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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설화 - 전라도편
전라도편
용궁샘 거북이 | 이태조와 몽불산 | 불보를 수지한 스님 | 종이장수의 깨달음 | 누워 계신 미륵부처님 | 보조국사와 숯 굽는 영감 | 공주의 울음과 불사 | 태자의 태묘 | 검은소의 울음 | 하룻밤의 사랑과 원한 | 자치샘의 참외 | 며느리의 지혜 | 진표율사의 구도 | 대북과 오리정 구렁이 | 신비로운 법당 | 소금을 만드는 노인 | 부설거사 일가 | 바위가 된 도둑 | 신비한 장군샘
용궁샘 거북이 <영암 여석산>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어느 가을날. 전남 영암군 신북면에 있는 여석산 기슭을 한 스님이 걷고 있었다.
고개를 오르느라 숨이 찬 스님은 고갯마루에 앉아 숨을 돌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장삼자락으로 닦다가 건너편에 서 있는 커다란 감나무에 시선이 닿았다.
스님은 바랑을 짊어진 채 그 감나무에 올라 감을 한 개 따서 입에 넣었다.
『별미로군.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감은 처음이다. 하늘에 천도가 있다더니 그 맛이 이럴까.』
달콤한 감맛에 취한 스님은 한 가지에 열린 감을 모두 따 먹고는 자기도 모르게 다음 가지로 옮아갔다. 가지를 옮기는 순간 와지끈 소리와 함께 감나무 아래 샘물 속으로 빠져 버렸다. 깊은 샘물은 스님을 삼킨 채 옥빛으로 맑았고 스님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이듬해였다. 모내기를 마친 그 마을엔 비가 내리지 않았다.
『허- 이게 무슨 징조인고. 70평생에 이런 가뭄은 처음이야. 늙은이들은 이런 흉변을 보기 전에 세상을 떠나야 하는 건데!』
마을 노인들은 긴 담뱃대에 잎담배를 담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이들은 여석산에 있는 그 샘물을 떠다가 갈라진 논바닥에 물을 대느라 바빴다. 남자들은 물을 푸고 아낙들은 물동이로 물을 날랐다.
『거북이다. 거북!』
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 물을 푸던 청년이 외치는 소리에 잠시 샘가에 앉아 쉬고 있던 젊은이들은 일제히 샘을 들여다보았다.
『와! 굉장히 큰 거북이로구나. 허리 앓는 사람에게 먹이면 약이 된다던데…』
마을 사람들은 산 개구리를 낚시에 꿰어 거북을 낚아 올리는 순간 또 한번 일제히 놀랐다. 그 거북의 넓적한 은회색 등 한복판에는 임금 「왕」자가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보통 영물이 아닐 것」이라며 마을 쳐ㅇ년 명수에게 거북이를 넘겨주었다.
『자네가 낚아 올렸으니 자네 집에 가지고 가게. 집에 두어도 별일이 없거든 약에 쓰게나.』
명수는 왠지 입맛이 없었다. 마지못해 거북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물 담긴 항아리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
바로 그날 밤, 휘영청 밝은 달빛이 창호지에 스밀 무렵 곯아떨어진 명수의 귓가에 목탁소리가 들렸다.
비몽사몽 간에 잠을 깬 명수의 눈앞에 웬 스님이 목탁을 치며 다가왔다.
『여보, 젊은이 들으시오. 나는 지난해 샘가의 감나무에서 감을 따먹다 샘에 빠져 죽은 불제자요.』
『예? 샘에 빠져 죽었다구요?』
『그렇소. 나는 거북이로 환생하여 그 샘에 살고 있던 중 오늘 당신 집까지 오게 되었으니 어서 나를 샘에다 갖다 놓아 주오.』
『아, 정말 모를 일이군요.』
『그 샘 속엔 용궁이 있어 그 용궁에서 유유자적 노닐고 있었는데 오늘 문득 바깥 세상이 그리워 물 위로 나왔다가 변을 당하고 말았소.』
『스님, 하지만 전 오늘 당신을 맡았을 뿐 제 마음대로는 하지 못합니다.』
명수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사정했다. 그러자 스님은 격한 호통을 쳤다.
『젊은이, 만일 나를 풀어주지 않으면 마을에 큰 변이 있을 것이니 그리 아시오.』
스님은 말을 마치자 「나무 관세음보살」을 외우고 목탁을 세 번 친후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스님! 스님!』
『아니 여보 웬 잠꼬대가 그리 심하세요.』
『아! 꿈인가 생시인가.』
명수의 이마엔 구슬땀이 맺혀 있었다.
『여보, 거북이를 놓아줍시다.』
『참 당신두 무슨 꿈타령이세요. 몇 해째 허리를 앓고 계신 친정아버님께 갖다 드리면 얼마나 좋아하시겠어요.』
아내는 남편의 꿈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날이 밝자마자 마을 사람들이 달려왔다.
『여러분, 이 거북이는 약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스님의 화신입니다.』
『뭐 스님의 화신, 별소릴 다 듣겠네.』
『흥 혼자서 약에 쓸려고, 허튼 수작 하지 말게.』
『그 거북이가 스님의 화신이라면 중생을 긍휼히 여길 게 아닌가. 그러니 어서 내놓게.』
『안됩니다. 이 거북이를 잡으면 변이 일어날 것입니다.』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영물을 얻더니 얼이 빠져 실성을 했나 보군.』
마을 사람들은 명수의 말을 믿지 않았다. 순간 명수는 항아리 속의 거북을 가슴에 안고 뛰기 시작했다.
『저 놈을 잡아라.』
마을 사람들이 뒤를 쫓았다. 헐레벌떡 샘가에 이르렀을 때 바싹 따라온 마을 청년이 명수의 발을 걸었다.
나가 떨어지면서 명수는 거북을 샘물에 던졌다.
순간 거북이 물에 뛰어들기가 무섭게 그토록 맑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일고 뇌성벽력과 함께 비가 쏟아졌다.
『앗! 비다. 비가 온다.』
명수는 빗발이 튀기는 황토흙 위에 엎드려 외쳤다.
『스님, 감사하옵니다. 스님, 감사하옵니다.』
그 후 이 마을은 늘 우순풍조하고 풍년가 소리가 높았다.
『이게 모두 자네 덕일세. 하마터면 큰 죄를 지을 뻔했네.』
마을 사람들은 명수를 치하했고 그 샘을 용궁샘이라 불렀다.
명주실 세 꾸리가 들어간다는 용궁샘. 지금도 푸르고 차게 넘실대고 있다.
이태조와 몽불산<담양 수북>
『시랑, 삼칠일이 다 되었는데도 아무런 영험이 없으니 필시 과인의 덕이 부족한가 보오.』
『마마, 황공한가 보오.』
성군이 되기 위해 명산대찰을 찾아 간절히 기도하는 이태조의 모습에 사랑은 참으로 감격했다. 창업 이전의 그 용맹 속에 저토록 부드러운 자애가 어디에 숨어있었을까.
『마마, 옛부터 이곳 무등산에는 백팔 나한이 있고 대소암자가 있어 수많은 산신들이 나한에게 공양을 올렸다 하옵니다. 들리는 바로는 오랜 옛날 석가여래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설법을 하셨고, 그 후 제불보살이 설법을 한다 하옵니다. 다시 삼일 기도를 올리심이 어떠하올지요?』
『무학 스님 말에 의하면 무등이 보살이라더니, 이 무등산에 부처님의 사자좌가 있단 말인가. 사랑, 그대는 과연 생각이 깊소 그려. 과인은 산신제를 그만둘까 했는데, 곧 삼일 기도를 준비토록 하시오.』
삼칠일 기도에 이어 다시 삼일 기도를 준비하는 태조는 새벽까지 한잠 자려고 자리에 들었다.
잠이 오질 않았다. 온갖 망상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창업 도중 희생된 고려 충신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들은 태조를 향해 살인자, 반역자라고 저주했다. 태조는 이를 악물었다.
머리가 뒤숭숭하고 숨결이 가빠지자 가슴에서 노기가 치밀었다. 칼을 더듬어 짚고 일어서며 「악」하고 외치는 순간 태조는 악몽에서 깨었다.
『마마, 어찌된 연고입니까? 용안이 몹시 피로해 보입니다.』
『오! 시랑 거기 있었구려. 꿈을 꾸었소.』
태조의 이마에는 땀이 비오듯 흘렀다.
『시랑, 아무래도 과인의 덕이 부족한 모양이오.』
『마마, 황공하오나 옥체가 허약하시기 때문인가 하옵니다. 마음을 편히 가지시고 좀 쉬시옵소서.』
『시랑, 그러리다. 시랑이 나의 침상을 지켜 주오.』
태조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몽롱한 미열 속에 구름을 탄 기분으로 그는 무등산 산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밝은 빛이 사방에서 산정을 비추는데 태조는 그 빛에 이끌리듯 다가갔다.
이윽고 산정에 이르자 한 신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조대왕,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소.』
『과인이 이곳에 온 것을 어찌 알았습니까?』
『오늘이 무등산에서 열리는 우란분재법회 마지막 날입니다. 대왕께서 삼칠일 기도를 올리는 동안 인근 보살과 나하느 신령들이 모두 여기 참석하느라 대왕의 기도처엔 가질 못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대왕이 비명을 질러 석가 부처님께서 지신을 보내 연유를 알아오도록 했지요. 지신이 대왕 처소로 가던 중 정몽주 등 고려 충신을 만나 사연을 듣고 왔습니다.』
『정몽주가?』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왕의 부덕함을 뉘우치는 겸손을 매우 기뻐하시며 맞아오도록 했습니다. 해서 제가 기다리고 있었지요.』
『오, 석가 부처님께서요!』
태조는 감격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두 사람이 법회 장소에 이르자 석가 세존은 가부좌를 하고 설법 중이었다.
『대왕이시여, 어서 오십시오.』
부처님은 태조대왕을 손짓해 부르며 맞았다.
『세존이시여, 먼 해동국까지 납시어 법회를 설하시는 자비에 감읍하옵니다.』
『대왕이시여, 옛부터 왕도는 치도이며 인도라고 했습니다. 중생을 어여삐 여기는 자비로써 왕도를 가야 할 줄 압니다.』
『세존이시여, 부디 그 길을 자세히 일러주십시오. 저의 조선조 창업이 그릇되지 않았다면 백성과 사직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겠나이까?』
이때 세존께서는 주장자를 높이 들었다.
『대왕이시여, 나의 주장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시오.』
주장자는 검푸른 밤하늘을 가리켰다. 순간 주장자 끝에서 물이 넘쳐 흘러 강을 이루고 강가에서 산봉우리가 치솟아 올랐다. 산은 세 갈래로 갈라져 흡사 솥발처럼 솟았다.
복판에는 주장자가 붓 모양을 ㅗ변해 하늘에 치솟고 세 개의 산봉우리가 허리에 강을 끼고 둘러섰다.
흐르는 강물소리는 아득한 말소리가 되어 『대왕이시여, 그대의 치세가 만세에 이르고 그 치적을 나는 하늘에 적으리라』고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위를 살핀 태조는 놀랐다. 침상가에서 시랑이 조심스럽게 태조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동안 꿈 속의 일을 생각하던 태조는 시랑을 불러 꿈 이야기를 했다.
『마마, 필시 기도의 영험인가 하옵니다.』
『옳소. 어서 과인이 꿈에 본 산을 찾도록 하시오.』
마침내 사람을 놓아 담양군 수북면 삼인산이 꿈 속의 산과 흡사함을 발견했다.
삼일 기도가 끝난 일행은 곧 그 산으로 갔다.
『오! 과인이 꿈에 본 산과 흡사하구나. 앞으로는 이 산을 몽불산이라 부르도록 해라. 그리고 해마다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기도처로 삼으라.』
그 후 오랫동안 나라에서 올리는 산신제가 이곳에서 열렸다.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들 낳기를 바라는 여인들의 기도처가 되고 있다. 산 이름은 몽선산으로 바뀌었다.
불보를 수지한 스님 <승주 송광사>
때는 신라 말엽. 여름 안거를 마치고 10여 명의 제자들과 함께 만해길에 오른 혜린 선사는 험한 산중에서 하룻밤 노숙하게 됐다.
『스님,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무슨 일이냐?』
『나라 안에 번지고 있는 괴질이 이 산중까지 옮겨졌는지 일행 중 두 스님의 몸이 불덩이 같사옵니다.』
『날이 밝는 대로 약초를 찾아볼 것이니 너무 상심치 말고 기도하며 잘 간병토록 해라.』
이튿날, 혜린선사는 약초를 뜯어 응급처치를 취했으나 효험은 커녕 환자가 하나 둘 더 늘어나 털썩털썩 풀섶에 주저 않았다.
『모두들 내 말을 명심해서 듣거라.』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은 질병임을 느낀 혜린 스님은 엄숙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서원한 출가 사문임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무릇 출가 사문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극기력이 있어야 하거늘 이만한 병고쯤 감당치 못하고서야 어찌 훗날 중생을 제도 하겠느냐. 오늘부터 병마를 물리치기 위해 정진에 들 것이니 전원이 한마음으로 기도토록 해라. 필시 부처님의 가피가 있을 것이니라.』
기도로써 병마를 이겨햐 한다고 생각한 혜린선사는 저역ㄹ한 기도처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아니 이럴 수가….』
스님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바로 가까운 곳에 연잎이 무성한 연못이 있는가 하면 못 가운데 문수보살 석상이 우뚝 서 계시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뜻밖의 발견에 스님은 기뻤다.
『문수보살님께서 우리를 구하러 오셨구나.』
문수보살을 향해 정좌한 일행은 기도헤 들어갔다. 7일 기도를 마치던 날 밤.
『이제 모든 시련이 다 끝났으니 안심해라. 그리고 이 길로 새 절터를 찾아 절을 세우고 중생 구제의 서원을 실천토록 해라.』
비몽사몽간에 부처님을 친견한 혜린선사는 감격 또 감격하여 절을 하다 눈을 떠보니 부처님은 간 곳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핀 혜린 스님은 또 놀랐다.
『스님! 저희 모두 질병이 완쾌되었습니다. 스님의 기도가 극진하여 부처님의 영험이 있으셨나 봅니다.』
다 죽어가던 제자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환호하는 광경을 본 혜린대사는 다시 눈을 감고 앞에 의연히 서 계신 문수보살님께 감사했다.
『저희들을 사경에서 구해주신 문수보살님,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보살님의 거룩하신 자비심으로 저희들의 앞길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뜬 혜린 스님은 마치 꿈을 꾸는 듯 어안이벙벙했다. 언제 오셨는지 노스님 한 분이 미소를 지으며 스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헛것을 보고 있나? 아니면 문수보살 석상이 생불(生佛)』로 화현하셨나?
