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동국통감 고려 공민왕23년,갑인년,1374년
가을 7월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최영(崔瑩) 등을 보내어 제주(濟州)를 토벌하였다. 이에 앞서 한방언(韓邦彦)이 제주에 이르매, 합적(哈赤)·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관음보(觀音保)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어찌 감히 원(元)나라의 세조 황제(世祖皇帝)께서 놓아 기른 말을 저 명(明)나라에 바치겠는가?”
하고, 단지 말 3백 필만 보내었다. 임밀(林密) 등이 말하기를,
“제주의 말이 2천 필의 수효에 차지 않으면 황제께서 반드시 우리들을 죽일 것이니, 청컨대 오늘 왕에게 죄를 받겠습니다.”
하니, 왕이 대답하지를 못하였다. 드디어 제주를 토벌하기로 의논하고 최영 등에게 명하여 가서 토벌하게 하였는데, 전함(戰艦)이 3백 14척이고, 정예(精銳) 군졸이 2만 5천 6백 5명이었다.
http://jeju.grandculture.net/Contents?local=jeju&dataType=01&contents_id=GC00700724{제주 목호의 난)
목호의 난
[정의]
고려 후기 공민왕대에 제주도의 몽골족 목호(牧胡) 세력이 주동해 일으킨 반란.
[개설]
제주 지역은 공민왕의 반원 정책이 단행되는 1356년(공민왕 5)부터 몽골족 목호 세력과 고려가 수차례 맞부딪치는 현장이 되었다. 특히 양자의 충돌은 명나라가 개입함에 따라 1374년에 총력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로써 목호 세력은 최후를 맞이했고, 제주 지역은 제주 사람들이 큰 희생을 당한 채 고려에 재귀속되었다.
[역사적 배경]
제주와 몽골의 교류가 이루어진 후, 크게 늘어난 제주 말이 원나라의 말을 밀어내 중국의 새 주인으로 등장하고, 고려와 국교를 맺은 명나라에도 바쳐졌다. 1374년(공민왕 23)에도 명나라는 제주에 좋은 말 2,000필을 보낼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에 고려 관리가 제주에서 말을 취하려 하자, 원의 탐라국립목장을 관할하던 몽골족 목호는 황제 쿠빌라이가 풀어놓아 기른 말을 명에게 바칠 수 없다면서, 단지 300필만 내주었다. 그러나 명이 강력하게 2,000필을 채울 줄 것을 요구함에 따라 공민왕은 어쩔 수 없이 제주 정벌을 결정한 다음, 제주 출정군을 편성했다.
[경과]
제주 출정군의 총사령관은 최영(崔瑩)이었고, 출정군은 정예군 2만 5,605명과 전함 314척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요동 정벌군 3만 8,830명과도 견줄 만한 전력이며, 당시 제주 인구와 맞먹을 정도의 병력이었다. 최고 지휘부 여섯 명의 원수도 전투 경험이 많았고, 모두 재상급 관직을 지냈을 정도로 전공이 뛰어난 자들이었다.
출정군 이외에도 예비 부대가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에 따로 주둔했다. 그럼에도 출정군은 제주 서쪽 명월포에 도착해 벌어진 목호군과의 첫 전투에서는 패배하였다. 그 다음에는 공격 명령에 주저하다가, 하급 장교 한 명이 최영에 의해 베어 조리돌리는 일마저 벌어졌다. 제주 출정군이 최정예 대규모 병력이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음에도 극도로 긴장했던 것이다.
이들의 긴장은 고려의 공략을 격퇴했던 목호 세력의 전투력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지만, 제주 사람들이 전부 목호와 결탁했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에 더욱 증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목호도 출정군에 맞설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목호 세력의 수뇌부는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관음보(觀音普) 등이었다. 이들은 동·서 아막(阿幕)의 탐라 목장 중 서아막을 관할하였고, 탐라 목장의 주도권은 서아막의 목호가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목호 수뇌부는 기병 3,000여 명과 수많은 보병을 거느리고 명월포에 포진했다. 이들 목호군은 당시 부락을 이루어 살았던 몽골족, 이들과 제주 여자 사이에 태어난 반(半) 몽골족화된 제주민, 그리고 고려 관리의 잦은 수탈에 반감을 품었던 일부의 제주 사람이 가세해 편성되었을 것이다. 이들 목호군은 명월포에 처음 상륙한 출정군을 모두 죽여 기세를 올렸으나, 재차 벌어진 명월포 전투에서 고려군에 패하였다.
이후 양자의 전투는 목호군이 제주 서쪽의 명월촌에서 서남부 쪽으로 밀리면서 한 달여간 주야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전투에서 밀린 목호군 수뇌부는 서귀포 앞바다 범섬으로 피했다. 최영도 배 40척을 몰고 직접 범섬을 압박해 들어갔다.
[결과]
출정군의 선전에 석질리필사는 처자식 등과 함께 항복하고, 초고독불화와 관음보는 벼랑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범섬 전투 이후에도 동아막의 목호 등이 수백 명을 거느리고 성에서 계속 저항했다. 이에 최영이 장수들을 거느려 성을 쳐부수고, 도망가는 무리를 샅샅이 찾아내 전부 죽였다.
최영이 제주에 와 한 달여간 전투를 벌였던 목호 정벌은 “우리 동족이 아닌 것이 섞여 갑인년(1374)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는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메인다”고 묘사될 정도로 고려와 목호 세력이 총력전을 벌였다. 이로써 목호 세력은 영향력을 상실했고, 제주 사람들 역시 많은 희생을 당하였다.
[의의와 평가]
제주의 몽골족 목호 세력은 1374년 최영의 정벌로 힘을 상실하게 되었고, 원의 직할령이 된 이후 고려에 환속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양국에 이중 귀속된 상태였던 제주는 제주민의 희생을 안은 채 고려에 재귀속되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 최영 장군이 탐라 목호 세력을 평정하느라 개경에 없을 때, 개혁 정치를 단행해 나라를 바로 잡아보려던 공민왕이 시해(弑害)되었다. 우왕은 1374년(공민왕 23)인 10살 때 최영이 제주 정벌에 나아가 개경에 없었기 때문에 선대 부왕 공민왕이 시해되었다고 확신했다. 이런 확신은 우왕이 24살의 성년에 이르러서도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우왕은 요동(遼東)[만주 지역] 정벌을 재촉하기 위해 최영 장군이 서경(西京)[평양]으로 나아가자 줄곧 따라다녔고, 개경으로 돌아가라는 최영의 간곡한 부탁도 거절한 채 같이 서경에 남았다.
즉 우왕은 부왕의 시해가 자신에게도 되풀이될까 두려워 최영을 곁에 두고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려는 의도에서 요동을 정벌하러 전쟁터로 가려는 최영의 발길을 막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성계가 고려왕조 몰락과 조선왕조 건국의 길로 나아가는 위화도 회군의 기회를 잡는 일이 가능했다 할 수 있다.
최영이 제주에 들어와 몽골족 목호 세력과 전투를 벌였던 일은 고려가 자주성을 회복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몽골족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이루어졌으나, 제주 사람들은 커다란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이성계가 조선 건국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상황도 만들어준 셈이다. 이어 제주는 조선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07m4094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