津父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한다.
69)上 唎 下 唎 娑陀 牟婁 四縣 : 네 縣의 구체적인 위치 등에 대하여는 『日本書紀』 卷17 繼體天皇 6년 겨울 12월조의 註)를 참조하라.
70)安羅: 慶尙南道 咸安지역에 있던 加耶의 一國.
71)次旱岐 夷呑奚 大不孫 久取柔利 : 夷呑奚는 다른 데에는 보이지 않으며, 大不孫과 久取柔利는 欽明天皇 5년 11월조에 下旱岐로 보이고 있다.
72)加羅 : 慶尙南道 高靈지방에 있던 大加耶를 가리키는 듯하다.
73)古殿奚 : 『日本書紀』 卷17 繼體天皇 7년 겨울 11월조에 보이는 旣殿奚와 동일인이 아닐까 한다.
74)卒麻 : 加耶의 一國으로 일명 走漕馬國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경상북도 금릉군 조마면 일대로 비정되는데, 이 외에도 그것을 경상남도 밀양군 率利馬 지역이나, 거창군 加祚, 또는 함안군 漆原과 마산일대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가야연맹의 일원으로서 개별적인 성장을 지속하다가 562년 다른 加耶 소국들과 함께 新羅에 병합되었다.
75)散半奚 : 加耶의 一國으로, 欽明天皇 23년 봄 正月條에는 散半下國이라고 되어 있다. 慶尙南道 草溪 지역에 비정된다.
76)多羅 : 加耶의 一國으로, 지금의 慶尙南道 陜川 지역에 비정된다. 陜川의 옛이름이 大良 도는 大耶인데, 이는 多羅와 音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陜川郡 일대에는 대형고분이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는데, 그 부장품의 호화로움으로 미루어 多羅는 당시 加耶 小國 가운데에서도 매우 유력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77)斯二岐 : 加耶의 一國으로, 慶尙南道 宜寧 지역에 비정된다. 562년 다른 加耶의 小國들과 함께 新羅에 복속되었다.
78)子他 : 加耶의 一國으로, 慶尙南道 居昌 지역에 비정된다. 晋州 지역에 비정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晋州의 옛이름이 무엇인지 확실치 않으므로 지금까지의 지명고증자료로서는 居昌說이 보다 유력하다. 子他國의 성립시기에 대하여는 잘 알 수 없으나, 5세기 후반에 大加耶 중심의 후기 가야연맹에 소속된 것으로 추정되며, 6세기 초에는 이곳에 大加耶에 의하여 百濟의 침략에 대비한 축성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다른 대부분의 加耶 小國들과 마찬가지로 562년 新羅에 병합됨으로써 멸망하였다.
79)聖明王 : 聖王(523-554)을 가리킨다. 聖王은 武寧王의 아들로서, 이름은 明 인데, 『梁書』 百濟傳에는 이름을 明이라 하였고, 『日本書紀』에는 明王 또는 聖明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80)卓淳 : 加耶의 一國으로, 慶尙北道 大邱 지역에 비정된다. 淳이라고도 표기한다.
81) 己呑 : 加耶의 一國으로, 그 위치에 대하여 종전까지는 경상북도 경산지역으로 비정하고 있었으나, 최근에 출토된 유물의 성격이나 문헌기록으로 미루어 영산 밀양 방면으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金泰植, 「6세기 전반 伽倻南部諸國의 소멸과정고찰」, 『韓國古代史硏究』 1, 1988). 성립시기에 대하여는 잘 알 수 없으나 5세기 말, 6세기 초에 고령의 大加耶가 推封(밀양에 비정)에까지 세력을 미칠 때 후기가야연맹으로 소속된 듯하다. 그 뒤 大加耶와 新羅의 혼인동맹 이후 大加耶王에 의하여 주변 소국들에 분산 배치된 신라 왕녀 수행인들의 變服문제로 가야연맹의 내부에 분쟁이 생겼는데(『일본서기』 권17 繼體天皇 23년조 참조), 신라가 이를 계기로 창원 영산 방면을 공격하자 己呑國의 函跛旱岐가 신라측에 내응함으로써 쉽게 멸망하였다. 후기가야소국 중 가장 먼저 신라에게 병합되었으며, 멸망연대는 529년을 전후한 2,3년간으로 추정된다(金泰植, 앞의 논문 참조).
82)速古王 : 近肖古王을 가리킨다. 神功皇后 46년 3월조에는 肖古王, 應神記에는 照古王으로 되어 있다.
83)貴首王 : 近仇首王을 가리킨다. 近肖古王의 아들로, 神功皇后 49년 3월조에는 王子貴須라고 되어 있다.
84)옛적에 친교를 두터이 맺어 : 近肖古王과 近仇首王 두 왕대에 諸旱岐가 百濟와 우호를 맺었던 것은, 神功皇后 46년조에 보이는 淳王과 百濟와의 교섭(실제 연대는 364년) 및 동 62년조의 百濟記에 보이는 加羅國王 一族의 百濟에로의 도망 등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85)中佐平 : 佐平은 百濟 16官等 중 第1位이다. 欽明天皇 4년 11월조에 三佐平이 보이고, 同 12월조에 上佐平 中佐平 下佐平이 보인다.
86)城方 : 城方은 昧奴의 관직일 것이다. 百濟에서 5方의 長官을 方領, 그 다음을 方佐라고 하였는데, 이 점으로 미루어 보면, 城方의 方'은 方領 혹은 方佐의 略字가 아닐까 한다.
87)옛적에 新羅가 百濟를 쳤으나 : 高句麗 廣開土王碑에 永樂 9년(399) 新羅가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청한 것이 보이는데, 이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인 듯하다.
88)奈率 : 百濟의 16官等 중 第6位이다.
89)옛적에 형제가 되었다 : 同 2년 4월조 註 참조.
90)下韓 : 下韓은 同王 5년 11월조에 南韓'이라고도 표시되어 있다. 下韓은 南加羅와 같은 뜻이지만, 南加羅는 이미 新羅에 병합되었으므로 南加羅는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下韓은 加耶의 諸國을 널리 가리키는 용어로 보여지는데, 특히 加耶의 남부, 즉 南加羅에 진출한 新羅의 前面에 있었던 지역이 아닐까 한다. 위치비정에 대한 견해는 섬진강 유역의 전남 내지 경남 서남지역으로 보는 설(鮎貝房之進, 「日本書紀朝鮮地名攷」, 『雜攷』 7 上卷, 1937, p.58)과, 낙동강 유역의 新羅 安羅 사이의 국경분쟁지역으로 보는 설(山尾幸久, 「任那に關する一試論」, 『古代東アジア史論集』 下卷, 1978, p.214)이 있다. 후자의 경우로 보는 견해 가운데 金鉉球는 국경분쟁지역이 百濟軍이 상주하고 있던 久禮山에서 安羅측 땅에 걸친 곳의 지역일 것이라고 지적하였다(『大和政權の對外關係硏究』, 吉川弘文館, 1985, p.193). 이에 대하여 金泰植은 『日本書紀』 권19 欽明天皇 5년 3월조에 의거 그 지역(久禮山)은 이미 新羅에 빼앗긴 상태였다는 점을 근거로 적절치 않다고 보고, 전자의 경우가 타당하다는 견해를 밝히면서 보다 구체적인 연구가 요망된다고 하였다(「6세기 중엽 加耶의 멸망에 대한 연구」, 『韓國古代史論叢』 4, 1992, pp.218-219).
91)護德 : 百濟의 16官等 중 第9位인 固德을 가리키는 듯하다.
92)扶南 : 인도차이나 남부 메콩강 하류에 있던 나라로서, 3세기에는 타이국 말레이반도까지 진출했지만, 6세기 후반에 영토의 대부분을 잃고 7세기 전반에 멸망하였다. 晋書 南蠻傳에 扶南 西去林邑三千餘里 在海大灣中 其境廣 三千里'라는 기록이 있다.
93)郡令과 城主 : 同王 5년 11월조에는 南韓에 郡領과 城主를 둔 기사가 보인다. 이 즈음 百濟는 新羅에 대한 방위를 위하여 국경을 넘어 下韓에까지 그들의 군대를 배치해 두었던 듯하다.
94)三佐平 : 同王 4년 12월조에 보이는 上 中 下의 세 佐平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들 佐平과 內臣佐平을 비롯한 6佐平과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敏達天皇 12년 是歲條에는 太佐平이라는 말도 보인다.
95)內頭 : 6佐平의 하나인 內頭佐平을 가리킨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古爾王 27년 正月條에 內頭佐平 掌庫藏事'라고 되어 있다.
96)德率 鼻利莫古 : 同王 2년 7월조에는 前部 奈率 鼻利莫古라고 되어 있다. 德率은 百濟의 16官等 중 第4位이다.
97)施德 : 百濟의 16官等 중 第8位이다.
98) 奈率 : 백제의 16관등 중 제6관등.
99) 詔書 : 『日本書紀』 권19, 欽明天皇 5년 2월조에 그 내용이 보인다.
100) 任那 :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 보이는 弁辰 24국 가운데 하나인 彌烏耶馬國(彌馬耶烏國) 곧 彌麻那의 略稱이다. 이는 낙동강 중류지역인 고령 일대의 大加耶(上加羅)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가야제국을 총괄하여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곧 廣開土王碑의 追至任那加羅 , 『三國史記』 强首傳의 臣本任那加良人 , 鳳林寺眞鏡大師碑의 其先任那王族 등에 보이는 任那'는 모두 加羅를 가리키는 말로서, 특히 광개왕비와 강수전의 경우는 마치 五加耶.六加耶처럼 가야 제국을 총괄하여 일컫는 말이라 하겠다. 일본의 경우도 『日本書紀』 欽明天皇 23년 춘 정월조의 註記에 總言任那 別言加羅國.安羅國.斯二岐國...... 이라 하여 임나를 가야제국의 총칭으로 일컬었지만, 加羅와 任那를 서로 혼동하여 사용한 예가 많다.(李丙燾, 「洛東江流域의 地理와 上.下加羅」,『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p.304)
101) 奈率 彌麻沙...등이 臣의 나라에 이르러 詔書를 받들어...라고 하였습니다 : 『日本書紀』 권19, 欽明天皇 2년 7월조 百濟遣紀臣奈率彌麻沙.中部奈率己連 來奏下韓.任那之政 幷上表之 의 사실을 가리킨다.
102) 새해가...한다 : 『日本書紀』 권19, 欽明天皇 4년 12월조의 過正旦而往聽焉 의 사실을 가리킨다.