혜란 스님은 못 가운데로 눈을 돌렸다. 분명 그곳엔 문수보살님이 서 계셨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스님은 정중히 합장 배례한 뒤 노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신 스님이신지요?』
『소승은 석가 세존께서 스님에게 전하라는 귀중한 선물을 가지고 왔으니 너무 놀라지 마시오.』
노스님은 붉은 가사 한 벌과 향내음 그윽한 발우, 그리고 세존 진골의 일부분인 불사리를 건네주었다.
혜린대사는 감격하였다.
『이런 불보를 감히 소승이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양 말고 수지하십시오. 그리고 대사! 소승이 전하는 말을 꼭 명심하여 실천토록 하시오.』
『예, 명심하겠습니다.』
『제자들을 데라고 전라도 남쪽 땅으로 가시오. 그곳에 가면 송광산이 있는데 거기가 바로 이 불보를 모시고 불법을 전할 성지입니다. 이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니 대사께서 어서 가서 절을 세우고 중생교화의 원력을 실천하시오. 그것만이 부처님의 가피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노승을 통해 부처님의 부촉을 받은 혜린대사는 너무 기뻐 눈물을 흘리며 삼배를 올렸다. 절을 마치고 보니 노슨미은 간 곳이 없었다.
혜린대사 일행은 전라도로 발길을 옮겼다. 여러 날이 지나 지금의 승주군 송광면 마을 어귀에 다다랐을 때 일행은 백발이 성성한 촌로를 만났다. 노인은 반색을 하며 정중하게 합장 배례를 한 후 궁금한 듯 물었다.
『무슨 일로 이 마을에 오셨는지요?』
『예, 송광산이 영산이라기에 절을 세우려고 찾아왔습니다.』
『참으로 잘 오셨습니다. 옛부터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장차 이 산에서 18공이 출현, 불법을 널리 홍포할 것이라 하여 18공을 의미하는 「송」자에 불법을 널리 편다는 「광」자를 더하여 「송광산」이라 불렀다 합니다.』
그래서인지 마을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이 산에서 성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이때였다. 송광산 기슭에 오색 무지개 같은 영롱한 서기가 피어올랐다.
『오! 저기로구나.』
맑은 계곡울 따라 서기가 피어오른 곳으로 향하던 혜린선사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석장을 꽂았다.
그날부터 절 짓는 일이 시작되었다. 나무를 베어내고 잡초를 거두고 터를 닦으니 고을에서 뿐 아니라 먼 곳이서까지 사람들이 구금처럼 몰려와 속히 성인이 출현하길 기원하면서 불사에 동참했다.
절이 완성되어 진골 불사리를 모시던 날 밤. 절 안에서 교룡이 나는 듯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했다. 선사는 절 이름을 길상사라 칭하니 이 절이 바로 16국사를 배출하고 선풍을 진작시킨 조계총림 송광사다.
종이장수의 깨달음 <해남 진불암>
조선조 중엽. 지금의 해남 대흥사 산내 암자인 진불암에는 70여 명의 스님들이 참선 정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조실 스님께서 동안거 결제법어를 하고 있는데 마침 종이 장수가 종이를 팔려고 절에 왔다.
대중 스님들이 모두 법당에서 법문을 듣고 있었으므로 종이장수 최씨는 누구한테도 말을 건넬 수 없었다.
그냥 돌아갈 수도 없고 해서 최씨는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맨 뒤쪽에 앉아 법문을 다 들은 최씨는 그 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거룩한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중 스님들의 경건한 모습이며 법당 안의 장엄한 분위기가 최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도 출가하여 스님이 될 수 있으면 오죽 좋을까.』
내심 행각에 잠겼던 최씨는 결심을 한 듯 법회가 끝나자 용기를 내어 조실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 저는 떠돌아다니며 종이를 파는 최창호라 하옵니다. 오늘 이곳에 들렀다가 스님의 법문을 듣고 불현듯 저도 입산수도하고픈 생각이 들어 스님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조실 스님은 최씨를 바라만 볼 뿐 말이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종이 장수주제에 종이나 팔면서 살 것이지 스님은 무슨 스님. 불쑥 찾아든 내가 잘못이지.」
가슴을 조이며 조실 스님의 답을 기다리던 최씨는 마음을 고쳐먹고 일어서려 했다. 이때였다.
『게 앉거라. 간밤 꿈에 부처님께서 큰 발우 하나를 내게 주셨는데 자네가 오려고 그랬구나. 지금은 비록 종이 장수지만 자네는 전생부터 불연이 지중하니 열심히 공부해서 큰 도를 이루도록 해라.』
최씨를 법기라고 생각한 조실 스님은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아 주었다.
최행자는 그날부터 물을 긷고 나무를 하는 등 후원 일을 거들면서 염불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도니 영문인지 그는 후원 일과는 달리 염불은 통 외우지를 못했다. 외우고 뒤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또 외워도 그때뿐이었다. 대중들은 그를 「바보」라고 수군대며 놀려댔다. 최행자는 꾹 참고 노력에 노력을 해 봤으나 허사였다. 입산한 지 반년이 지났으나 그는 천수경도 못 외웠고, 수계도 못 받았다.
그는 자신의 우둔함을 탓하면서 그만 하산하기로 결심하고 조실 스님께 인사드리려고 찾아갔다.
『스님, 저는 아무래도 절집과 인연이 없나 봅니다. 반년이 지나도록 염불 한 줄 외우지를 못하니 다시 마을로 내려가 종이 장사나 하겠습니다.』
최행자의 심각한 이야기를 다 들은 조실 스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너무 심려치 말고 공부를 계속하거라. 옛날 부처님 당시에도 너 같은 수행자가 있었는데 열심히 공부하여 깨달음을 얻었느니라.』
저실 스님은 옛날 인도에서 부처님을 찾아가 수행하던 「판타카」형제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최행자를 위로했다.
형과 함께 출가한 판타카는 아무리 부처님께서 법문을 설하셔도 기억하질 못했다. 마침내 그는 대중 스님들로부터 바보라고 놀림을 받게 됐다. 판타카는 울면서 부처님 곁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판타카야, 내 말을 기억하거나 외우는 일은 그렇게 소중한 일이 못된다. 오늘부터 너는 절 뜰을 말끔히 쓸고 대중 스님들이 탁발에서 돌아오면 발을 깨끗이 닦아 주거라. 이처럼 매일 쓸고 닦으면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니라.』
부처님은 판타카에게 「쓸고 닦으라」고 일러주셨다. 판타카는 그날부터 정사의 뜰을 쓸고 스님들의 발을 씻어 주었다. 판타카가 잊고 있으면 대중 스님들은 대야에 물을 떠 가지고 와서 거만스럽고 비앙거리는 말투로 「쓸고 닦으라」면서 더러운 발을 내밀었다. 그렇게 여러해가 지난 어느 날 아침. 판타카는 맏아을 쓸던 빗자루를 땅바닥에 휙 내던지면서 크게 소리쳤다.
『알았다, 알았어.』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며 단숨에 부처님 앞에 나아갔다.
『부처님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뭘 알았단 말이냐?』
『부처님께서 제게 쓸고 닦으라신 말씀은 매일같이 저의 업장을 쓸고 마음을 닦으라는 뜻이었지요.』
『오! 판타카야, 참으로 장하구나.』
부처님은 그 길로 큰 북을 울리셨다.
대중이 한자리에 모이자 부처님은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씀하였다.
『판타카는 깨달았다. 판타카는 깨달았다.』
조실 스님의 이야기를 다 들은 최행자는 「판타카」와 같은 수행인이 되기로 마음을 다졌다. 그는 후원 일을 도맡아 하면서 외우지는 못하망정 《천수경》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조실 스님이 막 장자리에 들려는데 밖에서 환한 방광이 일고 있었다.
조실 스님은 감격스러웠다.
최행자는 곤하게 잠들어 있는데 그가 읽던 《천수경》에서 경이로운 빛이 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다음날 또이변이 일어났다. 그 다음날 또 이변이 일어났다. 글 한줄 못 외우던 최행자가 천수경 뿐 아니라 무슨 경이든 한 번만 보면 줄줄 외워 나갔다.
이 스님이 후일 대흥사 13대 국사의 한 분인 범해 각안 스님이다. 유명한 저서로 《동사열전》이 있다.
조실 스님은 선대 스님들로부터 들어온 「진불암」 창건 유래를 생각하며 또 한 분의 진불이 출현했다고 생각했다.
진불암을 처음 창건하게 된 동기는 옛날 남인도에서 불상과 16나한상 그리고 《금강경》과 《법화경》등을 모시고 온 배가 전라도 강진 땅 백도방에 도착한 데서 비롯됐다.
영조 스님 일행이 명당지를 찾아 인도 부처님을 봉안하던 날 밤. 스님은 꿈에 한 노인으로부터 「이곳은 후세에 진불이 출현할 가람이니라」는 계시를 받고 절 이름을 진불암이라 명명했다.
누워 계신 미륵부처님 <영암 미륵당>
전남 영암군 학선면 학계리 광암 서북쪽에 미륵당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는 높이 3.6m, 너비 1.5m의 미륵을 모시는 당집이 있다.
옛날 조선 선조 때 이 당집이 세워지기 전 광암 마을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정씨라는 한 농부가 살고 있었다.
장가들어 2∼3년간은 이제나 저제나 하고 아기를 기다렸으나 태기가 없자 정씨 부인은 명산대찰을 찾아 부처님께 기도드리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보, 아무래도 기도가 부족한 모양이에요.』
『그보다 얼마나 더 열심히 기도할 수가 있겠소. 아마 우리 부부는 전생부터 자식연이 없는가 보구려. 너무 낙심치 말고 좀더 기다려 보다가 끝내 자식이 없게 되면 양자라도 하나 들이도록 합시다.』
정씨는 미안해 하는 아내 보기가 민망했는지 위로의 말을 주긴 했으나 내심으로는 섭섭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정씨는 깊은 쑴 속에서 미륵부처님을 만났다.
『내가 지금 쓰러져 있어 몹시 불편하니 나를 일으켜 세워주면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라.』
미륵부처님은 이렇게 말하고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으튿날 아침 정씨는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미륵부처님이 가르쳐 준 자리를 파기 시작했다. 얼마쯤 파들어 가니 과연 땅 속에는 미륵불이 옆으로 누운 채 묻혀 있었다.
정씨 내외는 미륵불을 파내 집에다 모셔 놓고는 조석으로 지성껏 불공을 드렸다.
그렇게 조석불공을 드리기 백일째 되던 날 밤, 정씨 부인은 큰 잉어를 가슴에 품는 꿈을 꾸었다.
『여보, 아무래도 꿈이 이상해요.』
정씨 부인은 기쁜 듯 꿈 이야기를 하면서 태몽인 것 같다고 말하자, 정씨 내외는 너무 좋아 손을 맞잡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여보, 오늘부터는 물도 내가 길어 줄 것이니 힘든 일은 하지 말고 몸조심 해야 하오.』
그로부터 열 달 후 정씨 부인은 귀여운 옥동자를 분만했다.
금슬 좋은 정씨 내외는 이제 부러울 것이 없었다. 다만 살림이 좀 궁색한 것이 흠이었으나 무럭무럭 자라는 아기를 바라보면 가난도 다잊고 그저 기쁘기만 했다.
정씨 내외는 미륵부처님의 가피가 늘 고마워 하루도 빠짐없이 감사기도와 공양 올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기 낳은 지 1년쯤 되었을 때다. 이웃 천석꾼 최씨 집에선 착하고 일 잘하는 정씨에게 많은 소작거리를 주었다.
부지런히 ㅜ시지 않고 일한 정씨네는 서서히 살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가뭄이 크게 들어도 정씨집 농사는 풍작을 거두었고 수해가 지나가도 탈없이 수확을 거두어 그는 마침내 큰 부자가 됐다.
살림 형편이 좋아지자 정씨는 집 뒤에 당집(전각)을 짓고는 미륵부처님을 모셨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정씨 내외도 환갑을 바라보게 되었다.
『여보, 이제 우리가 살 날도 그리 많지 않으니 좋은 일을 하고 가도록 합시다.』
정씨가 아내에게 말하자 부인도 선뜻 찬성했다.
『내 의견으로는 우리집 재산 중 아들 몫을 남기고는 모두 인근의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 주고픈데 부인은 어떻게 생각하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쩜 뜻이 똑같군요.』
내외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마을에서 제일 어려운 집을 꼽았다.
그리고는 이튿날 그들을 모두 집으로 초대하여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오늘이 무슨 날인가 보군요. 이렇듯 많은 음식을 장만하고 보잘것 없는 우리까지 모두 부르다니….』
『아무 날도 아닙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면서 상의하고 픈 일이 있어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궁금해 했다. 정씨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음식을 권했다.
『천천히 드시면서 제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제가 여러분들을 모신 것은 제 재산을 나눠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아니 재산을 주다니요?』
마을 사람들은 먹던 수저를 놓고는 어안이벙벙해졌다.
『그렇습니다. 제가 아들을 얻고 또 넉넉하게 살게 된 것은 모두가 미륵부처님의 가피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재물이란 주인이 없는 것이니 부처님 은혜를 갚는 뜻에서 이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정씨 뜻이 너무 고마워 말을 잇지 못했다.
이웃 사람들에게 고루 재산을 나눠준 정씨는 제일 좋은 전답을 미륵불 모실 제수답으로 하고는 자기가 죽은 뒤 공동으로 농사를 지어 미륵부처님께 매년 제사를 지내달라고 당부했다.
그 뒤 이 마을에선 매년 미륵부처님께 제사를 올리고 있다. 제주는 1주일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데 자식 없는 부인들이 지성으로 기도드리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보조국사(普照國師)와 숯굽는 영감 <승주 송광사>
16국사(國師)중 제 1세인 불일(不日)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운수납자로 행각을 하던 때의 일이다.
어느날 깊은 산중에서 날이 저물자 스님은 하룻밤 쉬어갈 곳을 찾던 중 산기슭에서 숯굽는 움막을 발견했다.
『주인 계십니까?』
뉘신지요?
움막에서는 지긋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나가는 객승인데 하루밤 신세 좀 질까 합니다.
움막안의 노인은 스님을 맞게 됨이 영광스러운 듯 내다보지도 않던 좀전과는 달리 허리를 구부려 합장하며 정중히 모셨다.
이런 누추한 곳에 스님을 모시게 되다니 그저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노인은 감자를 구원 저녁을 대접하고 갈자리 방에 스님을 쉬시게 했다.
영감님은 무얼 하시며 사시나요?
그저 감자나 심어 연명하면서 숯이나 굽고 산답니다.
