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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이별연습-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서울에서 공부하며, 생활하던 나는 방학이면 어김없이 고향으로 내려와 부모님과 함께 생활했다.
일찍 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서일까. 아니면 부모님이 계셔서일까. 늘 고향에 대한 연민이 어린 마음에도 많이 남아있었다. 고향은 산세가 수려하고 골짜기가 깊어 대낮에도 혼자 산속으로 들어가기란 쉽지 않은 곳이다. 대개 여름의 시골은 소를 방목하여 산에 풀어 놓았다가 오후 늦을 무렵 어둠이 내리기 전에 고삐하여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다.
매일같이 점심때 지나서 동네 소들을 모아다가 약 2.5km 정도 몰고나간 후 산에다 풀어 놓는다.
소는 사람과 늘 함께 사는 동물로 사람들로부터 크게 범위를 벗어나지 안아 소를 찾으러 온산을 헤메고 하지 않아도 자기네들끼리 모여 풀 뜯기에만, 열중하다가 해질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갈 때를 알고 스스로 길가로 내려온다. 그 많은 소들이 자기 주인의 집을 어떻게 알고 잘도 찾아간다.
한번은 소를 풀어 놓은 후 아이들에게 보게 하고 이런저런 생각도 할 겸 책 한 권을 들고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를 피해 한 적 한곳 제법 큰 바위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작심하고 몇 페이지를 읽었지만 얼마 못 되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바위에 드러누웠다가 엎드렸다가 이리뒤척 저리뒤척 하는데 뜻밖에 낯선 여학생 여럿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혀 본적이 없었다. 다가와서는 바위위에 올라온다.
마치 늘 지나가다가 의례적으로 쉬었다 가는 자리인 양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괜히 내가 남의 자리를 그동안 허락 없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무 소리 못 하고 한 켠으로 밀려나고 이건 뭐지 하고 불편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까 그 쪽에서 딱 봐도 생기 발랄한 여학생이 먼저 말을 건넨다.
“괜찮아 옆에 앉아 미안해”
“......”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느 동네사니?”
“응 아래 동네”
“방학이라서 왔구나”
“.....”
어떻게 알았을까 하고 갸우뚱하니,
“촌에 사는 것 같지 않아서”
“......”
여학생이 여섯이나 되어 주눅이 들 수밖에 그만 자리를 피해 동네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자세하게 얼굴을 보지는 않았지만, 도시의 여학생들에 비해 그중 키 큰 한 여학생만 얼굴이 하얗고 다들 약간 가무잡잡한 얼굴들을 하고 있어 오히려 건강해 보이고 티 없이 맑아 보이다 못해 순수하게 보이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동네로 돌아와 친구들에게 윗동네 여학생들을 만난 것을 말하니 이미 알고 지내는 친구 사이 들로.
사춘기를 막 벗어날 나이여서 그 두 친구는 이미 사귀고 있었다.
“이렇줄 알았으면, 좀 자세히 봐둘걸”
친구들은 열을 내며 그 중 누구는 이름이 아무갠데 조잘조잘조잘...
끝이 없다. 열변을 토하는 걸 봐서는 이 친구들이 무척 좋아하는 것을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은 오전에 비가 내릴 것처럼 날이 흐려지더니 오후가 못 되어 비가 오기 시작한다. 소를 방목할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가두어 여물과 지난해 추수한 볏집을 내어다가 꼴을 대신해서 구유에 넣어둔다. 여름비는 세차다. 한바탕 소나기 수준이 아니라 오후 내내 드러 붓는다. 비소가 석이여 내리는 비와 대기 중의 습기를 잔뜩 머금은 황토집들과 재래식 화장실이 있는 골목길에선 도시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절묘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비 그친 여름은 햇빛이 강렬하다. 강렬하다 못해 따갑다.
대지가 흠벅 젖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기온에 의해 금방 수분이 증발해 포송해 진다.
어김없이 친구들과 아이들이 빨리 가자고 서두른다.
이미 많은 무리의 소들이 마치 출항을 준비 중인 조그만 배처럼 여기저기 함께 모여있었다. 어떤 녀석은 아직 졸린 눈으로 더운 날씨가 귀찮은 듯 되새김질을 연신 하고 있고, 어떤 소는 언덕에 몸을 기대어 진득이 가죽을 파고드는 쇠파리 등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세차게 문지르기 시작한다. 이런 광경을 빗대어 하는 말 가운데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말이 이와 같은 장면을 두고 한 것 같다. 또 어떤 두 녀석은 만나기만 하면 힘겨루기를 한다. 모인 소들이 전부 암소들이지만 덩치가 있어서인지 싸움은 때론 격렬했다.
소들의 세계를 알 수는 없지만 어떻게 알고 두 녀석은 가까이 있기만 하면 자웅을 겨룬다. 그래서 항상 따로 떼어 놓는다.
“오늘은 묵바꼴이다”
그날 그날 소 먹일 곳을 결정하는 친구가 오늘은 비교적 동네로부터 먼 곳으로 정했다. 이웃 동네와 인접한 곳이다.
풀어놓아 자유롭게 꼴을 뜯게 하고는 여자아이들은 공기 놀이를 하기도 하고 여자들의 전매 놀이인 고무줄 넘기는 언제부터 전해졌는지는 모르나 성장기 여자애들은 지역을 불문하고 재미있어한다. 한번은 초등 때 장난으로 고무줄을 끊고 도망갔더니 함께한 애들 모두 소리 지르며 무척 화내는 모습을 본적이 있었다. 나는 장난으로 했는데 여자애들에게 고무줄놀이는 꽤 진지한 놀이구나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랬다. 남자애들은 여러개 돌을 세워놓고 발등 위에 작은 돌을 올려 멀리서 맞혀 넘기는 놀이를 한다. 도시와는 전혀 다른 게임으로 자연 속에서 자연이 제공한 것으로 순수하게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
아까 소 두 마리는 무엇이 서로 감정이 많은지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풀 뜯기보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힘겨루기에 에너지를 소비한다. 아까는 사람에 의해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고 느꼈는지 주인들이 없는 틈을 타서 아주 치열하게 뿔 부딪치는 소리가 툭툭하며 제법 묵직하게 들린다.
“저놈들은 이 더운 날에 기운도 남아도네 그늘 아래서 조용히 풀이나 뜯을 것이지” 하며 두 아이가 쫓아가서 떼어 놓는다.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한 마리는 이쪽으로 다른 하나는 반대편으로 아주 멀찍이 몰아내었다.
묵바꼴은 지형적으로 개울을 끼고있어 이편과 건너편으로 나뉘는데 마침 이웃 동리에서도 소를 먹이고 있었다.
산골이라 논들이 원래 지형을 따라 개간을 해서인지 층층이 굽이져 쌓인 것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작열하는 태양에도 불구하고 수건을 뒤집어쓰고 또 챙이 넓은 볏집 모자를 써서 최대한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노출 하지않은 채 허리를 구부려 논을 매는 농부의 모습이 저 멀리서 보인다.
성큼하게 자란 빽빽한 모들이 빳빳하게 하늘을 향해 찌를 듯이 뻗어있다. 이제 막 낫알을 형성할 중심대가 나오고 끝에는 쌀알 형상을 한 벼들이 나온다. 모두 다 처음엔 고개를 쳐들고 햇빛과 양분을 내려주기를 마치 제비 새끼들이 어미가 먹이를 물고 돌아오면 입을 짝짝 벌리듯이 하늘을 향해있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논에는 이렇듯 벼들로 온통 푸르다.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농부들의 고통이 고스란이 스며있는 곳’ 혼자 말처럼 중얼 그렸다.
어쩌다 시원한 바람이라도 불어주면 파도 물결같이 벼들이 일제히 춤춘다. 이 또한 도시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머지않아 고향의 모든 논 들은 넉넉한 황금색으로 물들어 농부들의 낫을 기다릴 것이다. 봄부터 수고한 고생의 결실을 비로소 맛보는 것이다. 힘들어도 몇 달 후 풍성한 수확을 생각하며, 그늘 하나 없는 넓은 들판 위에서 얼굴을 땅 가까이 까지 한 후 굵은 땀방울을 흘려야 만이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이렇듯 식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성장한다고 했던가.