103) 阿賢移那斯.佐魯麻都 : 『日本書紀』 권19, 欽明天皇 2년 7월조 세주의 『百濟本記』 기사에 보인다. 이들은 日本府의 親新羅派로서 지위는 낮았지만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移那斯는 『日本書紀』 권19, 欽明天皇 10년 6월.11년 4월조에는 延那斯로 나온다.
104) 安羅 : 6가야 중의 한 나라로 『三國遺事』 권1, 五伽耶條의 阿羅'에 해당한다. 이는 지금의 경상남도 咸安 지방으로 비정된다.
105) 삼가 勅에 따라 감히 시간을 지체하지 못하고...또 任那를 제압하여 (길을) 막고 보내지 않았습니다 : 『日本書紀』 권19, 欽明天皇 춘정월 是月條부터 2월조까지의 사실이다.
106) 己麻奴 : 『日本書紀』 권19, 欽明天皇 4년 2월조에 인용한 『百濟本記』의 기사에 津守連己麻奴 라고 하여 동일인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107) 啄淳 : 가야의 한 나라로 지금의 대구지방.
108) 久禮山 : 경북 달성군 서남쪽의 琵瑟山이라고 비정하기도 하지만 安羅(경남 咸安)와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어서 취하기 어렵다. 「日本書紀』 繼體天皇 24년 9월조에 久禮牟羅城이 보인다.
109) 斯羅 : 新羅의 別稱. 『三國史記』 권4, 지증마립간 4년조에 신라의 국호를 확정하는 과정에서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라고 하여 이 이름이 보이며, 같은 해에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 迎日冷水里新羅碑에도 斯羅 啄 斯夫智王.乃智王 此二王敎... 라고 하여 이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6세기 초엽 중국인의 對新羅觀을 반영하는 것이긴 하지만, 526-539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梁職貢圖에도 百濟...旁小國 叛波.卓.多羅.前羅.斯羅...等附之 라고 하여 이 이름이 보인다.
110) 荷山 : 경북 高靈郡 斗谷面 荷山.
111) 신라는...들었습니다 : 매년 봄과 가을에 실시하는 신라의 閱兵 행사에 대한 백제의 의구심을 나타낸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의 閱兵은 군사훈련과 군사통수권의 확립이라는 차원에서 베풀어졌지만 유사시에는 바로 군사작전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金瑛河,「百濟.新羅王의 軍事訓練과 統帥」,『泰東古典硏究』 6, 1990). 신라의 경우 탈해이사금 때 居道가 변경의 官長이 되어 매년 한 번씩 馬匹을 모아 놓고 병사들로 하여금 들판에 모아 놓고 즐겨 놀게 하다가 于尸山國과 居柒山國을 불의에 쳐들어가 멸망시킨 일이 있으며(『三國史記』 권44, 居道傳), 지증왕 때에 異斯夫가 居道의 權謀를 이어 받아 馬遊'로써 加耶를 속여 취한 사례가 있다(『三國史記』 권44, 異斯夫傳). 이에 대해 상고사회 전쟁과 유희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李基東, 「新羅上古의 戰爭과 遊戱」,『素軒南都泳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4).
112) 奈麻禮 : 신라 京位 17관등 중 제11관등인 奈麻를 가리킴.
113) 旱岐 : 干'과 같은 말이다. 干의 어원은 몽고의 khan'에서 찾을 수 있는데, 勢力의 대소에 관계 없이 族長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단군왕검의 儉', 고구려.부여의 加', 신라의 干'과 같은 유형의 말로서, 여기에서는 小國의 首長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114) 加羅國 : 낙동강 하류지역에 있었던 本加耶 곧 金官加耶로 지금의 金海 지방에 위치함. 『三國志』 魏志 東夷傳 韓傳의 弁辰 24國 가운데 狗邪國에 해당하는데, 3세기 무렵에 首露가 금관가야의 首長이 되어 6가야 연맹체를 결성함으로써 대가야를 대신하여 가야제국의 연맹장이 되었으며, 이로써 加羅가 가야를 총괄하는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李丙燾, 「加羅史上의 諸問題」,『韓國古代史硏究』 참조).
115) 加羅는...망한 것입니다 : 加羅國 곧 金官加耶의 멸망을 『三國史記』에서는 法興王 19年 金官國主金仇亥 與 妃及三子...以國帑寶物來降 이라 하여 법흥왕 19년(532)으로 보았다.
116) 多羅 : 가야의 한 나라로서 지금의 경남 陜川 지방을 일컬음. 6세기 초엽 梁의 對韓觀을 반영하는 梁職貢圖에는 斯羅와 함께 백제의 주변 소국으로 인식하고 있다.
117) 聖明王 : 백제 제26대 聖王(523-554)이다.
118) 큰강 : 낙동강을 가리킨다.
119) 6城을 수축하려고 : 아마도 久禮山의 신라 5城에 대적하기 위해 낙동강 右岸에 6城을 수축하려고 한 듯하다.
120) 南韓 : 『日本書紀』 권19, 欽明天皇 2년 7월조에 보이는 下韓을 지칭한다.
121) 膳臣 : 膳夫를 거느리고 天皇의 음식을 관장하는 膳部의 長을 일컫는다. 大彦命의 후예로서 『日本書紀』 景行天皇 53년 10월조에 遠祖인 磐鹿六雁이 供膳의 功으로 膳大伴部를 하사받고, 다시 天武天皇 13년 11월에 朝臣의 姓을 하사받았다고 하였다. 『新撰姓氏錄』 左京皇別의 高橋朝臣條와 高橋氏文에는 天武 12년에 膳臣으로부터 高橋朝臣의 姓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122) 護德 : 백제 16관등 가운데 제9관등인 固德을 가리키는 듯하다.
123) 丈六佛像 : 1丈 6尺의 불상. 부처님의 키가 1丈 6尺이라는 전설에서 유래되어 예로부터 丈六佛像을 많이 造像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24) 彌移居 : 屯倉 또는 官家 곧 ミヤケ'의 音寫이다. ミヤケ'란 大化 前代에 있어서 朝廷 직할의 농업경영지를 일컫는데, 여기에서는 가야의 땅을 가리킨다.
125) 12월 갑오에 ...죽였다 : 다음의 欽明天皇 7년 是歲條의 기사와 동일한 기사이다.
126) 國香岡上王 : 고구려 23대 安原王(531-545)을 가리킨다. 그런데 『日本書紀』 내지 釋紀의 여러 종류의 古寫本에는 國香岡上王'에 대해 각각 달리 전하고 있다. 곧 鵠香岡上王'(寬文 9년;1669년 刊本)과 國香岡上王'(釋日本紀秘訓과 中臣本.考彰館本), 香岡上王'(釋紀 三條西本) 등이 그 것이다. '은 コマ'로 訓讀하므로 高麗의 그 것과 동일한데, 文咨王 이후로 고구려 역대 왕의 葬地로써 왕호를 삼고 있다. 그러므로 각 刊本의 鵠香岡上' 國香岡上' 香岡上'은 地名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國岡上王은 故國原王을, 香岡上王은 陽香 곧 陽原王을 가리킨다. 鵠'과 國'은 모두 こく'로 訓讀되어 동일한 音이 중첩된 것이며, 香'과 岡'도 서로 통용할 수 있는 音이라 할 수 있고, 『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鵠島.鵠嶺.鵠嶺山과 같은 地名이 많으므로, 여기에서의 鵠香岡上王'은 安原王을 지칭하는 國의 鵠岡上王'이라 풀이된다(李弘稙, 「日本書紀所載 高句麗關係記事考」, 『韓國古代史의 硏究』, 1971, pp.159-162).
127) 무술에 國의 香岡上王이 죽었다 : 安原王의 죽음을 『三國史記』 고구려 안원왕 15년(545)조에는 3월'이라 하여 『百濟本記』의 12월 과 차이가 있다. 李弘稙은 『百濟本記』에 보이는 당시 고구려의 분위기로 보아 안원왕은 群과 細群이 싸우는 와중에 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日本書紀所載 高句麗關係記事考」, p.158). 한편 『梁書』 권3.『南史』 권7 武帝紀에는 太淸 2년(548) 3월 갑진이라 하여 하여 3년의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 三品彰英은 이 『百濟本記』의 百濟王曆에는 3년의 誤差가 있다고 보여지므로 『梁書』나 『南史』의 548년설이 옳은 것으로 풀이하였다(「高句麗王曆の一こま-百濟王曆の連關して-」,『朝鮮學報』 37.38, 1966, pp.18-27).
128) 己連 : 欽明天皇 6년 5월에 보낸 奈率 其릉과 동일인이지 않을까 추측된다.
129) 高麗가...2,000여 명이었다 : 欽明天皇 6년 是歲條와 일련의 기사로, 전투는 欽明天皇 6년(545) 12월 중에 치뤄진 것으로 보인다.
130) 高麗가...8살이었다 :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陽原王 元年條에는 陽原王 諱平成 安原王長子...以安原在位三年 立爲太子 至十五年 王薨 太子卽位 라고 하여, 『百濟本記』의 8세 즉위설과는 차이가 있다.
131) 高麗가...2,000여 명이었다 : 安原王 말년의 群과 細群의 政爭을 중앙정권과 환도세력의 대결로 파악하기도 한다(林起煥, 「6.7세기 高句麗 政治勢力의 동향」,『韓國古代史硏究』 5, 1992).
132) 『三國史記』 百濟本紀 聖王 26년(548)조의 高句麗平成與濊謀 攻漢山北獨山城 王遣使請於新羅 羅王命將軍朱珍 領甲卒三千發之 朱珍日夜兼程至獨山城下 與麗兵一戰 大破之 란 기사와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여 馬津城을 獨山城(충남 禮山)으로 보기도 한다(李弘稙,「日本書紀所載 高句麗關係記事考」, pp.162-163).
133) 得爾辛 : とくにし'라고 音讀하여 충남 論山郡 恩津 지방에 있었던 德斤支에 비정하기도 하나, 자세하지 않다.
134) 將德 : 백제 16관등 중 제7관등.
135) 固德 : 백제 16관등 중 제9관등.
136) 官家 : 屯倉(ミヤケ)과 같은 의미로, 백제를 가야지역과 함께 大化朝廷의 직할령으로 보았던 데서 비롯한 듯하다.
137) 30具 : 『類聚三代格』에 以矢五十隻爲一具 라고 하였으므로, 30具는 1,500隻이 된다.
138) 爾林 : 충남 大興(任城)지방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日本書紀』 應神天皇 16년조와 顯宗天皇 3년 是歲條에도 보이는데, 이들 세 곳이 동일한 지역이 아닌 것으로 판단되어 자세히 살피기 어렵다.
