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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25 행복운동특별본부 대회, 정토경전대학 입학식
“치매 부모를 모실 때 형제들과 어떻게 의논을 해야 할까요?”
https://www.jungto.org/pomnyun/view/84194
2023.03.28.
안녕하세요. 오늘은 2차 만일결사를 새롭게 시작하며 행복운동특별본부 대회를 하고, 정토 경전대학 입학식을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텃밭으로 나갔습니다. 오늘은 울력할 시간이 없어서 둘러보기만 했습니다.
“이 꽃 좀 보세요. 상추도 꽃처럼 예쁘네요.”
오전 9시부터 행복운동특별본부 대회에 온라인으로 참석했습니다. 새롭게 구성된 행복운동특별본부 구성원 전체가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수행문을 함께 읽고 대회를 시작했습니다.
각 지회별로 슬로건을 만들어 와서 힘차게 외치며 새로운 출발을 함께 축하한 후 2023년 사업계획을 발표하고, 임원을 맡은 분들의 각오와 다짐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봄에 활짝 피어나는 꽃들처럼 모두의 얼굴에 새로운 다짐과 희망이 가득했습니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각진 후 다 함께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왜 행복운동특별본부가 만들어졌는지 그 목적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지난 백 년 동안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겪고, 독립 후 분단이 되고 한국 전쟁을 치렀으며, 독재 체제 하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대한민국은 독립을 하고, 민주화도 이루고, 경제 성장도 달성하고, 전 세계에 한류문화를 확산하는 나라로 발전해 왔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요소가 매우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과거의 부정적 유산들이 해결이 안 되어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한반도에 대량 파괴를 몰고 오는 전쟁을 막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한과 북한의 대결을 완화하고 서로 화해해서 통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을 기초로 해서 동북아시아에 평화를 가져오고, 다가오는 22세기에 아시아 시대를 준비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대한민국 국민들이 나라와 민족에 대해서 자긍심을 갖고 공익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애국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 도덕성이 희박한 것처럼 우리나라 안에 공익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정치권만 봐도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치닫고 있고, 오직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면 경쟁이라기보다는 투쟁을 하고 있는 그런 시대로 점점 내몰려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행복도를 높이고 한반도를 평화롭게
언론에 보도된 기사를 보셨겠지만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의 행복도가 매우 낮습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세 가지가 성격이 급한 것, 욕심이 많은 것, 자기주장이 센 것입니다. 이런 측면들을 좀 완화해서 개인의 행복도를 높이고 사회를 좀 더 평화롭게 만들어가기 위해 마련한 것이 행복학교와 행복시민운동입니다. 더 크게는 기후 위기를 막고 지속 가능한 미래문명을 창조해 나가기 위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목표를 갖고 2차 만일결사를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과거에 집착해도 안 되고, 너무 허황된 생각을 해도 안되고, 너무 개인 수행에만 집중해도 안 되고, 너무 사회 변화만 주장을 해도 안 됩니다. 자기 성찰도 하면서 세상도 바꿔나가는, 즉 개인의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동시에 해나가는 보살의 길을 가기 위해서 행복운동특별본부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물론 개개인은 나름대로 특성이 있고, 이념이나 사상이 조금씩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런 다양성을 수용하되 큰 틀에서는 이런 설립 취지에 동의를 하고 이 활동에 참여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여기까지 기조 법문을 한 후 이어서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다섯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세 명은 최근에 논란이 일고 있는 한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정부의 외교 정책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스님은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을 추구해 나간다는 관점에서 현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관점을 잡아 주었습니다.
개인적인 고민을 질문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친정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상황인데 형제들 사이에서 어떻게 조율을 해나가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치매 부모를 모실 때 형제들과 어떻게 의논을 해야 할까요?
