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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인 신문 2월 1일 자에 실린 오해균 의 단편소설 입니다.
낯선 곳에서 하룻밤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이 지나고 열흘이 넘었다. 아내는 처가에 정이 없는 남편을 원망하며 뒤늦게 혼자서 신년 인사를 겸해 친정에 가고 없다.
현수는 잔소리하는 아내가 없는 금요일 저녁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왠지 허전하다.
전화기를 바라보며 누군가 문자라도 주기를 기다렸지만, 밤 아홉 시가 되어도 전화의 신호음은 울리지 않았다.
‘기다리는 내가 바보지! 이 시간에 어느 정신 빠진 놈이 날 찾을까.’
일없이 리모컨을 손에 쥐고 이곳저곳 채널을 검색하다 순간 무엇인가 스쳐 지나갔다.
다시 뒤로 돌려보니 젊은 청춘남녀가 벌거벗은 몸으로 욕정을 불태우고 있다.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고 누가 볼까 두려워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젠장 나 혼자 있는데 부끄러울 일이 뭐람!’
분명히 집에는 아무도 없는데 괜히 내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재빨리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혼자서 시치미를 떼고 앉았다.
몇 분이 지나고 뒷맛이 궁금하여 다시 그 채널로 돌리고 보니 운우의 정은 이미 끝나고 두 사람은 차가운 밤바다를 거닐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뭘까? 불륜 아니면 부부.’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윤리에 어긋나니, 어쩌니 하는 내가 웃긴다, 그래도 그 남자는 돈 벌고 재미보고 일견 생각하기엔 꽤 괜찮은 직업이다.
뒷맛이 개운치 않아서 혹시 하는 마음에 200여 개가 넘는 채널을 다 돌려 보았지만 두 번 다시 그런 장면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11시 30분 되어서 나는 잠자리에 들고 막 눈을 감으려 할 때였다.
“♬ 어두운 세상에 나를 향한 빛이 되어주세요.” 내 전화의 요란한 벨 소리가 정적을 깨고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 전화기를 보러 거실로 나갔다.
‘빛이 되어 달라는 사람이 누구지 마누라 인가, 내가 집에 있나 확인하는 거겠지!’
그러나 전화를 들고 확인해 보니 낯선 전화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김숙희예요.”
목소리가 맑다, 마치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정말 청량하다.
그러나 잠깐 생각이었지만 김숙희라는 이름을 모르겠다.
“누구라고요?”
“김숙희요, Y대 세미나에서 잠깐 뵈었지요.”
Y대 세미나라니, 난 그런 곳하고는 거리가 멀다.
“전화 잘못하셨습니다. 그만 끊겠습니다.”
잘못 걸려온 전화에 잠깐이나마 설레던 마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문자를 알리는 신호음이 들렸다.
『늦은 시간에 전화를 드려 정말 죄송했습니다. 목소리가 너무 중후하여 제가 잠깐 마음이 설렜네요. 편히 쉬세요.』
‘아니 뭐야 이 여자, 잘못 걸었으면 그만이지 무슨 문자로 사과까지 해.’
『사시는 곳이 어디신지요? 가까운 곳이면 차라도 대접하고 싶습니다. 저는 대전입니다.』
다음날 간밤에 잠을 설치고 늦게 일어나 전화를 열어보니 그녀는 또 문자를 보냈다.
‘뭐야 이 여자 꽃뱀 아냐! 지 때문에 잠도 설쳤는데.’
일이 이쯤 되고 보니 슬슬 그녀에게 장난이라도 치고 싶어졌다.
『저는 집이 산골입니다, 직업은 백수지요.』
이렇게 문자를 보내면 두 번 다시 안 올 것이다.
그러나 곧 다시 지워버렸다. 혹시 그녀가 목소리처럼 멋있는 여자이고, 꽃뱀이 아니고 정숙한 여자라면 어쩐지 손해를 보고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진짜로 내 중후한 목소리에 반하여 차를 마시자는 것이라면 하는 생각에 다시 정중하게 썼다.
나는 서울에 살지도 않으면서 대전보다는 큰 도시에 산다는 일종의 우월의식에 거짓 문자를 보냈다.
『여기는 서울입니다. 굳이 문자 안 하셔도 됩니다.』
『우리 중간에서 한번 만날까요? 잠깐의 일탈은 삶의 청량제라던데요.』
일이 이쯤 되니 내가 먼저 전화를 해서 그녀의 진의를 파악하고 싶어졌다.
“김숙희씨 도대체 왜 자꾸 문자를 보내시는 겁니까?”
“문자 받는 걸 싫어하시는 걸 모르고 제가 자꾸 보냈나 봐요, 이젠 안 보내겠습니다.”