139) 이 해에...차지하였다 : 『三國史記』 권44 居柒夫傳에는 성왕 29년(551; 신라 진흥왕 12)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먼저 平壤을 쳐부수고 竹嶺 이북 高峴 이남 10郡의 땅을 차지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때 백제도 漢江 하류의 옛 영토를 빼았았던 것으로 보인다.
140) 平壤 : 南平壤 곧 北漢城으로 추측된다. 『三國史記』 권37, 지리 4, 백제조에 인용된 古典記에는 至十三世近肖古王 取高句麗南平壤 都漢城... 이라 하여 漢城과 南平壤이 같음을 보여주고 있어, 본 기사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聖王이 한성을 쳐부수고 진군하였다는 평양은 南平壤일 것으로 추측된다.
141)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 『三國史記』 권44 居柒夫傳에도 이와 동일한 사건으로 보이는 기사가 보인다. 성왕 29년(551; 신라 진흥왕 12)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백제는 먼저 平壤을 쳐부셨고, 신라는 竹嶺 이북 高峴 이남 10郡의 땅을 차지하였다고 하였다. 백제는 이 때의 羅濟同盟으로 말미암아 漢江 하류의 옛 영토를 되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142)高麗 - 도모합니다: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내분을 틈타 551년에 북진을 시작하여, 백제는 한간 하류지역의 6군을 점령하고 신라는 한강 상류지역을 차지하였다. 553년에는 신라가 백제를 공격함으로써 백제와 신라의 동맹관계가 실질적으로 깨어졌으나, 이 기사로 보아 한강 상하류지역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이후 두 나라의 관계가 악화된 것 같다.
143)百濟 聖明王 - 經論 若干卷:「上宮聖德法王帝說」 「元興寺緣起」에서는 일본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이 흠명천황 7년 무오(538, 무오는 宣化 3년)로 太子像幷灌佛之器一具說佛起書卷一 '을 전했다고 하였다.
144)豊秋: 일본의 美稱이다.
145)以佛像- 堀江:「元興寺緣起』에서는 乙丑年(欽明30년) 稻目大臣이 죽은 후 余臣 등이 함께 계획하여 庚寅年에 堂舍 佛像 經敎를 태우고 훔쳐 난파강에 흘려보냈다 고 하였다.
146) 百濟 - 平壤: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다시 차지한 것은 흠명천황 12년조에 보인다.
147)是歲 - 漢城: 『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가 백제의 동북부지역을 차지하여 新州를 설치한 것이 진흥왕 14년 곧 다음해의 일이라 하였다.
148)同船: 많은 목재를 접합하여 만든 배이다.
149)相代:『日本書紀』에 의하면 繼體天皇 7년 6월(武寧王 13, 513) 백제가 五經博士 段楊爾를 보냈고, 同 10년(武寧王 16)에는 五經博士 高安茂를 보내 교대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백제는 오경박사와 전문기술자를 일본에 교대로 파견한 것으로 파악하고, 백제가 장기 체류나 귀국하지 않을 경우의 손실을 고려하여 교대시킨 것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李丙燾,「百濟學術 및 技術의 日本傳播』,『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1976).
150)王辰爾:『續日本紀』 延曆 9년 7월의 百濟王 仁貞 등이 올린 上表文에서는 辰爾의 祖가 백제 貴須王의 손자인 辰孫王으로 應神천황 때 來朝하였다고 하였다.
151)威德王:(525-598, 재위 554-598) 부왕인 聖王이 신라와의 管山城(沃川) 전투에서 전사하자 즉위하였다.
152) 6세기 중엽 성왕 때의 삼국관계: 성왕은 蓋鹵王이후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수복하려고 노력하여 신라와 동맹관계에 있었다. 그 결과 551년(성왕 29, 진흥왕 12) 한강 하류지역의 6군을 수복하고, 신라는 竹嶺 이북 高峴 이남의 한강 상류지역 10군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553년에는 백제가 되찾은 땅을 신라가 다시 빼앗았으므로, 554년 성왕은 신라를 공격하다가 管山城(沃川)에서 전사하였다. 그 결과 433년 이후 계속 되어 온 羅濟同盟이 깨어지고, 신라의 고립화가 이루어졌다.
153) 高麗王:당시 고구려의 왕은 陽原王이었다.
154)東聖山:평양 북쪽의 大聖山이라 추정되기도 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155)函山城:『三國史記』에서 성왕이 전사했다고 한 管山城, 곧 충청북도 沃川이다.
156)竹斯:筑紫.
157) 飼馬奴 苦都:『三國史記』 진흥왕 15년 7월조에서는 裨將 三年山郡 高干 都刀가 성왕을 죽였다고 하였다. 外位인 高干의 관등을 지닌 지방의 유력세력인 苦都를 飼馬奴라 한 것은 당시 신라인의 지방민 신분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그의 지휘 통솔을 받는 佐知村이 국가로부터 말(軍馬)을 기르는 奴(人)로서 취급당했음을 의미한다고 한다(朱甫暾, 「蔚珍鳳坪新羅碑와 法興王代 律令」,『韓國古代史硏究』2, p.120).
158)都堂: 삼국시대의 정사를 행하던 관청으로 南堂이라고도 한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점해왕 3년(249)에 남당을 궁궐 남쪽에 지어 251년부터 이곳에서 정사를 집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이 성립된 것은 奈勿麻立干 때라고 추정되고 있다. 한편 초기의 남당은 정사를 논의하거나 의식을 집행하는 원시집회기관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국가가 발달하면서 실무행정부문이 다른 기관으로 분리해 나가자 군신회의 회견 의식을 행하는 기관으로 변질하였다.
159) 王子 惠 : 聖王의 둘째 아들로 598년에 威德王(餘昌)을 이어서 즉위하여 惠王이 되었다. <<三國史記>>(권27) 백제본기 惠王 즉위년조에 惠王諱季 明王第二子 昌王薨 卽位二年王薨 諡曰惠王 이라 하여 이름은 明이고 惠를 諡號라 하였다. 그러나 본서에 의거하는 한 惠를 시호로 볼수는 없을 듯하다. 한편 <<三國遺事>> 왕력편에서는, 惠王의 이름은 季 또는 獻으로 威德王의 아들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는 위의 책(왕력편)에서 威德王의 이름을 明이라 한데서 생긴 착오라 하겠다. <<東國通鑑>>에서는 惠王의 이름을 季明이라 하였다.
160) 나루 : 難波津은 당시 한반도 3국이 왜에 往來할 때 거치는 출입항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나루는 難波津을 가리킬 것이다.
161) 蘇我卿 : 卿은 後世의 율령에서 3位 이상 및 參議에 대한 경칭이지만, 여기서는 율령적인 의미에서의 卿이 아니라 조정의 重臣 혹은 유력자에 대한 일반적인 존칭어에 지나지 않는다.
162) 大泊瀨天皇 때...고구려로부터 침략을 받아 : 大泊瀨天皇은 雄略天皇을 가리킨다. 본서(권14) 雄略紀에는 大泊瀨幼武天皇이라 하였다. 백제가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처했던 사실은 본서(권14) 웅략천황 20년조에 보이지만 자세한 내용은 실려있지 않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권25)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는데, 475년에 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을 받아 왕은 피살되고 漢城이 함락되었다고 한다.
163) 神祗伯 : 조정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우두머리이다.
164) 祝者 : 神祗伯 밑의 神官으로 신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그뜻을 풀이하여 전하는 직책을 맡아보는 사람이다.
165) 나라를 세운 神 : 종래 <<日本書紀>>의 주석가들은 建邦之神'을 일본의 건국신으로 이해하였으나, 이를 백제의 建國神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 주목된다.(石田一良,<建邦の神>,<<社會科學の方法>> 82,1976; 洪淳昶 譯 <<韓日關係硏究所紀要>> 8,1978.p.21-31).
166) 풀과 나무가 말을 할 때 : 본서(권1) 神代(上) 天孫降臨章에 復有草木咸能言語 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167) 원하시는 것 : 聖王의 명복을 빌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168) 彌.. : 지금의 경남 남해군 동남쪽에 있는 彌助里로 비정되고 있다.
169) 大身狹屯倉 : 身狹 땅에 설치한 屯倉의 하나로 身狹은 지금의 奈良縣 강原市 見瀨町에 비정되고 있다.
170) 田部 : 屯倉의 땅을 경작하는 농민.
171) 餘昌이 왕위를 이었는데 : <<三國史記>>(권27) 백제본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이 보다 3년전인 554년에 餘昌이 즉위했다고 한다.이점에 대하여 위덕왕의 즉위년은 <<일본서기>>의 내용이 옳으며 성왕이 죽은 후 3년간의 空位期間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관산성 패전 이후 백제 지배층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노중국,<<백제정치사연구>>,1989.p.181).
172) 奈末 : 신라 17관등 중 11위인 奈麻의 異稱이다. 신라 금석문을 통해 보면, 진흥왕 중엽 이후 신문왕 중엽까지와 애장왕대부터 진성왕 초까지는 奈麻를 모두 奈末로 표기하였다.
173) 及伐干 : 신라 17관등 중 9위인 級飡의 이칭이다. 이는 及伐干 외에도 居伐干支,及干支,及尺干,及干,及찬 등으로도 표기된다.
174) 司賓 :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직함이다. 외국사신 업무를 전담하는 관서인 司賓寺는 唐代에 존재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는 이러한 상설 관청이 없었으므로 여기서의 司賓은 임시직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75) 지난번의 調賦 : 이 구절로 보아, 지난번에 온 신라 사신 久禮叱이 예우문제로 되돌아갔을 때 調賦를 바치지 않고 그대로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176)難波의 大郡 : 본서(권23) 舒明天皇 2년 是歲條에 改修理難波大郡及三韓館 이라 하였고, 白雉 3년 정월조에 饗客等於難波大郡 이라 한 점으로 보아, 難波大郡은 지명이 아니라 외교용 廳舍 이름인 듯하다. 그 위치는 지금의 大阪市 중심부에 비정되고 있다.
177) 掌客 :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임시직책이다. 唐의 경우 鴻려寺 혹은 司賓寺의 속관으로서 掌客이 있었다.
178) 穴門 : 지금의 山口縣 지방에 있던 지명으로 畿內와 筑紫를 잇는 內海交通의 요지이디.
179) 阿羅의 波斯山 : 波斯山의 현위치에 관해서는 미상이다. 그러나 波斯山은 阿羅 즉 安羅國에 있던 곳이 분명하므로 신라는 당시 安羅國의 일부를 이미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180) 古嵯國 : 본서(권11) 欽明天皇 5년 11월조에 보이는 久嗟와 같은 나라이름으로, 지금의 경남 고성으로 비정된다.