“친정엄마가 치매이십니다. 밥은 혼자서 드시지만 활동하고 걷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어를 말하지 못해서 언어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에 주간보호센터를 다니고 계십니다. 점점 혼자 사시기가 힘드신 것 같아서 제가 모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릴 때 학대를 많이 받았던 기억이 있어서 엄마를 모셔도 될지, 만약 모신다면 수행자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형제 중에 제가 첫째입니다. 엄마를 모시게 되면 발생하는 비용이 있어서 그것을 형제간에 똑같이 내야 하는지, 아니면 잘 사는 사람이 더 내면 되는지, 아니면 부모를 모시는 사람은 내지 않아도 되는지, 아니면 모시는 사람이 전부 부담을 해야 될까요? 그리고 주변에 부모를 모시는 사람이 부모의 집을 가져가는 상황을 많이 봤습니다. 이것이 합당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만약 다른 형제가 부모를 모신다면 모두가 N분의 1로 나눠서 부담을 하든지, 부모를 모시는 사람을 빼고 나머지 사람들이 N분의 1로 나눠 부담을 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 내가 부모를 모신다면 나는 돈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부모를 모시는 사람은 ‘내가 부모를 모시기까지 하니 돈은 형제들이 내야 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기가 쉬운데, 대개 형제들은 용돈을 조금 내는 정도는 수용하지만 ‘네가 모시니까 네가 다 부담해라’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네가 모셔주니 고맙다. 나머지 돈은 우리가 내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열 명 중에 한 명도 안 된다고 봐야 됩니다. 그러니 ‘내가 부모를 모실 테니 돈은 너희들이 내라’라고 말하면 가족 간에 갈등을 생길 가능성이 높아요.
또 어머니가 집이 있거나 유산이라도 있으면 내가 모신다고 하는 순간 벌써 형제들은 ‘집을 가져가려고 저러는구나’ 하고 오해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말로 하든 안 하든 그렇게 생각할 확률이 매우 높아요. 그래서 가능하면 부모가 재산이 있는 경우에는 부모를 안 모시는 게 좋습니다. 숫제 부모가 재산이 아예 없으면 자식으로서 부모를 모시는 것에 대해 아무런 오해를 받지 않을 수 있고, 형제간에도 도움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재산이 있으면 내가 아무리 선의로 부모를 모신다고 해도 오해를 받기가 쉽습니다.
만약 부모가 고맙다고 생전에 집을 나에게 증여라도 하게 되면 형제간에 우애는 깨집니다. 왜냐하면 형제들은 ‘결국 집을 가지려고 저렇게 했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집을 남기셨더라도 질문자가 그 집을 가질 법적 권리는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극진히 효도를 하고 돈을 많이 지원했더라도 부모의 유산은 법적으로 형제가 똑같이 N분의 1로 나눠 갖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 동생이 어머니를 모셨다고 하면 ‘네가 어머니를 모셨으니까 집은 동생이 가져라’ 하고 말해도 괜찮지만, 내가 어머니를 모셨을 때는 집을 N분의 1로 똑같이 나눠서 법에 보장된 방식으로 형제들이 가져가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어머니를 모셨으니까 이 집은 내가 가져도 된다’라고 생각한다면 형제간에 원수가 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법적으로도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부모를 모시지 않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어머니가 더 이상 혼자서 지내기 어렵다면 형제들과 의논해서 다른 형제가 모시게 하고, 질문자는 재정을 부담하는 게 낫습니다. 그것도 어려우면 요양원에 모시고 자주 면회를 가는 게 나아요.
그리고 질문자가 어머니를 모시게 될 때는 또 다른 위험도 있습니다. 치매에 걸린 사람들은 말을 아무렇게나 하잖아요. 어머니가 툭툭 던지는 그 말에 집착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 학대를 당한 경험이 있는 자식은 그때 겪은 트라우마가 반응을 해서 오히려 불행을 자초할 위험이 매우 큽니다. 과거에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았다고 해서 부모를 모시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부모가 치매를 앓고 있기 때문에 질문자의 트라우마를 건드릴 위험이 매우 높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어머니를 가까이하지 않으면서 돕는 것이 좋아요. 너무 안타까워서 가까이 가면 관계가 더 나빠지거나 상처를 입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예측을 하면서 질문자가 어떻게 할지 결정을 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은 동생들에게 먼저 물어봤습니다. 남동생은 엄마랑 사이가 안 좋고, 여동생은 바쁘다고 했습니다. 둘 다 모시기를 거부하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동생들과 의논해서 요양원에 모시는 게 나아요. 질문자가 모시겠다면 재정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요양원에 모시면 형제가 똑같이 3분의 1씩 부담하는 게 가능하지만, 질문자가 맏이이기 때문에 질문자가 모시게 되면 동생들이 그것을 당연시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질문자와 동생들의 생각이 다를 수 있어요. 그리고 동생이 조금이라도 돈을 더 내면 항상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될 처지가 됩니다. ‘그건 너의 의무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왜냐하면 자식이 부모를 모셔야 되는 아무런 법적인 의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현재 집안 상황으로 봐서는 질문자가 앞서서 시작했다가 나중에 후회할 확률이 매우 높아 보여요. 결정을 하더라도 그걸 알고 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에 대해 모두 답변을 하고 나니 12시가 다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념사진을 함께 촬영하고 사홍서원을 한 후 행복운동특별본부 대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2시부터는 정토경전대학 입학식을 시작했습니다. 3월경전대학에 입학한 99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먼저 입학생들의 소감을 들어본 후 경전대학 진행자들의 축하 공연을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해외반을 진행하고 있는 김애경 님이 ‘모두 다 꽃이야’ 노래를 아름다운 목소리로 불러 주었습니다.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