“아니요, 제 이야기는 굳이 하실 이야기가 있으면 전화로 직접 하시라 이거지요.”
“겨울날 누군가와 함께 산성이 있는 곳 작은 카페에서 포근한 이야기를 짧은 시간만이라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산성이요? 혹 공주에 공산성이라고 아시면 그곳에 한번 가보세요.”
“어머 공주에도 산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어요. 그곳이면 대전과 서울의 중간쯤 되니 우리 거기서 만날까요?”
여자는 점점 대범하게 나왔다.
나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지만 나를 못 믿는 마누라가 자기 친구에게 장난을 치라고 사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에 그렇다면 나는 복수를 하고 싶었다.
나는 몇 개월 전 들려봤던 공산성 입구 관광안내소 맞은편의 작은 카페 ‘선경’을 생각해 내었다. 그곳에 미리 가서 앉아 있다가 창밖을 보면서 김숙희의 정체를 파악하고 싶었다.
“좋습니다, 제가 장소를 검색해보고 문자로 넣어 드릴게요.”
『오늘 오후 3시 공산성 입구 관광안내소』
문자를 보내고 시계를 보니 10시, 아직 다섯 시간이나 남았다, 나는 집에서 20분 거리이니 급할 것도 없다.
어차피 그녀는 대전이라 했으니 설마 이곳까지 와서 장난을 칠까.
느긋한 마음으로 욕조에 더운물을 받아놓고 몸을 담구니 스르르 잠이 온다. 그렇게 한 시간을 누워 있다가 물이 식으면서 잠도 달아났다.
뒤늦게 아침을 먹고 시간을 보니 12시가 조금 넘었다.
‘왜 이리 시간이 더디게 가는 거야!’
그녀를 만나기 조금은 이른 시간, 2시에 집을 나와 차가 있지만 일부러 택시를 타고
2시 10분쯤에 산성 매표소의 맞은편 2층 ‘선경’카페의 창가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며 동정을 살폈다.
소문난 관광지 이긴 하였지만 겨울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2시 40분쯤 되었을 때 고급스러운 세단 한 대가 매표소 앞에서 서고 이어서 뒷좌석에서 검은색 밍크코트를 입은 여자와 앞에서 사내 둘이 내려서 주위를 살펴보며 여자에게 뭔가 지시를 하더니 그들은 차를 몰고 주차장 쪽으로 사라졌다.
‘혹 저 여자인가, 만약 저 여자라면 분명히 꽃뱀이 틀림없다! 사내 둘을 대동한 걸 보면 날 치한으로 몰아서 돈이라도 뜯어내려는 속셈이 분명해.’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여자라는 것이다. 현수는 여차하면 파출소에 신고하려고 파출소 전화번호까지 저장을 해두고 카페를 나와 관광안내소 앞으로 갔다.
밍크코트를 입은 여자도 주차장 쪽에서 나를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반대편에선 또 다른 낯선 여자가 매표소를 향해 걸어온다. 복장은 수수했지만 얼굴이 참 고와 보였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여자가 내 스타일 인데! 왠지 밍크코트는 싫어.’
현수는 잠깐이지만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많은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점점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을 때, 그들보다 조금 빠르게 낯선 남자 둘이 내게 다가왔다.
“혹시 장현수씨 아니십니까?”
“네. 무슨 일이시지요?”
그때였다. 나에게 다가오던 밍크코트 여자가 오던 길을 되돌아 뛰기 시작했다.
“저 여자 잡아.”
건너편에 있던 또 다른 남자 둘이 그녀를 잡으러 뜀박질을 한다.
“장현수씨 당신을 마약사범으로 체포합니다.”
“여보시오 나는 장현수가 아니고 정현수요, 그리고 무슨 마약사범이란 말이요? 난 사람을 만나러 왔단 말이요.”
그들에게 나의 말은 통하지 않았다, 나는 짧은 순간 나를 향해 다가오던 또 다른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혹시 이 화가 자기에게도 미칠지 걱정이 되었는지 멈칫하더니 되돌아 가버렸다.
그들은 막무가내로 나를 차에 밀어놓고 데려다가 유치장에 집어넣었고 전화도 빼앗았으며 철저히 외부와는 차단을 시켰다.
설렁탕 한 그릇이 제공되어 저녁을 마치고 밤 10시가 되어 맞은편 유치장에 있는 밍크코트와 대질 심문을 한다며 나를 그녀와 함께 취조를 하였다.
“이 사람이 당신네 마약 공급책이 맞소?”
“얼굴은 몰라요, 그러나 그 시간에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틀림없겠지요.”
