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의 回想(회상)
고군면 오일시 박영관
2020년 경자년의 달력이 한 장 덜렁 남았다. 연초부터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행정 당국은 지금껏 방콕을 바라는 실정이다.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이다.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게 봄이 지나갔고, 사회적 흐름은 추운 날씨가 기승을 부리듯 계속 수위가 더해져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어렸을 때를 회상해 본다. 친구들과 봄이나 여름이면 땅이나 마루, 목침 등에 꼰(호박고누, 우물고누, 넉줄고누 등)을 그려놓고 놀이를 하거나 돈치기, 구슬치기, 땅따먹기(땅 빼앗기) 놀이를 하였다. 무더운 여름날이면 둠벙이나 냇가로 떼지어 가 목욕하거나, 세숫대야의 물로 등멱(목물)을 하였다. 저녁이면 여자들은 그룹을 지어 냇가의 웅덩이나 빨래터에 모여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곳은 여자들 소리가 나면 남자들은 함부로 지나가면 안 되는 금기의 장소였다.
가을이 되면 술래잡기, 들강달강놀이, 선세이구지깡 놀이 등을 하였다. 추석 무렵이면, 달 밝은 밤에 동네 사람들이 손에 손잡고 강강술래를 하며 협동 정신과 놀이(사회적)의 규칙, 건강을 지키는 놀이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겨울철이 되면 연을 만들어 날리거나 팽이치기, 못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등을 하며 놀았다. 또한 스케이트를 만들거나 썰매를 만들어 평평한 길이나 얼음 위에서 타고 놀았다. 스케이트는 소나무로 만들었는데 지름이 10-13cm 정도의 소나무를 반으로 쪼갠 후 타는 사람의 신발보다 약간 크게 자른 후 앞은 유선형 모양으로 낫으로 곱게 깎아 다듬고 신발 바로 밑 부분은 평평하게 하였다. 유선형 모양으로 된 나무의 밑 부분의 중심에 굵은 철사를 한 줄로 고정한다. 그 후 윗부분의 왼쪽과 오른쪽에 적당한 간격으로 못을 3-4개씩 박고 고무줄로 양쪽 못을 이용하여 한쪽 발을 고정하여 단단하게 묶은 다음 얼어있는 논 위에서 중심을 잡아 한 발을 들고 타면 된다. 처음 탈 때는 빙판에 넘어지기도 하지만 연습을 열심히 하면 중심이 잡힌다. 친구들끼리 누가 더 멀리 가는가 내기도 하였다. 상품은 없지만 어린 마음에도 서로 경쟁하는 마음은 같다. 썰매는 만들기도 하였지만, 비닐로 된 비료 가마니에 줄을 매 앞에서 끌어주거나 언덕에 올라가 아래로 내려가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방치하는 논이 많았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드문드문 물이 가득 찬 논에 얼음이 꽁꽁 얼었다. 놀 곳이 없으니 아이들은 집에 있는 팽이나 스케이트, 썰매를 가지고 넓은 장소의 놀이터나 얼어있는 논을 찾아 놀았다. 손발이 빨갛게 되어도 추운 줄도 모르고 즐겁게 놀이에만 열중하여 점심때가 되면 부모님들이 찾아야 아쉬운 듯 집으로 향했다.
이때의 아이들은 운동화는 비싸서 부잣집 아이들이 아니면 신지 못했다. 보통 검정 고무신이나 흰 고무신을 신었고, 그도 터지거나 찢어진 부분은 바늘로 깁거나 고무풀로 붙여 신었다. 양말은 거의 없었고 집에서 만든 버선을 신고 다녔다. 버선은 면화에서 실을 짠 무명이나 廣木(광목), 玉洋木(옥양목)으로 만들었으며, 보온 유지를 위해 속은 솜을 넣어서 만들기도 하였다. 그 후 낙화산 양말이 나와 장날이면 불티나게 팔리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되새겨 보면 실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대보름에는 잠을 자면 눈에 새까리(서캐)가 생긴다고 하면서 ‘잠을 자지 마라’고 하였다. 특히 이날은 양판(양푼)을 들고 남의 집으로 가서 오곡밥과 나물 등을 얻어 개와 나누어 먹거나 친구들과 같이 먹기도 하였다. 이웃 동네 아이들과 어느 마을 불이 더 큰가를 가르는 불싸움도 하고 깡통에 구멍을 뚫어 손잡이는 가는 철사로 묶어 불씨를 넣고 돌리면 작은 횃불이 되는데 이걸 돌리면서 놀았다. 또한 병충해를 없앤다고 논과 밭두둑에 마른 대나무에 불을 붙여 불을 지르는 쥐불놀이도 하였다.
