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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주저음으로의 미선나무
애틋한
그러니까, 활자로 된 그 지칭을 처음 보았을 때 내 마음이 얼마쯤 부드럽고 상냥해졌으리라. 미선나무라는 글자에서 번지는 아취는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하는 어떤 것이어서, 사로잡는 그 무엇의 향기를 흠향할 때처럼 온몸을 열고 심호흡을 하려니 글자에서 음계가 튀어나와 건반을 두드리는 것인데, 그렇다. ‘미’는 ‘도’와 ‘레’ 다음의 세 번째 음계로 온음인 ‘레’ 와 반음인 ‘파’ 사이에서 생각이 많았을까, 망설임이 묻어난다. 활시위에 걸린 활이 튕겨나가기 직전의, 여전히 활시위에 붙잡힌 채로 팽팽히 당겨진 반음이다. 그런가하면, 막내딸이 내미는 통지표에 ‘미’투성이를 보시고도 마냥 예뻐하시던 내 아버지의 막무가내 사랑이 떠오르는 것인데, ‘미’는 딱 중간에 위치하여 낙관도 비관도 아니고 긍정과 부정에서도 비켜서서 자유를 누리지 않는가. 감각기관을 통하여 인간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 아름다움, 그리고 개인적 이해관계 없이 내적 쾌감을 주는 감성적 대상으로의 ‘미’보다 우위에 두는 것이 착할 ‘선’일 것이나 미선나무는 부채 선(扇)을 쓴다. 하트모양의 섬유질 한가운데에 납작한 열매가 들어간 것이 마치 구중궁궐에서 사용하는 부채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한국에서는 꼬리 미에 부채 선을(尾扇)쓴다. 재밌는 것은 꼬리 尾는 물고기를 세는 단위인 마리의 뜻과 별자리 이름, 흘레하다, 곱고 예쁘다, 뒤를 밟다 등 관련성이 없을 듯하면서도 맥이 통하는 의미의 고리로 이어져있다.
평소와 달리 글의 어투까지 바꾸어 장광설을 늘어놓는 걸로 보아 내 본새가 조금은 들뜬 듯하다. ‘미선’의 어감이 좋기야하지만 하등에 들뜰 이유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세계에서 1속 1종밖에 없는 희귀종이 라는 것, 한반도 중서부, 두어 군데에서만 자생한대서 주의를 앗겼을 것이다. 아무데서나 살지 않음으로 변별되는 차이는 이도저도 다 되는 허접이 아니라 그 무엇만을 필요로 하는, 그 무엇이 되고자 함으로 염결성이다. 그리하여 부지하고 뿌리내린 영토를 특별하게 하고 그 또한 어떤 의미가 되고자 하는 형이상학을 표방한다. 의미의 무한한 차연으로의 여지를 거부하는 미선나무에게서 어떤 격조를 찾아볼 수 있어서 마냥 설레었을 것이다. 전 세계가 서로를 모방하고 비슷해지고 뒤섞여서 고유함을 잃어가는 시대를 사는 현대인이 잃어버린 오로지한 품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생장에 필요한 충분조건이 갖추어진다면 어디서나 꽃을 피우고 네모난 여린가지는 단단해지면서 여느 가지들처럼 둥글어 갈 것이다. 키 작은 미선나무는 파종, 꺾꽂이, 포기나누기, 삽목과 같은 방법으로 번식이 용이하나 성장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미선나무는 광물질적 생태를 표방한다. 광물질은 어떤 가치를 지니고 땅 속 깊이 숨어있다. 그 가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의 노력에 의해 드러나고 보답이나 하듯이 여러 쓰임이 된다. 마치 애정을 확인할 때 생기가 도는 연인들처럼 돌봄을 받아야 제 존재를 보다 명료하게 드러낸다. 이와 비슷하게 미선나무는 자드락밭이나 비탈에서 혼신으로 별빛을 베끼고 있다. 근자에 들어 정보와 기술력으로 인위적 조성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이 지면에서는 자연 상태로의 미선과 그것을 키운 거친 땅과의 통주저음으로의 어우러짐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특정지역에서만 자생하는 식물이 담고 있는 메시지란 무엇일까. 유안진 시인의 글에서처럼 지란지교를 꿈꾸며 충정의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가치를 제 실존의 존재이유로 삼은 걸까.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지 않다.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이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기를 바란다. 나는 여러 나라,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끼니와 잠을 아껴 많은 곳을 여행하였다. 그럼에도 지금은 그 많은 구경 중에 기막힌 감회로 남은 것은 거의 없다. 만약 내가 한두 곳, 한두 가지만 제대로 감상했더라면 두고두고 되새겨질” 것이라는 반성적 성찰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미선나무도 세계에서 1속 1종이라는 희귀성을 제 뿌리내린 땅에 선사하며 지란지교를 실현하는 것이 아닐까.
