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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특강>
덕향문학회 문학강좌교실 "인생을 그리다."
1. 문학 용어 (이론)
溥根 최기복 /시인, 효학박사, 덕향문학 발행인
1. 다다이즘 [dadaism]
기존의 모든 가치나 질서를 철저히 부정하고 야유하면서, 비이성적, 비심미적, 비도덕적인 것을 지향하는 예술 사조
다다이즘 [dadaism]이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말엽부터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예술 운동을 말한다.
다다(dada)라고도 한다. 조형예술(造形藝術)뿐만 아니라 넓게 문학·음악의 영역까지 포함한다. 다다란 본래 프랑스어(語)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木馬)를 가리키는 말이나, 이것은 다다이즘의 본질에 뿌리를 둔 ‘무의미함의 의미’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다다이즘은 처음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작되었다. 1916년 2월 작가 겸 연출가인 H.발이 카바레 볼테르를 개점하고, 시인인 T.차라, R.휠젠베크 등과 함께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비합리성·반도덕·비심미적(非審美的)인 것을 찬미하였다. 차라는 “새로운 예술가는 항의한다. 새로운 예술가는 이미 설명적·상징적인 복제(複製)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돌이나 나무나 쇠[鐵]로 직접 창조한다. 특급기관차(特急機關車)와 같은 새로운 예술가의 유기체(有機體)는 순간적인 감동을 싣고 모든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오늘날 말하는 자유분방한 오브제(objet)가 등장하는데 그것들은 문자 그대로 중립(中立)을 선언하면서 스위스에 모인 망명자들의, 밖에서의 참혹한 살육을 의식한 발언이며, 그들은 종래의 예술작품이 외적(外的) 폭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는가를 전쟁 체험을 통하여 느끼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잡지 《다다》가 발간되고 우연을 이용한 추상시· 음향시가 발표되는 등 이 취리히 다다는 1920년까지 계속되었다.
독일에서의 다다이즘은 베를린·하노버·쾰른 등 세 곳의 중심점을 가지고 있다. 베를린에서는 R.하우스만, G.그로스, W.메링 등이 주된 예술가였는데, 여류인 H.헤히도 여기에 가담하였다. 취리히와는 달리 베를린은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하였으므로 다다이즘도 혁명적 요소를 갖추고 하우스만의 아상블뢰즈(assambleuse:여러 가지 오브제 모음)나 헤히의 포토몽타주(2장 이상의 사진을 붙여 중복인화 ·중복노출 등으로 새로운 시각효과를 노림. 고안자는 J.하트필드라고도 한다) 이외에 그로스의 격렬한 반전(反戰) 시리즈인 《이 사람을 보라》 등을 탄생시키고 있다. 《이 사람을 보라》는 제1차세계대전 중의 군부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전후의 황폐, 그리고 다시 권력자로 변해가고 있는 사회 상층계급에 대한 공격을 내포하는 무산계급의 옹호를 그 특색으로 한, 예리한 시각의 소묘집(素描集)이다.
베를린에서의 다다이즘은 대전이 끝난 1918년부터 1933년까지 계속되었다. 하노버에서의 중심인물은 K.슈비터스였다. 슈비터스도 시와 조형(造形)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나타내어 1923~1932년 잡지 《메르츠》를 간행하고 있었는데 주목되는 작품은 《메르츠바우》이다. 이것은 길에서 주운 널조각과 잡동사니를 소재로 하여 만든 기둥인데 조각에서 표현한 콜라주(collage)의 선구적 예(例)이기도 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콜라주는 다다이즘의 유력한 무기인데, 일찍이 입체주의(큐비즘)의 P.코레에서도 같은 종류의 경향을 볼 수 있다. 다만 다다이즘의 경우에는 응용하는 소재를 신문지 ·우표 등에서 우모(羽毛) ·철사 ·성냥개비 ·화폐 등으로 더욱 넓히고 있으므로 작품 효과는 입체주의 시대의 것과는 현저하게 달라졌다.
