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이 더 선호하는 왜곡된 보도와 왜곡된 설교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나는 특정 방송이나 신문에 나는 기사 거리와 심지어 유튜브 등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특정 방송이나 유튜브나 신문을 읽다 보면 펙트가 아닌 의혹만으로 그것이 곧 팩트인 양 호도되고 부풀리다 못해 확정지어 결정해 버리는 실 예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특히 요즈음 시대가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도 모르게 그런 기사를 쓴 그 기자의 생각과 시각에 끌려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문이나 방송은 사실적 보도를 그 생명으로 한다. 방송을 보거나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은 어떤 사건에 대한 기자의 생각과 시각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실이 무엇인가를 그 팩트만을 알고 싶어 할 뿐이다.
그러므로 방송이나 신문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달만 하면 되는 것이지 자신들의 시각과 사상을 기준으로 해서
사건을 팩트와 다르게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판단하여 가공된 자료들을 보도를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다만 그러한 것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재하는 칼럼과 같은 것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결국 방송이나 신문이 본연의 역할을 벗어남으로 인해서 같은 사건을 두고도 서로 다르게 보도되는 것을 얼마든지 우리는 현실 속에서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어야 한다.
그런데 특정 방송이나 신문이 자신들의 사상과 생각을 가미하여 사건을 자기들의 시각으로 멋대로 가공해서 전달해 버린다면 결국 독자는 특정 방송이나 특정 신문의 판단을 강요받는 것이 되어 버린다. 난 그것이 싫은 것이다.
물론 방송이나 신문마다 각각 그 나름대로 특징은 있다. 어떤 특정 방송이나 신문은 노동계의 소식에 비중을 둘 수 있고, 또 어떤 방송이나 신문은 정치계의 소식에 더 많은 비중을 둘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팩트에 근거하지 못하고 자기 주관적인 시각으로 어떤 한 사건을 가공해서 정보를 전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왜곡 보도이기 때문이다. 특정 사실을 감추거나 다르게 보도하는 것만이 왜곡 보도가 아니다. 독자로 하여금 사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유를 침해하는 것도 왜곡 보도인 것이다. 거기에 편승하여 요즈음 특정 유튜버들이 한 몫에 끼워 펙트와는 상관없이 자기 주관적인 목소리로 설쳐대고 있다.
이런 면에서 목사의 설교 역시 다르지 않다. 목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역할 자일 뿐이다. 단지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본의를 밝히 해명하는 계시행위이다.
그러기 위해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그 성경의 다양성의 내용을 통전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으로 통일성 있게 바르게 통찰할 수 있는 계시적 안목이 필요하다.
또한 언약적 구속사관(성경신학적 관점)의 정립은 하나님의 심정으로 말씀의 본의에 깊이 접촉되는 일에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기에
그래서 목사는 성경에 집중해야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다. 마치 금광 깊숙이 매장되어 있는 금광맥처럼 성경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깊숙이 무궁무진하게 매장되어 있다.
그래서 말씀의 세계에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마치 광부가 금광맥을 발견하여 그것을 하나하나 캐내는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구원의 길을 찾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이처럼 구원의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가면서 점차 선명하고 확고하게 드러나는 구원의 진리를 알아가는 기쁨 보다는 다만 현실적인 필요의 요구에 더 관심이 크다. 이러한 현대 기독교에 교회로서의 참된 본질이 간직되어 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시 121:1,2절 시편의 기자처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는 물음에 대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라’라는 답을 분명히 제시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여호와만이 구원의 도움이시라는 믿음의 길로 감으로써 구원의 답을 가진 교회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가 성경에서 이탈함으로써 오직 자신의 현실적 상황만을 잘 대변해 주는 평강하다, 평강하다 라는 위로와 격려가 곧 답이라는 세상의 길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설교란 방법과 기술이 아니다. 인문학이나 글쓰기가 아니다. 단지 목사가 독자들에게 인간의 구미에 맞게 성경의 내용과 인문학적 관점으로 세상의 가치들을 잘 섞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가공하여 전달하는 것이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를 액면 그대로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이 설교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자기 자신을 포함 한 모든 설교자를 중매쟁이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결혼 중매쟁이도 신랑의 정확한 정보와 팩트만을 가지고 상대의 신부에게 잘 전달해 주어야만이 비로소 그 상대가 그 신랑의 정확한 펙트의 정보를 갖고 신랑을 올바르게 선택 할 수 있는 기회로 선용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데도 신자가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성경의 구절을 그대로만 읽어도 청중들이 이해하고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신 바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깨달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공부하지 않은 성도들이 그렇게 하기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지 않게 담고 있는 팩트의 진의를 올바로 해석하여 청중들에게 사실 그대로 곧이 곧대로 전달하는 것이 그 어떤 종교적인 행위들보다 참으로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이것이 설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목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만 초점을 두지 않고 자신이 목적하고 원하는 것을 교인들에게 강요하고 가르치고자 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 되어 버림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 없는 말을 하는 것만이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자기 주관적인 생각대로 가공해 버리는 것도 심각한 왜곡인 것이다. 그래서 설교를 할 때마다 설교가 나에게 안겨주는 숙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본의를 벗어나지 않고 최대한 하나님의 뜻에 접근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버려져야 하는 것은 목사인 내가 하고 싶은 자기 말이다. 지금까지 설교를 해오면서 어려웠던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보다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보다 대중에게 관심을 갖고 신자들에게 원하는 것을 앞세우다 보니 성경을 이용해서 결국 독자들이 기대하고 바라는 것들을 생각하다 보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목사 또한 말씀 앞에선 신자임을 생각하고 설교를 듣는 신자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가 아니라 목사는 설교를 하는 사람, 신자는 설교를 듣는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설교를 하는 사람으로서 신자들 위에 있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이용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설교를 하는 목사도 말씀을 듣는 자라는 사실을 놓쳐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일반 신자 뿐만 아니라 목사 자신도 삶의 실질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즉 이 세상 역사 속에 면면이 흐르는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 경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적인 절대 주권과 그 말씀의 지배와 다스림 안에 서 있지 못하고 본질과 다른 말씀과 동떨어진 이중적인 삶을 지향해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이 의도한 바를 전하려는 욕심 때문에 문장만 제대로 파악해도, 전후좌우 문맥에만 충실해도 황당한 말은 피할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를 못하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런 황당한 말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아멘하면서 받아들이는 교인들의 수준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정말 말이 안 통한다. 함께 얘기를 해봐야 가슴 답답함과 속에서 솟아오르는 울분을 경험할 뿐이다.
그러하기에 기자나 목사는 있는 사실을 사실 그 대로 팩트만 반드시 전달해야 할 책임이 있다. 기자는 사건의 본의를 벗어나서는 안 되고 목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본의를 벗어 나서는 안 된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 본의를 벗어날 때 성경을 왜곡하게 되고 이것은 신자로 하여금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악을 행하는 것이 됨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전에 택한 하나님의 양은 자기 목자(그리스도)의 음성만을 듣고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일 주일 설교를 위해 다시금 다짐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