유성(儒城)에서 조치원(鳥致院)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修道僧)일까, 묵중(默重)하게 서 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公州)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過客)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溫陽)으로 우회(迂廻)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把守兵)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默重)한 그들의, 침울(沈鬱)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나무 / 박목월
나무는 시원의 숨결이다. 그저 스쳐지나갔을 뿐이나 시인의 시선에 포획된 풍경에 시인의 정서가 고스란히 투영되었다. 하여 마을 어귀에 있는 나무가 묵중한 수도승이 되고 어설픈 과객이 되고 외로운 파수병으로 치환된다. “풍경은 코드화된 세계의 표면”으로 주체의 심연을 되비추는 까닭이다. 시인의 마음자리에 재배치된, 비현실적 공간에서 발아한 풍경은 조망자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인간화된다. 이제 풍경은 시인의 마음자리에서 뽑아낼 수 없는 무엇이 되어 일체화에 이른다. 미선나무도 그렇게 내 마음자리에 뿌리를 내렸다. 그것은 애틋하고 고절한 무엇이어서 어느새 나는 몇 그루의 미선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미선나무의 조상은 물푸레나무이다. 세 개의 수평면과 아홉 세상의 축인 거대한 이드그라실은 기실 물푸레나무를 일컫는다. 꼭 다른 나라의 신화를 빌리지 않더라도 현실계에서의 물푸레나무는 10여 미터까지 자라는 거목이다. 그렇지만 미선나무는 제 조상과 달리 다 자란 것이 1미터 남짓이다. 마치 라톤증후군인 것처럼 아주 마디게 자란다. 학계에서는 미선나무를 다양한 환경적응에 실패한 종으로 보는가 하면 현재 환경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강인한 종이라는 역설적인 견해를 내놓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미선나무를 포시라운 옥토에서 찾아낸 것이 아니라 돌무더기 거친 땅에서 발견하였다. 투박한 촌부의 품에 안긴 처녀와 같은 모양이다. 미선나무를 품어준 지세와 풍토가 어떠하기에 오로지 거기, 거기에서뿌리 내려서 개나리보다 먼저 봄의 전령이 되었을까. “땅은 저마다 타고나는 바가 다르고 그에 따라 쓰임도 다르다” 하였는데, 총상꽃차례로 수굿이 매달린 꽃과 매혹적 향기를 발산할 수 있게 한 지역의 지형지세와 풍토에 관심이 모아진다. 시절이 여름으로 접어들었으니 상아미선, 분홍미선, 푸른미선, 골드미선, 은은한 빛깔의 꽃차례를 볼 수 없으나 지세와 풍광이나마 볼 요량으로 길을 나설 작정이었다. 동행자를 찾다가 음성에 사는 최준 시인에게 전화를 했다. 음성에서 괴산까지 불과 이십 여분 소요되는 거리라며 동행해 주겠다하여 막막한 답사 길이 한결 수월할 듯싶다.