181) 子他國 : 본서(권17) 繼體紀 8년(514) 3월조에 보이는 子呑과 동일 국명이다. 지금의 경남 晋州 혹은 거창으로 비정된다. 특히 경남 거창읍 東部洞과 거창군 南上面과 南下里 등지에 6세기 초중엽경의 고분유적이 산재해 있는 점에 주목하여 이곳을 子他國의 유력한 후보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
(김태식,<가야제국 연맹의 형성과 변천>,서울대 박사학위논문,1992.pp.134-
136 및 171)
182) 散半下國 : 본서(권19) 5년 11월조에 보이는 散半奚와 같은 이름이다. 지금의 경남 草溪 혹은 의령 등지에 비정된다.
183) 乞飡國 : 지금의 창원시 혹은 산청군 단성면 등에 비정된다.특히 경남 산청군 단성면과 신안면에는 5,6세기 가야고분이 산재하므로 이 유적을 乞飡國과 연결시키는 견해도 있다.(김태식,앞의 논문.pp.168-169)
184) 서쪽 오랑캐(西羌) : 羌은 중국 서북쪽의 甘肅,靑海 방면에 있는 티베트계 유목민인데, 중국에서는 이를 羌이라 하여 서쪽 오랑캐로 여겼다. 여기서는 신라가 일본의 서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신라를 西羌이라 하였다. 이는 본서 곳곳에서 스스로를 中國'이라 표기한 것과 상통하는 표현이다.
185) 氣長足姬尊 : 神功皇后를 가리킨다.
186) 更荒郡 : 지금의 大坂府 북쪽 河內郡 田철町과 大東市 西半 그리고 寢屋川市 서쪽에 걸쳐 있던 지역이다.
187) 紀男麻呂宿녜 : 587년 7월에 物部守屋大連 토벌전에 참여하였으며, 591년 11월에는 대장군으로서 筑紫에 출진하였다가 595년 7월에 돌아왔다고 한다.
188) 고려를 쳐서 깨트렸다 : 平原王 4년(562)에 해당하는데, <<三國史記>>를 비롯한 여타 史書에는 이 해에 일본이 고구려를 쳐서 깨트렸다는 기록이 없다. 한편 <<三代實錄>>(권..) 貞觀 3년 8월 19일조에,大田常雄의 家牒을 인용하여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189) 七織帳 : 7가지 色 실로 짠 비단 帳幕이다.
190) 輕 : 지금의 奈良縣 강(木+畺)原市 大輕町 부근으로 추정된다.
191) 陽香 : <<삼국사기>>(권 19)에 의하면 平原王의 이름은 陽成이다. 그런데 여기서 陽香이라 한 것은 陽成의 誤記인지 혹은 成과 香이 발음상 서로 통하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192) 田部 : 屯倉의 田地를 경작하는 농민.
193) 膽津 : 船史 王辰爾의 형 味沙의 아들이다.
194) 식선 : 본서(권 22) 推古天皇 16년 6월조에도 隋나라 사신에 대하여 以飾船三十소 迎客等于江口 라 하였다. 飾船은 아마 사신을 맞이하기 위하여 특별히 장식한 배가 아닌가 한다.
195) 百濟大井; 지금의 大阪府 河內長野市 太井지역 또는 奈良縣 北葛城郡 廣陵町 부근으로 추측되고 있다.
196) 王辰爾에게 船史라는 氏姓을 내린 것은 欽明天皇 14년 7월조에 보인다.
197) 이같은 사실은 欽明天皇 31년 4월.5월조에 보이는데 고려의 使人이 越國에 표착하자 이곳의 豪族이었던 道君이 천황이라 칭하며 고려의 貢物을 빼앗았던 일이 있다. 천한 사람이란 곧 道君을 가리킨다.
198) 越海岸; 石川.福井縣의 海岸으로 고구려와 발해의 사신은 여러번 이곳을 통하여 來往하였다.
199) 國; 여기의 國은 곧 吉備國으로 원래 難波는 吉備지방(지금의 岡山縣과 廣島縣 동쪽을 포함하는 지역의 옛이름)의 호족이었으므로 자기의 연고지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 것임.
200) 多多羅.須奈羅.和陀.發鬼 4邑; 繼體天皇 23년 4월 是月조에 보이는 多多羅.須那羅.和多.費智의 4邑에 해당하는 것으로, 신라가 임나를 멸망시킨 후 이 지방의 調를 임나의 調로서 바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201) 뒤의 11년 10월 기사와 동일하므로 어느 한 쪽이 잘못된 듯하다.
202) 達率 日羅; 達率은 百濟 16官等 가운데 제2관등이며, 日羅는 아마도 본래 加羅系 百濟人이 아니었을까 하는 견해가 있다.
203) 師德率次干德; 師 즉 배의 키잡이로서 관등이 德率인 次干德이라는 인물로 보아야 할 듯하다.
204) 新造國; 백제가 筑紫지방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는 것은 일본열도에 백제의 分國을 두려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205) 壘塞; 塞는 軍壘를 뜻하며 險要한 곳에 안밖을 격리되도록 한다는 것이 辭典的 의미이고 塞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欽明 14년 10월조에 백제의 王子 餘昌이 나라의 병사를 징발하여 고려국을 향하여 百合野塞를 쌓았다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206) 佛法의 始初; 이 사건을 「元興寺緣起」에는 13년이 아니라 바로 前年인 癸卯年의 일로 기록하고 있으며, 欽明天皇 13년(552) 10월조에 의하면 백제의 聖王이 怒唎斯致契 등을 보내어 佛像과 經論을 바쳤다고 한다. 일본의 불교수용에 관해서는 552년(壬申)설 외에 538(戊午)說도 있다.
207) 善信阿尼 : 『日本書紀』 권20, 敏達天皇 13년 是歲條에 이들이 出家하게 된 사정이 보인다. 또 「元興寺緣起」에는 時三尼等官曰 傳聞出家之人以戒爲本 爲無戒師故 度百濟國 欲受戒曰 이라 하였다.
208) 백제국에서 사신과 승려...畵工 白加를 바쳤다 : 「元興寺緣起」에는 攝(椅)天皇(崇峻)治(天)下時戊申年(元年) 送六口僧 名令照律師.弟子惠悤.令威法師.弟子惠勳.道嚴法師.弟子令契及恩率首眞等四口工人幷金堂本樣奉上 이라 하였다.
209) 慧慈 : 推古天皇 3년 5월에 일본에 건너가 4년 11월에 法興寺에 주석하였고, 23년 11월에 귀국하였다.
210) 內敎 : 佛敎를 가리킴.
211) 外典 : 儒敎의 經典을 가리킴.
212) 두 승려 : 고구려 승려 慧慈와 백제의 승려 慧聰을 가리킨다.
213) 寺司 : 『日本書紀』 대화원년 8월 8일조에 처음으로 보인다.
214) 阿佐 : 威德王의 아들인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215) 多多羅.素奈羅.弗知鬼.委陀.南迦羅.阿羅羅 6城 : 多多羅.素奈羅.弗知鬼.委陀는 『日本書紀』 繼體天皇 23년 4월 是月條의 四村', 敏達天皇 4년 6월조의 四邑'과 대응하고, 南迦羅는 그 4촌의 총칭 또는 그 중의 素奈羅로 보이며, 阿羅羅는 南迦羅의 서쪽 변경에 위치한 阿羅(安羅)로 풀이되고 있다.
216) 觀勒 : 三論學의 대가로서 일본 초대 僧正이 되었다. 『日本書紀』 권22, 推古天皇 32년 4월조에 불법이 백제에 이른지 겨우 100년이 되었다.... 라는 표를 올린 기사가 보인다.
217) 曆本 : 觀勒이 일본에 전한 曆本은 중국 南朝 宋나라의 元嘉曆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周書』 『隋書』 百濟傳에는 백제가 元嘉曆을 사용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백제 武寧王陵 誌石에 보이는 月朔과 日干支에서도 백제의 曆이 元嘉曆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에서는 비로소 國史를 편찬할 수 있었다고 한다.
218) 大興王 : 推古天皇 13년(605)은 고구려 영양왕 16년이므로 大興王은 영양왕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219) 천황이 皇太子.大臣 및 여러 왕과 신하에게...황금 300兩을 바쳤다 : 元興寺緣起에 인용된 丈六光銘에는 十三年 歲次乙丑(605)四月八日戊辰 以銅二萬三千斤 金七百五十九兩 敬造尺迦丈六像 銅繡二軀幷挾侍 高麗大興王方睦大倭 尊重三寶 邀以隨喜 黃金三百二十兩助成大福...歲次戊辰(608)...明年己巳(609) 四月八日甲辰 畢竟坐於元興寺 라고 보인다.
220)그 나라에 난리가 나는 바람에 : 『隋書』에 의하면 이 즈음(大業 원년~6년, 推古天皇 13년~18년) 長城의 축조, 運河의 개통, 東都의 造營 등 大土木工事가 이루어졌는데, 이에 따른 民丁의 잦은 징발로 말미암아 지방적 반란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大業 3년~6년에 걸친 流求國(현재의 臺灣) 정벌과 관계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221)道人 : 「智度論」에 得道者名爲道人 余出家者未得道者 亦名道人'이라고 되어 있다. 즉 俗事를 버리고 佛法에 귀의한 사람을 가리킨다. 或說에는 道人은 道欣의 誤記라 하고, 十一'을 一十'이라 하고 人'字를 보충해 넣은 本도 있다.
222)曇徵 : 579(平元王 21) ~ 631(榮留王 14). 이 기록에 보이는 바와 같이, 曇徵은 610년( 陽王 21)에 百濟를 거쳐 日本에 건너가 종이 먹 연자방아 등의 제작방법을 전하였다. 그는 日本 僧 法定과 함께 나라(奈良)에 있는 法隆寺에 머물면서 五經과 佛法 등을 강론하고 金堂의 벽화를 그렸다고 전한다. 그러나 석가 아미타 미륵 약사 등으로 구성된 四佛淨土圖인 이 金堂壁畵는 1949년 1월 수리 중에 화재를 당하여 소실되었고, 현재는 모사화가 일부 남아 있을 뿐이다. 일본학게에서는 이것이 한 사람의 수법이 아닐 뿐만 아니라 凹凸法 채색법 인물의 묘사법 등이 西域畵風에 토대를 두고 唐風으로 변형된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여 曇徵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고, 7세기 후반경의 白鳳時代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23)물방아( ) : 는 水力을 이용한 절구이다. 職員令 主稅寮條 義解에 謂 水 也 作米曰 作麵曰 '라고 있고, 天智天皇 9년 是歲條에서는 造水 而冶鐵'이라고 하였다.
224)習部 : 新羅 6部 가운데 하나인 習比部의 比'字가 탈락된 것이 아닌가 한다.