쥐불놀이는 논이나 밭두렁에 불을 붙이는 정월의 민속놀이로 음력 정월 첫 쥐날[上子日(상자일)], 밤에 농가에서 벌이는 풍속이다. 해가 저물면 밭둑이나 논둑의 마른 풀에 일제히 불을 놓아 태우는데 이렇게 하면 1년 내내 병이 없고 재앙을 물리친다고 믿었다. 이날 쥐불을 놓는 까닭도, 잡초를 태움으로써 해충의 알이나 쥐를 박멸하여 풍작을 이루려는 뜻도 담겨있다. 이 쥐불의 크기에 따라 풍년이나 흉년, 마을의 길흉화복을 점치기도 하였는데, 불의 기세가 크면 좋다고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위험한 놀이라고 생각되지만, 그 시절에는 해마다 하는 당연한 놀이로 생각하고 이날을 위해 미리 준비하기도 하였다.
특히 대보름날 아침에는 더위팔기[賣吾暑(매오서)]로 이른 아침에 친구 집 대문 앞에 가서 이름을 불러 대답을 하면 “네독”한다. 그럴 때 대답을 하면 그 친구에게 더위를 판다는 것이다. 이럴 때 부모들은 누구나 부르면 대답하지 말라고 일러주면서 “네독 건네 독”(내 더위 사가거라)이라고 흥겹게 받아 소리치라고 한다. 또한 가축들의 더위를 예방하기 위해 왼새끼를 꼬아 소나 돼지의 목에 걸어주거나 동으로 뻗은 복숭아나무의 가지를 꺾어주기도 하였다.
타임머신에서 뭉클한 가슴을 달래고 내리니 얼기설기 얽힌 세상사로 골패인 얼굴에 백발이 휘날린다. 어릴 때 즐거웠던 일을 회상하면 꿈같던 그 肖像(초상)은 엔도르핀(endorphin)이 된다. 지난 시대의 문화의 한 단면이었고 정이 따스하게 이어졌었다. 그 시절이 하나하나 주마등처럼 지나가면 입가엔 어느새 미소가 머금어진다. 노쇠한 몸에서는 어느새 모닥불이 훈훈히 지펴져 생기의 활력소가 꿈틀댄다.
필자는 핏덩이 때부터 외할머니댁에서 어머니와 셋이 유년 생활을 보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유일한 혈육이다. 두 분은 교육 문제는 살림이 어려워도 내색하지 않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다독이며, 지원해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 궁핍한 살림으로 광주로 고등학교를 보냈으니 실로 대단한 일을 해냈다. 지금 사는 집은 옛집을 개축하였지만, 현재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모두 외할머니의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다.
오늘은 유난히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두 분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필자가 있었을까?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고귀한 삶의 일부가 파노라마처럼 조명된다. 아린 가슴을 달래며 어릴 때의 회상을 되새기는 마음을 담아 맺는다.
어머니는 으레
손발이 부르터도 약도 바르지 않고
해어진 옷을 깁고 또 기워 입어도
새벽닭이 울면 호미 들고 나가고
땅거미 지면 돌아와
자식은 밑반찬에 쌀밥
어머니는 반찬 없는 찬밥 한 술
어머니는 으레 그러는 줄 알았습니다.
손발에 생채기가 나도 침으로 바르고
여기저기 상처투성이도 견디며
그리 아프고 모진 삶을 살아도
눈여겨보지 않고
어머니는 으레 그러는 줄 알았는데
해가 지고 달이 가니
곱디고운 그 마음 떠올라 가슴에 박혀
가 없는 뉘우침으로
눈물로 부르고 또 외쳐가며
어머니! 죄송합니다
용서하소서 해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