한참 신세타령을 늘어 놓는 노인에게 스님은 물었다.
영감님 소원은 무엇입니까?
금생에야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다만 내생(來生)에 다시 태어난다면 중국의 만승천자(萬乘天子)가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 소원이 이뤄질 수 있을까요?
선업(善業)을 쌓고 열심히 참선을 하시면 됩니다.
스님은 工夫하는 방법을 자상하게 일러줬다. 그뒤 30여년간 수도에 전념하던 스님은 길상사(吉祥寺, 지금의 송광사)에 주석하시게 됐다.
그당시 길상사는 이미 퇴락될대로 퇴락돼 外道들이 절을이 점거하고 있었다. 하루는 스님께서 외도들에게 길상사 중창의 뜻을 밝혔으나 외도들은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여보게, 우리 오늘은 저 스님이나 골려주세.
그거 재미 있겠는데.
외도들은 절 앞 냇가에 나가 고기를 잡아 한냄비 끓여 놓고 먹다가는 그 앞을 지나는 스님을 불러세웠다.
스님께서 이 고기를 먹고 다시 산 고기를 내놓을 수 있다면 우리가 절을 비워 주겠소.
스님은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말없이 고기를 다 잡수셨다. 그리고는 물가로 가서 토해 내니 고기들은 다시 살아 꼬리를 흔들며 떼지어 퍼드득 거렸다. 스님의 도력(道力)에 놀란 외도들은 즉시 절을 떠났다.
지금도 송광사 계곡에는 그 고기가 서식하고 있는데 토해낸 고기라 하여 「토어(吐魚)」 또는 중택이 중피리라고 부른다.
그후 스님은 길상사를 크게 중창하고 절 이름을 수선사(修禪寺)라 개칭하는 한편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선포하여 납자를 제접하고 선풍(禪風)을 드날렸다.
그러던 어느날.
중국 천태산(天台山)에서 16나한님이 금나라 천자(天子)의 공양청장을 갖고 스님을 모시러 왔다. 그러나 스님은 너무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승려신분으로 왕가(王家)에 가는 것은 불가하다며 사양하셨다. 큰 스님께서는 과거의 인연을 생각하시어 눈만 감고 계십시요. 우리가 모시고 갈 것입니다.
꼭 모셔 가야겠다고 작정한 나한님들은 간곡하면서도 강경하게 권했다.
스님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입정(入定)에 드니 순식간에 중국 천태산 나한전에 도착했다.
절에서는 막 백일기도를 회향하고 있었다. 법회가 끝난 뒤 대신(大巨)들은 스님께 아뢰었다.
천자(天子)께서 등창이 났는데 백약이 무효입니다. 해서 이곳 나한님께 백일기도를 올렸더니 나한님들의 신통력으로 스님을 모셔왔읍니다.
순간 스님의 뇌리엔 산중에서 숯굽던 노인이 떠올랐다.
스님은 천자의 환부를 만지면서 내가 하룻밤 잘 쉬어만 갔지 그대 등 아픈 것은 몰랐구먼. 이렇게 고생해서야 쓰겠는가. 어서 쾌차하여 일어나게. 하니 천자의 등창은 언제 아팠느냐는 듯 씻은듯이 완쾌되었다.
천자는 전생의 인연법을 신기하게 생각하고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다.
스님, 그냥 가시면 제가 섭섭하여 아니 되옵니다.
천자는 사양하는 스님에게 보은의 기회를 청하면서 많은 금란가사와 보물을 공양 올리고는 아들인 世子로 하여금 스님을 시봉케했다. 보조스님께서는 중국의 세자를 시봉으로 삼아 수선사로 돌아오셨다.
보조스님과 함께 온 금나라 세자는 현(現) 송광사가 자리한 조계산 깊숙한 곳에 암자를 짓고 수도에 전념하니 그가 바로 담당(湛堂)국사다. 담당국사가 창건한 이 암자는 천자와 보조스님의 인연으로 천자암(天子庵)이라 불렀다.
담당국사는 그후 얼마전까지 효봉, 구산선사가 주석하던 지금의 「삼일암(三日庵)」이라 명명했고 약수는 「삼일약수(三日泉水)」라 부르고 있다.
지금도 조계산내 암자 중에서 가장 먼거리에 자리한 천자암 뒷뜰에는 보조국사와 세자가 짚고 와서 꽂아둔 지팡이가 뿌리를 내려 자랐다는 두 그루의 향나무(천연기념물 제88호)가 전설을 지닌 채 거목으로 서 있다. 천자암(天子庵)은 불일국제선원 모체라는 설도 있다. 보조국사는 경신년(1210) 3월 우연히 병을 얻었다. 스님은 7일 후 열반에 드실 것을 미리 알아 목욕하신 후 27일 아침 법복을 갈아 입으시더니 설법전에 나가 대중을 운집시켰다.
법상에 오른 스님은
대중(大衆)은 일선자(一着子)를 남김없이 물어라. 내가 마지막으로 설파(設破)하리라.
하시니 한 제자가 물었다.
옛날 유마거사가 로야(毘耶)에서 병을 보였고 오늘 스님께선 조계(曹溪)에서 병이 나셨으니 같습니까, 틀립니까?
너는 같은가 틀린가만 배웠느냐?
스님은 주장자로 법상을 두번 치시고는
천가지 만가지가 여기에 있느니라.
고 이르시고는 앉은 채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문도들은 향화(香花)를 공양 올리고 7일 후 다비하려고 하니 얼굴이 생시와 같았으며 수염이 자라 있었다.
송광사에서는 매년 음력 3월이면 지눌 또는 스스로 목우자(牧牛子)라 불렀던 보조국사 종제를 봉행하며 그 유덕과 가르침을 기리고 있다.
공주의 울음과 불사 <구례·화엄사>
『주지와 대중은 들으라.』
『예.』
『내일 아침 밀가루 항아리에 손을 넣어 밀가루가 묻지 않는 사람을 화주승으로 삼아라.』
때는 조선 숙종조. 임란 때 소실된 장륙전 중창 원력을 세운 대중들이 백일기도를 마치기 전날 밤. 대중은 일제히 백발의 노인으로부터 이같은 부촉을 받았다.
회향일인 이튿날 아침 큰방에 모인 대중은 긴장된 표정으로 차례를 기다려 밀가루 항아리에 손을 넣었으나 한결같이 흰손이 되곤 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주지 계파 스님뿐. 스님은 스스로 공양주 소임을 맡아 백일간 부엌일에만 충실했기에 아예 항아리에 손을 넣지 않았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마지막으로 항아리에 손을 넣었다. 이게 웬일인가. 계파 스님의 손에는 밀가루 한 점 묻지 않았다.
스님은 걱정이 태산 같아 밤새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다.
『너무 걱정 말고 내일 아침 길을 떠나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청하라.』
간밤 꿈에 만났던 그 백발의 노승이 다시 나타나 일깨워 주었다.
『나무 관세음보살.』
새벽 예불 종소리가 끝나자 주지 스님은 가사장삼을 수하고 산기슭 아랫마을로 향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도록 아무도 만나지 못한 계파 스님은 초조와 실망을 금치 못했다.
『아! 내가 한낱 꿈속의 일을 가지고….』
씁쓰레 웃으며 마지막 마을 모퉁이를 돌아설 때, 눈앞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기쁨에 넘친 스님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스님은 남루한 거지 노파의 모습에 이내 실망했다.
그러나 백발노승의 말을 믿기로 한 스님은 노파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눈이 휘둥그래진 거지 노파는 모둘 바를 몰랐다.
『아니 스님, 쇤네는….』
그러나 스님은 그 자리에 꿇어앉아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
『소승의 소망을 불타 없어진 절을 다시 복구하는 일이옵니다. 하오니 절을 지어 주시옵소서.』
『아이구, 나같이 천한 계집이 스님에게 절을 받다니 말이나 되나 안되지 안돼.』
총총히 사라지는 주지 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노파는 결심했다.
『다 늙은 것 주지 스님께 욕을 뵈ㅇ니 셈이니 이젠 죽는 수밖에 없지. 난 죽어야 해. 아무데도 쓸데없는 이 하찮은 몸, 죽어 다음에 태어나 큰 불사를 이루도록 부디 문수 대성은 가피를 내리소서.』
할멈은 그 길로 강가로 갔다. 짚신을 바위 위에 가지런히 벗어 놓고는 강물에 투신자살을 했다.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자 스님은 살인범 누명을 쓰게 됐다.
『아, 내가 허무맹랑한 꿈을 믿다니.』
스님은 바랑을 짊어진 채 피신길에 올라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5∼6년 후.
창경궁 안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울음을 그치지 않는 공주를 큰길에 다락을 지어 가두라는 왕명이 내렸다.
『폐하, 노여움을 푸시고 명을 거두어 주옵소서.』
『듣기 싫소, 어서 공주를 다락에 가두고 명의를 불러 울음병을 고치도록 하라.』
이 소문을 전해 들은 계파 스님은 호기심에 대궐 앞 공주가 울고 있는 다락 아래로 가 보았다.
이때 묘한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울기만 하던 공주가 울음을 뚝 그쳤다.
『공주!』
황후는 방실방실 웃어대는 공주를 번쩍 안으며 기뻐 어쩔 줄 몰라했다.
『아니, 공주가 손가락으로 누구를 가리키며 웃사옵니다. 폐하!』
『허허! 정말 그렇구나.』
황제와 황후는 주위를 훑어보았다.
『폐하! 저기 저 스님을 가리키고 있사옵니다.』
『응, 스님을?』
모든 사람의 시선이 계파 스님에게 쏠렸다.
주위를 의식한 스님이 그만 자리를 떠나려 하자 공주는 또 울기 시작했다.
『여봐라, 저 스님을 모시도록 하라.』
황제 앞에 부복한 스님은 얼떨떨했다.
『폐하, 죽어야 할 몸이오니 응분의 벌을 주시옵소서.』
스님은 지난날의 일을 낱낱이 고하며 눈물을 흘렸다.
울음을 멈춘 공주는 달려와 스님에게 매달렸다. 그리고는 태어날 때부터 펴지 않던 한 손을 스님이 만지니 스스로 펴는 것이 아닌가. 손바닥엔 「장륙전」이란 석 자가 씌어 있었다.
이 모습을 본 황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내 일찍이 부처님의 영험을 알지 못하고 크고 작은 죄를 범하였으니, 스님 과히 허물하지 마십시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소승 몸둘 바를 모르갰습니다. 폐하!』
『공주가 스님을 알아보고 울지 않는 것은 필시 스님과 전생에 깊은 인연이 있음을 뜻함이오. 짐은 이제사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스님을 도와 절을 복구할 터인즉 어서 불사 준비를 서두르시오.』
숙종대왕은 장륙전 건립의 대원을 발하고 전각이 완성되자 「각황전」이라 이름했다. 왕이 깨달아 건립했다는 뜻이다.
이 건물이 바로 숙종 25년에 시작하여 28년에 완성된 2층 팔각지붕의 국보 제67호이다.
태자의 태묘 <광주 신안동>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가 이 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피난갔을 때였다.
왕과 함께 공주로 내려온 왕후가 피난지에서 옥동자를 분만하니 그가 바로 아지대군이다. 나중이긴 했지만 왕손을 얻게 되자 상감과 조정대신들은 모두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며 기뻐했다.
『중전마마!』
『왜 그러느냐?』
『태를 태합에 담았사옵니다.』
『그럼 어서 묻도록 하여라.』
당시 왕손의 태는 함에 담아 무덤 형식의 분을 만들어 묻었다 한다.
중전의 허락을 받아 아지대군의 태는 공주에서 가까운 계룡산에 정성스럽게 묻혔다.
궁을 떠나 피난지에서 태어난 아지대군은 주변이 어수선해서인지 태어나면서부터 잘 먹지를 않고 어쩐 일인지 자주 앓았다. 갓난아기인지라 약도 맘대로 쓸 수가 없어 왕실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생각다 못한 왕비는 어느 날 나들이 채비를 하고 상궁을 불렀다.
『상궁, 불공을 드리러 갈 터이니 즉시 절에 갈 준비를 하도록 하라.』
『마마! 갑자기 불공은 어인 일이십니까?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시온데, 후일로 미루시는 것이 어떠하올지요?』
그때 아기의 보채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중전은 한숨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지대군이 저렇게 보채기만 하고 날이 갈수록 기력을 잃어가니 부처님께 영험을 빌어보려고 그런다.』
왕후가 이틀 동안 계속 불공을 올리고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전날과 같이 몸을 정하게 단장하고 법당에 나가려는데 갑자기 소리없이 방문이 열리면서 붉은 도복을 입은 노스님 한 분이 거침없이 중전의 방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순간, 중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스님의 위엄스런 모습을 보자 합장 배례했다. 신비감을 지닌 노스님은 우렁차면서도 자비로운 음성으로 중전에게 말했다.
『소승은 계룡산에 있사온데 마마께서 왕자로 인하여 심려가 많으시다기에 이렇게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어찌 기별도 없이….』
『무례를 범한 듯하오나 일이 급하고 또 마마께 은밀히 전해야 할 말씀이 있어 이렇게 뵈러 왔사옵니다.』
『은밀히 하실 말씀이라뇨?』
『예, 소승이 생각하기엔 이대로 가다간 대군께서 돌을 넘기기가 어려울 듯하옵니다.』
『아니, 돌을 넘기기가 어렵다뇨? 스님, 무슨 대책이 없을까요?』
왕비의 충격은 말할 수 없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마마, 한 가지 방법이 있사옵니다.』
『스님, 그게 무엇인지 어서 일러주십시오.』
『왕자의 태묘를 빠른 시일내에 옮기십시오. 소승이 알기로는 이전 장소로 전라도 무등산 아래가 가장 적합할 듯하옵니다.』
『전라도 무등산요?』
『예, 그곳은 옛날 도선국사께서 절터로 잡아두었던 곳으로 국사께서 표시로 심어 놓은 은행나무가 서 있을 거입니다. 그 은행나무는 해마다 붉은 은행이 열리는데 그 나무를 베어내고 그곳에 태를 묻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왕자님은 건강하게 자라 백세를 누리실 뿐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영특하여 지혜로우실 것입니다. 그럼 소승 이만 물러갑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저, 스님의 법명은 누구시온지요.』
그러나 스님은 어느새 방문 밖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얘들아, 방금 나가신 스님께서 어디로 가시더냐?』
『마마, 스님이라뇨?』
『아니 문 밖에 있었으면서 사람이 들고 나는 것도 모른단 말이냐?』
중전이 언서을 높이며 상궁들을 나무랐다.