길가에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아무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이어서 정토회 대표님의 환영사를 듣고, 두 사람의 소감을 들어본 후 다 함께 스님에게 입학 기념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먼저 축하 공연을 해주신 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경전대학 입학생 여러분,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입학을 축하하는 노래 공연이 아주 좋았습니다.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 아무 데나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이 노래 가사는 마치 부처님의 말씀 같았습니다. 축하 노래를 해주신 분께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내 마음에 봄꽃이 피어나는 날
노래 가사처럼 모든 사람은 얼굴이 흰색이어도 사람이고, 얼굴이 검은색이어도 사람이고, 남자도 사람이고, 여자도 사람이고, 한국 사람도 사람이고, 미국 사람도 사람이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마음을 가지고 있고, 마음을 가진 자는 누구나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꽃을 상징해서 노래로 표현하는 것 같았습니다. (웃음)
요즘은 정말로 봄이 왔음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어요. 여기저기에 온갖 꽃들이 한창 피어나고 있습니다. 개나리꽃, 목련꽃, 매화꽃, 벚꽃, 복숭아꽃, 앵두꽃, 살구꽃 등 여러 꽃들이 피어나고 있고, 산에는 진달래가 아주 많이 피었습니다. 이런 좋은 봄날에 여러분도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해서 마음에 봄꽃이 피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경전을 배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경전을 토대로 일상에서 어떻게 삶의 관점을 잡을 것인지, 실천 활동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며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2,6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인도에서 출발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시대가 달라지니까 변화가 일어났고, 지역이 달라지니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다양한 불교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이런 불교와 저런 불교의 스펙트럼이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만큼 넓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진짜 불교인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진짜 불교가 어떤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불교문화, 사상, 교리가 만들어졌습니다. 그중에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불교는 한국에 들어와서 한국문화와 결합한 불교에 불과합니다. 세계적으로 나아가면 스님의 옷 모양도 다르고, 불상의 모양도 다르고, 절의 모양도 다르고, 부처님이 태어나신 날짜도 다르고, 부처님이 깨달으신 날짜도 다르고, 부처님이 돌아가신 날짜도 다르고,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읽는 경전도 다릅니다.
지금 행복해지기 위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이렇게 다양한 불교 중에서 무엇을 진짜 불교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자칫 헷갈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불교 중에 어떤 것이 진짜 불교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산에 나무가 몇 종류가 있는지 따질 필요가 뭐가 있어요? 내가 필요한 나무를 산에 가서 베어 오면 되잖아요. 나에게 필요한 나무를 정원수로 심든지 기둥으로 만들면 되지 나무의 종류가 몇 가지 있는지를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처럼 불교가 먼저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느냐가 먼저예요.
우리는 모두 행복하게 살고 싶고, 괴로움 없이 살고 싶어 합니다. 괴로움 없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막상 현실은 늘 괴로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괴로움이란 화나고, 짜증 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슬프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방황하고, 허전해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말합니다. 물론 스스로 ‘이런 게 인생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괴로움을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초조, 불안, 근심, 걱정, 슬픔, 미움, 원망과 괴로움 없이 살고 싶다면 그렇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즉, 사람이 원래부터 이렇게 괴로워하면서 살도록 되어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무언가 생각을 잘못해서 괴로움에 빠져 살고 있다는 것이죠. 원래 괴롭게 살도록 운명 지어진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고, 전생에 지은 죄 때문에 괴롭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괴로워하면서 살고 싶으면 그렇게 살면 되는데, 만약 괴로움 없이 살고 싶다면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괴로움 없이 사는 길을 발견한 사람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깊이 탐구하셨고 그 원인을 발견해 내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면 괴로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 하는 진리를 설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집멸도’의 사성제(四聖諦)입니다.