한적한 곳을 찾아 바위를 방석으로 하여 책을 읽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친구들의 나를 찾는 고함 소리가 아스라이 들린다. 아무 응답이 없자 이번에는 여럿이서 한꺼번에 불렀다.
힘껏 대답했지만, 미치지 못했는가 연신 불러 댄다.
친구들과 낮선 사람들이 함께 모여있었다.
옆 동네 친구들이 놀러왔다. 놀랍게도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났던 여학생들이 거의 다 함께했다. “야아, 얘 말이냐?”
친구 중 하나가 나를 가리키며, 여학생들에게 말한다.
“무슨 일 있어?”
“윗 동네 친구들이 너에 대해 묻 길래......”
시선을 상대방 쪽으로 하고 미소도 짓지 않은 채 소개를 간단한 눈인사로 대신했다.
그리고는 원래 있던 곳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친구들이 같이 있기를 권한다.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어색한 가운데 있는 게 이렇게 힘든지 그때 까지 만 해도 잘 몰랐다.
갑자기 여자애들이 수군수군하더니 친구 중 하나에게 말을 건넨다. 그리고 귓속말을 받은 친구가 “야아 너 서울 어디서 사냐고 묻는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아니 내가 무슨 외국인이라도 되어 통역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 친구를 거쳐 그것도 어렵게 한마디 물어보는 것이 고작 어디 사냐고 묻는다. “네가 대신 말해줘”
남자들은 여자들 앞에서는 나약함을 보이기 싫어서일까. 아니면 자신들의 얼마 되지 않은 용감함을 나타내 보이고 싶음일까. 평상시 친구들의 모습 하고는 다소 차이가 느껴져 오히려 불편했다.
참 난감했다. 같이 있자니 딱히 할 말도 없어서 어색해 싫고, 빨리 시간이 지나갔어면 하고 바램했다. 어떻게 이 낮선 이어색함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까 마땅히 생각이 나지 안았다.
“잠깐만 저기좀 갔다 올게”
“어딜 가는데”
“잠깐이면 돼”하고 겨우 빠져나왔다.
물론 이 산중에 마땅히 어디 갈 곳이 없는 줄은 친구들도 잘 알고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있는 게 어색해서 애써 자리를 피한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을 것이다.
저녁 어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친구 하나가 찾아왔다. “누가 널 찾는다.”
“나를 누가...”
“글쎄 가보면 알아”
“말해봐 누군데...”
“아까 봤던 여자애 중에 하나가 널 찾아왔다.”
순간 여럿 중에 누굴까 누가 나를 찾아왔을까. 궁금하기는 했다.
그럼 왜 찾아왔을까. 이유가 뭘까. 너무 궁금해
친구와 걸어가면서 “왜 찾아온 거야?”
“글세 직접 물어봐”
친구를 따라가 보니 세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뒤에 알았지만 그중 두 명은 친구 둘과 교제하고 있었고 한 명은 혼자였다.
친구들은 자기 짝들과 간데없이 슬며시 사라졌다.
둘만 남았다. 벤치나 카페나 하다 못해 빵집도 없는 오직 앉을 곳은 그냥 딱딱한 바위밖에 없어 많이 난감했다. 그렇다고 깜깜한 낮선 곳에 여자애를 혼자 두고 들어갈 수도 없고, 일단 앉아서 친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잠깐 이동하여 적당한 곳을 찾았다.
“앉으세요”
“.....”
내가 먼저 앉았다.
그런데 여자애가 멀찍이 떨어져서 앉을 줄 알았는데 바로옆 어깨가 닫을 정도로 바짝 붙여 앉아서 순간 많이 당황했다.
처음으로 가슴이 뛰었다. 나도 내 심장 소리를 그날 처음 들었다. 두근두근 뛰는 소리가 마치 내 귀를 거쳐 넓은 벌판으로 메아리치는 것만 같았다. 행여나 누가 내 심장 소리를 듣고 달과 별들이 가로등 대신 빛의 입자들을 모아 밤 하늘을 가로질러 바람과 함께 이곳까지 도착 한 그 날 누가 내 심장이 뛴 이유를 알기라도 한다면,,,,두려웠다.
조금 떨어져서 간격을 벌려볼까도 했는데 도무지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여섯 명 중 제일 키가 큰 아이였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이 느낌은 또 뭐지 지금껏 어느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연민 적 감정 이런 표현 못 할 느낌을 가리켜 혹시 뭐라고 하던 데...
놀랍게도 내 속에 이런 감정도 잠재해있었구나, 아직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내가 존재하고 있음도 그날 처음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답답했는지 가족관계와 혈액형 등을 물어본다. O형이라고 답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엔 내가 반대로 물었다. 자신은 B형이라고 했다.
형제 관계는 드물게 무남독녀였다.
목소리가 참 고왔다. 차분했다. 톤이 안정적이고 일정했다. 아직 탈색되지 않은 청바지가 잘 어울렸다. 청바지로 인해 몸매가 잘 드러나고 새것처럼 하얀 단추 많은 블라우스와도 잘 어울렸다.
상의 맨 위 단추는 채우지 않아 그 사이로 가늘고 긴 목을 볼 수 있었다. 목의 왼쪽 중간 부분에 쌀알보다 조금 적은 까만 점이 있었다. 머리는 단발보다 약간 짧은 컷트로 웨이브저 있는 게 그냥 자연적인 건지 아니면 퍼머먼트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생 머리칼 보다는 한층 세련되 보였다. 당시 여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했지만 유독 잘 어울렸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절로 느껴졌다.
얼굴은 비교적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드물게 백옥처럼 맑다 못해 창백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꾸미거나 하지 않았어도 어딘가 귀품이 있어 보였다.
“아까 낮에 인사하고 어디 갔었어?”
역시 목소리가 진지함이 묻어있었다. 그냥 시간을 채우기 위한 물음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친구들과 어울려 떠들고 장난치고 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않은 것이 궁금했나 보다.
“응, 그냥 조용한 곳”
“조용한 곳을 좋아해?”
“......”
“혼자 있었어?”
“책을 읽고 있었어.”
“제목이 어떻게 돼?”
“베르테르의 슬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응...”
“괴테가 젊은 날 어떤 여자를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되는데 그 여인은 이미 약혼자가 있는 사람으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베르테르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말 하자면 그런 내용이지?”
“어 벌써 읽어 봤구나!”
괴테가 실제로 어떤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서 복잡 미묘하게 심경을 열거해 놓은 작품이 바로 베르테르의 슬픔이었다.
“원작을 다 보진 못하고, 간단하게 요약집을 봤었어.”
“아 그랬었구나”
“어디까지 읽었는데?”
“오늘 겨우 시작했어.”
뜻밖에 공통분모가 있어서 대화가 쉽게 이어질 수도 있었는데 책을 읽지 못한 상태여서 줄거리만 갖고 애기하긴 좀 어색했다. 그래서인지 대화가 진척이 없었다. 거기까지였다.
속으로 애는 자꾸 묻기만 하네. 궁금한 것이 많은가보다.
뜻밖이였다. 지금껏 누가 나에게 이런 많은 물음들을 던진 예가 있었던가? 여전히 내 심장의 고동은 잔잔해 질줄 몰랐다. 내가 스스로 어떻게 통제하고 싶은데 잘 안되었다.
내 목소리는 심장 때문인지 나즈막하게 떨리고 있었다.
여자애는 어떻게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차분히 얘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늘 사실은 함께한 친구 둘은 이미 내 친구들과 만남을 갖고 있지만, 약속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본인이 특별히 부탁해서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순전히 나를 만나기 위함이 아닌가?’하고 생각하니
순간 기분이 묘했다.
카페에서처럼 마주보며, 서로 눈빛을 맞추지는 않아도 그 깊이를 가늠할 정도였다. 이미 나의 이름은 어떻게 알았는지 ‘동수!!’하며 부르는 것이 아닌가.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친구를 통해서 알았어.”