『아무도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않았사옵니다. 마마!』
괴이한 일이었다. 중전은 마치 꿈만 같은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고 스님의 말씀대로 따르자고 아뢰었다. 중전의 이야기를 다 듣고난 임금도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음… 알겠소, 중전.』
임금은 곧 전라도 무등산으로 사람 세 명을 보냈다. 달포만에 수백년 묵은 은행나무를 발견한 그들은 지나가는 노파에게 이 은행나무에 빨간 은행이 열리느냐고 물었다.
『열리고 말구요. 아주 새빨간 은행이 주렁주렁 열린답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절을 지으려고 그 표적으로 심은 나무라더군요.』
이 말을 들은 신하 세 사람은 급히 돌아와 임금께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은 다시 명을 내렸다.
『무등산 아래 은행나무 자리로 왕자의 태를 옮길 것이니 곧 나무를 베어내고 작은 산을 만들 것이며, 계룡산의 태합을 캐 내도록 하라.』
분부받은 신하들이 태합을 캐내니 석분에는 수많은 개미떼들이 새까맣게 붙어 있었다.
태합을 광주 무등산으로 옮기려 하던 날. 전일의 노스님이 다시 중전의 내실에 기척없이 나타났다.
중전은 반갑게 스님을 맞이했다.
『중전마마,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어 이렇게 다시 찾아뵈었습니다.』
『어서 일러주십시오. 무슨 일이든지 말씀대로 따르겠사옵니다.』
『다름 아니오라 태합을 무등산 기슭에 묻으실 때는 반드시 손바닥 만한 금을 함께 묻으시기 바랍니다.』
『스님, 금을 말입니까?』
중전이 의아스러워 되묻자 스님은 그 까닭을 설명했다.
『예, 그것은 땅 속의 잡귀를 물리치기 위한 것이옵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아니, 어느새 자취도 없이 가버리셨네. 이는 필시 부처님께서 내 기도와 정성을 돌보심일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중전은 서둘러 태묘를 이장했다.
그 후 아지태자는 병고없이 잘 자랐으며 왕후의 불심은 더욱 돈독해졌다.
이 태무덤은 상서로운 곳에 태를 묻어 산봉우리처럼 이뤄졌다 해서 서방태봉이라 불리었다.
이 전설의 무덤이 있던 곳은 현 광주광역시 신안동 전남대학교 입구. 1967년까지 작은 인조산(人造山)으로 있다가 헐리었다. 헐릴 당시 그 태묘 안에서는 6구의 시체가 나왔다. 이는 그 자리가 명당이라 하여 몰래 시체를 묻었기 때문이라 한다.
검은소의 울음 <해남 미황사>
『저것이 무엇일까?』
『배지 뭐야. 여보게 아무리 봐도 배처럼 생기지 않았나?』
『그렇기는 하지만 배 같으면 사람이 보일 터인데 사람이 안 보이지 않은가?』
『사람이야 보이거나 말거나 밸세, 배야. 바다에 떠서 움직이는 게 배가 아니고 뭐겠나?』
때는 신라 성덕왕 가절. 지금의 전라도 해남지역 사자포(속칭 사재 끝, 땅끝) 앞바다에 돌배 하나가 나타났다.
이상히 여긴 어부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배 가까이 다가가니 배에서는 아름다운 천악(天樂) 범패소리가 울려퍼졌다.
배는 사람을 피하여 둥실둥실 바다 가운데로 떠나가더니 사람이 돌아서니 다시 육지로 떠오곤 했다.
이러한 소문은 마침내 관가에까지 들어가게 됐다. 관원들이 실지로 나와서 본 후 고을 촌주(지금의 군수나 면장격)에게 보고했다.
관원들의 보고를 들은 촌주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 배는 외국에서 우리나라 사정을 탐지하러 온 배가 아니겠느냐? 배 위에 사람이 없다는 말은 그들의 위장술에 속은 것일 것이니라. 사람이 숨어서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 그렇지 ㅇ낳고서야 그렇게 달아날 이치가 있겠느냐? 그 배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황당한 배라고 아니할 수 없으니 수군을 풀어서 나포토록 하여라.』
촌주의 명을 받은 관원들은 즉시 수군에게 첩보하여 정체 모르는 배를 잡아들이도록 했다. 무장한 수군 수십 명이 목선을 나눠 타고 돌배를 추격했다. 그러나 그 돌배는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바다 위를 날쌔게 달아났다. 아무리 추격해도 쫓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달아나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
추격하던 수군들은 헛수고만 하고 돌아왔다.
『그것 참 알 수 없는 일일세. 어찌 그렇게도 빨리 달아날 수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부리는 배는 아닐 성싶은데… 바닷가에 가끔 신선이 내려와서 배를 부린다더니 아마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걸까?』
『오라, 그래서 배 안에서 풍악소리가 울려 나오나 보군.』
『그것 참 이상한 일일세. 그 배가 정녕 나무로 만든 배는 아니지. 바위를 파서 만든 돌배가 틀림없지?』
『돌배가 어떻게 물에 떠 다닐까?』
『그러기에 신선이 타고 노는 배거나 귀신의 조화라는 것이 아닌가.』
이토록 괴이한 소문은 이웃 마을에까지 널리 퍼졌다.
의조 스님도 이 소문을 들었다. 스님은 곧 촌주, 우감과 장운 두 사미승, 그리고 불자 1백 명을 거느리고 바닷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재를 올렸다. 드리어 배가 서서히 육지를 향해 오기 시작했다. 배가 바다 언덕에 닿자 스님을 필두로 일행을 배에 올랐다.
일행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배 안에는 사람이라곤 그림자 하나 볼 수 없는데 금물을 입힌 쇠사람이 노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옆에 놓인 금함을 열어 보니 그안에는 《화엄경》,《법화경》, 비로자나불, 문수·보현보살 등 40성중, 53선지식, 16나한 탱화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금으로 되어 있어 눈이 부시도록 휘황찬란했다. 그 중에는 금환(金環)과 흑석(黑石) 각 1매가 있었다.
스님은 이 법보들을 조심스럽게 하선시켰다.
불자들이 불상과 경을 언덕에 내려놓고 봉안할 땅을 의논할 때 흑석이 갑자기 벌어지더니 그 속에서 검은소 한 마리가 나타나 삽시간에 커져 큰 소가 됐다.
이날 밤, 의조화상 꿈에 금인이 나타났다.
『나는 우전국이란 나라의 왕이오. 금강산에 만불을 모시려고 불경과 불상을 배에 싣고 왔더니 곳곳에 크고 작은 사찰이 들어서 있어 봉안할 곳이 마땅치 않았소. 해서 그냥 돌아가는 길에 이곳 달마산 산세를 보니 그 형세가 금강산과 대동소이해 가히 경상(經像)을 모실 만하여 배를 멈추고 때를 기다린 것이오.
그래서 이곳이 부처님의 인연토가 되었으니 경전과 불상을 이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면서 누웠다 일어나는 곳에 절을 짓고 경상을 안치하면 국운과 불교가 흥왕할 것이오.』
금인은 이렇게 이르고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이튿날, 의조화상은 금인의 지시대로 소에 불경과 불상을 싣고 길을 떠났다. 검은소는 경치 좋은 곳에 이르러 한 번 누웠다 일어나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산협(山峽)에 이르러 검은소는 크게 울며 눕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 이 자리에 절을 창건하고 불상과 불경을 모신 후 절 이름을 미황사라 명했다. 이는 그 소의 울음소리가 극히 아름다워 「미」자를 취하고 금인의 황홀한 빛을 상징하여 「황」자를 택해 미황사라 칭했다 한다.
또 처음 소가 누웠던 곳에도 절을 세우니 이 절 이름은 통교사라 한다.
통교사, 미황사를 비롯 달마산 내에는 도솔암, 문수암 등 12암자가 산중 각처에 있었으나 지금은 미황사만 남아 옛 전설을 묵언으로 전하고 있다.
전남 해남군 송지·현산·북평 등 3개 면에 위치하면서 영암에 속한 달마산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절경의 명산이다. 문헌에 의하면 1백 여 자가 넘는 수목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으며 최상봉은 순백색의 흰 바위가 우뚝 솟아 사자가 웅크리며 포효하는 모습이고 용호가 어금니를 펴는 것 같다고 한다. 또 멀리서 바라보면 흰눈이 쌓여 허공에 떠 있는 듯하고 구름 속의 신기루처럼 순간적으로 변모하는 이 산은 금강산 절경에 비유되어 왔다.
바로 전설의 돌배가 이 산을 보고 돌아가던 길을 멈춘 것도 이 산이 불교적인 인연 국토임을 알게 한다.
옛날 불교 포교의 원력을 세운 인도의 왕은 경책과 불상을 조성하여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내면 인연있는 땅에 도착하여 저절로 포교가 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불상만 보고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꿈같은 일일 뿐 아니라 국고의 재산이 고갈된다면서 극구 반대했다. 하지만 오아은 불교를 선포하면 나라가 흥하고 백성이 이롭게 도니다는 굳은 신심으로 금불상과 경전 및 철불을 조성하여 배에 띄어 보냈던 것이다.
하룻밤의 사랑과 원한 <고흥·수도암>
몹시 무더운 여름철인데도 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한려수도의 절경은 시원스러웠다. 난생 처음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에 취한 홍총각은 낙방의 시름도, 다시 맞을 과거에 대한 조급함도 다 잊고 있었다.
작고 큰 포구를 따라 풍남리라는 포구에 이르렀을 무렵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거 야단났군!』
다급한 홍총각은 대나무 숲이 우거진 언덕의 작은 초가집으로 무조건 뛰어들었다.
『죄송하오나 잠시 비를 좀 피해 가겠습니다.』
비록 차림새는 초라하나 기골이 장대하고 수려한 미모의 총각이 들이닥치자 방 안에서 바느질하던 여인은 질겁을 하며 놀랐다. 여인은 숨을 돌리며 진정한 뒤 입을 열었다.
『나그네길인가 보온데 걱정 마시고 비가 멈출 때까지 쉬어 가십시오.』
여인의 음성은 외모만큼 고왔으나, 어딘가 쓸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홍총각은 야릇한 충동을 느꼈다.
『식구들은 모두 어디 가셨나요?』
『이 집엔 저 혼자 있사옵니다.』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어찌 홀로 살고 있을까. 홍총각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라도 하려는 듯 여인은 자신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고을에서 미녀로 알려져 총각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됐던 그녀의 이름은 임녀. 수없이 남의 입에 오르다 결혼을 했으나 1년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그때 심적 충격이 컸던 그녀는 세상이 싫어져 대밭 가운데다 초당을 짓고 홀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야기가 끝나도록 비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빗줄기는 더욱 세차게 퍼부었다.
『갈 길은 먼데 이거 큰일인걸….』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도 홍총각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누추하지만 여기서 하룻밤 주무시고 가시지요.』
비는 오고 날은 어두우니 임녀는 나구네를 딱하게 여겨 어려운 결심을 한 것이다.
『옛부터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부엌에서 하룻밤 지샐까 하오니 어서 방으로 드십시오.』
홍총각은 펄쩍 뛰었다. 한참 후 옥신각신 양보하다 결국은 한방에서 지내기로 결정을 내렸다. 홍총각은 아랫목에서 임녀는 웃목에서 자기로 한 것이다.
막상 잠자리에 들었으나 두 사람 다 잠이 오질 않았다. 밖에선 세찬 빗소리가 여전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홍총각은 임녀 생각으로 가득했다. 홍총각은 참다 못해 떨리는 손을 뻗어 여인의 손을 잡았다.
『아이 망칙해라! 왜 이러세요?』
그녀는 놀라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부인, 나와 혼인해 주오. 우연히 이렇게 만나 하룻밤 지내는 것도 큰 인연이 아니겠소.』
홍총각의 목소리는 떨렸다.
『혼인을요? 그런 농담 거두십시오. 한 여자가 어찌 두 남편을 섬기겠습니까?』
여인은 침착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총각은 대장부가 한번 뺀 칼을 다시 넣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늘을 두고 나의 사랑을 맹세하겠소. 장부일언은 중천금이라 했으니 이 마음 결코 변치 않으리다.』
이렇듯 간절한 속삼임에 임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홍총각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만일 당신이 나를 버리시면 이 몸은 구렁이가 되어 당신을 말려 죽일 거예요.』
『어허, 공연한 걱정을 다하는구려. 날이 새면 당장 고향에 가서 혼인 채비를 해가지고 올 것이오.』
다음날 아침, 홍총각은 꽃가마로 모시러 오겠다고 큰소리를 치며 길을 떠났다.
홍충각이 떠난 지 열흘.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임녀의 마음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이 가고 해가 바뀌었다. 홍총각의 소식은 점점 아득하기만 했다. 뒷동산에 올라가 하염없이 먼 산과 바다를 바라보며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마침내 임녀이 마음엔 증오의 불길이 일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의원은 「상사병」엔 백약이 무효라며 돌아갔고, 홍총각과 만난 지 꼭 1년이 되는 날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한편 고향으로 돌아온 홍총각은 임녀와으이 약속은 까맣게 잊은 채 책만 열심히 읽더니 과거에 급제하여 함평 현감으로 부임했다. 그리고는 양가댁 규수를 아내로 맞아 잘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현감은 거나하게 술이 취해 잠자리에 들었다. 이날따라 이상한 소리가 현감의 잠을 흔들어 깨웠다.
「스르륵 스르륵」그것은 커다란 구렁이가 기어드는 소리였다.
『아니 구렁이가? 게 누구 없느냐! 저 구렁이를 빨리 때려잡아라.』
현감의 아닌 밤중 호령에 하인들이 몰려들어 현감이 자는 방문을 열려고 했으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현감의 황급한 호령에 하인들은 몽둥이로 문을 부수려 했으나 이번엔 손에 쥐가 내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놈들 뭣하고 있느냐! 어서 구렁이를 때려잡지… 아악!』
현감은 말을 채 맺지 못한 채 비명을 질렀다.
구렁이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현감의 몸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현감은 숨이 콱콱 막히면서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관세음보살을 염했다. 이때 스산한 바람과 함께 징그러운 구렁이가 머리를 추켜들고 혀를 날름거리는 것이 아닌가.
『여보! 나를 모르겠소?』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다. 구렁이 입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나오다니.
『나는 당신의 언약을 믿고 기다리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임녀입니다. 맹세를 저버리면 구렁이가 되어 당신을 죽이겠다던 그날 밤을 잊으셨군요. 기다림에 지친 나는 죽어 상사뱀이 되었다오.』
『아-. 내가 지은 죄의 업보를 받는구나.』
현감은 총각 시절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탄식했다.
그냘부터 밤이 깊어지면 이 상사뱀은 현감의 잠자리에 찾아왔다가 새벽녘이 되면 온데간데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현감은 병든 사람처럼 누렇게 얼굴이 뜨면서 마르기 시작했다. 유명한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처방을 했으나 구렁이는 밤마다 찾아왔다. 생각다 못해 산속 깊이 살고 있는 어느 도승을 찾아가 간곡히 당부했다.