괴로움을 한 번 없앴다고 하더라도 이 괴로움은 다시 생길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괴로움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라고도 하셨습니다. 괴로움에 대한 예방책이라고 할 수 있죠. 그 예방책이 바로 여덟 가지의 바른 길을 의미하는 팔정도(八正道)입니다.
이렇게 법의 이치는 간단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후대 사람들은 이러한 법의 이치나 도(道)를 버리고 다시 세속의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오히려 불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다시 세속적인 길을 가기도 했습니다. 괴로움이 없는 삶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다시 세속적인 관점에서 절을 크게 지으려고 하고, 돈이 많고 지위가 높은 걸 좋아했습니다.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들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을 읽고 외우면서도 실제로는 세속적인 길로 빠지니까, ‘이것은 붓다의 근본적인 가르침에서 바라볼 때 올바른 방향이 아니다’ 이렇게 문제제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불교의 목표는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길, 즉 해탈과 열반입니다. 해탈은 얽매임이 없는 자유를 뜻하고, 열반은 괴로움이 없는 행복을 뜻합니다.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하고 그것을 증득하려고 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지, 죽어서 극락이 어떻다느니, 내생이 어떻다느니, 불교를 믿으면 다음 생에 부자로 태어난다느니, 이런 것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불교 경전을 많이 읽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거나 다음 생에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식으로 가르침을 전파했기 때문에 후대에 새로운 불교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불교의 원래 가르침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을 대승불교 운동이라고 합니다.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서 붓다의 원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다시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에 새로 일어난 선불교(禪佛敎) 운동은 대승불교 운동보다 더 파격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경전에 적힌 글에 얽매이는 것도 필요 없고, 마음을 깨닫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음 하나 깨달으면 되지 무슨 글자에 얽매이느냐고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마음 하나 깨달으면 되지 글자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하는 주장들이 수도 없이 쌓여서 죽을 때까지 다 공부해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웃음)
이런 과정이 지난 2,600년 동안 전 세계에서 여러 차례 벌어졌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결과물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불교를 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다른 불교에 대한 이해를 갖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걸 접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세속적 주장도 있고, 그걸 비판하는 혁명적 주장도 있고, 당시에는 혁명적 주장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주장도 있고, 이런 과정을 반복해서 겪어왔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불교의 원래의 관심사인 ‘내가 괴로움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길’에 도움이 되는 것만 취사선택을 하면 됩니다. 물론 경전대학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과 그 내용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주장들은 우리의 머리를 복잡하게 하려고 나온 게 아니에요. 모두 당시의 필요에 의해 나오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경전대학에서는 왜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배웁니다. 그중에서 우리는 대승불교의 문제의식이 가장 잘 담겨있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선택해서 공부합니다.
불교의 역사에서 또 다른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선(禪) 불교입니다. 그들은 문자 같은 건 필요 없고 내가 직접 경험하고 체험해서 마음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글에 얽매이는 건 마치 달을 가리키면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을 보는 것과 같다는 혁명적인 주장을 하기도 하고, 내 마음 깨달으면 그게 곧 부처이지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파격적인 주장도 했습니다. 선불교도 후대에 여러 가지 갈래로 나뉘게 되는데, 우리는 선불교의 가장 초기 정신이 담긴 육조단경을 공부합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 500년이 지난 1세기경의 인도 사람들이 가졌던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경전입니다. 육조단경은 그 후로 다시 500년이 지난 6세기에서 7세기경의 중국 사람들이 가진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경전입니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길이 무엇인가
이런 경전들을 공부하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다시 그때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브라만 시대에 부처님께서 새로운 길을 가셨듯이, 소승불교가 번창한 시기에 새로운 불교인 대승불교가 일어났듯이, 대승불교가 번창한 시기에 새로운 불교인 선불교가 일어났듯이, 오늘날에도 수많은 종교와 철학이 난무하는 가운데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길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길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에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의 문제의식을 공부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답을 얻기 위해서 경전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그런 사실 관계를 기억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내가 미래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서 과거에 다른 사람이 경험한 바를 참고하는 것입니다. 