미선나무가 발견된 지역은 충청북도 괴산과 진천, 그리고 변산반도라고 한다. 그러나 괴산으로 갈 작정을 했다. 동행하기로 한 최시인과 거리가 가까워서이기도 하려니와 괴산이라는 지명에 이끌려 나오는 밝음의 배후에는 사촌 큰 올케가 있다. 무슨 영화처럼 열넷에 민며느리로 시집와 세 살 적은, 열한 살 남편의 아내였던 그녀, 사십에 과수가 된, 여섯 아들을 잘 키워 위세가 등등했던 시모에게 극진했던 여인. 그리고 다섯 시동생의 좋은 형수였으며 삼남삼녀의 어머니로의 일인 다역은 훌륭하여 진부하기조차하다. 그러나 주어진 삶이라는 질료에 심지를 돋우어 불 밝히느라 여념이라곤 없었을 것인데, 정성으로 점철된 생은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 무엇보다도 허무 따위가 끼어들 틈이라고는 없어서 매우 아름답고도 귀하다 할 수 있다.
나를 막내 아가씨라고 부르던 그녀를 어린 내가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의 허리는 이미 꼬부라져 있었다. 종가의 대소사를 도맡아하던 할머니 같은 올케는 일을 하면서 혼잣말을 잘 했는데 표정이 고요했던 것으로 보아 무슨 불평을 했다기보다 자신에게 무언가 주지시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녀의 무채 써는 솜씨는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 나는 도마소리가 날 때마다 부엌으로 가 무 써는 모습을 바라보곤 했는데 그녀는 썰던 푸른 빛 도는 무 한쪽을 내 입에 넣어주곤 했다. 돌이켜보면 검은 빛 대청마루는 세월감이 묻어있었으나 구석구석에까지 손길이 닿아 윤이 났다. 올케의 손이 만지고 또 만지는 사이에 안주인을 닮아버린 물건들과 텃밭과 집안팍은 그야말로 정갈하고도 살뜰했다. 요새처럼 과시를 위한 물건이 아니라 살뜰하니 소용되는 물건들에 올케의 마음씀씀이 전이된 듯 절제미와 정갈함이 배어있었다. 그녀가 화제선상에 오를 때마다 따라붙는 수식어는 ‘양반 이래’였다. 아무튼 괴산이라는 지명을 들을 때면 가슴속이 환히 밝아오는 것이다. 둥지에서 막 꺼내온 달걀의 온기가 전해오는 것이다. 일상의 부대낌이 없지 않았을 것이나 꼬부랑 할머니 올케는 시간이란 좀도 구멍을 내지 못하는 영도의 질감으로 나의 가슴 속에 드리워져있다. “사람은 땅을 딛고 살며 땅에서 나는 것들로 제 육신을 양육한다. 필경 사람은 그 땅과 닮을 수밖에 없다.”(『장소의 탄생』46p/ 장석주)고 하였다. 틀림없이 그녀에게서 미선향이 낫을 것이다.
풍토색
강원도 정선이 고향인 최준 시인은 아마 고향에서 지낸 햇수보다 서울에서 지낸 햇수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어투에 강원도 억양이 여전하다. 지역에 따라 억양과 성조, 종결어미의 처리가 다른 토박이말은 피와 살의 말이다. “토박이 말이란 우리가 어머니 품에서부터 배워 온 어미말입니다. 이 어미말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서 우리 피와 살처럼 되어있는 말입니다. 이 어미말은 그것이 없이는 한순간이라도 지내기 어려울 만큼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어미의 말을 쓰는 것은 자기의 정신이나 몸을 순수하게 지켜나가려는 본능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 한창기) 탯줄로 이어진 어머니와 같이 땔 수 없는 결속의 정서가 언어에 배어버린 그 체계는 특유의 기질과 문화 창출의 동력이다. 지형의 높낮이와 휘돌아나가는 물줄기와 출처가 모호한 바람의 교호작용의 결이 새겨진 방언은 섬세하고도 명징하여 시의 보물창고나 다름이 없다. 선천적 조건아래서 ‘말'이 마침내 생각을 바꾸고 문화를 만들며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풍토의 유구함은 발음체계를 결정하였다. 그 체계는 어찌나 뿌리가 깊은지 여간해서는 뽑히지 않는다. 경상도에서 쌍시옷발음을 잘 못하는데, 이처럼 특정발음을 어려워하는 점에 착안하여 적을 가려냈던 역사적 기록이 있다.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에 요르단 강을 사이에 두고 있던 길르앗과 에브라임은 서로 대치국면에 처하게 되었는데, 족보도 없는 자라는 모욕을 당한 길르앗사람들은 나루터를 지키고 있다가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에게 쉽볼렛을 발음하도록 하였다. 에브라임(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차자)사람들이 sh발음을 잘 못하는 것을 알고 그 민족을 색출해낼 의도에서였다. 그 결과 쉽볼렛을 십볼렛으로 발음한 에브라임사람 사만 이천이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쉽볼렛은 히브리어로 강, 곡식의 이삭, 올리브 가지 등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일반 명사화되어 특정집단의 관습, 군호, 암호의 원류인 셈이다.