『스님, 제발 살 길을 일러주십시오.』
스님은 임녀가 살던 초당을 헐고 암자를 지은 후 크게 위령제를 올리라고 일러줬다. 현감은 그대로 따랐다. 그 후 구렁이는 나타나지 않았으니 일러줬다. 현감은 그대로 따랐다. 그 후 구렁이는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 암자가 바로 고흥 수도암이라 한다.
자치샘의 참외 <화순·학다리>
아무리 더운 여름날에도 땀을 식힐 정도로 시원한 샘물이 전라도 화순 고을에 있었다. 이름하여 「자치샘」.
이 고을 사람들은 역경에 처하거나 불행을 만나면 으레 샘물을 정화수로 떠놓고 신령님께 소원을 빌었다.
고려 말엽 이 고을에 조씨 성을 가진 한 상민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양반의 말에 대꾸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에게는 품행이 조신하면서도 미모가 특출한 분이라는 외동딸이 있었다. 아직 출가 전인 그녀의 효심은 지극했다. 분이는 아버지가 옥에 갇히자 날마다 첫새벽이면 이 자치샘의 정화수를 길어다 신령님께 아버지의 석방을 축수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의 어둠 속을 더듬으며 샘터에 다다라 보니 웬 중년 부인이 자기보다 먼저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분이는 내심 아버지를 향한 자신의 정성이 부족한 듯싶은 자책감에 내일은 더 일찍 오리라 다짐했다.
다음날 새벽. 분이는 어제보다 더 일찍 집을 나섰다. 캄캄한 산길을 무서운 줄도 모르고 걸음을 재촉해 자치샘에 당도하니 뜻밖의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큰 참외 한 개가 둥둥 샘물 위에 떠 있는 게 아닌가.
『으응? 웬 참외일까? 간밤에 누가 따다 넣은 건가, 아니면 나보다 먼저 누가 다녀갔나?』
분이는 이 참외를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새벽 공기를 울리며 이상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소녀여, 참외를 먹어라. 그 참외는 너 먹으라고 놓아둔 것이니 주저치 말고 어서 건져 먹어라.』
분이는 깜짝 놀라 말소리가 들리는 곳을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필경 산신령의 계시인가 보구나. 왜 먹으라고 했을까. 아무튼 먹으라고 하시니 먹어야지.』
분이는 조심스럽게 참외를 건져 먹고는 여느 날처럼 물을 길어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분이는 그날부터 태기가 있더니 배가 불러오는 것이 아닌가. 처녀가 아기를 잉태하다니. 실로 기막힐 노릇이었다. 분이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생죄인이 되고 말았다.
달이 차자 분이는 옥동자를 순산했다. 그녀는 견딜 수 없는 수치감 때문에 아이를 기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솜보자기에 아이를 싸서 지금의 학다리 마을 근처 논두렁에 버렸다.
다음날 저녁, 이곳을 지나가던 한 길손이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고 걸음을 멈췄다. 커다란 학 한 마리가 이상한 물건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이하게 생각한 길손은 학이 있는 곳으로 가 보았다.
사람 기척이 나자 학은 날아가고 그 자리엔 갓난아기가 솜에 싸여 있었다.
『아니 이건 어린아기가 아닌가? 못된 것들, 천벌을 받을 줄 모르고.』
길손은 아기를 안고 관가로 갔다.
그는 원님 앞에 나아가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소인이 먼 길을 다녀오다 논두렁가에서 이 갓난아기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옥동자를 학이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인이 가까이 다가가자 학은 날아가고 제가 이 아기를 데려오게 된 것입니다.』
『허어! 학이 품고 있었다고. 필시 이 아이가 자라면 장차 비범한 인물이 될 징조로구나. 이방은 이 아기의 어미를 찾아 데려오도록 해라.』
마침 슬하에 손이 없던 길손은 이 아기가 장차 크게 될 인물이라는 원님의 말에 자기가 기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원님께 간청했다.
『소인이 자식이 없어 적적하오니 이 아기를 기르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음 그렇다면 분부 있을 때까지 우선 데려다 기르도록 해라.』
길손은 어린아이를 안고 돌아갔고, 이방은 아기 어머니를 찾아나섰다.
이방은 아기 어머니 분이를 쉽게 찾아 관가로 데려왔다. 분이는 원님 앞에 대령하여 국문을 받기 시작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낳은 죄, 벌하여 주옵소서.』
분이는 원님의 분부를 기다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아기를 낳게 된 연유를 소상히 아뢰어라.』
원님은 아기가 비범치 않다고 생각해서인지 관대한 어투로 물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녀의 아버님은 양반에게 말대답을 했다는 죄로 한산리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버님의 방면을 축수하느라 새벽마다 자치샘으로 정화수를 길러 다녔는데 어느 날 샘물 위에 떠 있는 참외를 신령님 분부로 먹었습니다. 그날 이후 배가 부르기 시작하여 아기를 낳게 됐습니다.』
『음, 예사로운 일이 아니로구나.』
『원님, 간청하옵나니 죄 없으신 저의 아버님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방면하여 주십시오.』
『음, 네 효심이 정녕 갸륵하구나. 알겠으니 염려하지 말아라.』
딸의 효성으로 조씨는 옥살이를 벗어났다. 이 소문이 고을에 퍼지자 마을 사람들도 분이의 효심을 산신령이 가상히 여긴 것이라며, 학이 아기를 품고 있던 곳을 학다리 마을이라 불렀다.
한편 그 옥동자는 길손의 집에 가서 잘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순하고 총명하여 남의 이목을 끌더니 성장해서는 출가하여 스님이 됐다. 그 스님이 바로 송광사 16국사 중의 초대국사인 불일 보조국사라 한다.
그러나 영암 구림리에서는 시내에 떠 있는 오이를 먹고 도선국사를낳았다는 등 비슷한 전설이 간혹 전한다. 이는 여자의 성숙기 16세를 뜻하는 「파과지년(破瓜之年)」이란 말의 「과」자에서 비롯된 듯하다는 설도 있다. 과 자를 중심으로 해자(解字)하면 두 개의 팔 자가 된 데서 16세를 뜻한다.
전설과는 달리 지눌 보조국사는 1158년 황해도 서흥(당시의 동주)에서 국학학정을 지낸 정광우와 부인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다. 어려서 몸이 허약했던 이 아이는 부모의 지극한 정성으로 8세 때 건강을 회복했다.
아버지 정씨는 아들 건강회복을 위해 부처님께 출가를 시키기로 발원하며 기도했다 한다. 그래서 이 아이는 건강이 회복된 8세 때 종휘선사를 찾아가 출가한 뒤 26세 때 승과에 합격했다. 그 후 스님은 조계산 송광사에 정혜사를 개창하고 정혜결사 정신을 꽃피워 우리 역사의 종교적 거성이 되었다.
며느리의 지혜 <영암·도갑사>
월출산 산마루에 붉은 노을이 물들 무렵. 드넓은 절터 한복판에 한 노인이 흰 수염을 날리며 못박힌 듯 망연히 서 있었다. 간혹 깊은 한숨을 몰아쉬면서.
발 아래 널려 있는 서까래를 번쩍 세워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아주 정중하게 다시 눕힌 후 자로 재기 시작했다.
석양빛마저 감춘 어둠 속에서도 노인은 되풀이하여 서까래를 쟀다.
『이상한 일이다. 아무래도 짧으니 알 수 없는 일이로구나.』
노인은 중얼거리며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때는 신라 말엽.
왕은 날로 기우는 국운을 걱정하여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 기슭에 99칸의 대찰을 세우도록 명했다.
당시 왕궁 이외의 건물은 백칸을 넘지 못하도록 국법에 정해져 있어 왕은 아쉬움을 금치 못한 채 99칸 대웅보전을 신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게 건립할 것을 명한 것이다.
이때 서까래를 맡은 목공은 대목(大木) 사보라 노인이었다.
건물이 아름답고 웅장하려면 하늘을 차고 나를 듯 치솟은 지붕의 멋을 한껏 살려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서까래를 잘 다듬어야 했다. 이런 연유에서 당대의 뛰어난 대목 사보라 노인에게 이 일이 맡겨졌다.
팔순이 넘은 노인은 이 불사를 필생의 작업으로 삼아 온 정성을 다해 나무를 깎고 다듬었다. 젊은 목수의 도움도 마다하고 5백 개의 서까래가 상량을 며칠 앞두고 다 깎여졌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낱낱이 자로 재면서 깎은 서까래가 도면보다 짧게 끊겨져 있었다.
노인은 재고 또 재 보았으나 한번 짧게 끊긴 서까래가 길어질 리 없었다.
『새로 나무를 구입할 수도 없고, 제 날짜에 법당을 지을 수 없으니 왕명을 어긴 죄 어이할까.』
노인은 절망을 되씹었다.
『80평생 나무와 함께 늙어온 내가 이제 평생을 건 마지막 공사에 실수를 하다니….』
국수(國手)의 말을 듣는 자신의 명예가 땅에 떨어져 비참해지는 것을 눈앞에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서 있는 나무만 보아도 나무의 나이를 알았고, 껍질 속이 얼마나 굳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사보라 노인에게 있어 집짓는 일은 창조의 희열을 동반하는 예술이며 삶의 보람이었다.
노인은 절망의 밑바닥에서 안간힘을 썼다. 생명의 불꽃이 하루 아침에 꺼지는 듯했다. 집에 돌아온 노인은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침식을 끊고 사람을 멀리했다. 온 생애가 마치 땅 속으로 잦아드는 것만 같았다. 노인은 평생 지은 집들을 하나하나 기억에 떠 올렸다.
맨 처음 스승에게 허락을 받고 끌을 쥐었을 때의 감회가 새삼 느껴지자 온몸에 전류가 감돌며 주먹에 힘이 솟았다.
『다시 시작해야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며느리가 갖다 놓은 약그릇을 드는 순간 손이 힘없이 늘어졌다.
『어떻게 무엇으로 다시 시작한단 말인가.』
노인은 다시 자리에 눕고 말았다.
밥상을 들고 들어온 며느리가 조심스럽게 상을 내려놓고 시아버지 곁에 단정히 앉았다.
『아버님, 저녁 진지 드셔요. 약도 안 잡수셨군요.』
『아니다. 생각이 없다. 상을 물리려므나.』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지요. 며칠째 자리를 걷지 않으시니 염려가 크옵니다.』
『아무 일 아니다. 너희가 알 일도 아니고, 내가 무슨 병에 걸린 것도 아니니 걱정 말아라.』
『하오나 저는 이제 겨우 시집온 지 열흘이온데 집안에 우환이 있으면 모두 제 탓인 듯하와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아가야, 네 탓도 누구의 잘못도 아닌 내 잘못이니 심려치 말아라.』
『아버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하옵니다. 혹 저의 미욱한 지혜라도 도움이 도리지 모르오니 어서 사연을 말씀해 주십시오.』
노인은 며느리의 간곡한 청에 못이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며느리는 눈앞이 캄캄했으나 아무 기색없이 물러나와 마당에 섰다. 온 집안이 무거운 근심 속에 잠겨 있을 뿐 대책이 없었다.
상량을 사흘 앞두고 공사를 맡은 벼슬아치들은 영문도 모르고 사보라 노인의 병 위문을 왔다.
『사보라 노인, 이제 상량을 하고 서까래만 올리면 일은 거의 끝난 샘이니 빨리 부처님 은혜로 쾌차하길 바라겠소.』
노인은 말을 잃었다. 벼슬아치를 전송하고 돌아서는 며느리의 눈앞에 이상한 것이 비쳤다. 한 줄로 가지런한 서까래가 두 줄로 보였다. 처마 밑으로 바짝 다가가서 보니 다시 한 줄. 며느리는 비로소 깨달았다. 집안과 바깥 불빛이 어우러져 그림자가 그렇게 보인 것이었다. 순간 며느리는 시아버님께 뛰어갔다.
『아버님, 서까래가 짧게 다듬어졌다 하셨지요?』
『그래, 그렇다만 아기 네가 갑자기 웬일이냐.』
『다름 아니오라 짧은 서까래에 다른 서까래를 겹쳐 대면 더 웅장하고 튼튼하지 않겠습니까, 아버님.』
얼른 이해가 안가 한동안 망연했던 노인의 눈앞에 아직까지 없었던 날아갈 듯한 한 채의 건물이 보였다.
엷은 흥분이 노인의 전신에 생기를 돋구었다.
『그렇구나, 아가야. 부연(附延)하면 된다. 그 육중하면서도 날렵한 몸매가 선하구나. 부연한 그 지붕의 멋을 감히 누가 흉내낼 수 있겠느냐. 어서 채비를 차려라.』
『아버님 야심하온데 어떻게? 성치도 않으신 몸으로.』
『아니다. 가서 부연목을 재어볼 것이다.』
노인은 언제 누워 있었느냐는 듯 원기왕성했다. 드넓은 절터에서 온몸에 달빛을 받으며 기둥과 기둥, 대들보에서 처마끝을 재는 노인의 날렵한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듯했다.
교교한 달빛 속에 흰 수염을 날리며 신들린 듯 부연을 켜기 시작한 노인의 표정은 엄숙 또 엄숙했다.
이리하여 세워진 도갑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부연식(附延式) 지붕 건물이 되었다.
며느리가 도와서 선 서까래라 해서 부연(婦延)이라고도 한다. 지방 문화재 제42호였으나 75년 화재로 전소되었으나 79년 옛모습 그대로 다시 중창되었다.
진표율사의 구도 <김제 금산사>
때는 신라 성덕왕대. 전주 벽골군 산촌대정 마을(지금의 김제군 만경면 대정리) 어부 정씨 집에 오색구름과 서기가 서리면서 아기 울음 소리가 울렸다.
이 상서로운 광경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장차 크게 될 인물이 태어났다고 기뻐하며 축하했으니 이 아기가 바로 유명한 진표율사다.
아버지 진내말과 어머니 길보랑 사이에서 태어난 진표는 자라면서 주위 사람들의 칭찬을 한몸에 받았다.
율사가 11세 되던 어느 봄날.
친구들과 산에 놀러간 소년은 개구리 10마리를 잡아 끈에 꿰어 물속에 담가 두고는 그만 잊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봄 다시 산에 가게 된 소년은 작년에 두고온 개구리 생각이 나서 가보니 개구리 10마리가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본 순간 소년의 가슴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개구리를 풀어 준 소년은 친구들과 떨어져 조용한 곳에서 생각에 잠겼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왜 태어나서 죽는 것일까?」하는 생각에 골똘하다 문득 먼 산을 바라본 그는 그곳에 가보고픈 충동을 느꼈다. 어떻게 산을 넘고 내를 건넜는지 자신도 모르게 달려 어두워서 당도한 곳이 모악산 기슭에 자리한 금산사였다.