225)吳橋 : 中國風의 石橋를 말한다.
226)伎樂의 춤(伎樂舞) : 고대 티벳 인도의 가면극으로, 西域을 거쳐 中國 南朝에 전해져 散樂이라고 불려졌던 것이다. 敎訓抄에 師子 吳公 등 9曲, 法隆寺資財帳에 11曲의 이름이 보이며, 古代의 모습이 正倉院 東大寺 法隆寺에 남아 있다. 職員令 雅樂廖條에 伎樂師一人 掌敎伎樂生 其生以樂戶爲之 腰鼓生准此 腰鼓師二人 掌敎腰鼓生'이라고 있다. 그 춤은 엄숙한 것이 아니라 해학적이며 비속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職員令集解에는 穴云 伎樂腰鼓等 今云吳樂是也'라고 되어 있다.
227)唐 : 사실은 隋를 가리킨다. 隋 煬帝 大業 10년의 일이다.
228)慧慈 : 高句麗 승려로서 推古天皇 3년 5월에 來朝하여, 4년 11월부터 法興寺에 머물다가 이 때에 귀국하였다.
229)奈末 竹世士 : 推古天皇 18년 7월조에도 日本에 사신으로 온 것이 보인다.
230)隋 煬帝가 격파되었습니다 : 隋 煬帝는 이보다 앞서 세 차례에 걸쳐 大軍을 보내어 高句麗를 공격하였다. 614년(推古天皇 22년)에는 제3회째의 大軍이 원정하였지만, 양국 모두 심하게 피폐된 상태에서, 高句麗의 청에 따라 隋 煬帝는 遠征을 그치고 군사를 거두었다. 그러나 隋는 각지에서의 반란으로 정국이 혼미해진 가운데, 618년(推古天皇 26년) 煬帝가 죽고 李淵(唐高祖)이 帝位를 이어 唐朝를 열게 되었다.
231)上宮太子(聖德太子) :
232)慧慈 : 推古天皇 3년 5월에 來朝하여, 4년 11월부터 法興寺에 머물다가 同王 23년 11월에 귀국하였다. 『上宮聖德法王帝說』에 慧慈法師齎上宮御製疏 還歸本國 流傳之間 壬午年二月卄二日夜半聖王薨逝也 慧慈法師聞之 奉爲王命 講經發願曰 逢上宮聖王 必欲所化 吾慧慈來年二月卄二日死者 必逢聖王 面奉淨土 遂如其言 到明年二月卄二日 發病命終也'라고 되어 있다.
233)智洗爾 : 同王 31년 是歲條에는 智世遲라고 되어 있다.
234)奈末智 : 同王 31년 是歲條에는 奈末遲라고 되어 있다.
235)모두 四天王寺에 들였다 : 太子傳古今目錄抄에 인용된 大同緣起 延曆 22년 四天王寺 資財帳 逸文에는 二重金堂一基 阿彌陀三尊 右惠光法師 從大唐請坐 라고 되어 있다.
236)惠日 : 渡唐한 해는 알 수 없다. 舒明天皇 2년(630) 8월에 唐에 사신으로 가고, 白雉 5년(654)에도 遣唐副使로 파견되었다. 百濟를 거쳐 歸化한 高句麗人 德來의 자손으로, 中國에서 醫를 배웠다. 자손은 難波藥師라는 姓을 하사받았는데, 이것은 『續日本紀』 天平寶字 2년 4월조에 보인다.
237)福因 : 同王 16년 9월조에 보이는 倭漢直福因이다.
238)이하 31년 기사는 당시 日本의 對新羅外交의 긴박한 상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즉 日本內 穩健派와 强硬派 사이의 대립 갈등이 잘 드러나 있다.
239)新羅가 任那를 복속되었다 : 잠시동안 日本에 타협적이었던 新羅가 다시 日本에 대한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서게 되었음을 나타내 준다고 보여진다.
240)新羅의 國王 : 眞平王을 말한다.
241)智洗遲 : 同王 31년 7월조에는 智洗爾로 되어 있다.
242)奈末遲 : 同王 31년 7월조에는 奈末智로 되어 있다.
243)堪遲 大舍 : 堪遲는 人名이고, 大舍는 新羅 17官等 가운데 제12위의 官等이다.
244)觀勒 : 생몰년 미상. 日本에 佛敎를 전파한 百濟 武王 때의 고승으로, 三論에 정통했을 분만 아니라 醫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602년(武王 3, 推古天皇 10) 10월에 曆本과 天文, 地理書 및 遁甲과 方術 등에 관한 책을 가지고 日本으로 건너갔다. 일본왕은 그를 元興寺에 머물게 하고 書生을 뽑아 그것을 배우게 하였다. 한편 이 해(624, 推古天皇 32)에 한 승려가 조부를 죽인 사건이 생겼을 때, 日本에서는 觀勒의 건의에 의하여 교단통제기구로 僧正과 僧都라는 제도를 도입하였는데, 觀勒은 초대 僧正에 임명되었다(同月 戊午, 壬戌條 기사 참조). 觀勒의 건의에 따라 최초로 시행된 日本의 僧職制度는 百濟의 제도를 본뜬 것이며, 이를 통하여 최초로 승려의 기강이 확립되었다고 한다.
245)대저 佛法은 漢에 이르러 : 中國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後漢 明帝 永平 10년(67)이라고 보는 견해와 前漢 哀帝 元壽 원년(BC 2)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246)3백년이 지나 되었습니다 : 百濟에 佛敎가 전해진 것은 枕流王 원년(384)의 일로, 『三國史記』 枕流王 元年條에 胡僧摩羅難陀 自晋至 佛法始於此 라고 되어 있다.
247)겨우 백 년이 되었을 때에 : 日本에 佛敎가 전해진 것이 538년의 일이라고 한다면(欽明天皇 13년 10월 기사 및 각주 참조), 실제로는 百濟에 佛敎가 전해진 지 154년 만의 일이 된다.
248)우리 왕 : 百濟의 聖王(聖明王)을 가리킨다.
249)일본천황 : 欽明天皇을 가리킨다.
250)우리 왕은 바쳤는데 : 欽明天皇 13년 10월조 기사에 보인다.
251)아직 백 년이 못되었습니다 : 538년으로부터 본다면 86년이고, 欽明天皇 13년으로부터는 72년이다.
252)僧正 : 推古天皇 32년 4월 戊午條에 詔를 내려, 무릇 道人이 오히려 法을 범한다면 무엇으로 俗人들을 깨우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후로는 僧正과 僧都를 임명하여 승려들을 감독하도록 할 것이다 라고 한 기사가 보인다.
253)惠觀 : 三國佛法傳通緣起에 三論學者 隨大唐嘉祥大師 受學三論 이라고 되어 있다.
254) 三韓館 : 한반도로부터 오는 사신이 묵는 숙소로, 攝津志에 東生郡三韓館在安國寺坂上 이라 하였다.
255) 백제왕 義慈 : 의자왕은 641년(舒明天皇 13년) 3월에 즉위하여 660년에 羅唐聯合軍에 의하여 백제가 망할 때까지 재위하였다. 그러므로 631년 당시 백제왕 義慈 云云 하는 것은 잘못이다. 혹시 舒明天皇 13년의 것이 錯簡된 것이 아닌가 한다.
256) 豊章 : <<三國史記>>(권20)와 <<新唐書>>(권220) 백제전에서 말하는 의자왕의 아들 夫餘豊을 가리킨다. 본서 孝德,濟明紀에는 豊璋으로 표기하였다. 660년에 백제가 망한 후 복신과 도침 등이 부흥운동을 일으켰을 때, 일본에 있던 豊이 일본의 원군을 태운 170여척의 배를 이끌고 귀국하여 왕이 되었다. 그후 내부 분란과 白江전투에서 패함으로써 夫餘豊은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257) 高表仁 : <<舊唐書>> 倭國傳에 遣新州刺史高表仁 持節往撫之 表仁無綏遠之才 與王子爭禮 不宣朝命而還 이라 하였다. 즉 그는 제1차 견당사인 三田사를 따라 일본에 왔으나 聖德太子와 某種의 儀禮問題로 다툰 후 당 태종의 조서를 전하지 않고 되돌아 갔다.
258) 學問僧 : 중국,인도 혹은 한반도 三國에 건너 가 그곳의 선진 불교를 공부하던 구법승의 총칭.
259) 大匠 : 건축,토목 기술자의 우두머리로, 중국에서는 이러한 직책을 將作大莊이라 하였다.
260) 惠隱 : 608년(推古 16) 9월에 수나라 사신 裵世淸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함께 따라간 志賀漢人 慧隱과 동일인으로 보인다. 이들은 신라의 送使를 따라 귀국하였으므로 귀국시에 신라를 거쳐왔음을 알 수 있다.
261) 淸安 : 608년 9월에 수나라 사신 裵世淸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함께 입당한 南淵漢人請安과 동일인이다. 귀국 후 中大兄皇子와 中臣鎌足 등에게 유교를 가르켰으며 大和改新에도 참여하였다.
262) 高向漢人玄理 : 608년 隋使 裵世淸을 따라 입당하였다. 黑麻呂라고도 한다. 대화개신에 참여하여 國博士가 되었고 후에 성을 史로 바꾸었다. 654년 견당사의 押使로서 입당하였다가 당에서 죽었다.
263) 百濟宮 : 舒明天皇 11년 7월의 조칙에 의하여 백제천 옆에 지으진 궁궐로 지금의 奈良縣 강(木+畺)原市 飯高町에 그 옛터가 있다.
264) 大仁 : 推古朝 12冠位 중의 제3관위.
265) 塞上 : 白雉 元年 2월 15일조에 보이는 塞城과 동일인물로 보인다. 그렇다면 塞上은 의자왕의 동생에 해당한다.그가 언제 일본에 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266) 智積 : 1948년 부여에서 발견된 砂宅智積碑를 만던 砂宅智積과 동일인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대좌평까지 역임한 후 관직에서 물러나 奈祗城에서 晩年을 보냈다고 하겠다. 그런데 본문에서 백제 조문사의 從者의 말을 인용하여 지난해 11월에 智積이 죽었다고 하였으나 이해 7월에 지적에 사신으로 일본에 왔으므로 從者의 말은 訛傳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67) 아우 왕자 : 영유왕의 아우인 大陽王으로, 그의 아들이 보장왕이 되자 동왕 2년에 왕으로 봉해졌다.