습속에 의해 굳혀진 언어체계를 단시일에 바꾸기란 쉽지 않다. 발음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기후, 공기와 물, 음식물에 오랫동안 노출될 때 구강상태와 혀의 움직임이 유사하게 체계화된다고 한다. 선천적 조건아래서 ‘고유한 어휘들은 자연스러운 '입말'로 문화의 건강성과 다양성의 지표가 된다고 한다. "지역어 고유어 민속어 유행어 비속어 등 다양한 어휘가 모여 한국어는 성립된다. 유구한 내력을 가진 토속어가 소위 표준어에 눌려 촌스러운 것으로 규정된다. 표준어와 대비해 비하하지 말고 풍요로운 언어생활을 위해 '공통어'로 수용해야 할 것“이라고 이태영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말한다. 풍토란 자연을 전재로 하여 이루어진 환경으로 사람을 이해하는데 간과할 수 없는 요소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고향을 묻고 저서의 프로필에 출신지를 표기하는 것은 사람을 알아가는 일종의 패러다임이다.
독일의 학자 폰 헤르더는 풍토와 풍속이 인간의 소질을 만들어낸다고 하였다. 풍속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기질로 만들어진 그 무엇이 풍(風)이며 스타일인 셈이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문화적 특징으로 나타나는 인문적 풍토는 자연적 풍토의 조건 속에서 문화의 층이 형성되었다. 지금이야 사통팔달 길이 뚫려 깊은 오지라 할지라도 예전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접근이 용이하고 메스미디어의 발달로 지역적 특색이 현저히 약화되었지만 풍토는 여전히 사람들의 기질과 문화, 생활습관, 신체와 언어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민족적 기질로 나타나며 질병과도 관계가 깊고 직업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요소로 작용한다.
미선나무는 석회암지대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석회암지대서는 장가가는 날 아궁이 재를 담은 봉지를 던지던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외지 신랑이 신부를 데려가기 위해 마을로 들어서면 미리 아궁이에서 재를 종이에 담아뒀다가 힘껏 던집니다. 같은 동네에서 시집 장가를 가면 잿봉을 살살 던지기도 했지만 외지총각이 마을처녀를 신부로 데려가는 날이면 난리가 납니다. 신랑이 겁먹을 정도로 잿봉 던지기는 격렬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을 노동력을 다른 마을로 빼앗긴다는 노동력 상실에 따른 항의 표시도 포함된 것 같습니다. 또 재를 던지면서 자연스럽게 토양이 중화되는 토양개량제의 역할도 했던 것 같고, 외지인에게 붙어 올 수 있는 병충해 등 잡균에 대한 예방 의미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반도 지질 중에 석회암지대는 삼척, 동해, 태백, 강릉, 정선, 영월, 평창 등 강원남부지역과 충북, 경북 일대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미선나무는 키운 것은 석회암 토질 외에 다른 작용이 있을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땅은 물과 공기, 유기물, 그리고 잘게 부서진 돌알갱이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 필수적으로 포함되는 것이 미생물들이다. 보통 흙에 고체 덩어리가 차지하고 있는 비율은 50퍼센트이고 그 나머지는 액체와 기체이다. 기체가 있는 공간에 유기물과 미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흙 1그램에는 미생물들이 수천만 마리에서 수억 마리까지 살고 있다. 이는 흙을 하나의 생명체라 말하는 근거로 흙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유기적 세계를 이룬다. 게다가 흙은 전기적으로 음(陰)이어서 남성보다는 여성에 가까운 성질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흙을 아버지라 하지 않고 어머니라 했을 것이다.