『날이 저물었는데 어디서 온 누구냐?』
『예, 대정리에 살고 있는데 저도 모르게 오게 됐습니다.』
『오, 전생의 인연지인 모양이구나. 그래 잘 왔다. 언젠가는 이곳의 주인이 되겠구나.』
노스님은 소년이 기특한 듯 쓰다듬어 주며 반겼다.
이튿날 집에 돌아오니 집에선 소년이 금산사에 다녀온 것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장정도 이틀이 걸리는 먼 거리였기 때문이다.
소년은 그날부터 말이 적어지고 늘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저는 인생이 무엇인가를 공부하기 위해 출가하여 스님이 되겠어요.』
『어, 그래. 장한 생각이구나. 그러나 너는 아직 어리니 3년만 더 집에서 시중들다가 가도록 해라.』
비록 어부였지만 불심이 돈독한 아버지는 아들의 결심을 막지 않았다.
아버지의 이해와 격려 속에 소년은 평생 해야할 효도를 3년간에 다하기 위해 열심히 부모님을 도우며 봉양했다. 어느 날 소년의 아버지는 두 자나 되는 큰 붕어를 낚아 왔다. 그 금붕어는 소년을 보자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만 같았다. 소년은 아버지께 금붕어를 자신이 키우겠다며 팔지 못하게 부탁했다.
금붕어에게 먹이를 주며 정성껏 돌봐주는 가운데 어느덧 3년이 흘러 소년은 집을 떠나게 됐다. 집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도련님, 이제 저도 인연이 다하여 멀리 떠나게 되었습니다. 부디 출가하시거든 성불하시어 많은 중생을 제도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그간의 은혜에 보답키 위해 제가 살던 곳에 값진 것 하나 놓고 가니 그것을 팔면 부모님께서는 평생 편히 지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꿈에 웬 처녀가 나타나 이렇게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 마지막으로 금붕어에게 밥을 주고 작별 인사를 하려고 보니 붕어는 죽어 있었고 항아리 속에는 큰 진주가 하나 있었다. 소년은 부모님께 진주를 드리면서 간밤 꿈 이야기를 하고는 곧장 3년 전에 가 보았던 금산사로 떠났다.
덕 높으신 순제법사 문하에 들어간 소년은 3년간의 행자 수행을 거쳐 진표란 법명을 받았다.
『여기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과 점찰선악업보경(占擦善惡業報經)이 있으니 수지독송하고 정진하여 미륵부처님과 지장보살을 친견, 중생구제의 법을 널리 펴도록 해라. 법을 구함은 쉬운 일이 아니니 큰 인욕과 원을 갖고 공부해야 할 것이니라.』
『예, 명심하여 수행하겠습니다.』
미륵부처님과 지장보살 친견을 서원한 진표 스님은 그 길로 스승께 3배를 올린 후 운수행각에 나섰다.
선지식을 두루 만난 진표 스님은 공부에 자신이 생기자 찐쌀 2말을 가지고 변산 부사의방에 들어갔다. 하루에 쌀 5홉을 양식으로 하고 그중 1홉은 절을 찾는 쥐에게 먹였다. 그렇게 3년간 뼈를 깎는 고행을 하면서 스승이 내리신 두 권의 경을 공부했으나 아무런 감응이 없자 스님은 스스로 절망했다.
진표 스님은 업장이 두터워 평생 공부해도 도를 얻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이 몸 버려 도를 얻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는 높은 절벽 위에서 업장 소멸을 기원하며 몸을 던졌다. 이때였다. 몸이 막 공중에서 땅으로 떨어지는데 어디선가 홀연히청의동자가 나타나 두 손으로 스님을 받아 절벽 위에 올려 놓았다. 이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진표 스님은 다시 생각을 고쳤다.
『이는 필시 부처님의 가피일 게다. 죽은 몸 다시 태어난 셈이니 더욱 참회 정진하리라.』
스님은 바위 위에서 오체투지로 절을 하며 3·7일 기도에 들어갔다.
3일이 지나자 진표 스님의 손과 무릎에선 피가 흘렀다. 7일이 되덛날 밤 지장보살이 금장을 흔들며 나타났다.
『오, 착하고 착하구나.네 정성이 지극하니 내 친히 가사와 발우를 주노라.』
지장보살의 가호를 받은 진표 스님의 몸은 상처 하나없이 원상태가 되었다.
스님은 이같은 신령스런 감응에 감동하여 남은 기도 기간 동안 더욱 용맹정진했다. 단식을 하여 허기진 상태였으나 날이 갈수록 정신은 또렷해지기만 했다.
3·7일 기도회향일. 진표 스님은 드디어 천안을 얻어 도솔천중이 오는 형상을 보았다. 이때였다.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도솔천 대중의 호위를 받으며 내려와 스님의 머리를 만지면서 말했다.
『계를 구하기 위해 이같이 신명을 다해 참회하다니 과연 장하구나! 이 간자를 줄 터이니 중생을 구제토록 해라.』
지장은 계본을 주고 미륵은 나무간자를 주었다. 간자에는 제8간자와 제9간자라 쓰여 있었다. 미륵보살이 말했다.
『이 간자는 내 새끼손가락 뼈로 만든 것으로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을 비유한 것이니라. 8자 본각은 성불종자를, 9자 시각은 청정비법을 뜻하니 이들을 점찰 방편에 사용하여 중생을 제도하면 되느니라.』
수기를 준 미륵과 지장보살은 꽃비와 풍악이 울리는 가운데 오색 구름을 타고 홀연히 사라졌다.
지장과 미륵 두 보살로부터 수계를 받은 진표 스님은 산에서 오색 구름을 타고 홀연히 사라졌다.
지장과 미륵 두 보살로부터 수계를 받은 진표 스님은 산에서 내려와 금산사로 갔다. 때는 경덕왕 21년(762) 4월이었다.
스님은 금산사를 대가람으로 중창할 원력을 세웠다.
『옳지, 저 연못을 메꾸고 거기다 미륵전을 세우자.』
경내를 둘러보던 스님은 사방 둘레가 1km나 되는 큰 호수에 눈이 머물렀다. 불사는 바로 시작됐다. 돌과 흙을 운반하여 못을 메꾸었다. 그러나 아무리 큰 바위를 굴려 넣어도 어찌 된 영문인지 연못은 메꿔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더이상 인력과 비용을 댈 수가 없게 되자 진표 스님은 지장보살과 미륵불의 가호 없이는 불사가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스님은 곧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미륵부처님 그리고 지장보살님 제게 힘을 주옵소서.』
백일기도를 회향하는 날이었다.
『이 호수는 9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곳이므로 바위나 흙으로 호수를 메꾸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숯으로 메꾸도록 해라. 또 이 호숫물을 마시거나 목욕을 하는 사람에게는 만병통치의 영험을 내릴 것이니 중생의 아픔을 치유하고 불사를 원만 성취토록 해라.』
미륵불과 지장보살은 진표 스님 앞에 강림하시어 이렇게 계시했다.
진표 스님은 신도들에게 말했다.
『누구든지 병이 있는 사람은 금산사 호숫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면 무슨 병이든 완치될 것입니다. 그 대신 반드시 숯을 양것 가져다 호수에 넣고 자신의 업장을 참회하여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신도들은 수군대기 시작했다.
『스님이 백일기도를 마치고 나서 좀 이상해지셨나 봐요.』
『아녀, 절을 세울 수가 없으니까 이젠 별소릴 다하는군.』
그러던 어느 날.
경상도에서 한 문둥병자가 숯을 한 짐 지고 금산사에 도착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스님, 저는 기쁜 마음으로 미륵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왔습니다. 설사 스님께서 절을 세우기 위해 거짓말을 하셨다 하더라도 불사를 위해 하신 말씀이니 기꺼이 동참할 것입니다.』
문둥병 환자는 지고 온 숯을 호수에 넣고 발원했다.
『부처님이시여! 이 호수의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한 후 제 몸의 병이 낫지 않더라도 저는 스님이나 부처님을 원망치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저의 이 작은 보시공덕으로 불사가 원만히 이뤄지고 다음 생에는 좋은 인연받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를 마친 문둥병자는 호숫물을 마시고 막 목욕을 끝내는 순간 자신의 눈을 씻고 또 씻었다.
분명 못가에 서기가 피어 오르면서미륵부처님이 나타나시더니 자기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 착하고 착하구나. 과연 장한 불심이로구나.』
미륵부처님은 문둥병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스님! 제 몸이 씻은듯이 깨끗해졌습니다.』
문둥병자는 가뻐 어쩔 줄 몰라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흉칙하던 몸이 말끔해지다니. 너무도 신통한 부처님의 가피였다.
『오! 미륵부처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신도들은 잠시나마 진표 스님을 의심한 것을 참회하며 너도나도 숯을 지게에 가득히 지고 금산사 호수로 모여들었다.
소문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졌다. 금산사 호수에는 하루에도 수천명의 환자들이 줄을 이었다.
대복과 오리정 구렁이 <남원·대복사>
지금부터 약 1백50년 전. 춘향이와 이도령 이야기로 유명한 전라도 남원 고을에 대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힙이 세고 매우 용감하게 생긴 이 사람은 맹리 말을 타고 전주 관가에 공문서를 전달하는 일을 했다.
어느 날, 전주에 서류를 전하고 오는 길이었다. 하지 무렵이라 해가 한창 긴 때인데 그날따라 흐린 탓인지 여느 때보다 일찍 저물었다.
「주막에서 하룻밤 묵어갈까? 아냐, 부인이 기다를 텐데 어서 가야지.」
대복은 사위가 어두워지자 말 위에서 잠시 망설였으나 집에서 기다릴 아내를 생각하고는 다시 갈 길을 재촉했다.
춘향과 이도령이 이별했다는 오리정 고개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주위는 조용하여 말발굽 소리만 요란할 뿐인데 어디선가 대복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대복은 말의 속도를 줄이고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귀를 기울였다.
『대복아! 대복아!』
분명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발을 멈추고 소리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대복은 그만 『앗!』하고 질겁을 했다. 바로 어깨 너머에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큰 구렁이가 두 눈에 시퍼런 불을 켜고 혀를 날름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처럼 담이 크고 용감한 대복이도 이번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힌 뒤 점잖게 말했다.
『그래, 무슨 연유로 남의 바쁜 걸음을 지체케 했느냐?』
『나는 백년간이나 이 오리정 연못을 지켜온 「지킴」인데, 흉한 탈을 벗고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소원이다. 그래서 오늘밤 내 너를 잡아먹고 나는 사람으로 태어날 테니 너는 이 연못의 지킴이가 되어 줘야겠다.』
순간 대복은 허리에 찬 칼을 뽑아들었다. 그때였다. 허공에서 한 줄기 빛이 일더니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오리정 연못의 지킴이는 듣거라. 대복이는 본인의 심성도 착하지만 그 부인 불심이 남편을 위해 부처님께 간절이 기도하고 지성껏 시주하니 그 정성과 공덕을 보아 해치지 않도록 해라.』
평소 아내가 절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대복이었으나 그날은 자기도 모르게 합장배례하고는 관음보살님께 감사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과음보살은 간 곳이 없었다.
『그대는 부인의 공덕으로 오늘 목숨을 건지었소. 그러나 나는 구렁이 탈을 벗지 못해 한이 되니 집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부처님께 기도해 주실 부탁하오.』
구렁이는 이처럼 신신당부를 하고는 힘없이 연못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복은 「어휴, 이제 살았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내 집에 가거든 네 부탁을 잊지 않고 열심히 기도할 것을 약속하마.』
대복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당신 혹시 절에다 많은 시주를 한 일이 있소?』
『들어오시자마자 웬 시주 이야기세요?』
절에 가는 것을 마땅찮아 하던 남편이 시주 말을 꺼내자 부인은 내색을 꺼렸다.
『부인, 그렇게 곤란해 하지 않아도 되오.』
눈치를 챈 대복은 담뱃대에 불을 붙인 뒤 오리정에서 일어났던 아슬아슬한 사연을 아내에게 들려줬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내는 여러 차례 관세음보살을 뇌이면서 부처님께 감사했다.
『실은 당신께 꾸중들을까 염려해서 밝히지 않았으나 얼마 전 대곡사에 쌀 30석을 시주하고 삼칠일 기도를 올렸습니다. 바로 어제 회향했어요.』
『당신의 그런 지극한 정성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오리정 연못의 지킴이가 되었을 것이오. 여보, 정말 고맙소.』
그날부터 대복은 착실한 불제자가 되었다.
『부인, 부처님 가피가 아니었다면 내 어찌 당신 곁에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겠소. 내 그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 불사를 하고 싶은데 당신 뜻은 어떻소?』
『그야 물으시나마나지요. 적극 찬성이에요.』
『그럼 우리절 대곡사 법당이 굉장히 낡았던데, 우리집 재산을 다 바쳐서라도 법당을 중창하도록 합시다.』
대복이 내외는 그날로 대곡사 법당 중창불사를 시작, 법당을 새로 지었다.
낙성식 날이었다. 대복이는 많은 신도들과 축하객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자신이 법당을 새로 짓게 된 사연을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피에 감탄을 연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남원부사가 말했다.
『듣고 보니 부처님의 가피가 진실로 하해와 같이 놀라울 뿐이오. 더욱이 그대 부인의 정성은 더욱 감동스러우며, 부처님이 계신 훌륭한 법당을 새로 지은 그 불심 또한 가상타 아니할 수 없소. 이러한 대복의 불심과 사연을 후세까지 기리기 위해 이 절 이름을 대곡사에서 대복사로 바꿔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주지 스님의 의향은 어떠하신지요?』
『소승도 부사님 생각과 꼭 같습니다. 대복이란 크게 복이 깃든다는 뜻이니 아주 훌륭한 이름입니다. 이왕이면 부사님께서 「대복사」현판을 오늘 써 주시지요.』
부사는 쾌히 그 자리에서 대복사란 현판 글씨를 썼다.
그 후 대복이는 오리정 지킴이가 사람으로 환생하길 기원하는 백일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마치는 날 밤이었다.
『고맙소. 그대 때문에 나는 남자로 태어났소. 당신이 더욱 선업을 쌓고 정진하여 꼭 극락왕생하길 나는 기원하겠소.』
꿈에서 깬 대복은 부처님께 감사의 절을 거듭거듭했다.