“......”
“나는 숙영이라고 해 꼭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잊지 않을 꺼지?”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숙영, 숙영’하고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지막하게 두어 번 읍 조려 보았다. 물론 옆에서도 못 들었을 것이다.
이름 또한 얼굴과 함께 친근감이 간다.
“나를 이상한 애 취급은 하지 말아 줘. 뒤에서 남학생 이름이나 궁금해하는 사람으로 말야”
“.....”
“남학생과 이런 시간 동수가 처음이야.”
“동수는 서울에서 예쁜 여학생 친구들도 많겠지...”
“친구들은 이곳도 많아 꼭 도시라고 좋은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시골이라 없는 것도 아닐 텐데 친구를 도시와 시골로 구분 짓지 않았으면 해”하고 내가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놀랐다. 여자애도 예상밖의 말에 순간 무안 당황했나 보다. 잠시 공기가 무거웠다. 아직까지 나는 사과하는 법도 상대방을 살피며 말하는 법도 잘 모른다. 그냥 속에서 내키는 대로 말하니 당황 할수 밖에 언뜻 듣기엔 상대방에게 퉁명스럽고 짜증스럽게 들릴 수도 아니면 상대방의 말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 생각은 너 생각하고 다르거든 하며, 반박하는 의도로 들릴 수도 있겠다. 나의 이 한마디가 모든 시간을 그만 어색하게 하고 말았다.
이상하게 내 가슴의 두근거림이 처음 설레임으로 뛰던 것과는 확실히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뛰엄뛰엄 이어오던 대화도 끊기고, 한동안 서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을 때 친구들의 음성이 조용히 들린다. 그리고 얼마후 나를 불렀다. 한번 부른 후 대답이 없자 조금더 큰 목소리로 또 한 번 나를 부른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이번엔 그의 친구들이 그녀를 부른다.
분명 귀에 들렸음에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여학생 특유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린다. 숙영아 ~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않았다. 대신 어찌할 줄 몰라 내심 당황하는 나의 심호흡만이 되레 크게 들릴 뿐이다. 한숨 섞인 심호흡을 연속 세 번이나 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친구들이 불러서 이만 가 봐야 해.
다음에 또 보자” 하며, 대뜸 편지를 건네어 준다. 물론 직접 전달하므로 우표가 붙어 있지는 않았다.
만나기 전 집에서 미리 준비해서 헤어지기 전에 주려 했나 보다.
“.......”
나도 반가웠어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말하지 못했다.
일어남과 동시에 친구 아무개를 부르며, 위치를 알린다.
“야아, 즐거운 시간 보냈냐?”
“.......”
“동수야! 어두운 밤길인데 우리가 동네까지 배웅을 해주고 오자.”
“너희 둘이 좀 다녀와 얼떨결에 말씀도 제대로 못 하고 나왔어. 미안해.”
“그래 알았어. 부모님이 많이 기다리시겠다.”
달빛 외에 빛이라고는 없는데도 나에게로 고정되다시피 한 그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이 부담되 애써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나를 보고는 옅은 미소와 함께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이내 친구들과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나도 살짝 턱을 앞으로 당기는 정도로 화답했다.
대나무 숲사이로 난 오솔길은 평소에도 깜깜함이 두렵다 못해 공포스럽게 느껴지지만 그녀가 걸어간 그 길은 이상하게도 정답게 느껴졌다.
모습들은 보이지 않은데 간헐적으로 들리는 여자들의 목소리보다 오히려 여자친구가 있어 들뜬 내 친구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물론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멀리서 나를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왔는데 배웅하지 못한 미안함 때문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들의 모습과 목소리마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내내 그녀의 얼굴과 그 목소리‘남학생과 이렇게 길게 얘기하는 건 동수가 처음이야’그 청아한 목소리가 잠시도 떠나지 않는다. 마치 녹음기 테잎을 틀어놓은 것처럼 계속 귓전을 울린다. 그녀가 했던 말을 되감기라도 하듯 그 잔상이 계속해서 아른 거렸다.
그날 밤 처음으로 여자를 생각하며, 잠이 든 것 같다.
옆에 어머니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떠나지 않는다.
괜히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며칠 전 우연히 산속에서 나를 만난 것과 첫 느낌들을 제법 자세하게 서술했다. 어제 낮에 본 것도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
안녕!!
이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편지를 쓰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많이 놀라셨지요.
처음 우연히 바위위 전나무 그늘아래서 책을
읽는 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표현은 잘 못하지만, 이 밤 누구를 생각하며, 적어도
한 사람을 당신이 설레게 하네요.
만약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우린 만남을 가졌겠지요.
서로 좋은 느낌의 만남이었을까? 아니면 서로 어색한 만
남으로 헤어졌을까?
오히려 그냥 나의 마음속에 담아 혼자 간직하는 편이 좋
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설치네요.
이 밤이 지나가면 알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의 바램은 정말 좋은 사람으로 아니 좋은 기억
으로 남기를 희망해요. 이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면 당신
은 떠나겠지요.
이렇게 누구를 생각하고 그 생각을 편지로 옮겨보기는
처음입니다.
거리와 시간은 별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사람의 마음이 문제라면 문제일 뿐! 다른 건 문제
가 될 수도 없겠지요
당신을 떠올리며,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이시간 당신의
음성도 사물에 대한 당신의 생각도 당신이 좋은 사람인
지 아니면... 왠지 깊은 심성을 가진 분으로 느껴집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무작정 그렇게 믿고 싶어요
두서없이 쓴 편지 무례히 생각지 마시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
편안한 밤 되시구요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며,,, - 숙영 -
또박또박하고 간결한 글씨체가 그의 성품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만 같았다. 진심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어머니 아닌 사람을 이렇게 깊이 생각하고 그의 말들을 되새겨 본적이 있었던가?
숙영이 건네준 편지를 어머니 몰래 보고 또 보고 다음 날 오전까지 삼십번은 더 읽었다.
편지 말미에 내가 왠지 깊은 심성을 가졌을 것으로 느낌 아닌 느낌을 받았다는데,,,
내 생각엔 오히려 그녀가 나와는 비교도 안되는 깊이를 가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나에 대한 기대감으로 밤길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왔었구나, 그것도 약속도 없는 친구들을 굳이 부탁하면서까지, 그 마음이 어렴풋이 헤아려졌다.
어색하게 다음을 기약하지 못하고 돌려보낸 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다음엔 마음도 표현하고 보다 많은 얘기를 들어줘야겠다.
어제 밤 꿈속에 혹시 나타나지는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아버지의 걱정 어린 잔소리가 멈추지를 않는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고, 평생을 농사를 업으로 삼으셨기에 당신의 자녀들 만큼은 지게지는 고통에서는 벗어나게 하고픔을 오래전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허승득이 얘들 셋다 공부를 잘 한다더라. 장덕팔이네 얘들도 얼마나 똑똑한지 아느냐 똑똑하기가 말도 못 한다. 또 최만수네 얘들은 나뭇짐이 얼마나 큰지 벌써 장골짐을 지고 다닌다. 너는 공부도 반거치, 일도 반거치 뭘 해서 먹고살래” 당신의 자녀들을 훈계하고 다그칠 때 이 말은 빠지는 법이 없다. ‘일도 반거치 공부도 반거치 뭘 해서 먹고 살래’제일 듣기 싫은 말이었다. 오늘도 예외없이 아버지의 이 말은 내 귓전을 따라 뇌리속에 반발심으로 각인된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대로만 비교를 하시고는 아직도 성이 풀리는지 않는지 아버지의 얼굴은 몹시 상기된 채 붉어 있고, 눈도 충혈되어 아주 크게 확장되 있었다. 손에 작대기라도 들려있으면 사정없이 휘두를 기세시다. 아버지의 답답한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다른 집안의 사람들과 비교를 하면서 야단치시는 것에 정말 속이 상했다. 아직 다 성장해서 사회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인생 결과에 대한 성적표를 받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답답해하시고 다그치기만 하신다.