슈비터스는 콜라주의 뛰어난 작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쾰른에서의 다다이즘은 M.에른스트와 J.T.바르겔트로 대표된다. 바르겔트는 잡지 《선풍기(扇風機)》의 창간자이기도 하며, 에른스트와 공동으로 제작을 시도한 일도 있는 화가로서 아상블뢰즈를 잘하였다. 에른스트의 기법(技法)은 콜라주이며, 1920년 파리에서 열린 콜라주전(展)은 이제까지의 회화개념(繪畵槪念)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그는 1924년에 초현실주의(surralisme) 운동에 참여하여 독특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타주(frottage)에 새로운 면을 개척했는데, 그것을 보면 다다이즘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는 과정은 종이 한 장 차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파리에서의 다다이즘 운동은 1919년에 이루어졌다. 자살한 23세의 시인 J.바셰 외에 ‘검은 유모어’의 A.브르통 등도 다다이즘의 선봉으로서 빼놓을 수 없으며, P.엘뤼아르, B.페레, L.아라공 등도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다.
뉴욕에서의 다다이즘은 취리히와 그 모습을 같이하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 또는 대전 전부터 전위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필시 1913년에 개최된 사진과 회화의 모던 아트전(展) 아모리 쇼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 전람회에 출품된 M.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裸體)》는 사진가 A.스티그리츠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요소로서의 광채(光彩)라고까지 절찬한 브르통을 포함해서 미국 전람회 역사상 보기 드문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 작품은 순전히 메커니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데도, 마치 고속사진(高速寫眞)의 한 장면과 같이 역동적이며, 미래파(未來派) 작품에 호응하여 사진과 예술의 새로운 결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 후 뒤샹은 기성품(旣成品)을 곁들인 레디 메이드(ready made)를 발표하여, 다다이즘이라고 하면 M.레이의 《선물》(1921)이냐 뒤샹의 《샘[泉]》(1917)이냐라고 할 정도로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또한 F.피카비아, H.알프, 실험영화로 유명한 H.리히터도 빼놓을 수는 없다. 다다이즘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네오 다다’라는 명칭으로 부활 되었다. 부활의 배경은 전후 고조되고 있던 기계문명·인간소외 등의 이유에서였다. 다다이즘의 대표 작가로는 R.리히텐슈타인, J.팅게리, C.올덴버그, H.로젠버그 등을 들 수 있다.
* 시인 정지용은 1926년 다다이즘 경향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을 하였다.
2. 페미니즘 [(Feminism) 여성주의 (女性主義) ]
1)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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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또는 여권주의로 번역되곤 하는 페미니즘은 남성중심주의와 가부장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여성의 권익 신장을 포함한 젠더 불평등의 타파를 논하는 이론이다.
한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Feminism'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Feminism, the belief in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equality of the sexes. Although largely originating in the West, feminism is manifested worldwide and is represented by various institutions committed to activity on behalf of women’s rights and interests. #
해석: 페미니즘은 성별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평등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주로 서양에서 유래했지만, 페미니즘은 전세계적인 주장이며 여성의 권리와 이권에 관련한 활동을 하는 수많은 단체들이 내세우고 있다.
2) 설명
2015년부터 국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키워드이며 나무위키를 비롯한 인터넷 커뮤니티를 비롯하여 정치계, 언론계를 뜨겁게 논하는 이슈 중 하나다. 여성주의(Feminism, 페미니즘, 女性主義)는 여성의 권리를 추구하며, 여성에 대한 차별을 반대한다. 페미니즘(féminisme)이라는 용어는 1837년 프랑스의 유토피아 사회 철학자 샤를 푸리에가 만들어 냈다고 흔히 알려져 있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1872년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1890년에는 영국에서, 1910년에는 미국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옥스퍼드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은 1852년을 여성주의자(Feminist, 페미니스트)가 처음으로 출현한 해, 1895년을 페미니즘의 해로 수록했다. 페미니즘은 20세기 초, 여성 참정권의 인정을 기반으로 시작되어 여성의 사회적인 이미지와 권리를 남성과 동등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여성의 권리 확장과 성차별적인 대우의 타파를 통해 여성해방과 여성우월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근대 초기부터 지금까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참정권, 투표권, 여성이 의무교육을 받을 권리, 여성이 남성과 법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획득할 권리, 아동과 노약자 보호, 성폭력 예방, 올바른 성교육, 환경보호, 사회복지, 노동환경 개선 등 폭넓은 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이루어 냈다. 학계에서는 학제 간 연구의 일환으로 여성학 협동과정 등의 정규과정을 통하여 활발하게 탐구되고 있다. 페미니즘의 선구자로는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주장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가 꼽히며,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나 베티 프리댄의 《여성의 신비》, 케이트 밀릿의 《성 정치학》 등이 있다. 성 평등을 주장한 19세기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를 주장해 초기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페미니즘에는 엄청나게 많은 이해 관계와 이익 관계, 역사와 현재, 합리적 판단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등 많은 것들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주제 자체가 문화권을 막론하고 거대한 화두가 됐다.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이 2015년 이후부터 큰 이슈가 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페미니즘은 한국 포털사이트에서 자주 내리오른 용어였다.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가 당선된 2012년에는 해외 언론에서 페미니즘 사상이 한국에서 부각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이미 페미니즘 사상은 2015년 이전에도 자주 인용되었다. 페미니즘은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뜨거운 이슈이며, 유럽과 북미에서는 한국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이슈화되었다.
