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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사진과 사진에 걸맞은 시가 만났다.
이 시집은 감성적인 양립형이다.
왼쪽 페이지의 사진과 오른편의 시가
감성 무게의 비중이 수평을 이룬다.
너덜한 사진에 온갖 미사여구가 아닌,
단순함과 담백하게 감성의 지향점에 대해 정곡을 찌른다.
어렵지도 않다.
사진을 보고 시를 읽으면 시가 무슨 은유인지 금방 알아차린다.
사진은 직관이고 시는 은유이다.
직관의 현상을 시로 은유되는 사상의 감정은
일반적 사진에서만 나올 수도 없고
시 자체로써도 부족하다.
시에서 한층 비틀면 은유가 외계어가 되지만
이를 사진은 직관성을 통해서 다시 중화시킨다.
그래서 감성의 효과는 시너지를 일어나게 한다.
즉 시의 언어가 짙어지고
이미지의 사진이 다시 보이는 합일점을 만나게 된다.
사진이란 이렇게 시를 유도하고 시는 다시 사진을 요구한다.
이른바 현대에 사진으로 인해서 발생한 새로운 문학 장르인
"디카시"가 만들어졌다는 의미이다.
한마디로 예술적인 하이브리드인 셈이다.
융합이라는 공학에서 나오는 뜻이
영상 언어와 텍스트 언어가 만나서 나오는
조합의 새로운 세계였던 것이 아닐까.
역시 시인이자 사진작가인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조화는
균형추가 공평하다.
사진도 참 적절하다는 느낌.
그리고 이에 걸맞게 짧아서 더 함축의 은유된 시구절에
감성의 열쇠가 마음의 자물통에 접점하듯이 사진과 시가 만났다.
사진을 보니 작가는 참 부지런했음을,
옥과 석은 구별되는 것이 다듬었을 때와 그저 주웠을 때의 차이이다.
사진을 시로 다듬었던 것이 아닐까 했다.
셔터를 누르면 어느 것이든 다 사진이란 카테고리에 속하지만
사진이라도 다 사진일 수는 없다.
실수로 눌러진 셔터로 찍힌 사진도 사진일 수야 없다는 정의는 확실하다.
그러나 작가의 사진 다듬기는 결국 시로써 표현된다.
그래서 다시 시가 사진을 수식한다.
이 두 개의 예술적 포인트가 희석 됨으로써
시너지의 효과는 감성을 더 자극한다.
사진의 농축이 시로 나타나고
시의 은유가 사진을 수식하는 콜라보. 역시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이때까지 그런 경험 숱하게 있다.
자신이 찍은 사진에 무슨 말 한마디 못하는 감성 무심형을 많이 접했던 탓이다.
내가 무슨 생각과 의미로 셔터를 눌렀던 그 동기에 대해
스스로가 모호하다면 과연 사진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했음에도 내가 했다고 증명할 수 없는 언어는 결국 누구의 것인지 모호해진다.
스스로에게 설명이 안된다면 누군가에게 내밀어서
설명을 요구하는 것도 일종의 강권일뿐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공감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나에게 공감이 되어야 할 첫 번째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사진에 더 많은 공감이 시로써 표현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고도 당연하다.
그런데 이 당연성 앞에서 무너지고 나면 사진은 겉돈다.
겉도는 이미지에서 그 감성의 이야기는 매몰될 수밖에 없다.
대체 내가 찍었는데 무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지
오랜 기간의 일관성은 이렇게 사진으로 입증되는 이유.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라고 하지만 아무리 이미지라고는 하지만
역시나 텍스트는 사라질 수 없다.
TV가 나올 때 라디오가 죽을 것이라고 하였지만
라디오는 여전히 전파를 타듯이
텍스트는 이미지 위에서 잘도 논다.
그러니 어쩌면 이 이미지와 텍스트의 접점이 없을 수가 없는
당위성, 당연성은 오늘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진은 무엇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묻는 설문지와 같다.
그래서 묻는다.
사진에서 도출되는 텍스트의 언어는 무슨 의미인지를 은유한다.
물론 사진만으로도 족할 수도 있고 시의 언어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에서 머물러 있지 않는다.
끝없이 연금술을 하듯이 융합하려 들고 해체하려 들며 부수고 다시 조립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등의 수단을 동원하다.
그래서 감성은 변화로 곧 진보해야 한다.
머물러 있을 때 고착된 무변화성은 답답함을 느끼는 이치이다.
연연히 흐르는 강물의 변화에서 일관성에 더불어서 변하는 시간의
영속적 성질을 사진과 시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시는 마치 일본의 하이쿠를 닮았지만 그렇다고 사진에서 나오는
그 언어의 맥을 놓치지 않으니
이런 흐르는 물의 일관성이 곧 작가의 삶으로 흐르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사진은 엄연히 사물의 형태적 복제이다.
이를 시뮬라크르라고 한다.
자기 동일성이 없는 복제라는 뜻이다.
우리의 유전자가 바로 이런 복제의 사슬과 같다.
그러나 이런 무수한 반복적 복제에서 사슬 단 하나가 배열을 변화시킬 때
유전자는 진화라는 결과로 도출한다. 바뀐다는 뜻이다,
그저 늘 똑같은 반복에서 작은 변이로써 사진에 추출된 시가 곧,
그 진일보의 역할을 해내는 중요한 변수 인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진은 단순히 복제의 한계를 뛰어넘어
변이의 그 현재진행형의 행횡을 도모하는 순간이라는 점이다.
반복과 수식, 동등성과 균형성,
이 몇 개의 키워드가 새로운 장르의 잉태함과 탄생으로 연결되었다.
페이지마다 걸려 있는 사진과 그리고 5행 이내의 짧은 은유의 시가 만나서
이렇게 접점의 융합이라는 콜라보를 만들어 내는 시집.
정말 만나고 싶었고 만나니 반가웠다.
시가 시로써 단독으로도 가능하지만 나는 사진을 첨가 시킬 때
만들어지는 감성을 사랑한다.
오랫동안 사진과 시로 다듬은 작가의 노고에 책으로 많이 알려지길 원하다.
그리고 그런 사진과 시로써 예술적인 감성이 더욱 증폭되고 기폭제가 될때
이 황무지 같은 시대에 바싹 마른 가슴에 물이라도 흘러 들는
흠뻑 젖어드는 효과를 누리면 삶이 더욱 평화로울 수 있기를 고대한다.
참 찡한 사진과 글이었다.
[강미옥 디카시집 기억의 그늘 : 리뷰- 알라딘 - 유레카(유병찬)님]
PS : 이 사진 시집을 알려주신 지우당님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언제 작가님에게도 꼭 감동이었다고 전해 주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리뷰 좀 길게 적고 싶었지만
요즘 제가 시간이 넉넉하지 못하니 줄였음을 고백합니다.
작가분에게도 알려 드리세요.
감동하는 유레카도 있었더라고 말이죠.
http://blog.aladin.co.kr/768030147/9327261 2015, 2016, 2017년 알라딘 서재달인 유레카 (유병찬)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