경전을 절대화 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경전 속에서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가를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언어는 다르지만 경전 속에서 붓다가 가진 관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경전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당시에는 상상도 못 할 파격적인 관점이 바로 연기법입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연기법은 요즘 사람들이 들어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따져보면 아주 분명한 진실입니다. 올바른 길은 시간과 공간적 조건에 따라서 유동적으로 나타나며 어떠한 것도 고정된 것은 없다는 중도(中道)의 가르침은 어쩌면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중도의 길에 대해 대승불교에서는 ‘공(空)’이라는 언어로 표현을 했고, 선불교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 즉 문자에 너무 의지하지 말라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둘 다 쉽게 말하면 ‘고정관념에 빠지지 말라’ 하는 의미입니다. 대승불교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상(相)’이라고 이름을 지어서 ‘상을 짓지 말라’ 하고 표현했고, 선불교에서는 ‘문자에 집착하지 말라’ 하고 표현했습니다. 그 본질은 동일합니다. 모두 고정관념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내가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대승불교 경전과 선불교 경전을 통해서 그들이 발견한 핵심 가르침을 공부하는 거예요. 그러니 그 요점을 파악하는 데는 어려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관념에 빠지지 않기 위해 주어지는 실천 과제
특히 대승 불교는 사회적 실천을 강조합니다. 이 역시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 혼자만 공부하는 게 아니라 이웃과 함께 공부하고, 나만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세상 속에서 실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대학을 공부하는 동안에는 여러분에게 실천 과제가 주어집니다. 기후 위기를 극복하는 환경 실천을 체험해보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 평화 캠페인을 해보고, 이웃에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구호활동을 해보고, 으뜸절에 가서 농사도 한번 지어보고, 꽃밭도 가꿔보고, 재활용 물건도 정리해보고, 내가 사는 동네에서도 다양한 실천 활동도 해봅니다. 이런 실천 활동이 반드시 겸비되어야 경전대학을 졸업할 수 있습니다.
실천 활동이 함께 따르지 않으면 자꾸 관념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을 온라인으로 전환하고 나서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이 실천 과제였습니다. 각자 방에서 온라인으로 법문을 듣고 온라인으로 나누기를 하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실천 활동을 하기 위해서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자고 하면 불편한 겁니다. 그래서 결석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졸업을 못하는 문제가 생겨나고 있어요.
불법의 가피를 입는다는 건 불법을 경험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마음의 이치를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기쁨은 시험에 합격하고, 결혼하고, 돈을 많이 벌었을 때의 기쁨 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걸 저는 체험했기 때문에 복을 비는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고도 이 부처님의 법만으로도 현대인들은 충분히 이 법에 귀의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제가 배우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알게 된 것을 요약해서 교과 과정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토불교대학과 경전대학 과정입니다.
마음의 이치를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기쁨
어쩌면 제가 수십 년간 배우고 경험한 것을 요약해서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의 교과 과정에는 허황된 이야기가 일절 없습니다. 저부터 이치에 맞지 않는 허황된 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세속적인 내용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현실에 맞는 가르침이라는 것은 지금도 생활 속에 적용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뜻이지 세속적인 가르침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세속적으로 복을 빌도록 하는 가르침은 우리를 해탈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설령 정토회 활동을 그만두더라도 최소한 경전대학은 졸업하고 나서 그만둬야 합니다. 경전대학에서 배우는 정도의 기본적인 소양은 갖춰야 앞으로 기독교 공부를 하든, 다른 철학과 사상을 공부하든, 자신의 입지가 서고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전을 공부하는 것은 역사의식을 갖는 것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결국 경전 공부란 수많은 경전 속에 다양한 주장들을 놓고 어떤 관점에서 이들을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조금만 관심을 두면 경전대학에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전대학에서 배우는 내용은 지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조금 어렵더라도 그 고비를 넘기시면 많은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입학식 법문을 갈음하고 입학생들 중에 법문을 듣고 난 소감을 자유롭게 말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앞으로의 수업 시간에 대한 기대감을 말하는 참가자들이 줄을 이어서 소감을 말했습니다. 사홍서원으로 입학식을 마친 후 참가자들은 교실별로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여 첫인사와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방송실을 나온 스님은 법사교육을 받기 위해 두북 수련원에 내려와 있는 행자님들과 함께 언양 작천정에 벚꽃을 보러 나갔습니다. 작년보다 10일이나 빨리 벚꽃이 개화를 했습니다. 봄의 여유를 만끽한 후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서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두북 수련원을 찾아온 손님들과 함께 하루 종일 봄꽃 구경을 다녀온 후 저녁에는 일요 명상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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