신비로운 법당 <변산·내소사>
『스님, 이제 그만 들어가시지요. 이렇게 나와서 1년을 기다려도 목수는 오지 않으니, 언제 대웅전을 짓겠습니까? 내일은 소승이 좀 미숙해도 구해 오겠습니다.』
『허, 군말이 많구나.』
『그리고 기다리실 바엔 절에서 기다리시지 하필이면 예까지 나오셔서….』
『멍청한 녀석. 내가 기다리는 것은 목수지만 매일 여기 나오는 것은 백호혈(白虎穴)을 지키기 위해서니라.』
노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늙은 호랑이가 포효하며 노승 앞에 나타났다.
호랑이의 안광은 석양의 노을 속에 이글거렸다. 아무 일 없었던 듯 노승이 주장자를 휘저으며 호랑이 앞을 지나려 하자 대호는 앞발을 높이 들고 노승을 향해 으르릉댔다.
『안된다고 해도 그러는구나. 대웅보전을 짓기까지는 안돼.』
노승은 주장자를 들어 소나무 허리를 때렸다.
「팽」하는 소리가 나자 호랑이는 「어흥」하는 외마디 울부짖음을 남기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날 저녁 타 버린 대웅전 주춧돌에 앉아 산을 내려다보던 노승은 사미승을 불렀다.
『너 일주문 밖에 좀 나가 보아라. 누가 올 터이니 짐을 받아 오도록 해라.』
『이 밤중에 어떻게 일주문 밖을 나가라고 하십니까?』
『일주문 밖과 여기가 어떻게 다르기라도 하단 말이냐?』
마지못해 대답을 하고 간신히 일주문에 다다른 선우의 가슴은 철렁했다.
무슨 기다란 동물이 기둥에 기대어 누워 있지 않은가.
입 속으로 염불을 외우며 다가서니 누었던 사람이 일어났다. 나그네였다.
『어서 오십시오. 스님이 마중을 보내서 왔습니다.』
나그네는 아무 말 없이 걸망을 둘러메고 걸었다.
『손님, 짐을 저에게 주십시오. 스님께서 짐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나그네는 묵묵히 걸망을 건네주었다.
『손님은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이 집 속엔 뭣이 들었길래 이리 무겁습니까? 노스님과는 잘 아시나요?』
나그네는 대꾸가 없었다.
그는 다음날부터 대웅전 지을 나무를 찾아 기둥감과 중방감을 켜고 작은 기둥과 서까래를 끊었다. 다음에는 목침만한 크기로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목수는 말없이 목침만을 잘랐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며 비웃었다. 그러나 노승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어언 다섯 달. 목수는 비로소 톱을 놓고 대패를 들었다.
목침을 대패로 다듬기 시작한 지 3년. 흡사 삼매에 든 듯 목침만을 다듬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보 목수양반, 목침 깎다가 세월 다 가겠소.』
선우의 비웃는 말에도 목수는 잠자코 목침만을 다듬었다. 선우는 슬그머니 화가 나 목수를 골려 주려고 목침 하나를 감췄다.
사흘이 지나 목침깎기 3년이 되던 날. 목수는 대패를 버리고 일어나더니 노적만큼 쌓아올린 목침을 세기 시작했다.
무수한 목침을 다 세고 난 목수의 눈에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일할 때와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절망이 깃들었다.
연장을 챙긴 목수는 노승을 찾아갔다.
『스님, 소인은 아직 법당 지을 인연이 먼 듯하옵니다.』
절에 와서 처음으로 입을 여는 목수를 보고 선우의 눈은 왕방울만큼 커졌다.
『왜 무슨 까닭이 있었느냐?』
노승은 조용히 물었다.
『목침 하나가 부족합니다. 아직 저의 경계가 미흡한가 봅니다.』
『가지 말고 법당을 짓게. 목침이 그대의 경계를 말하는 것은 아닐세.』
선우는 놀랐다. 목침으로 법당을 짓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산더미 같은 목침 속에서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알다니-.
목수는 기둥을 세우고 중방을 걸고 순식간에 법당을 완성했다.
법당에 단청을 하려고 화공을 불러왔다.
노승은 대중에게 엄격히 타일렀다.
『화공의 일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법당 안을 들여다봐서는 안되느니라.』
화공은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밖에 나오질 않았다. 사람들은 법당안에 그려지는 그림이 보고 싶고 궁금했다. 그러나 법당 앞에는 늘 목수가 아니면 노승이 지키고 있었다.
어느 날, 선우는 법당 가까이 가서 목수에게 말했다.
『스님께서 잠깐 오시랍니다.』
목수가 법당 앞을 떠나자 선우는 재빠르게 문틈으로 법당 안을 들여다봤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없는데 오색 영롱한 작은 새가 입에 붓을 물고 날개에 물감을 묻혀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선우는 문을 살그머니 열고 법당 안으로 발을 디밀었다. 순간 어디선가 산울림 같은 무서운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면서 새는 날아가버렸다.
노호 소리에 놀란 선우가 어슴프레 정신을 차렸을 때 노승은 법당 앞에 죽어 있는 대호를 향해 법문을 설했다.
『대호선사여! 생사가 둘이 아닌데 선사는 지금 어느 곳에 가 있는가. 선사가 세운 대웅보전은 길이 법연을 이으리라.』
때는 1633년. 내소사 조실 청민선사는 대웅보전 증축 후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변산반도 한 기슭에 자리한 내소사 대웅전(보물 제291호)은 지금도 한 개의 포가 모자란 채 옛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그리다 만 벽화는 날로 퇴색해 가고 있다.
소금을 만드는 노인 <고창·선운사>
옛날 백제시대.
선녀들이 구름을 타고 내려왔다는 선운산(현 도솔산, 전북 고창군 아산면) 기슭 선운리 마을에는 가끔 산적과 해적들이 나타나 주민들을 괴롭혔다.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면 나눠먹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우면서 오손도손 살고 있는 이 마을 사람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도적떼였다.
『도적떼를 막을 수 있는 길이 없을까요?』
『우리에게 무슨 힘이 있어야지.』
마을 사람들은 걱정만 할 뿐 별 대책없이 늘 불안과 초조 속에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웬 낯선 영감님이 나타나 촌장을 찾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저는 떠돌아 다니면서 소금과 종이를 만들어 연명해 가는 보잘것 없는 사람입니다. 이 마을이 소금을 굽고 종이를 만들기에 좋을 것 같아 발길을 멈췄으니 오늘부터 마을 입구에 움막을 짓고 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비록 허름한 차림새였으나 인자하게 생긴 노인인지라 마을에선 쾌히 승낙했다.
노인이 인근 해변에 나가 바닷물을 퍼서 소금을 만들 때면 마을 사람들은 따라가서 일을 거들며 소금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주민들은 아는 것이 많은 할아버지를 자연 따르게 됐고, 노인은 친자식이나 손자를 대하듯 늘 친절하게 마을 사람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다.
『할아버지, 큰일났어요.』
『무슨일이냐?』
『산적들이 나타났어요.』
산적들은 벌써 움막으로 들이닥쳤다.
『음, 처음 보는 영감이로군. 목숨이 아깝거든 가진 것을 모두 내놓으시오.』
『보시다시피 나는 가진 것이라곤 소금밖에 없소. 가져가고 싶은 만큼 갖고 가시오.』
산적들은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노인의 태연한 모습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저희들끼리 쑤군대면서 소금을 한짐씩 지고 갔다.
마을은 얼마간 평화로웠다.
『할아버지, 바다 한가운데 이상한 배가 나타났어요.』
『이번엔 해적이 왔느냐?』
『아니어요. 사람 기척이 없는 빈 배여요. 사람이 보이면 물 속에 잠기고 사람이 숨으면 물 밖으로 솟아나오는 이상한 배가 나타났어요.』
노인이 바닷가에 다다르자 배는 노인을 향해 다가왔다. 동리 사람들은 눈이 둥그래졌다.
『사람을 보면 숨던 배가 이쪽으로 오고 있잖아요?』
노인은 그 배의 뜻을 아는 듯 배에 올랐다. 그때 하늘에서 음악소리가 울리면서 백의동자가 나타났다.
『할아버지! 저는 인도에서 공주님의 심부름으로 두 분의 금불상을 모시고 이곳에 왔습니다. 공주님께서는 동쪽 해뜨는 나라의 소금 만드는 할아버지에게 이 불상을 전하고 성스런 땅에 모시게 하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마을로 돌아온 노인은 선운리 망르에 조그만 암자를 세우고 동자가 전해 준 관세음보살님과 지장보살님을 모셨다.
노인은 그날부터 염불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둑들은 다시 노인을 찾아와 소금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거 참 안됐구려. 나는 요즘 불공을 올리느라 소금을 만들지 못했다오.』
『그래, 그렇게 부처님만 쳐다보고 앉아 있으면 밥이 나옵니까? 옷이 나옵니까?』
도둑들은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자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어흥」하며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놀란 도둑들은 손에 든 창과 칼로 호랑이를 위협하려 했다.
이때 염불을 하던 노인은 한 손으로 호랑이를 어루만지면서 돌아갈 것을 권했다. 그러자 호랑이는 노인 앞에 공손히 절을 하더니 어슬렁어슬렁 산으로 올라갔다.
이 광경을 목격한 도둑들은 노인이 예사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알아뵙지 못하고 무례했던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도둑들은 엎드려 절을 하면서 새사람이 될 것을 맹세했다.
『이 시각부터 남의 물건 훔치는 일을 그만두고 사람다운 사람이 될 것이니 저희들에게 새삶의 길을 열어 주십시오. 노인 어른.』
『거 참 반가운 일이군요. 잘 생각하셨소. 내 오늘부터 소금 만드는 법을 일러줄 터이니 열심히 배워 착하게 살도록 하시오.』
노인은 해적들에게 소금 만드는 법을 일러줬다. 이 소문을 들은 선운산 도적들도 마을로 내려와 노인에게 참회하며 착하게 살 것을 맹세했다. 산적들에게는 종이 만드는 법을 알려 주면서 거처인 굴 속에서 부처님께 예불하며 참회하는 불자가 되도록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 할일을 다했으니 가 봐야지.』
노인은 마을 을 떠날 채비를 차렸다. 동리 아이들가지 울면서 매달렸으나 소용없었다.
『정 가시려면 이름이나 알려주시지요.』
『늙은이가 이름은 무슨 이름…. 난 검단(黔丹)이라 하오.』
『아니, 할아버지가 바로 그 유명한 검단 스님이시라구요?』
동네 사람들은 모두 놀랬다. 특히 전날의 도둑들은 그제서야 노인의 뜻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깎고 출가할 것을 결심했다. 그후 선운사는 89개의 암자와 1백89동의 요사채, 24개의 굴이 있는 대가람이 되었다.
1954년까지 고창군 심원면 고전리 부락에는 검단선사 이후 불을 때서 소금을 만들던 흔적이 있었는데 46년 삼양염업사에서 그곳에 염전을 만들었다. 그 후 삼양염업사에서는 매년 봄·가을이면 선운사에 소금을 기증하고 있다.
부설거사 일가 <변산·월명암>
『부설수좌, 빨리 걸읍시다. 이렇게 가다간 해전에 마을에 이르기가 어려울 것 같소.』
『공부하는 수좌가 뭘 그리 마음이 바쁘오.』
때는 통일신라 신문왕 시절. 부설, 영희, 영조 등 세 수좌는 여름 안거에 들기 위해 전라도 변산을 거쳐 오대산으로 가고 있었다.
그 중 우리나라 거사선(禪)의 대표적 인물로 자주 거론되는 부설은 본래 불국사 스님이었다. 경주 태생으로 불국사에서 원경이란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후 전국 각지를 두루 돌며 열심히 수도하던 중 쌍선봉 아래 조그만 암자를 짓고 10년간 홀로 공부했다. 그러다 도반들이 찾아와 오대산에 들어가 대중과 함께 정진하자는 제의에 선뜻 자리를 털고 일어선 것이었다.
걸음을 재촉하는 두 도반과 함께 그날 밤 부설은 만경 고을 구씨란 사람 집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음력 3월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 부설이 잠시 뜰에 나와 거닐고 있으려니 어느새 다가왔는지 주인집 딸이 옆에 서 있었다.
『스님, 언제 떠나시나요?』
『내일 아침 일찍 떠납니다.』
18세쯤 되어 보이는 묘화는 스님에게 무슨 말인가 할 듯하면서 선뜻 말을 못한 채 망연히 달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아가씨, 소승에게 무슨 할말이 있으신지요?』
잠시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던 묘화는 중대한 결심이나 한 듯 입을 열었다.
『스님, 떠나지 마옵소서.』
『아니, 떠나지 말라니요?』
『소녀 저녁 무렵 스님을 처음 뵙는 순간 평생 지아비로 모시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설은 뜻밖의 말에 내심 크게 놀랐으나 조용한 어조로 타일렀다.
『그 무슨 철없는 말이오. 소승은 큰 뜻을 품은 수도승이 아닙니까?』
『스님, 제가 어찌 그걸 모르겠사옵니까. 하오나….』
스님은 과년한 처녀의 심중을 헤아리는 듯 다시 일렀다.
『그대의 애끓는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 허나 이 사람은 도반과 함께 오대산으로 공부하러 가는 길인데 어찌 장부의 뜻을 굽혀 그대의 청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스님의 장하신 뜻을 꺾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장차 도통하여 많은 중생을 구하실 스님이 작은 계집 하나 구해 주지 못한다면 어찌 큰 뜻을 이루실 수가 있겠습니까?』
단정한 용모에 재기와 덕기를 겸비한 묘화는 결사적으로 애원했다.
부설은 그녀의 끈덕진 호소에 감동하여 그녀와 혼인하기로 결심했다.
이튿날 아침 두 도반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는 듯 오대산을 향해 떠났다.
묘화의 부모도 하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많은 곳에서 청혼이 들어와도 들은 척도 않던 딸이 길가는 객승에게 빠져 시집을 가겠다고 막무가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부설은 묘화와 결혼하여 지금의 김제군 성덕면 성덕리 고련부락에서 살았다. 그 마을에는 이상하게도 늘 눈이 떠돌아다니므로 부설은 마을 이름을 부설촌이라 했고, 자기 이름도 부설이라 불렀다.
부설은 아들 딸 남매를 낳고 살면서도 아내와 함께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대산으로 떠난 옛 도반들이 찾아왔다.
『우리는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라네. 가장 공부를 잘해 장래가 촉망되던 자네가 혹이 몇 씩이나 붙은 낙오자가 되다니….』
도반들은 부설이 안됐다는 듯 측은한 어조로 말했다.
옆에서 이 말을 들은 묘화 부인은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듯 말을 꺼냈다.
『두 분 스님께서 공부의 도가 높은 듯한데 그러면 저희집 어른과 한번 겨뤄 보시면 어떨까요?』
영희, 영조 스님은 어떻게 도를 겨루자는 것인지 의아해하면서도 한편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선뜻 허락했다.