3) 명칭
상술한 대로 시대가 시대인지라 사상의 이름에서부터 'Femini-(여성의-)'를 포함하는 만큼 일단 대외적으로 성적 불평등이 상당수 해결된 현재로선 '여성만을 위한 사상이다.'라는 인상으로 여겨진다는 의견이 나타나면서 외부만이 아닌 페미니즘 운동권 내부에서도 명칭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는 중. 즉 다른 성평등을 추구하는 단어를 찾을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사용되던 단어를 계속 쓸 것인지의 차이.
페미니즘 명칭 존치측에서는 Femini라는 단어를 제외할려는 것에서 여성에 대한 문제를 감추려는 의도가 어느 정도 다분하기 때문이며 어느정도 개선되도 유리천장, 유리벽 등 암묵적인 차별이 크게 와닿는 와중에 근본적 해결이 안 된 상태에서 바꾸면 페미니즘을 완벽히 달성할 수 없으니 명칭을 바꾸기엔 아직 빠르다는 주장이다.
페미니즘 변경 찬성 측에선 상술한 의견도 긍정하긴 하지만 현재로선 그 이상으로 시스젠더나 트랜스젠더등 성의 기준자체가 모호한 사람이 많고 여성보다 이들이 더 소수이며 그만큼 더 차별을 받는 와중에 페미니즘이란 늬앙스는 원래의 모든 성의 평등을 가리키는 것과는 반대로 차별받는 축에서도 여성만을 위한다거나 아니면 남성과 다른 성을 배척하고 여성들부터 살펴야 한다는 반발이 나올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변경하자는 의견 측의 주장대로 원래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성평등'에서 현재까지도 성적소수자들까지 포용하기보단 근대 여권신장운동에서 시작하여 여성의 인권만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고 어디까지나 과거에는 제3의 성이란 것 자체가 없다시피했으므로 페미니즘의 사상이 여성에 쏠리기도 한다는 것과 현재 페미니즘 단체가 여초상태나 아니면 남성 자체를 배척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실제로 틀린 게 없는 의견.
다만, 페미니즘 운동 초기에 추구하던 여성 참정권, 사회 참여 등의 진전과 함께 최근에는 생물학적 성에 기인한 억압과 차별에 대한 폐지와 양성의 동일한 권리, 기회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차별 타파 위주의 평등주의와 혼용되기도 한다. 즉 페미니즘은 평등주의 그 자체는 아니지만 다른 부분에서도 평등주의의 입장을 많은 부분에서 수용하려고 노력한다. 배우 엠마 왓슨의 UN 여성의 날 스피치 역시 같은 관점을 반영했으며, 디즈니 또한 남성에 대한 차별을 이야기했고, UN의 여성 권리 운동 역시 성별, 종교, 인종 등으로 인한 차별의 타파를 추구하고 있다.
물론, 모든 페미니즘 분파가 모든 차별의 타파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월성 Superiority참조.) 국내의 워마드처럼 남성 혐오 분파는 오직 생물학적 여성들의 권리만을 위해 남성 성소수자, 트랜스 여성에 대한 차별과 비하를 묵인하거나, 그 차별과 비하를 적극적으로 행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도 존재한다.(TIRF) 참고로 이러한 극단적 현상은 인권운동에서 나타나는 흔한 양상으로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하여 한창 흑인인권운동이 활성화되던 60년대 미국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편하다. 인권운동이 활성화되면 꼭 집단이기주의를 동반한 극단적 우월주의도 따라오는 법이다. 허나 여성이면서 극단적 여성우월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또한 존재한다.