옆에 있다가는 잔소리가 그치지 않을 것 같아서 아버지를 피해 잠시 밖으로 나왔다. 책도 잘 읽혀지지가 않는다. 답답하다.
아버지의 꾸지람이 약이되고 용기가되면 좋은데 오히려 속만 휘저어 안정 되지가 못했다. 왜일까? 세상에서 제일 나를 위해주실 분은 그래도 부모님일 텐데 어째서 이렇게 속상하고 아버지가 불편할까? 친구들도 나와 같을까?
그냥 걸었다.
며칠 전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사라진 어두운 오솔길을 걸었다. 아버지의 잔소리로 인해 식상했던, 마음들이 그녀를 생각하므로 조금은 차분해졌다.
이 길을 따라 걸어갈 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음을 기약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바람에 막연한 기다림의 시간들을 예상하지는 않았을까?
발길이 나도 모르게 얼마 전 그 바위앞에 와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앉았던 자리가 아닌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보았다.
이상하리 만치 푹신하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가슴이 뛰었다. 마치 그녀가 옆에 있기라도 하는 양 의도치 않게 내 심장이 그 날밤 이 자리를 먼저 알아보고는 두근 그림으로 반응을 한다. 놀라웠다.
숨길 수 없었다. 말은 못해도 속에서 요동치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강아지풀을 입에 물고는 팔베개를 하고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새 두 마리가 장난치듯 하나가 앞서면 또 하나가 그 앞을 가로 막고 또 앞지르기를 하며 이번엔 못 쫓아오게 아예 하늘 높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다가 이내 땅으로 곤두박질한다. 뒤 따르던 또 하나도 그대로 따라 비행한다. 마치 공중에서 술래잡이를 하는 것 같이 여유로운 비행을 하며 북쪽으로 날아간다.
외롭고 우울한 나에게 ‘뭐해 왜 그러고 있어, 용기를 내봐’하는 것만 같다.
‘그래 아버지의 잔소리가 싫어서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들어가서 부모님을 안심은 시켜드려야지.’ 안 그러면 어머니께서 몹시 힘들어 하실꺼란 생각이 들었다.
집에 들어서자 언제나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어머니께서 안으며, 더욱 반기신다. 나는 이런 어머니가 너무나 좋다. 아버지는 다른 분에 비해 한번 두번 부러워 한적은 있지만 어머니는 세상 그 어떤 분을 두고도 안 부러워할 것 같다. 그 만큼 어머니가 정말 좋았다. 언젠가 좀더 성장하면 지금은 듣기 싫은 아버지의 잔소리도 책망도 온전히 이해할 때가 오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To : 숙영에게
보내주신 글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인데 마치 깊은 뭔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주시니 감사하긴 한데 무척 부담이 되네요.
나 때문에 그날 대화가 원만히 끝맺지 못한 것 사과드립니다.
나 또한 숙영이와 같이 이런 만남이 처음이라 상대방의 의중이나 마음을 헤아리는 부분이 많이 미흡합니다.
마음은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닌데,,,,
오늘도 아버지께 한바탕 야단을 맞을 정도로 여러 가지가
온전치 못한 아직 어린 학생입니다.
편안하게 대해주세요
나 또한 숙영이의 고운 목소리와 순수함이
마음에 남아있어요.
낮에 속상한 마음으로 우리가 만났던 곳에 가봤어요.
끝까지 미소로 화답해 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만약 이 편지를 읽 는 다면 그땐 우리의 두 번째 만남 이후겠지요.
- 동수 -
2
정확히 일주일 후 처음 만났던 산속 바위에서 숙영과 단둘이 만났다. 그녀는 소 꼴을 먹이러 온 건 아니고, 순전히 나를 만나기 위함이었고,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소꼴을 먹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소먹이는 장소는 앞전보다 거리가 상당하여 오히려 내가 사는 동네에서 더 가까웠다. 그러니까 지금 만나는 장소하고는 약간의 거리가 있는 편이다. 처음 그날 저녁보다는 한층 여유 있어 보이고, 나 또한 그녀의 마음을 편지를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으므로 긴장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옅은 체크무늬 바지에 단추 세개 달린 흰색 티 상의와 청색 운동화를 신은 단아한 모습이 티 없이 맑고 순수해 보였다.
“늦어서 미안해 오래 기다렸어?”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아니, 조금 전에 도착했어.”
“여긴 사람들에게 잘 보이니까 자리를 저쪽으로 옮길까?”
“응, 그게 좋겠다.”
나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이곳 지리와 형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차도 다닐 수 없는 좁은 농노길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녀가 살고있는 윗마을과 우리동네 사람들이 전부인데 그것이 두려웠다. 시골이라 남녀 그것도 학생들이 단둘이 있는 것은 용납이 안 될 뿐더러 괴상한 소문이 전염병처럼 금방 마을 전체로 퍼져 한동안 당사자와 그 가족들은 진정될 때까지 홍역을 치룬다.
“여기가 아까보다 훨씬 괜찮지?”
“응........”
나름 약간의 그늘과 혹 누군가의 시선을 전혀 의식할 필요가 없어서 안심은 되는데 정작 무슨 말부터 전개 해야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동안 서로 말없이 어색한 가운데 애매히 나뭇잎과 풀잎들만 고초를 겪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내가 먼저 말을 건넨다.
“그 날 잘 올라갔어? 바래다 주지못해 미안해”
“조금 무섭긴 했는데 그래도 친구들이 함께해서 괜찮았어.”
“아 다행이다.”그리고
“편지 잘 읽었어” 하고 내가 말했다.
“편지로 인해 불쾌하지는 않았어?”
그녀가 말했다.
“아니 괜찮아! 조금은 부담되긴 했어.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부담 갖지마 부담줄려고 한게 아닌데. 그냥 보고 느낀점을 얘기했을 뿐인데...”
“어느 누구에게 그것도 상대가 내게 왠지 조금의 기대라도 갖고, 있다면 부담을 안 가질 수는 없겠지”
그녀가 부담을 느낄 것 같아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별것도 아닌데 마치 굉장한 것처럼 부풀려 말함으로 상대방의 관심을 끌기 위함이었다.
그녀가 내게 묻는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다 읽었어?”
“응, 다 읽었어”
“어떤 부분이 제일 마음에 와 닿았어?”
책은 다 읽었지만, 막상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머뭇하다 목소리도 아니고 콧바람을 두 번 흠 흠하며, 떠올리며,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의 첫 번째 작품으로 아마 24세쯤으로 기억해 실제로 본인이 친구의 약혼녀를 흠모하게 되면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점점 깊이 빠져들면서 겪는 내면의 고통을 옮겨 놓은 것으로 거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보면 틀림없어.”
“그럼 괴테의 경험이라고 봐도 되겠네.”
“맞아 괴테는 굉장히 똑똑한 사람으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그 외 문학과 미술 등에도 큰 소질이 있었어. 실제로 법관시보로 일하면서 샤를롯테 부프와 사랑에 빠졌는데 아마도 이때의 일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추론하는 것 같아”
“아 그렇구나”
그녀는 작품의 줄거리를 알고부터는 내면도 궁금한지 다음 질문을 이어간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도 소개해줘”
나는 힐끔 그녀의 얼굴을 아니 옆모습을 바라봤다.
참 예뻤다. 순간 나도 사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눈이 마주쳤다.
피하고 싶지 않았다. 순간 그녀를 바라보는 내 눈빛이 보통 때와는 사뭇 달랐다. 이런 눈빛은 아마 처음 같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가슴 가득 사랑을 담았고, 아주 강렬하게 눈도 깜밖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물론 그녀도 내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말보다도 침묵이 훨씬 깊이가 느껴졌다.
침묵이 백 마디 말보다 부인할 수 없는 서로의 내면의 전달이 훨씬 명확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베르테르의 상심으로 말미암는 죽음이 아닐까 생각해”
“.........”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내 말에 동감한다는 뜻일까?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해 받지 못할 것이라는데 사랑하는 로테에게서 조차 인간의 감정이란 무엇인지, 로테의 약혼자와 논쟁 끝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아마 베르테르의 답답하고 사무치는 마음을 세상에서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음을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하는 그 고통이 결국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하고 나름 유추해 봤어.” 순간 그녀도 심각해진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다 아는 사람처럼 너무 분외의 말을 하는 것 같아 순간 머쓱해진다.