감동을 추적하다
음성시내에서 최준 시인과 합류하여 목적지로 향했다. 최 시인은 동행하는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말랑말랑한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 어투를 사용하는데도 경쾌하게 들렸다. 무엇보다도 맹랑한 침묵 따위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아서 고마웠다. 오월 끝자락의 차창 밖 풍경은 초록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초록의 행진이 일으킨 착시인지 모르겠으나 반시간 남짓 음성에서 괴산으로 이동하는 내내 지역 간 풍토적 차이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기야 행정구역이라는 것이 금 긋기를 좋아하는 인간적 관점이긴 하나 미선나무의 산경표는 평야와 완만한 구릉성으로 평온선을 그리는 괴산 북서부에 자생한다. 반면에 남동쪽은 소백산맥의 산릉이 연봉을 이루어 험준하다고 한다. 덕가산, 칠보산, 보개산, 군자산, 낙영산, 조봉산 등 팔구백 미터의 산악지대로 평지가 적다고 한다.
동쪽 소백산맥을 경계로 경상북도 문경과 상주에 접하고 북쪽으로 음성과 충주, 서쪽으로 진천과 청원, 남쪽으로 보은군과 접해있다. 그중에 괴산은 충청북도 중앙에 위치해있다. 괴산의 북동쪽으로 뻗어 있는 소백산맥은 아름다운 계곡을 여럿 품고 있다. 화양계곡과 선유계곡 쌍곡계곡이 손꼽히는 비경이다. 화양계곡을 따라 3킬로미터 가량 오르면 맑은 물, 고운 모레, 기암괴석이 기묘한 화양구곡에서 우암 송시열 선생인 은거지로 여러 필적을 찾아볼 수 있다. 가는 곳마다 명승지 아닌 곳이 없을 정도로 경관이 수려하나 마치 청빈낙도와 은일을 잃지 않으려는 듯이 번거로움으로부터 격조하다. 한곳에 뿌리박고 살기에 적당한 장소인 것이다. “한 장소에 뿌리박고 산다는 것은 한 장소에 애착을 갖고 그것을 도덕적, 지적, 정신적 토대로 삼는 것을 뜻한다. 사람은 장소에 의미를 만들고 부여하는 존재지만 뒤집으면 장소는 사람에게 경험과 인식의 토대일 뿐만 아니라 정서와 인격을 키우고 의미의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촉매적 거점”이 된다. (장소의 탄생 중에서)
최종목적지는 산막이 길 근처에 있는 운천농원이다. 산막이 길은 경치가 빼어날뿐더러 걷기 좋은 코스로 각광받는 곳이다. 내비게이션에 잡히지 않는 운천농원을 찾다찾다 찾지 못하고 농원주인 김병준 씨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큰길까지 내려와서 길안내를 해주었다. 왕년에 주먹께나 썼다는 그는 이순을 훌쩍 넘겼으나 미선나무를 좀 더 알기 위해서 중부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가 자랑스럽게 가리키는 손끝 건너에 미선나무가 초록의 광휘를 내뿜고 있었다. 미선나무는 경사진 둔덕에 있을 때, 그리고 무리지어 있을 때 운치를 더할 듯싶다. 그는 농원의 여기저기를 두루두루 보여주며 특히 미선나무의 효용성과 활용 범위에 대해 설명하며 우리가 돌아갈 때 고향의 자부심으로 키운 화분에 담긴 미선나무 두 주를 선물해 주었다.