4) 역사
크게 3개의 시대적 사조로 구분이 가능하다. 일반적인 역사 연구에서는 n세대라는 표현을 흔하게 쓰지만, 최근 여성 운동권이나 여성학계에서는 이 시대적 구분을 'wave'로 부르고 n파(또는 'n의 물결')로 번역하고 있다.
4)-1페미니즘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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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px-Mary Wolls...
올랭프 드 구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The belief and aim that women should have the same rights and opportunities as men; the struggle to achieve this aim.
여성이 남성과 같은 권리와 기회를 누려야 한다는 믿음과 목표, 혹은 이를 성취하기 위한 투쟁
옥스퍼드 영어사전
Feminism is a radical notion that women are people.
페미니즘은 여자도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급진적인 개념이다.
마리 시어 (Marie Shear)]
일반적으로 페미니즘(여성주의)은 18세기 근대 유럽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학자들 중에서는 프로토 페미니즘이란 용어를 써서 계몽 시대 이전에 존재했던 성평등 이념의 역사를 다루는 이도 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에서 "신체적인 힘에서 비롯된 차이만을 제외하면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다"고 언급했다. 프로토 페미니즘과 페미니즘을 가르는 기준은 "페미니즘 개념이 정립된 때"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개념이 언제 정립됐는지가 중요하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특정한 신념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 건 1837년 샤를 푸리에가 처음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주장이 오류라는 반론도 있다. 최초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칭한 인물은 프랑스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인 위베르틴 오클레르(1848~1914)였고, 1892년 파리에서 열린 '제1차 국제여성회의'에서 "성평등 이념에 입각하여 여성에게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페미니즘을 정의했다고 한다.#참조 여러 사료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페미니즘 개념이 온전히 정립된 건 19세기 후반 이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만약에 '프로토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받아들인다면, 페미니즘의 기원은 당겨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늦춰질 수도 있다.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프로토 페미니즘을 거부하기도 한다.
18세기 근대 유럽, 당시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중시했고, 동등한 이성을 지닌 인간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 그러나 만인이 평등하다는 천부인권은 여성에게는 인정되지 않았다. 많은 계몽주의자들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이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도 일부는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이성을 갖고 있으니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주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 여성에게도 참정권 등의 법적 권리를 인정할 것인지에 대해 벌어진 논쟁은 근대적인 성평등 이념을 이끌어냈다.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계몽주의에 입각하면서도 계몽사상의 한계인 남성 편향성을 극복하려는 비판적 성찰을 가졌다.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활동하던 시절도 바로 이 때이다.
장 자크 루소(1712~1778)는 계몽 시대의 남성우월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에밀>(1762)에서 "여성은 남성의 마음에 들도록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남성은 가정에서 여성의 뜻에 따르는 대신에, 사회에서는 강자 행세를 하게 된다. 남성은 이성에 따라 스스로 성욕을 억제할 수 있지만, 여성은 남성에게 순종하여 정숙한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루소는 여성이 남성에게 예속되는 것을 정당화했다. 다만, 루소의 여성관에 대해서는 상반된 해석도 존재한다. 루소는 성(sex)에 있어서만 남녀의 차이를 주장했고 종(species)에 있어서는 남녀의 평등을 주장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존재라고 강조했다. 여성성을 강조하였으며 여성 교육을 주장하면서 당시로서는 페미니즘의 발전에 긍정적인 불씨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는 계몽 시대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중 한 명이다. 그는 프랑스의 정치인 탈레랑이 "여성은 가사교육만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한 데 반박하여, 저서 《여성의 권리 옹호》(1792)에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것"을 주장했다.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주된 비판 대상은 루소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루소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여성상에서 '이성(理性)'이 결여되어 있음을 비판했다. 루소가 주장했던 여성 교육 역시 가부장제에 부합한 행실과 욕망을 자극하는 용모만을 갖추는 데 그친 노예 훈련이라고 비판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이 남성처럼 정치.경제.사회.문화 활동 전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여건을 마련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남성과 여성은 상호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성에 대한 이중잣대를 공격했다. 다만, 울스턴크래프트에게도 한계점은 있다. 그는 여성과 남성이 완전히 동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주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즉, 완전히 같은 내용의 시민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지는 않다.