“편지 기억나 왠지 깊이가 느껴진다고, 잘 들었어.” 그녀가 웃으면서 말한다.
나도 모르게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잠시 후 뜻밖에 먹구름이 몰려온다. 아무래도 구름의 비중이 높아 보여 곧 소나기가 예상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피할 곳이 없었다. 잠시 큰 나무 아래로 서둘러 몸을 옮겼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진다. 비 온다는 예보는 전혀 듣지 못하여서 우산이나 비옷도 준비하지 못했다. 참 난감했다. 저 멀리 구름 속에서 번쩍하더니 잠시 후 꽝 꽝 천둥소리가 요란하다. 번개치는 데 큰 나무아래 있는 것은 비는 조금 피할 수 있으나 번개를 맞을 수 있어 몹시 위험하다.
“여기있는 것은 몹시 위험서 안되겠어. 저쪽으로 옮겨야 될 것 같아”
“어느 쪽 비를 피할 수 있을까?”
“응, 바위속이라 적어도 비는 맞지 않을 거야” 내가 말했다.
“그럼 그쪽으로 뛰어가자 잘 따라와”
“그래 알았어.”
오래 전부터 유일하게 한곳이 널찍하고 비교적 평평한 바위아래 네 다섯명 정도는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옛날 산짐승들의 은신처였는지 아니면 오래전 사람들이 소먹이를 하면서 약간 다듬어 놓은 건지 알 수는 없었다. 내가 앞서 달려갔다. 그녀는 비로 인해 뛰는 게 힘들어 보인다. 다시 돌아와 그녀의 손을 잡고 달렸다. 내가 힘껏 손을 잡자 그녀도 힘껏 내 손을 잡았다. 순간 몰골은 말이 아닌데 기분은 좋았다. 순간 비가 너무 좋았다. 온몸이 이미 흠벅 젖은 상태로 겨우 도착했다. 역시 비 한 방울 들어와 있지 않았다.
가운데 자연적인 돌이 있어서 그런대로 앉을만했다.
머리는 비누칠하지 않고 물만 적신 것처럼 몹시 젖어있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눈썹까지 젖은 그녀의 얼굴은 이상하리만큼 창백해 있고, 입술은 바르르 떨고 있었다. 핏기 또한 전혀 없어 보였다. 순간 아무것도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미안했다. “괜찮아?” “응 ...”그녀의 대답은 힘이 없었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비를 흠벅맞은 상태여서 따뜻한 온기가 필요했다. 그래도 바람과 비가 미치지 못하므로 조금씩 체온을 상승하는 수밖에 별 다른 도리가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렇게 세찬 빗줄기는 점차 가늘어지고 날이 조금은 환해지는 것 같다. 그래도 비는 계속 내렸다.
다행히 옷은 체온 때문인지 조금은 말랐고, 젖은 머리도 더 이상 물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와 같이 밖에 비가 내리는 광경을 꼼짝 않고 바라보았다. “저 내리는 비가 조금 전 우리를 흠벅 적셨던 그 비가 맞아?” 하고 내가 말했다.
“왜 아닌 것 같아?”
“응, 아닌 것 같아서 바라보고 있을 땐 좋은데 아무래도 그 비가 아닌 것 같아” 지난번처럼 그녀와 가까이 앉았다. 그녀에게서 향기가 느껴졌다. 아무라도 비를 맞고 나면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날 리가 없는데 적어도 그녀의 향기는 달랐다. 청초한 풀잎 향기처럼 가까이서 계속 맡고 싶은 총동을 느꼈다. 그녀의 가슴은 상의가 물기로 인해 몸에 달라 붙어서인지 그 형태가 여실히 드러나 보였다. 앞으로 방긋 나온 두 봉울은 크지도 그렇다고 아주 작지도 않게 망울져 있었다. 양어깨 가운데 브래지어끈이 걸려있는 게 겉옷으로 인해 희미하지만,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젖은 머리칼이 어느 정도 마른 다음 옆의 머리들을 양쪽 귀 뒤로 넘길 때 참 아름다웠다. 그날 밤 어둠 가운데 무심코 봤던 모습 하고는 또 달랐다. 그녀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잠깐 정신을 놓았다. 순간 사랑하고 싶은 충동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 손은 가냘픈 그녀의 허리와 가슴으로 향할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또다시 가슴이 소리 내어 그날 저녁같이 뛰기 시작한다. 다시 한번 내 심장이 아주아주 강하게 고동쳤다. 지금까지 또래의 여학생을 한 번도 생각하거나 사랑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그녀가 처음이었다.
비는 점점 줄어들더니 다시금 해가 쨍하게 내리쬔다. 잠시 밖으로 나왔다. 계곡은 멀리서 봐도 흙탕물을 하고 있으며, 그 기세가 대단했다. 비올 때 산속 계곡물은 급류에다 순식간에 불어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나 아까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
“언제?”
“비 내리는 광경을 같이 보고 있을 때”
“글쎄 무슨 생각 했을까? 잘 모르겠는데”
“음.......”
내가 말을 꺼내놓고 아무 말이 없자 그녀가 재차 묻는다.
“무슨 생각했는데?”
“궁금해?”
“응...”
“비가 내리는 김에 쉬지 않고 삼일은 계속 왔으면, 했어” 그녀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마치 비를 그렇게 맞고도 지긋지긋하지 않냐는 눈치다. 온몸이 젖었으니 그럴 수밖에.
“비가 그렇게 좋아? 왜 하필 삼일씩이나?”
“비가 오면 집에 못 가고 꼼짝없이 둘이 같이 있잖아!
그래서 삼일 정도 만, 비가 더 오길 바랬어.”
나의 변명을 듣고는 그녀가 활짝 소리내어 웃는다.
부끄러워서인지 얼굴이 빨개진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서 참 좋았다.
은밀한 밀실 같은 곳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와 단둘이 있어 보았다.
조금 전 비에 젖은 모습은 간데없고 거의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젖은 신발을 말리기 위해 벗은 그녀의 발을 우연히 보았다. 보통 정도 될까? 하이힐이나 뽀쪽한 구두로 인한 발의 모양이 변형되거나 하지 않고 발 어디에도 굳은살 하나 없이 가지런하여 하얀데다 약간 푸른색의 혈관들이 눈에 띄게 잘 들어왔다. 문득 호기심이 발동하여 몰래 신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바닥에 235미리 라고 적혀있었다. 순간 어머니의 발하고는 너무나 비교가 되었다. 사시사철 굳은살에 손톱 깍기도 들어가지 않아 깍을 수 없는 뭉툭한 엄지발톱. 평생 시골에서만 살면서 메니큐어 한번 발라 보지 않은 손인데 발은 오죽하랴. 갑자기 어머니의 고운 모양도 부드러움도 예쁠 것도 없는 손과 발이 떠올랐다. 외출할 때나 겨우 흰 고무신을 신으시고 평상시 검정 고무신만 신으시는 어머니의 발은 굳은살과 함께 심하게 발가락이 안으로 휘어져 있었다. 어머니도 이 나이 때는 그녀처럼 매끈하고 고운 발을 하고 있었겠지. 순간 어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하얀 발을 보고 ‘참 예쁘다’ 할 수도 있었지만, 더 이상 내색을 하고 싶지 않았다.
“동수는 무슨 노래 좋아해? 좋아하는 가수나 배우는 누구데?” 뜸 금 없이, 그녀가 묻는다. 보통 이 나이 때는 그의 대다수가 연예인 얘기 노래 얘기 등으로 화제를 삼고 온통 스타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많은 때이다. 남자들은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나도 좋아하는 가수도 있고 영화배우도 있어. 노래는 팝송인데 Here, There And Everywhere 하고 In My Life 그리고 지금 이곳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MockinBird Hill 도 좋아해”
“처음 들어보는데 누가 불렀어?”