풍광지세가 제게 의지하는 생명들을 두루 감싸 안으니 의기가 생각을 보듬어 소산물이 반듯함을 지향하는 것일까. 미선나무에는 항암, 항염, 항알러지의 효능 뿐 아니라 항산화작용과 미백, 주름개선 등 효능으로 식음료와 화장품 원료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종양세포의 증식을 억제하는 활성물질이 미선나무 전체에서 추출할 수 있는데 잎, 가지, 뿌리, 열매, 줄기, 꽃, 껍질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게다가 정상세포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아서 종양 예방 및 치료에 유용하여 특허등록이 되었다. 대수로울 것 없는 초목이 하늘의 기운을 입어 제 난 자리의 품격을 높이고 거듭 존귀해졌다. 넓디넓은 지구상에서 무슨 뜻이 그리 옹골차고 갸륵해서 한반도 배꼽에, 있는 듯 없는 듯 있다가 이십세기 초에서야 눈에 띠였을까. 연교차도 크고 여름에는 집중호우가, 겨울에는 북서계절풍의 바람받이에 위치하여 강설량도 많을뿐더러 춥기로 말하자면 대륙성기후의 전형이 아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조건이 연유가 아니라 미선나무만이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이 모르는 어떤 땅기운에 흡의하여서가 아닐까. 하늘과 땅의 위태로운 선의만을 골라서 제 것으로 삼았을까. 밤하늘의 별을 보고 별 닮은 꽃피우고 햇살의 변주로 황홀한 향 지녔을까.
소나무 사이로 별의 동녘이 움트는
큰개자리 여인숙,
오늘 하루 나 거기서 묵었다 가려 하네.
거인 사냥꾼 오리온은
왼쪽 옆구리에 끼기 좋은 하트모양으로 누웠고
얼음 붙은 쩡쩡한 소리로
태백성이 호수를 타종하는 곳.
그믐이라 눈 덮인 숲길은 더욱 빛나
별의 성역으로 가는 길이 은싸라기 부려놓은 듯하네.
발아래 밟히는 이깔나무 열매,
당의정 같은 산토끼들의 똥.
섬뜩하게 살별이 긋고 지나간 하늘엔 서기가 감돌고
별빛으로 헹궈낸 머릿속은 맑은 고량주 빛깔로 찰랑이네.
그곳, 밤이 나의 성좌임을
칠흑 어둠의 의지로 발화케 하는 곳에
도수 높은 내 명정(酩酊)의 간이숙소가 있네
순도 높은 휴식, 밤의 호의가 있네.
씨곡 알알이 겨를 벗듯 발아하는 별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지만 근육이 미소 짓는 힘.
그러한 힘으로 길음 골짜기를 걸터듬어 산정으로 오르고
샘의 향기를 맡은 별들이 숲정이로 내려앉네.
밤의 처마 네 귀퉁이에 열린 별의 풍경이
내 입김에 별꽃처럼 녹아내릴 즈음,
내 아득한 꿈으로 애벌 씻은 하늘엔 운빈(雲鬢) 걷히고
그렁그렁한 슬픔도 넘칠 듯 눌어
호박의 아주 오래된 온기를 지니네.
그 따뜻함, 훗훗함은
우주의 늘봄으로 지하광석들을 꿈틀거리게 하네.
밤의 저 절대적인 싹들, 항성의 나무들.
성도(星圖) 한가운데 깊숙이 멧부리 들고 솟은 나의 노래는
별보다 반음 낮고 얼음보다 반은 높은 음조로
수목 한계선 너머 은허문자들의 영토를
밤새워 음유하다 가리.
큰개자리 여인숙, 그 객사에서의 하룻밤.
김영래 「큰개자리 여인숙」
씨곡 알알이 겨를 벗듯 발아하는 별들을 올려다보며 우주의 연수를 헤아리다 입김이 별꽃처럼 녹아내릴 즈음 피어오른 그리움의 계통발생인가. 우주의 늘봄으로 꿈틀거리는 지하광석을 연모한 애탐일까. 별보다 반이 낮고 얼음보다 반이 높아 서늘하고도 쓸쓸하게 때론 처연하고도 비장하게 우리의 곁을 지키는가. 은허문자의 영토를 밤새워 은유하며 우리의 곁을 지키는 나무, 나무, 나무, 미선나무, 나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