268) 伊梨柯須彌 : 고구려 말기에 정권을 장악했던 淵蓋蘇文을 가리킨다. 泉南生墓誌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할아버지는 子遊이고 아버지는 太祚로 이들은 모두 막리지의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 연개소문이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막리지에 올라 세력을 키우자, 이를 두려워한 귀족들과 영류왕이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연개소문은 이를 눈치채고 642년 평양성 남쪽에서 部兵의 열병식을 구실로 귀족을 불러 모은 뒤 정변을 일으켜 이들을 모두 죽이고 왕궁에 돌입하여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웠다. 본서에서 말하는 伊梨柯須彌의 정변는 곧 이상의 사실을 말한다.
269) 吉士 : 이해 2월에 백제에 사신으로 보낸 國勝吉士水鷄를 가리킨다.
270) 參官 : 官名인지 人名인지 분명하지 않다. 문맥상으로 보아 인명인 듯하다.
271) 同船 : 많은 목재를 連接하여 이어 만든 배로 合木船이라고도 한다.
272) 衛門府 : 궁궐의 여러 문을 수비하고 경게하는 관부로, 左.右衛門府로 나뉘어져 있었다. 督,佐 大.少尉 등의 관원이 있었다.
273) 百濟調使 - 任那調: 642년(義慈王 2, 善德王 11) 백제가 옛 任那의 중심지대를 신라로부터 다시 빼앗았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三國史記』 권28 百濟本紀 6 의자왕 2년조에 의하면 7월에는 왕이 직접 신라를 공격하여 下 등 40여 성을 빼앗았고, 8월에는 允忠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大耶城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新羅本紀 5 善德王 11년조에도 동일한 사실이 전하고 있다).
274) 明神御宇日本天皇詔旨: 公式令에 의하면, 大事를 번국의 사신에게 선포할 때 쓰던 말이다. 백제 사신에 대한 詔에서도 나오지만, 이 말은 당시의 서술 방식이 아니라 후대의 令에 대한 지식에 의해 쓰여졌다고 추정되고 있다. 효덕천황 2년 2월의 鍾 의 制를 만드는 詔에서는 明神御宇日本倭根子天皇', 3월 27일 황태자가 名代 子代를 봉헌한 奏에서는 現爲明神御八島國天皇'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공식령의 국내에 대한 조서에서 明神御大八洲天皇詔旨'라고 한다는 규정과 조금 차이가 있다.
275) 高麗神子: 고구려 건국설화에 의하면 건국시조인 朱蒙의 아버지는 天帝의 아들 解慕漱이고, 어머니는 河伯의 딸이라 하였다(『三國史記』 권 13, 高句麗本紀 1, 시조 東明聖王). 그리고 「광개토왕릉비」에도 始祖 鄒牟王의 出自는 北夫餘로 天帝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또 牟頭婁 墓誌銘에서도 河伯의 손자이며 日月의 아들 鄒牟聖王'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고구려왕을 지칭하는 듯하다.
276) 道登: 고구려 승려로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중국의 吉藏에게 三論學을 수강했으며, 일본에 건너간 것은 일본 舒明王(629-641) 初로 元興寺에서 머물며 空宗을 연구했다고 한다(「本朝高僧傳」 권72, 道登傳:高翊晉, 『韓國古代佛敎思想史』, 동국대출판부, 1989, p. 120). 그러나『靈異記』上 제12話에 의하면 일본 승려로 高麗에 유학하고 元興寺에 머물렀다고 한다.
277) 人質: 신라의 인질은 神功攝政前紀에 나오는 微叱己知波珍干岐 이후에는 없었다.
278) 遂罷任那之調: 이 이후에는 임나에 관한 기사는 나오지 않는다. 신라가 가야지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279)新羅 - 金春秋等: 642년(선덕왕 11, 義慈王2 ) 7월에 백제에게 서쪽 변경의 40여 성을 빼앗기고, 8월에는 大耶城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김춘추의 사위였던 都督 伊飡 品釋이 사망하였다. 이에 신라는 그 해 겨울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구원병을 청했으나, 고구려가 竹嶺 西北의 땅을 돌려주기를 요구하였으므로 실패하였다. 한편 『三國史記』에는 648년(眞德王 2년) 김춘추가 당에 사신으로 가 구원을 청해 태종이 허락한 일은 전하고 있으나, 일본에 간 사실은 전하지 않는다. 이 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따른다면 신라는 관산성 싸움 이후 한반도에서 고립되어 고구려 백제의 협공을 받고 있었으므로 이를 타개하기 위한 정책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280)金多遂: 貞觀 19년(645) 2월에 작성된 「貞觀年中撫慰新羅王詔書一首」에 의하면, 그 전해인 644년에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고 한다(朱甫暾, 「<<文館詞林>>에 보이는 韓國古代史 관련 外交文書」, 『慶北史學』 15, 1992).
281) 譯語: 통역관.
282) 人: 시중드는 하인.
283) 다리가 셋인 새(三足烏): 각저총, 오회분 4 5호묘 등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는 둥근 원 안에 다리가 셋인 새를 그려 해를 상징하고, 두꺼비를 그려 달을 상징하였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면 고구려에서는 삼족오가 해를 상징하는 길조로 여겨지고 있엇음을 알 수 있다.
284) 着唐國服: 649년(眞德王 3년)부터 신라에서 중국 조정의 衣冠을 입기 시작하였던 것에 연유한다. 『三國史記』 권5 신라본기 5 眞德王 2년조에 의하면 金春秋가 아들 文王과 함께 당에 조공하러 가서 章服을 바꾸어 중국의 제도를 따르기를 청한 이후 진덕왕 3년 신라의 관복이 중국식으로 바뀌었다고 하였다. 한편 『三國遺事』 권4 義解 5 慈藏定律조에 의하면 자장이 眞德王 3년에 처음으로 중국의 衣冠을 입게 했다고 하였다.
285) 其伐之狀 不須擧力: 신라가 진흥왕 때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동시에 받게되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나온 말인 듯하다. 특히 백제는 武王 때부터 끊임없이 신라를 공격하여 의자왕 2년(642, 선덕왕 11))에는 신라의 서쪽 40여성을 빼앗았고, 643년에는 고구려와 함께 黨項城을 공격하여 중국과의 교통로를 끊으려 하였다. 백제는 공격을 늦추지 않았으므로, 신라는 고구려에서 새로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에게 642년 도움을 청했으나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기를 요구받아 실패하였다. 이에 김춘추는 진덕왕 2년(648) 唐에 들어가 외교교섭을 벌이게 되었던 사정으로 미루어 신라의 다급함을 알 수 있다.
286) 新羅道:일본의 遣唐使나 학문승이 초기에 이용하던 신라도는 남양만-장산곳-대동강 하구-압록강하구- 旅順 - 廟島群島 - 蓬萊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방해를 받던 신라는 6세기말 이후 새로운 항로를 개발하여, 唐恩浦 - 椒島 (또는 白翎島) - 赤山의 적산항로를 이용하였다고 한다(申瀅植, 1990, 「통일신라의 번영과 서해」,『統一新羅史硏究』, 三知院).
287) 伊吉博得: 齊明 5년 7월조 등에서는 伊吉連博德書'라고 되어 있는데, 『日本書紀』가 大化 이후의 遣唐使臣의 왕래나 齊明朝 전후의 외교사정에 관해 참고한 伊吉連博德의 기록이다.
288) 奉弔: 10월 임자에 천황이 죽자 조문한 것으로 보인다.
289)玄 法師:(600-664), 17년간의 인도 유학을 마치고 645년 長安에 돌아와 당 태종의 지원을 받으며 불경 75部 1,335권을 번역하였다.
290)無性衆生: 다른 말로 一闡提라고도 하는데, 成佛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중국의 다른 종파들이 모든 사람에게 성불할 가능성을 개방하고 있는 것과 달리, 玄 - 窺基의 法相宗에서는 중생을 聲聞, 緣覺, 菩薩, 不定性, 無性중생의 5종류로 나누어 성불 가능성이 없는 존재를 상정하였다.
291)海東之政: 당과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정벌할 일을 이 때 계획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292)春秋智: 김춘추를 말한다.
293)春秋智- 멸망시켰다: 『三國史記』 권 5, 新羅本紀에 의하면 太宗 武烈王 6년(659)년 사신을 보내 군대를 청하자, 唐 高宗은 그 다음해 3월 左武衛大將軍 蘇定方을 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金仁問을 副大摠管으로 삼아 左驍衛將軍 劉伯英 등 水陸 13만 군을 거느리고 백제를정벌하게 하였다. 6월 21일에 소정방을 德物島에서 맞이하여 나당연합군은 사비성을 공격하였는데, 7월 13일 의자왕이 熊津城으로 도주하였다가 18일 항복하였다.
294)蓋金: 淵蓋蘇文의 다른 이름이다.
295) 사로잡은 - 50여 명: 『三國史記』 권 5, 新羅本紀 5에 의하면 太宗 武烈王 6년(659)년 9월 3일 소정방은 백제왕과 왕족, 臣寮 93인, 백성 1만 2천인을 데리고 당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296) 尾資津: 왕성의 서남쪽인 錦江 하구인지 정확하지 않다. 또 충남 保寧郡 能川面 彌造浦라는 설도 있다.
297)怒受利山: 충남 대전 부근으로 『三國史記』에서 말하는 黃山原이다.
298) 鬼室福信: 『三國史記』, 『舊唐書』 등에는 福信(? - 663)이라 하였는데, 백제 무왕의 조카인 동시에 의자왕의 사촌동생이다. 泗 城이 나당연합군에게 함락된 후, 僧 道琛과 함께 周留城(지금의 韓山)을 근거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에 있던 왕자 豊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고,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劉仁願이 지키던 사비성을 포위하기도 하였다. 唐이 劉仁軌를 파견하여 구원하게 하자, 任存城(大興)으로 물러나 복신은 霜岑將軍, 도침은 領車將軍을 칭하고 유민들을 모아 부흥운동에 힘썼다. 그러나 그 후 도침과 불화하여 그를 죽이고, 나아가 부여풍까지 죽이려 하다가 실패로 죽었다(『三國史記』 권 28, 백제본기 6, 義慈王).
299)任射岐山: 충남 大興 부근의 任存山을 말한다.
300)서부 - 웅거하고: 『舊唐書』 권 109 黑齒常之전에 의하면 흑치상지가 도망한 자들을 불러모아 任存城을 확보하고 柵을 쌓으니, 10일 동안에 귀부한 자가 3만여명이었다고 했다.
301) 餘自進: 餘自信이라고도 하며, 663년(天智천황 2년)에 일본에 건너가 669년(천지 8)에 近江에 옮겨 살았다. 671년(천지 10)에는 大錦下를 제수받았다.
302) 久麻怒利城: 熊津城, 지금의 公州이다.