“앞의 두곡은 비틀즈가 또 한곡은 패티 페이지가 불렀어.”
“글쎄, 잘은 모르겠어.”
“Yesterday도 그 사람들이 불렀는데...”
“아 그렇구나”잘 아는 부분이라 신나서 얘기했지만, 혹시나 ‘그럼 한번 불러봐 듣고 싶어’ 하고 부탁할까 봐 걱정했다. 사실 나는 노래를 듣는 것은 좋아하는데 부를 줄은 모른다. 전혀 음정과 박자 심지어 목소리까지 떨려서 여러 사람 앞은 고사하고 혼자서도 부끄러워서 못 할 정도이다. “그럼 영화배우는 누구 좋아하는데?” “남자는 그레고리 펙, 여자는 비비안리”
“비비안리는 남학생들이 다 좋아하는 것 같아”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리 반 남자애들이 그 여자 사진과 좋아한다는 얘기들을 많이 해, 동수도 좋아 하는 구나!”
“그럼 나도 남잔데, 중등 때 애수라는 영화에서 그녀를 처음 본 후 좋아하게 되었어”하고
서로 마주 보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
“나도 애수 영화는 봤어. 오래전 흑백 영화로 기억해”
“맞아 원제는 워털루 브릿지이고 흑백으로 제작되었어.”
“그렇구나 ...”
우리는 한참을 영화 애수에 대해서 서로의 견해를 애기했다. 서로 뜨겁게 사랑했지만, 전쟁으로 말미암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어 참 슬픈 영화이다. 올드랭 사인을 OST로 한 주제곡은 들을 때마다 슬픔이 묻어난다. 비비안 리의 긴 머리칼과 로버트 테일러의 품격있는 제복은 멋지게 어울렸다. 비비안리가 발레리나로 백조의 호수 공연을 하고 있을 때 객석에서 비비안을 향한 로이의 애절한 눈빛을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내가 말했다.
그녀 또한 중년의 남자 주인공이 2차대전 출정을 앞두고 잠시 다리위에서 품속의 마스코트를 꺼내보고는 회상에 잠기는 장면부터 공습을 피해 이동 중 우연한 만남과 여주인공의 자살로 마감하는 끝부분까지 모든 장면들이 인상 깊었다고 한다. 다만 남자가 보는 입장차와 여자가 보는 시각적인 면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젊은 날 이른 나이에 사랑을 하면 반드시 헤어지는 걸까?” 나를 올려다보며 그녀가 말했다.
순간 영화에서의 사연처럼 젊을 때 너무 이른 만남은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간에 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 속에서도 또는 드라마에서도 한때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 사랑이 지속되지 못하고 젊음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헤어지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인생 경험이 전무 한 어릴 때 만남이 끝까지 가는 걸 주변에서는 잘 보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마치 첫사랑은 결실치 못하고 헤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
“.......”
“아무래도 십대를 거쳐 이십대가 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언제까지나 순수할 것만 같았던 서로의 마음들이 조금씩 퇴색되어가는 건 아닐까?”하고 내가 말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서로 알고 있는 영화로 인해 마치 우리의 만남도 얼마 못되어 끝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서로에게 임했나 보다.
얼른 그녀가 아까 노래 이야기로 화제를 돌린다. 아무래도 분위기전환엔 노래만 한 게 또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예스터데이를 한 번 부를 것을 권했다.
정말 마음 같아선 그녀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서 들려주고 싶었지만 나는 타고나기를 노래를 못한다.
나의 어색한 미소와 함께 분위기가 또 이상해진다.
아주 작게 Yesterday, all my troubles seemed so far away. Now it looks as though they’re here to stay Oh, I believe in yesterday. suddenly~
하고 채 두소절도 못되어 바로 허밍으로 이어진다. 어떻게 어떻게 하여 노래 마지막은 음 음 음 음 음 음~~~
마음만은 비틀즈 처럼 뜨겁게 들려주고 싶었다.
이 순간만큼은 노래 잘하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아무래도 노래로 더 이상 분위기 반전을 꾀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여기서 한두 곡이 더 이어지다가는 듣는 사람도, 부르는 사람도 서로 불편만 가중될 것 같아서 이번엔 내가 먼저 그녀에 대해 궁금한 부분으로 화제를 돌렸다.
“숙영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얼떨결에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지만, 곧 후회가 되었다.
“뭔데 얘기해봐”
잠시 주저하다가 내가 물었다.
“부모님은 한 번도 고향을 떠나지 않으셨어?”
“아니, 내 어릴 때 도시에서 할아버지 고향으로 들어오셨어.”
“할아버지 고향이면 지금 이곳?”
“응, 맞아”
“아 그랬었구나.”
“정확히 몇 살 땐지는 오래되어서 기억나지 않아”
뜻밖이었다. 대부분 농사일이 너무 힘들고 일정한 수입이 여의치 못해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가기 마련인데,,,
“그런데, 왜 시골로 들어오시게 되었어?”
“........”
갑자기 그녀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다. 너무 어릴 때라 이유를 몰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말하기 곤란한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그녀의 침묵이 이어지면서 나는 몹시 당황이 되었다. 침묵이 너무 긴 것 같아 내가 먼저 말을 건넨다.
“내가 곤란한 물음을 한 것 같아 미안해”
“.......”
고개를 숙인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무거웠다.
잠시 후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묘한 안타까움을 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오히려 내가 그녀의 눈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가 차분히 입을 연다. “언젠가 동수에게 기회가 되면 말하려고 했는데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 나의 부모님은 오래도록 도시 생활을 하셨고, 그곳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또 공부도 하셨어. 그리고 장성한 후엔 두 분은 같은 회사에서 만났어. 아빠는 아주 성실하게 일하셨고, 엄마는 그런 아빠의 성실함에 반해 결혼하시고 신혼살림도 도시에서 하셨어. 그렇게 두 해가 바뀌고 몇 달 후 첫 아이가 태어났는데, 아들이었어. 그때가 가장 두 분 인생에서 행복하지 않았나, 생각해. 그렇지만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 행복도 잠시, 아이가 다섯 살 무렵 이유도 원인도 모른 채 아프기 시작했어. 부모님은 오로지 아이를 낫게하기 위해서 전국 큰 병원과 유명한 의사들에게 매달려 봤지만, 그런 부모의 애달픈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용이 없었어.” 그녀는 어느 한 곳으로만 시선을 고정하고는 조금의 흔들림 없이 잔잔하게 말을 이어 나간다. 그녀의 진지함에 나는 눈만 깜빡 일뿐 그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렇게 단란하던 가정은 하루아침에 고통과 괴로움으로 추스르기 힘들었고, 평상시 술을 전혀 못 드시던 아빠는 술을 드시기 시작했어. 그리고 그 횟수가 점점 늘어나 급기야 병원에 입원할 정도였어. 그렇게 하기를 몇 년 주위 분들의 따뜻한 격려와 위로 덕분에 엄마 아빠는 슬픔과 괴로움에서 점차 벗어나 예전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도 하셨어. 그리고 정확히 5년이 지난 후 엄마는 두 번째 아이를 출산하셨는데 이번에도 사내아이였어. 첫째 아이와 많이 닮아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 묻어둔 아이의 이름이 갓난이를 보면서 얼떨결에 나오기도 하시고, 그럴 때면 서로 끌어안고, 흐느껴 울기도 하셨어. 아이는 정상적으로 잘 성장해주었고, 아빠는 그동안 다니든 회사를 그만두고 같은 업종의 일로 새로이 사업을 시작하셨어. 평생 해온 일이라 거래처도 고객사도 아빠 회사에서 생산한 제품을 최고로 알아주셨어. 그렇게 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해 갔어. 그리고 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내가 태어나고, 어느 정도 부모님의 마음의 고통이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며, 조금은 아물어 가는가 싶었는데. 그런데,,,”
하고, 말을 멈춘 후 그녀가 깊은 한숨을 연거푸 두 번 내 쉬며, 또다시 침묵한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어떤 물음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어떤 사업을 하셨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 물음조차도 할 수 없었다. 고개 숙인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애써 가슴 아픈 일들을 상기하고, 싶지 않은데, 하며 많이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 하고 멈춘 그녀의 다음 말이 몹시 궁금했지만, 나는 어떤 말로도 그녀의 가슴속에 있는 무게를 덜어 줄 자신이 없었다. “힘들면 다음 말은 지금 하지 않아도 돼” 하고, 나지막하게 내가 말했다. 그녀는 약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 괜찮아”
잠시 후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본 후 사방을 크게 한번 둘러 보고는 힘겹게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예비 소집일을 얼마 앞두고, 갑자기 가슴 부분의 이상을 호소하고는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결국 잘 못 되었어.” 말하는 동안 눈물이 두 뺨 가득 흘러내리고, 더 이상 다음 말을 잊지 못했다. 그녀에게서 이렇게 슬픈 가슴 아픈 사연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나도 슬펐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 상황에서 사업을 계속하기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무렵 그녀의 기억속에 부모의 고통이 새겨지기 전 부모는 지난 기억은 가슴에 묻고 어린 딸아이를 위해 자기 부친의 고향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그녀의 힘없는 몸은 내 팔에 의지한 채 기대여 있지만, 그녀의 숨결도 내 심장의 두근거림도 더 이상은 없었다. 그렇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온 산 가득 쉴새 없이 울어대는 매미의 울음소리와 가까이서 들리는 뻐꾸기 소리가 그나마 무거운 마음을 조금은 낮춰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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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기 전 비에 젖은 우표 없는 나의 손편지를 그녀에게 전해 주었다.