부인은 병 3개에 물을 가득히 담아 벽에 걸어놓고는 물만 벽에 매달려 있고 병은 땅에 떨어지게 하자는 문제를 냈다. 두 스님은 모두 실패했으나 부설만이 일을 해내니 두 스님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뒤 부설 내외는 남매를 데리고 옛날 공부하던 변산으로 들어가 전에 공부하던 자리에 부설암을 짓고, 부인을 위하여는 낙조대 올라가는 중간에 묘적암을, 그리고 그 딸을 위해 월명암을, 아들을 위해서는 등운암을 지어 각자 일생 동안 수도생활에 정진했다.
그의 딸 월명도 어머니를 닮아 15·6세가 되니 자태가 고울 뿐 아니라 글 공부에 능통하여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루는 재색을 겸비한 그녀에게 그 절 상좌가 정을 구해 왔다. 월명이 오빠에게 상의하니 청을 들어주라고 했다. 오빠의 말에 따르고 나니 얼마 후 상좌는 다시 정을 구해 왔다. 오빠는 또 들어주라고 승낙했다. 이런 일이 자꾸 되풀이되자 오빠 등운은 그 일로 누이의 공부에 장애가 될 것을 염려하여 그 상좌를 부엌 아궁이에 넣어 불태워 죽였다.
그 상좌는 저승에 들어가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하소연하면서 등운을 잡아들여 보복해 줄 것을 해원했다. 저승에서는 사자를 보내 등운을 잡아들이게 했으나 등운의 경지가 워낙 높아 잡아들이지를 못했다.
세 번이나 헛걸음치고 돌아가는 저승 사자에게 등운은 말했다.
『공중에다 모래로 줄을 꼬아서 나를 묶는 재주가 있다면 나를 잡을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나를 잡을 수 없으리라.』
저승에서는 끝내 등운을 잡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누이동생 월명도 마침내 도통하여 육신이 있는 채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바위가 된 도둑 <임실 서당재>
때는 조선조 초엽.
지금의 전북 임실군 삼계면 서당재의 조그만 암자에 한 비구니 스님이 홀로 수도를 하고 있었다. 20세 안팎의 이 스님은 고려말 귀족의 딸로서 멸족의 화를 면해 입산 출가했다는 소문이 마을에 파다했다.
밤이면 호랑이 늑대 소리가 들려도 젊은 스님은 염불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던 스님은 그만 깜박 잠이 들었다.
하얀 백발 노인이 근엄한 표정으로 스님 앞에 나타났다.
『아니…?』
『놀라지 말아라. 나는 이 산을 다스리는 신령이니라. 이제 그대에게 자식 하나를 점지해 주려고 이렇게 찾아왔노라.』
『당치 않으신 말씀입니다. 소녀는 계율을 수행의 첫 덕목으로 삼으며 공부하는 불가의 비구니이옵니다.』
『이 산의 정기를 그대 몸을 빌어 자식으로 태어나게 할 것이니라.』
『신령님! 산 아래 마을에는 자식이 없어 애태우는 사람들이 많사온데 왜 하필이면 소승의 몸을 빌리려 하십니까?』
『다 뜻이 있어서 그러느니라. 이제 그대에게 점지할 아들은 귀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정결한 그대를 선택한 것이니 그리 알라.』
말을 마친 노인은 홀연히 사라졌다. 노인이 사라짐과 동시에 스님은 아득해짐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중천에 두둥실 떠 있던 보름달이 하강하더니 스님의 입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스님은 경악해서 질렀는데 그만 그소리에 놀라 잠이 깼다.
주변을 둘러보니 불교ㅇ을 올리다 잠이 든 모습 그대로였다.
『별란 꿈도 다 있네.』
그러나 스님은 그 신기한 꿈을 꾼 지 10달이 지난 후 달덩이 같은 옥동자를 산고도 없이 낳았다.
아기는 날이 갈수록 영특하고 총명해졌다. 이렇게 무럭무럭 자라는 아기르 ㄹ바라볼 때마다 스님은 착잡한 상념에 사로잡혔다.
『그렇지. 아무래도 예사 아이는 아니야. 훌륭히 키워 보자.』
스스로 다집한 스님은 아들이 커 갈수록 마음이 든든해졌다.
『어머니!』
『어머니라고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부르라고 했지 않느냐?』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는데 뭔가 잘못이에요?』
『하지만 난 다른 어머니와 달리 출가한 여승이 아니냐. 그러니 앞으로는 꼭 스님이라 부르거라.』
『우리 아버지는 누구세요?』
퉁명스럽게 묻는 아들의 말에 스님이 대답이 없자 아이는 골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왜 말을 못하시고 숨기세요? 어머니가 스님이 되신 곳도 다 아버지 때문이 아니세요?』
『그런 것이 아니란다.』
『그럼 왜 말씀을 못하세요?』
『네가 좀더 크면 말하려 했는데 정히 네가 원한다면 내 오늘 다 말해 주마. 한 가지 약속할 것은 내 말에 의심을 갖지 말고 믿어줘야 하느니라.』
스님으로부터 자초지종의 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했다. 자신의 출생 동기를 알게 된 그는 이대로 집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결심했다.
『어머니, 저는 이제 어머니 곁을 떠나야겠습니다.』
『아니 어디로?』
『큰스님을 찾아뵙고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음, 그래 말리지 않겠다. 어디를 가든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너는 예사롭게 태어난 사람이 아니란 것을 명심하고.』
『네, 어머님 아니 스님.』
소년은 그 길로 무등산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대혜도사를 만나 열심히 수도하며 무예를 익혔다. 그렇게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소년은 20세의 천하장사로 성장했다.
하루는 대혜 스님이 청년을 불렀다.
『이제 나는 네게 더 가르칠 것이 없게 됐다. 그만하면 훌륭하니 그만 내 곁을 떠나도록 해라.』
『하오나 소생은 아직 미흡하옵니다.』
『아니다. 네가 부족한 것이 있다면 장사가 갖는 용마가 아직 없다는 것뿐이다.』
『용마라니요?』
『너는 명산의 정기로 태어난 장사음을 내 이미 알고 있었느니라. 헌데 아직 용마를 못 얻어 네 스스로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스님, 어찌하면 용마를 얻을 수 있을까요?』
『용마는 하늘이 주시는 것이니라. 허나 아직 하늘이 네가 용마를 주실뜻이 없는 듯하니 대신 내가 말 한 필을 주마. 저기 마굿간으로 가자.』
마굿간 앞에 선 청년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거기엔 청동의 황금옷을 입힌 말 한 필이 있었다.
『너는 저 말을 능히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어서 끌고 가거라.』
그때였다.
『히-잉』
청동마가 긴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가.
『허어 됐다, 됐어. 그 말의 울음소리를 들었으니 무슨 일이든 네 뜻 대로 될 것이다.』
청년은 스승과 헤어져 청동마를 이끌고 서당재 암자로 달려갔다.
『아니? 이게 누구냐!』
10여 년만에 아들을 만난 스님은 기뻐 눈물을 흘렸다. 실로 오랜만의 모자 상봉이었다.
그날 밤, 신기한 청동마를 탐낸 도둑이 암자에 들었다.
『허허,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을 내가 갖게 됐구나.』
청동마를 둘러메고 산을 내려오는 이름난 산적 두목 도포는 무거운 줄도 몰랐다.
방에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청년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급히 나와 보니 청동마가 보이질 않았다.
『앗, 내 청동마를 누가 훔쳐 갔어요.』
『뭐라고. 그 귀한 말을 도둑맞았다구?』
『어머님, 소자는 용마를 얻을 때까지 더 수도하겠습니다. 청동마는 저와 인연이 없는가 보옵니다. 그러나 소자는 도둑과 그 말을 바위로 만들어 버리겠습니다.』
청년은 급히 종이에 주문을 적어 허공에 날렸다. 그때였다. 멋도 모르고 산속 어디쯤을 내려가던 도둑이 소리를 쳤다.
『으악! 사람 살려요.』
외마디 비명을 지른 산적 도포는 그 자리에 굳어 바위가 됐다. 그후 서당재에는 도둑 도포와 청동말 형상의 바위가 생겨났고 지금도 그곳엔 서당재 도둑 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청년 장사는 그 길로 산중 깊이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장사는 용마를 얻지 못하면 세상에 나갈 수 없다」는 말을 입증이나 하듯.
신비한 장군샘 <정읍·내장사>
조선조 제13대 명종 때였다.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내장산 내장사(당시는 영은사)에 기운이 장사인 희묵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스님의 힘은 산에 나무하러 가서 달려드는 호랑이를 한 손으로 꼼짝 못하게 할 정도로 대단했다.
어느 날 스님이 아랫마을로 시주하러 갔을 때였다. 큰 황소 두 마리가 뿔을 맞대고 싸우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몽둥이를 들고 떼어 놓으려 했으나 오히려 황소의 싸움은 격렬해지기만 했다.
이때 이를 목격한 희묵 스님은 묵묵히 바라만 보다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황소 옆으로 다가갔다.
『스님, 저리 비키십시오. 가까이 가면 다치십니다.』
놀란 마을 사람들은 크게 소리치며 걱정했으나 스님은 태연스럽게 두 소의 뿔을 양쪽 손에 나누어 잡고는 간단히 떼어 놓았다. 이를 지켜본 마을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과연 천하장사로군요.』
희묵대사가 천하장사라는 소문은 널리 퍼졌다.
힘이 세기로 알려진 희천이란 젊은 스님도 이 소문을 들었다. 그는 혼자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내장사로 달려갔다.
『젊은 객승 문안이업니다. 희묵대사를 뵙고자 합니다.』
『웬일로 날 찾아오셨소?』
『외람된 청이오나 스님께서 천하장사라 하옵기 소승 문하에서 공부를 하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희천 스님의 속셈은 말과는 달랐다. 문하에 들어가겠다는 것은 구실일 뿐 희묵대사를 눌러 민망케 한 후 자기가 제일 힘이 세다는 것을 천하에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희천 스님은 자신의 생각이 헛된 망상임을 곧 알게 됐다. 도저히 자신의 실력으로는 희묵대사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희천 스님은 진심으로 희묵대사의 제자가 되어 은사 스님이 어떻게 힘을 키우는지 배우기로 했다.
희묵대사는 힘을 키우기 위해 특별히 운동을 하는 일도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희천 스님은 스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기 시작했다. 희묵대사는 매일 새벽 예불을 끝내면 절 뒷산 중턱 바위틈에서 나오는 샘물을 감로수 마시듯 마시고는 아주 기분 좋게 하산하는 것이었다.
『혹시 저 샘물에 무슨….』
희묵 스님이 물 마시는 광경을 몇 차례 훔쳐본 희천 스님은 샘물을 맛보았다. 물맛이 하도 좋아 희천 스님은 아무래도 샘물에 무슨 조화가 있다고 생각했다.
희천 스님도 매일 샘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물 마시기 1주일째 되던 날. 희천 스님은 자신의 힘이 세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곤 너무 좋아 다음날부터는 물을 더 많이씩 마셨다.
그러던 어느 날. 희묵대사는 아무래도 희천의 거동이 이상하여 살펴보니 혼자만 마시는 샘물을 희천이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네 이놈! 어찌 스승의 허락도 없이 네 맘대로 샘물을 마시느냐?』
희묵 스님은 제자를 시험하려는 듯 산봉우리에 올라 큰 돌을 아래로 던졌다. 희천 스님도 힘이 세어 스승이 던지는 돌을 받아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지금도 내장사에 가면 그때 희천대사가 쌓았다는 돌모더기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희묵대사는 희천 스님과 승병을 이끌고 왜군과 싸웠다. 그 후 사람들은 구 봉우리를 장군봉이라 불렀으며 샘물은 장군이 마셨다 하여 장군샘의 장군수라고 했다.
산정에는 희묵대사의 지휘대였다는 장군대(일명 용바위)가 있고 산북쪽 줄기 밑의 신선대 부근에는 성터의 흔적이 있어 스님들의 구국사상을 오늘에 전하고 있다.
또한 내장산 동구리에서 약 1km 거리에 백양사로 넘어가는 지름길 고개를 유군이재라고 하는데 이는 군대가 머물렀던 곳이란 뜻이다.
희묵대사와 희천 스님은 승병을 이끌고 이 고개에 머물면서 왜구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희묵대사와 희천 스님이 이곳을 지키고 있자 왜구들은 다른 실로 돌아 전주로 향했다. 전주에는 이태조의 사당 경기전이 있었으므로 위험을 느낀 두 스님은 사람을 보내 태조의 영정과 전적을 옮겨 오도록 즉각 대처했다.
밤길을 타서 모셔온 영정과 실록을 두 스님은 신선봉 밑에 있는 천연동굴 용굴암에 모셨다. 위기를 면한 이 전적과 유물들은 1년 1개월간 용굴암에 보전됐다가 조정의 명으로 함경도 묘향산 보현사 별전에 옮겨졌다.
그밖에도 내장산에는 불교와 관계된 명칭이 많이 있다.
서래봉(써래봉)은 달마조사의 서래설(西來說)에 연유한다. 서래봉 줄기의 서쪽 바위 봉우리 불출봉은 봉우리 바로 밑에 있는 불출암터인 커다란 석굴에서 부처님이 나왔다 하여 석굴에서 부처님이 나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불출암은 공부하기 좋은 곳으로 널리 알려져 유생들마저 자주 찾았던 곳이다. 이 석굴에는 신비스런 바늘구멍이 있어 끼니때마다 먹을 만큼의 쌀이 나오고 손님이 오면 접대하기에 알맞은 양의 쌀이 솟아 나왔다. 하루는 사미가 매 끼니마다 쌀푸기가 귀찮은 데다 욕심이 생겨 바위 구멍을 크게 넓혀 놓았다. 그 뒤부터 쌀은 한 톨도 안 나왔다고 한다.
내장사 대웅전 바로 뒷산 봉우리는 영취봉이라 하는데 이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인도의 영취산 이름을 본따 지은 이름이다.
이렇듯 불연이 그ㅍ은 내장사는 백제 제30대 무왕 37년(636) 영은조사가 창건하여 영은사라 칭했다.
고려 제15대 숙종 3년에 신안선사가 전각과 당주를 크개 고쳐 중창했고 조선조에 와서 희묵대사가 3창했으나 정유재란 때 소실됐다. 그후 부용대사가 4창했다, 영운대사가 5창했다.
1925년 백학명선사가 벽련사 위치로 옮겨 벽련사라 개명하고 옛 절터에는 영은암을 두었다.
그러나 1938년 매곡선사가 현재의 위치에 중창불사를 한 후 내장사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