303) 都都岐留山: 『日本書紀』 天智천황 기사에는 留, 州柔라고 하였는데, 『三國史記』 등에서 백제부흥군의 근거지라고 한 周留城을 가리킨다.
304) 餘豊璋: 舒明天皇 3년(631, 무왕 32)에 볼모로 일본에 보내졌다. 『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義慈王조에서는 扶餘豊이라 하였다.
305) 塞上: 皇極천황 원년(642, 의자왕 2) 2월에 백제의 국왕은 塞上이 항상 나쁜 짓을 하니 백제로 돌려보내지 말 것을 청했고, 白雉 원년(650, 의자왕 10) 2월 갑신조에서는 百濟君 豊璋, 그 아우 塞城, 忠勝 이라 하였다.
306)續麻郊: 지금 伊勢市의 서북, 多氣郡 明和町 川 하구 부근인듯한데, 부근의 모든 하구는 일본 동해지방으로부터의 해로로 중요하다.
307)巨坂: 현재 長野縣下伊郡郡阿智村과 西筑摩郡神坂村의 경계인 富士見臺이다.
308)大伯海:岡山縣 邑久郡의 바다.
309)娜大津: 博多港이다.
310) 解: 齊明天皇 7년 8월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는 璋을 말하는 듯하다.
311)客船: 일본의 遣唐使의 배.
312)墾田: 滋賀縣 栗太郡 東町內라는 설도 있고, 단순한 개간지라고 보기도 한다.
313)蘇將軍: 唐의 蘇定方을 가리킨다.
314)契苾加力:『舊唐書』 권4 本紀4 高宗 上과 권109 列傳59 契苾何力전, 『三國史記』 권22 高句麗本紀10 寶藏王 20년 정월조에는 契苾何力이라고 되어 있다.
315)蘇將軍 - 이르렀다: 『舊唐書』 권4 本紀4 高宗 上 龍朔 원년 여름 5월 병신조에 의하면, 左驍衛大將軍 凉國公 契苾何力을 遼東道大摠管, 左武衛大將軍 邢國公 蘇定方을 平壤道大摠管, 兵部尙書同中書門下三品樂安縣公 任雅相을 浿江道大摠管으로 삼아 고구려를 정벌하게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三國史記』 권22 高句麗本紀10 보장왕 20년조에 의하면, 그 해 4월 위의 3장군과 扶餘道行軍摠管 蕭嗣業으로 하여금 35군을 거느리고 고구려 정벌을 떠나게 하였으며, 8월에 소정방이 고구려군을 浿江에서 격파하고 馬邑山을 뺏고 평양성을 포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9월에 蓋蘇文이 아들 男生을 보내 수만명의 날쌘 군인으로 압록강을 지키게 하니, 당군이 건너지 못하다가 契苾何力이 도착할 무렵 얼음이 얼어 당군이 강을 건너오니 고구려군이 패주하여 3만인이 죽고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항복하였으며 남생이 겨우 살았는데, 당의 철군 명령으로 당군이 돌아갔다고 하였다. 그러나 『舊唐書』 권84 列傳34 劉仁軌전에서는 소정방이 평양성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316)皇太子: 齊明天皇이 이 해 7월 정사에 죽었으므로, 舒明天皇과 齊明天皇에게서 태어난 황태자가 정사를 맡게 된 것이다.
317)百濟:여기에서는 백제왕 豊璋을 의미한다.
318)우리나라와 중국측 사료에는 정확히 백제 왕자 豊璋(扶餘豊)과 일본군이 언제 도착했는지 전하지 않는다. 天智天皇 원년(662) 5월에도 같은 기사가 나오지만, 『舊唐書』 권199 列傳149 東夷百濟傳의 龍朔원년(661) 기사가 福信殺道琛 倂其兵衆 扶餘豊但主祭而已 라 끝난 것으로 보아 이 기사가 타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19) 雲車: 높은 망루가 있는 수레로, 이 곳에 올라 적의 모습을 보는 데 이용하였다.
320)衝 : 적의 城을 돌파하는 망루가 있는 兵車.
321)金春秋 - 하였다: 뜻이 분명하지 않아 여러가지 경우로 풀이되고 있다. 춘추를 金春秋로, 先聲百濟의 聲을 擊의 오자라고 보아 이렇게 풀이하기도 하고,춘추를 孔子의 『春秋』로 보아 공자가 춘추를 지었던 때와 같은 명분을 바로하려는 뜻은 바로 고구려에서 일어나 먼저 백제에서 호응했다 고 풀이하기도 한다. 또 唐의 진정한 목적은 고구려의 정복에 있었으며 그를 위해 먼저 백제를 공격했다고도 풀이하기도 한다.
322)日本 - 장수들: 일본이 고구려에도 구원군을 파견했다는 것은 우리와 중국측 사료에는 나오지 않는 사실이다.
323)加巴利: 皆火(지금 전라북도 扶安)로 추정되고 있다.
324) 留城: 백제부흥을 시도하던 백제 유민들의 본거지인 周留城을 말하는 듯하다.
325) 쥐 - 말꼬리: 12支로 방향을 나타낸 것으로 子는 北, 牛는 南을 가리킨다.
326)대장군- 보내주었다: 한 해 전인 齊明天皇 7년 9월의 기사에 이미 풍장 등이 백제에 도착한 것으로 나와 있다.
327)金策: 金泥로 쓴 冊書 또는 牌.
328)州柔: 周留城을 말한다. 그런데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 그동안 韓山이라는 설이 일반적이었으나, 근래 洪城 扶安 등의 설도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신라군의 공격로가 熊津城 - 豆陵尹城(청양군 정산)-周留城-任存城이므로 한산설릉 재고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견해도 있다(崔根泳, 『統一新羅時代의 地方勢力硏究』, 신서원, 1993, pp. 37-39).
329) 避城; 부근의 지형이 아래에서 묘사하는 것과 유사한 周留城 남쪽의 金堤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피성을 김제로 비정하는 견해는 주류성이 한산에 있었을 경우에만 설득력이 있다고 한다. 최근 주류성이 홍성에 있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피성을 충남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 城)로 비정하고 있다(朴性興, 「百濟復興軍戰史의 歷史地理的 考察」,『任存城 百濟復興軍戰史』, 예산향토사연구회, 1989).
330)古連旦涇: 新坪川(충남 당진군 신평면).
331)안덕 - 빼앗았다: 『三國史記』 신라본기 문무왕 3년 2월 기사에 신라군이 백제의 居列(지금의 居昌) 居忽(지금의 南原) 沙平(충남 당진군 신평면) 德安(지금의 충남 恩津) 4城을 공략하여 빼앗았다 는 기사가 있다. 따라서 안덕은 덕안의 잘못인 듯하다. 그리고 덕안은 백제 5方의 治所 중 하나였다.
332)좌평 - 올려 보냈다: 齊明天皇 7년 11월조의 『日本世記』 인용기사와 중복된다.
333) 2만 7천 인: 『三國史記』 권7 新羅本紀7 문무왕 11년의 기사에 따르면 문무왕이 薛仁貴에게 보낸 답서에서 龍朔 3년에 백제를 구원하어 온 왜의 배 千척이 白沙에 머물러 있었다고 하였다.
334)石城: 충청남도 扶餘 동남쪽의 石城里로 추정된다.
335) 沙鼻岐奴江 - 빼앗았다: 沙鼻 岐奴江인지 沙鼻岐 奴江인지 沙鼻岐奴의 江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336)풍장과 福信의 대립 및 福信의 죽음에 대해 『舊唐書』권199 상 列傳149 東夷百濟조에서는 당시 복신이 그 병권을 오로지 한 뒤 扶餘豊과 점차 서로 시기하였다. 복신이 병이 들었다고 하고 窟室에 누워 있으면서 장차 扶餘豊이 문병오면 습격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扶餘豊이 이를 알고 그가 믿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불의에 습격하여 죽였다 고 하였다. 『三國史記』 권28 義慈王조의 용삭 2년의 기사도 이와 같다.
337)新羅 - 계획하였다: 『三國史記』 권42 열전2 김유신전의 용삭 3년조에서는 문무왕이 직접 金庾信 金仁問 天存 竹旨 등의 장군을 거느리고 7월 17일 豆率城을 정벌하고 熊津州에 나아가 劉仁願의 군사와 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唐書』 108 열전33 劉仁軌전에서는 유인궤의 제안으로 주류성을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338) 白村: 白村江으로, 『三國史記』에는 伎伐浦, 『唐書』 등 중국측 자료에는 白江으로 나와 있는데 지금의 錦江 하구 부근이다.
339)唐의 군장: 이 때 唐의 대군을 이끌고 온 것은 右威衛將軍 孫仁師였다. 그리고 웅진성에서 금강 하구로 내려 온 사람들은 劉仁軌, 杜爽, 扶餘隆 등이었다.
340) 일본의 수군: 『三國史記』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1년조에 의하면 薛仁貴에게 보낸 글에서 龍朔 3년의 주류성 함락 당시를 회고하면서 倭船 천 척이 白沙에 머물러 있었다 고 하였고, 『舊唐書』 권199 열전149 東夷百濟傳, 『唐書』 권108 열전33 劉仁軌傳 등에서는 유인궤가 백강 입구에서 扶餘豊 倭人과 4번 싸워 이기고 그 배 400척을 불태웠다고 하였다.
341)데(弓+ 一)禮城: 冬老縣(전남 烏城)이라는 설도 있지만 알 수 없다.
342)枕服岐城:어디인지 알 수 없다.
343)牟데(弓+ 一):彌데(경남 섬진강 입구, 지금의 南海郡 彌助面)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344)百濟王 善光王: 禪廣이라고도 함. 의자왕의 아들인지 동생인지 정확하지 않다. 『續日本紀』 天平神護 2년 6월 28일조에 의하면 舒明天皇 때 豊璋과 함께 入朝하였는데, 백제의 멸망으로 귀국하지 못했다. 持統天皇 때 百濟王이라고 賜姓하였고, 죽자 正廣參을 추증했다. 持統天皇 7년 정월에 죽었다. 여기에서 백제왕이라고 한 것은 追記일 것이다.
345)蓋金이 - 죽었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보장왕 25년(666) 개금, 즉 蓋蘇文이 죽고 장자 男生이 대신 莫離支가 되었다고 했고, 『舊唐書』 권5 본기5 高宗 하에서도 乾封원년(666) 6월 임인에 고려의 막리지 개소문이 죽었다고 했으므로, 이 기사와 차이가 있다.
346)백제 - 대조하였다: 백제 멸망 후 일본에 이주한 백제인들에게 관위를 주는데 백제에서의 관위에 대응하는 원칙을 세운 것을 말한다.