“오늘은 잊지 못할 경험들을 많이 한 것 같아” 그녀가 말했다.
“아마 물에 빠진 생쥐 꼴은 못 잊을걸”
비로 인해 힘든 하루였지만, 그녀와 같이 있으므로 오히려 힘든지도 모르고 시간이 빠르게만 지나갔다. 아쉬웠다. 헤어질 시간이다. 바래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그래 조심히 올라가 배웅해주지 못해 미안해”
“괜찮아 다음엔 꼭 바래다 줘”
“알았어” 그녀와 약속 아닌 약속을 했다.
그녀는 힘들지만 그래도 맑은 미소와 함께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도 짧게 고개를 끄덕하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지금까지 누구와 헤어지면서 이렇게 아쉬웠던 적이 또 있던가? 이런 기분은 아마 태어나서 처음 갔다.
이렇게 우리의 두 번째 만남은 다음을 기약하지 못하고, 아쉬운 가운데 헤어졌다.
저녁을 부모님과 함께하는 동안 아버지께서는 한 말씀도 없으셨다. 어머니께서도 많이 먹으라고만 하시고 나를 향해 늘 안타까운 눈빛이다. 어머니는 식사하실 때 늘 오른쪽 다리를 구부려 가슴에 닫게하고 오른팔을 구부린 무릎에 의지한 채 식사를 하신다. 바로 옆에서 식사하던 나는 순간 어머니의 발등 아니 발을 보았다. 낮에 보았던 숙영의 발이 생각이 났다. 같은 여자의 발인데 차이가 너무 컸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물론 두 분은 눈치채지 못했다.
저녁을 물린 후 그동안 말씀이 없으셨던 아버지께서 조용히 입을 떼신다. “내일 서울로 올라가도록 해라.”
“네?”
“촌에 있는 게 네겐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올라가거라.” 순간 아버지의 얼굴은 너무나 굳어있었고, 심각했다. 평상시 못 보던 얼굴을 하고 계셨다. 더 머무르다 올라가겠습니다.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근엄한 표정 앞에서는 누구라도 예,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부엌에서 부자지간 대화를 들으셨는지 어머니께서는
“온지 몇일 됐다고 벌써 애를 보내요. 방학이 끝나면 어짜피 올라갈 건데 좀 더 있게 하세요”
어머니의 말을 들으셨는지 아니면 못 들으셨는지 아버지의 얼굴은 미간 하나 움직임 없이 꿈쩍도 안 하셨다. 당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신 것만 같았다. “왜 대답이 없느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예, 아버지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내가 대답한 후 어머니께서는 한 번 두 번 더 매달려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담배를 피워 무시고는 뒷간에 들린 후 사랑채로 향하신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위로해드리고, 잠시 바람도 쐴 겸 해서 밖으로 나왔다. 친구를 잠깐 불러낸 후 내일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고 말하고, 서둘러 짐 정리를 마쳤다. 잠이 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코고는 소리가 옆방에서 나지막하게 들려온다. 숙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그녀가 너무나 생각이 났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옆에서 그의 위로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서울로 올라가야만 된다.
어쩌면 우리의 만남도 오늘 낮에 본 것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선 한걸음에 달려가 사랑을 고백하고 다음을 약속하고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마음뿐!
어느새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 소리가 꼬끼오하고 들려왔다. 날이 밝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닭울기 전에 먼저 일어나시고 아버지는 여름의 더위를 피해 아직 미명에 꽹이와 낫 두 자루와 톱 정도를 챙겨 지게에 담고는 들로 나가셨다. 어머니는 내가 서울로 올라갈 것을 생각하니 많이 서운하신지 표정이 몹시 어두웠다.
버스는 하루 세 번 운행하는데, 첫차는 07:20분으로 서둘러야만 탈 수 있다. 동구 밖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 나오신 어머니를 뒤로하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진주에서 고속버스를 갈아탄 후 오후 늦게 집에 도착했다.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다음날 바로 올라왔지만, 갑자기 숙영과의 거리가 천 리가 넘게 떨어졌을 때 그녀의 말대로 정말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 걸까?
그녀와의 짧은 만남이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녀가 생각 날 때마다 편지를 보고 또 보고하여 낡은 헝겊처럼 접히는 부분의 글씨는 거의 지워졌다. 지금 그녀는 내가 서울에 도착 한지도 모르고 있다. 달리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이렇게 누구를 밤새도록 떠올리며, 그립고 따스한 기분을 단 한 번이라도 느껴보았던가? 그리고 앞으로도 그녀가 아닌 누구에게 동일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으리란 생각이 든다. 지금 같아선 없을 것 같다.
공부도 잘되지 않았다. 방학도 끝나고, 개학과 동시에 입시를 준비했다. 마음이 초급 했다. 하루하루가 전쟁과도 같았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몇 달이 훌쩍 가버렸다. 그사이 계절은 두 번 바뀌었다. 대입 시험도 끝나고, 조용히 결과를 기다릴 시간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겨우 진학했다. 좀 더 열심히 하지 못한 게 후회가 되었다. 그렇게 열아홉의 겨울은 후회와 갈등과 아쉬움을 뒤로한 채 이십대로 넘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결과야 어떻든 모든 프레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진학을 확정 지은 다음 잠깐 틈을 내어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뵙기 위해 지난여름이 후 다시 내려왔다. 어머니의 모습은 한해 한해 점점 기운이 쇠해 보였다. 얼굴의 주름은 전보다 더욱 깊어지고, 여기저기 고생의 흔적들로 인해 함께하는 내내 마음이 너무 아팠다.