“여보세요 아주머니 나는 당신을 본적도 없고 나도 약속이 있어서 그곳에 왔다가 이렇게 봉변을 당하는데 무슨 개 같은 소리요? 그리고 형사인지 경찰인지 당신들, 아무 죄도 없는 나를 이리해도 되는 것이요?”
“그럼 그 시간에 그곳을 왜 온 겁니까?”
“누구 만나러 갔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요?”
“나도 몰라요 누군지, 그리고 이 여자 내가 2시 40분에 카페에서 보니까 젊은 남자 둘과 같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분명 마약공급선 이니 그들을 찾는 게 빠를 거요.”
“아저씨 내가 당신에게 마약을 받기로 되어 있잖아요, 무슨 있지도 않은 젊은 남자를 말해요.”
현수가 보아하니 이 여자는 자신들의 공급선을 보호하려 절대 입을 열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무 관계도 없는 나를 끌어들여 그들에게 멀리 은신할 시간을 주는 게 분명했다.
화가 나고 가슴이 타는 밤이다. 현수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상황을 생각해 보니 공연히 알 수 없는 여자에게 정신이 팔려 이 지경까지 되었으니 분명 벌을 받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로 볼 때 그 여자 김숙희가 이 여자는 아니다.
“전화나 돌려주시오, 나 때문에 걱정하는 사람이 많단 말이오.”
“내일 아침 신원조회 끝나고 이상 없으면 돌려드릴 테니 잠자코 계세요.”
“그럼 날 이곳에 재우고 억울하게 누명 씌운 보상도 같이 해줍니까?”
“이보세요, 장현수씨 당신은 지금 마약사범입니다.”
“나 미치겠네, 난 정현수요.”
결국 그날 밤, 유치장 간이침대에서 추위에 떨며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서장이란 사람이 찾아왔다.
자신을 심문하던 그 못된 놈들은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도 않고, 경솔했던 직원들이 복무에 너무 열정적으로 임하다 보니 억울하게 하룻밤 옥살이 한 것을 사죄한다며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데 문제를 삼기도 뭣하여 일언반구 없이 소지품만 챙겨서 나왔다.
‘나도 실수할 때가 많은데 너희들도 마찬가지겠지!’
상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하니 분노는 가셨는데 그 김숙희가 궁금했다.
전화를 열어보니 마누라 전화가 20여회, 그녀의 문자도 보인다.
『오늘 3시 그 장소에 갔지만 제 기대와 다르게 오시질 않았더군요. 잠깐 동안 행복했고 죄송했습니다. 숙희 올림』
‘그럼 맞은편에서 오다가 되돌아간 여자가 그녀인가! 나는 지 때문에 유치장에서 잤는데.’
이것도 일탈이라면 일탈이다, 내가 생각이 저급하여 벌어진 일인데 그 누굴 원망하나.
‘일단 마누라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만약 집에 가서 있다면 뭐라고 변명을 하지.’
아무리 머리를 짜도 사실대로 말하는 것 이외엔 상책이 없다.
차를 타면 십 분도 안 되는 거리를 한 시간을 걸어서 집에 도착하니 다행히 우리 집 마나님은 아직 친정집인지 집은 냉기가 흘렀다.
“여보 전화가 고장 나 고쳐서 이제야 전화를 하네.”
“마누라가 이틀씩 집을 비워도 궁금하지도 않나요?”
“뭔 소리야, 보고 싶으니 빨리 와.”
“내일 갈 테니 빨래 좀 돌리고, 시장도 봐 놓으세요.”
한 사람은 해결이 되었다. 이제는 김숙희 그녀에게 전화를 해보자.
“김숙희씨 저 어제 약속했던 사람입니다.”
“알고 있어요, 어제는 왜 안 나오셨나요? 저를 놀려먹으니 재미있던가요?”
“무슨 말씀이세요? 난 어제 김숙희씨 때문에 큰 고욕을 치른 사람입니다.”
“저는 차마 얼굴 뵙기가 부끄러워 맞은편 카페에서 90분을 기다렸어요.”
“그래요, 우리는 30분 정도를 같은 장소에 있었네요, 나는 2시30분부터 앉아 있다가 3시에 나가서 덕분에 곤욕을 치르고 지금 집으로 왔습니다.”
“그럼 어제 몇 사람이 실랑이하던 그분이셨어요?”
“말해 뭐합니까, 하여튼 김숙희씨 덕분에 낯선 곳에서 하룻밤 잘 잤습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그녀는 한참이나 웃었다.
“우리 다시 약속 정할까요?”
“됐고요, 혹 내가 대전 갈일 있으면 전화한번 하리다.”
“아니요, 사실은 저는 집이 공주입니다. 혹 공주 오실일 있으면 그때 꼭 전화주세요.”
첫댓글 하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추리소설 읽는 듯, 스릴도 있어요.
다른 작품도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