347)鬼室集斯: 福信을 일본측 기록에서는 鬼室福信이라 한 것과 이 기록으로 미루어 그의 가족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348)鬼室集斯 - 제수했다; 이 기사는 10년 정월조에도 보인다.
349)神前郡:滋賀縣 동남부이다.
350) 軍: 『三國史記』 권 6 신라본기6 문무왕 10년 가을 7월조에서는 왕이 백제의 남은 무리가 反覆할 것을 의심하여 大阿飡 儒敦을 웅진도독부에 보내어 和를 청하였으나, 듣지않고 司馬 稱軍을 보내 엿보게 했다 고 했는데, 여기의 稱軍을 軍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권 7 문무왕 12년조에서는 熊州都督府 司馬 軍이라 하였다.
351)達相:乙相과 같다고 추정하기도 하나, 정확하지 않다.
352) 두 동생: 男建과 男産이다. 남생이 唐으로 도망한 후 남건이 막리지가 되었다.
353)당으로 도망하여: 『三國史記』 권22 고구려본기 10 보장왕 하 보장왕 25년조에 의하면 남생이 6월에 입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354)越의 길:北陸道의 옛이름이다.
355)上臣: 신라 귀족회의의 의장인 上大等을 말한다. 金庾信은 무열왕 7년(660) 1월부터 사망할 때인 문무왕 13년(673) 7월까지 上大等에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356)大角干: 신라시대 관등의 하나. 17관등 위에 설정된 특수 관등으로 상설 관등은 아니다. 『三國史記』 직관지에 의하면 태종무열왕 7년(660) 백제를 멸하고 공을 논하였을 때 대장군 김유신에게 대각간을 주었다 고 했고, 문무왕 8년 고구려를 멸한 공을 논할 때에는 김유신을 太大角干으로 金仁問을 대각간으로 삼았다.
357)英公: 英國公 李勣으로, 보장왕 25년(666) 겨울 12월 遼東道行軍大摠管 겸 安撫大使에 임명되어 고구려 정벌군을 총지휘하였다.
358)고구려의 멸망: 『三國史記』 권22 보장왕 27년조에서는 가을 9월에 이적이 평양성을 함락하고, 10월에 개선한 것으로 되어 있다.
359)仲牟王: 고구려의 시조 朱蒙을 가리킨다.
360) 近江國 蒲生郡: 滋賀縣 동남부로 神崎郡의 서남쪽.
361)高麗: 668년 高句麗가 망한 후, 新羅 문무왕은 670년 8월에 보장왕의 庶子 安勝이 거느리고 온 4천戶를 받아들여 金馬渚에 있게 하고, 9월에는 안승을 高句麗王(뒤에 報德王)으로 봉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고려는 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 후 684년 11월에는 보덕국을 혁파하였다.
362)法官: 司法을 맡은 관청을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令制의 式部省에 상당하는 近江令官制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63)學職頭: 令官制의 大學寮의 장관에 상당한다.
364)比知嶋:거제도 서남쪽에 比珍島가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365)百濟의 집: 奈良縣北葛城郡廣陵町百濟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366)百濟沙宅昭明: 天智天皇 10년 정월 조에는 沙宅紹明이라 하였다.
367)韓阿飡: 大阿飡.
368)貴干:新羅에서 지방민에게 주어지던 外位의 제4관등이다.
369)位頭大兄: 고구려의 관등 중 하나. 『三國史記』에는 위두대형이라고 나오는데, 『翰苑』에서 衣頭大兄이라고 표기한 관등과 같은 것인 듯하다.
370)韓奈末:大奈麻.
371)百濟王 昌成:『續日本紀』 天平神護 2년 6월조, 百濟王 敬福傳에 의하면 의자왕의 孫이고, 善光의 子, 良虞의 兄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갔다가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고 한다.
372)大監: 신라의 兵部 侍衛府 浿江鎭典의 차관직이다. 병부대감은 진평왕 45년(623)에 설치되었으벼, 경덕왕 때 侍郞으로 고친 적도 있었다. 阿飡 이하의 관등을 지닌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시위부대감은 奈麻에서 阿飡, 패강진전대감은 舍知 이상 重阿飡까지 임명하였다.
373)第監: 『三國史記』에는 弟監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신라 진평왕 11년(589)에 설치한 兵部의 관직이다. 무열왕 5년 大舍로 , 경덕왕 때에는 郎中으로 개칭하였다가 혜공왕 때 다시 대사라고 칭하였다. 舍知에서 奈麻에 이르는 위계를 지니는 사람들이 임명되었다. 한편 신라 6亭 9誓幢에 속한 무관직의 이름이기도 하였는데, 여기에는 舍知에서 大奈麻의 품계를 지닌 사람이 임명되었다.
374)大麻: 같이 온 사람들의 서열로 보아 大奈麻라기보다는 大舍의 잘못인 듯하다.
375)耽羅의 王인 姑如: 天智天皇 5년 정월조에는 王子로서 이름이 나온다.
376)국왕이 돌아가셨다: 『三國史記』 권7 新羅本紀7 문무왕 21년(681) 7월 1일에 왕이 죽었다고 하였다.
377)助有: 관등이나 관직이 기록될 위치이나,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378)大那末: 大奈末, 大奈麻.
379) 道藏: 持統天皇 2년(688) 7월에도 祈雨하자 효험이 있었으며, 養老 5년(721) 6월에 法門의 영수로서 80세가 넘었으므로 祿을 받았다.「三國佛法傳通緣起」에 의하면 도장의 저술로 「成實論疏」16권이 있었다.
380) 娑羅羅馬飼造: 『姓氏錄』의 河內諸蕃에 佐良良連을 싣고, 出自百濟國人久米都彦也 라 하였다. 同國 更荒郡 馬甘里에 거주하던 씨족으로, 다음의 野馬飼造와 함께 황후 野讚皇女(持統天皇)가 어릴 때 거주하던 지역과 관계깊은 씨족일 것이다.
381) 野馬飼造: 欽明天皇 23년(562) 7월조에 河內國 更荒郡 자(玆+鳥)野邑의 新羅人이라는 기사가 보인다.『姓氏錄』未定雜姓(河內)에 宇努連 新羅皇子金庭興之後也 라 하였다.
382)고려에 보냈다: 여기의 고려는 보덕국으로 여겨지는데, 684년(신문왕 4) 11월에 안승의 族子 大文이 謀叛을 일으켰다가 처형되었다. 그 후 金馬渚를 함락하고 그곳의 사람들을 國南의 州郡으로 옮기고 금마군이라 하였다.
383)都努朝臣牛飼: 天武天皇 13년 4월 신미조에서는 都努臣牛甘이라 하였다.
384)優婆塞: 불교 신도 중 남자를 가리킨다.
385)白朮:엉거시과에 속하는 다년초의 뿌리로,한약재로 쓴다.
386) 朱鳥 원년: 천황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여 7월 20일에 改元하였다.
387)伎樂:百濟에서 전해진 중국의 樂舞. 여기에서는 伎樂의 舞人 樂人 樂器 衣裳 등을 의미한다.
388)百濟王良虞: 郎虞라고도 한다.의자왕의 손자이며, 善光의 아들, 昌成의 아우이고 敬福의 아버지이다. 大寶 3년(703) 伊予守가 되고 天平 9년(737) 7월 散位 종4위하로 죽었다.
389)祭文:천황이 9월 병오에 죽었으므로 그를 추모하는 제문을 말한다.
390) 高麗 百濟 新羅 3國:고구려는 668년 백제는 660년 망했는데, 여기 나온 고구려인과 백제인이 누구인지 정확하지 않다.고구려인은 報德國의 백성인지도 모르겠다.
391)彩色: 丹 등의 값 비싼 塗料.
392)道藏: 80세가 넘도록 국가의 존숭을 받았는데, 그가 지은 「成實論疏」(16권)에 근거하여 東大寺의 승려들이 삼론학을 배웠다고 한다(「本朝高僧傳」 권1 道藏傳). 이로 미루어 도장은 삼론종 계통의 승려라고 여겨진다(高翊晉, 『韓國古代佛敎思想史』, 동국대출판부, pp. 127-128).
393) 2년: 원년 정월 19일조에 보이는데, 사신들의 출발이 늦어져 2년에 신라에 통고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394) 蘇判: 신라의 17관등 중 제3관등.
395) 옛날 - 날에: 이 내용은 다른 기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396) 飡: 신라 17관등 중 제2관등인 伊飡.
397) 一吉飡: 신라 17관등 중 제7관등.
398) 金薩儒: 天武天皇 2년 윤6월 15일조 참조.
399) 級飡: 신라 17관등 중 제9관등.
400)배를 나란히 - 되었습니다: 神功記에 每年 船 不乾船腹 不乾 , 神功攝政前紀에서는 不乾船 라 하였는데, 이는 조공 등을 바치는 사신의 왕래가 끊이지 않게 하겠다는 의미이다.
401) 大伴部博麻: 齊明天皇 7년 백제를 구원하기 위한 싸움에서 포로가 되었던 사람이다.
402) 學生- 送使: 天武天皇 13년 12월 계미에 新羅는 大奈麻 金物儒를 보내 唐에 유학했던 土師宿 甥, 白猪史寶然 및 백제를 구원하기 위한 싸움에서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을 보내주었다. 여기에서는 이 때의 예에 따르도록 한 것이다.
403) 筑後國: 9월 丁酉조에서는 筑紫國이라 하였다.
404) 天智天皇 3년: 筑紫君薩夜麻의 귀국은 天智天皇 10년 11월의 일이다.
405) 務大肆:일본 令制의 從7位下에 해당.
406) 余禪廣: 善光이라고도 한다.
407) 遠寶: 善光의 아들인 듯하다. 常陸寺 左衛士督을 거쳐 散位 從4位下로서 天平 6년에 죽었다.
408) 良虞: 善光의 아들.
409) 南典: 持統天皇 10년 봄정월 갑인조에서는 百濟王南典이라고 하였다. 같이 열거된 良虞가 善光의 아들인 것으로 미루어 善光의 아들이 아닌가 추정되기도 한다. 直大肆, 備前守, 播磨按察使를 거쳐 天平 9년에는 종3위에 이르렀다.
410) 大稅: 후에는 正稅라고도 하였다.
411) 淳武微子: 淳武는 『姓氏錄』에 의하면 百濟國 淳武止等의 후예라고 한다.
412) 法藏: 天武천황 14년 10월 경진조에 의하면 百濟僧으로 되어 있다.
413) 왕의 喪: 신라 神文王의 죽음을 말하는 듯하다. 『三國史記』권 8 신문왕 12년조에 의하면 왕이 그 해(692) 7월에 죽었다고 하였다.
414) 補命:관명인지 정확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