가슴속 소중히 간직하는 숙영에 대해서 그날 마지막 만남 이후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채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많이 궁금했다. 그녀는 어떻게 됐을까. 그리고 어디에 있을까? 안타깝게도 소식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다. 지난여름 서울로 올라가기 전 날밤 온통 그녀의 생각으로 몸부림쳤었다. 청아한 그 목소리, 따스한 그녀의 미소, 그녀의 눈물, 고왔던 그녀의 향기가 어느새 가슴 가득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채운다. 함께 걷던 길, 함께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밤사이 소리 없이 눈이 내렸다. 발걸음을 동네로 옮겨보았다. 온 동네가 눈이 가득하다. 꼬마들이 눈싸움을 하며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중 한 녀석이 “아! 동수형이다. 형 우리 눈싸움하고 같이 놀자” 어릴 때 친구들과 함께 편을 나누어 눈싸움도 하고 동그랗게 눈사람도 만들고 눈,코,입은 언제나 솔방울이 대신했다. “그래 같이 놀자” “형은 이쪽 편이 명수가 적으니까 이쪽 편해” “그래 알았어 자 시작한다.” 추운 줄도 모르고 한바탕 신나게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한 참 눈싸움을 하다 보니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편은 없어지고, 이 녀석들이 모두 나를 에워싸 공격하고 있었다. 보기 좋게 아이들에게 눈 세례를 받았다. 산허리를 돌아 대나무숲 사이 지난여름 그녀가 걸어갔던 오솔길에도 눈이 쌓였다. 좀 더 걸어 보았다. 녹음이 우거져 푸르던 산들은 눈으로 덮였고,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큰 소나무 봉우리 위에 눈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다. 왠지 그녀가 그 장소에서 꼭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어떤 걷잡을 수 없는 힘이 나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발걸음이 움직이는 대로 맡겨보았다. 나의 발걸음이 비로소 그 바위 앞에서 멈췄다. 눈이 쌓여있을 뿐 그 어디에도 사람의 자취라고는 없었다. 다만 꿩 발자국과 토끼로 추정되는 발자국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잘 몰라도 쪽이 갈라진 발자국들이 눈 위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지난여름 그녀와 비를 피한 무성했던 나무는 가지 끝에 마지막 잎새를 힘겹게 붙들었고, 가지들은 잎 대신 눈꽃을 피웠다. 정겹게 울던 새 소리는 들리지 않고, 차갑고 황량한 겨울바람 소리가 온산을 휘감아 돈다.
친구 하나가 내가 집에 온줄 알고 찾아와서는 조그만 상자 하나를 건넨다. “이것은 뭐냐?” 내가 물었다.
“방학 때 네가 집에 오면 전해 달라고 숙영씨가 맡겼어.”
“그때가 언제였어?”
“지난가을이었어”
상자는 책 다섯 권 정도의 무게였다.
“그녀에 대해서 들은 소식은 없어?”
“그 이후로 별다른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네가 서울로 가고 얼마 못 되어 갑자기 몸이 아프다는 얘길 들었어. 그리고 학교도 휴학하고, 요양차 다른 곳으로 이사 아닌 이사를 했다고 들은 것이 전부이다.” 뜻밖이었다. 친구의 말을 듣고는 적잖이 놀랬다.
“주소나 연락처를 알 수는 없을까?”
“그래 내가 한번 알아볼게.”
떨리는 마음으로 상자를 열어보았다. 블루톤의 반 팔 티와 늦가을 향기가 묻어나는 스웨터와 양말 두 켤레 그리고 손수건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그 밑에 만년필 케이스와 함께 일기장 한 권이 들어있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일기의 시작은 작년 7월 15일이고 이날은 나를 만나기 불과 몇 일 전이었다. 9월 1일의 일기를 마지막 페이지에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일기는 끝이 났다. 일기를 손에든 순간 가슴이 두근 그렸다. 과연 어떤 내용 들로 지면이 채워졌을까?
4
7월28일
낮에 동수를 만났다.
두 번째 만남이었다.
처음으로 속에 있는 얘기를 하나도 숨김없이 모두 털어놓았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가정사를 고백해본 적은 없었다.
망설여 젖지만, 왠지 그에게 모두 말하고 싶었다.
내심 위로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남자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여름의 소나기처럼 한바탕 울고 싶었다.
이렇게 나의 말을 들어주고, 함께 울어주고 위로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참 좋았다. 그가 무척 고마웠다. 혹시 이런 감정이 사랑일까?
같이 비를 맞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그가 나의 손을 잡았다.
나도 힘껏 그의 손을 잡고 달렸다.
순간 그와 함께라면 비 아닌 그 어떤 것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에게 잠깐 기대였을 때 마치 어릴 적 아빠의 품처럼 포근했다.
8월5일
두 번째 만남 이후 동수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무척이나 기다려졌다.
다음날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오늘 듣게 되었다.
혹시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을까?
어떤 일이기에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바로 올라갔을까?
전날까지도 서울 간다는 말은 없었는데,,,
몹시 답답했다.
비를 맞은 이후 삼일부터 몸이 좀 이상했다.
그 날 저녁 심한 오한과 고열의 괴로움으로 밤새 의식을 잃었다.
엄마가 애를 많이 쓰셨다.
숨이차다. 가슴이 답답함을 떠나서 이상하게 아파 왔다.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말을 못 했다.
8월20일
긴 여름 방학도 끝나고, 오늘 개학했다.
다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어서 무척 반가웠지만, 몸이 많이 이상하다.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집에 일찍 왔다.
처음으로 부모님께 증상을 말씀드렸다.
너무나 놀라셨다.
아빠는 바로 대학병원에 입원을 잡으셨다.
불안했다.
다음 날 오전부터 검사가 진행됐다.
검사결과 아니나 다를까 심장쪽 이상이었다. 항체 미 보균자로 언제라도
바이러스로 부터 생명을 위협당할 수 있다고 한다. 담당 주치의로부터
설명을 들은 후 엄마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왔는데 갑자기 왜 이런 겁니까?
그동안은 바이러스가 몸안에서 잠복해있다가 때가 되어서 활동을 시작한
겁니다. 또 한 번 부모님이 나로 인해 고통 가운데 놓이는 건 아닐까?
아빠가 이유와 원인을 듣고서 그럼 아직 항체는 개발되지 않았나요?
하고 의사 선생님께 묻는다.
안타깝게도 아직 실용화됐다는 사례는 의학회에서 발표된 적이 없습니다.
의사가 돌아간 후 엄마는 흐느껴 우셨고, 아빠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 다.
9월01일
입원 한지 11일 만에 퇴원했다.
휴학계를 제출했다. 언제쯤 완쾌되어서 학교를 다닐 수 있을까?
아니 내가 낫을 수는 있을까? 막연하고, 막막하다.
부모님을 생각하므로 내 마음이 더욱 아프다.
점점 기운이 없고, 가슴의 통증은 어제보다도 훨씬 강하다.
엄마가 정성스럽게 다려준 약도 음식도 잘 넘어 가지가 않는다.
아무 꿈도 꾸지 않으면서 왜 이렇게 눈이 감길까?
아아 이 모든 것이 그냥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냥 기분 나쁜 꿈이었으면, 그리고 꿈은 깨어나면, 그 만인 것을.
일기는 9월1일까지 기록되어있다. 비를 맞은 그 날 그녀의 입술이 파랏게 되어 바르르 떨리던 것이 생각이 난다. 행여나 그 때문은 아닐까? 차라리 그녀가 아프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나았을까?
“숙영씨의 주소나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 없네.”
친구가 나의 부탁을 듣고는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보다. 답답하다.
일기는 숙영의 피로 쓴 것 같이 고통과 절망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모님이 자신으로 인해 또다시 고통 가운데 놓일 것을 생각하니 그것이 더욱 자신을 힘들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디를 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사무치는 그리움을 가슴에 안은 채,
서둘러 올라왔다. 서울엔 비가 내렸다. 겨울엔 비가 잘 내리지 않는데 겨울비하고는 양이 제법 되었다. 쓸쓸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것이 사랑일까? 그래 사랑인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태어나 처음으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사람이다. 옷깃을 세우고 겨울비를 맞으며, 걷는 이 거리가 더욱 슬프고, 차갑게 느껴졌다. 귀뚜라미와 낙엽지는 가을에만 쓸쓸함이 찾아오는 줄 알았는데 1월에도 이렇게 쓸쓸할 수 있구나!
나는 지금 가을보다 더한 1월을 마주하고 있다. 19살의 첮 이별. 상처의 흔적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것 같다 다가올 내인생의 이별은 또 언제 시작 될른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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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별연습>
읽으면서 눈에 가득 물이 고입니다.
동수와 숙영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기를 빕니다.
순수하고 따뜻한 단편소설입니다.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의 감성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성인이 되어서, 중년이 되어서 재회할 수 있는 가능성~~
기대해도 되지요? 노작가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