울스턴크래프트는 1797년 둘째 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을 낳고 사망했다. 향년 만 38세. 딸 메리는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와 결혼했으니, 호러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가 그 메리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사상은 생전에 나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사후, 세 번째 남편이자 선구적 아나키스트였던 윌리엄 고드윈(1756~1836)이 <여권의 옹호 저자에 관한 회고록>(1798)을 발간한 걸 계기로 맹비난을 받았다. 고드윈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개방적인 인물이었고 <회고록>에서 아내 울스턴크래프트의 연애 이력, 이혼, 자살 시도, 부부 생활을 꽤나 솔직하게 밝혔다. 당대의 사회 통념과 보수 윤리에는 어긋나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고드윈의 의도와는 다르게 울스턴크래프트의 평판은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선구적인 정신은 백여 년 동안 잊혀졌지만, 20세기 들어서 버지니아 울프(1882~1941)와 엠마 골드만(1869~1940)에 의해 발견되고 재평가받았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직후 작성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여성이나 무산계급을 배제하고 남성에 대해서만 인권을 천명했다. 이에 반발한 몇몇 계몽주의자들은 여성에게도 권리를 부여할 것을 주장했다. 예를 들어, 니콜라 드 콩도르세(1743~1794)는 <여성의 시민권을 위한 청원>(1790)에서 남성에게 부여된 자유와 권리를 여성에게도 부여할 것을 요구하며 여성 참정권을 주장했다. 올랭프 드 구주(1748~1793)는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 선언>(1791)에서 남성에게 부여된 모든 권리를 여성에게도 적용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자코뱅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세력들을 숙청하는 공포 정치를 단행하고 있었다. 올랭프 드 구주는 왕정제를 옹호하고 자코뱅을 비판하는 저술활동을 벌이다가 길로틴에서 처형당했고, 그의 동지였던 콩도르세 후작은 체포된 직후 음독 자살했다.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평등주의)에서 파생되었나"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선 이갈리타리아니즘이라는 용어가 문서마다 각각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키백과나 철학의 기초에서는 이갈리타리아니즘을 평등 이념을 하나의 사상 체계로 정립한 것으로 넓은 의미에서 정의하고 있다. 넓은 의미의 이갈리타리아니즘은 스토아 학파의 코스모폴리타니즘(세계시민주의)이나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평등 사상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였다. 반면에 스탠포드 철학사전 등에서는 고전적인 리버럴리즘(자유주의)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별개의 운동이 된, 좁은 의미의 이갈리타리아니즘을 상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이갈리타리아니즘은 용어가 정립된 이후인 19세기 후반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참조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는 측은 좁은 의미가 아닌 넓은 의미의 이갈리타리아니즘을 말하고 있다.
스토아 학파가 이갈리타리아니즘적이라는 건 "후대의 평가일 뿐"이라는 반론이 있다. 이 반론에 일관성을 맞춘다면, 이갈리타리아니즘이라는 개념이 정립된 19세기 이전에 존재했던 평등 사상들이 이갈리타리아니즘적이라는 건 모두 "후대의 평가일 뿐"일 것이다. 그리고 페미니즘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에 여성의 평등을 주장했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나 올랭프 드 구주(1748~1793)의 사상이 페미니즘적이라는 것도 "후대의 평가일 뿐"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이갈리타리아니즘과 페미니즘을 모두 가장 협소한 의미로 파악하게 되어 서로 간에 큰 상관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개념짓기 이전인 프랑스 혁명기의 여권 운동가들도 페미니즘이라고 용어의 반경을 넓히는 이상 "후대의 평가일 뿐"이라는 반론은 자기모순이 있다. "후대의 평가"라는 반론 외에도, 프로토 페미니즘인 플라톤이 스토아 학파보다 이전의 세대이므로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보다 먼저 발생했다는 반론도 있다. 잘못된 반론이다. 프로토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기원이 아니라 전사(前史)를 말하므로, "플라톤이 프로토 페미니즘"이라는 말은 "페미니즘은 아니었지만 그 이전에 영향을 준 사상"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프로토 페미니즘만으로는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보다 먼저 발생했다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 차라리 "이갈리타리아니즘을 분명히 정의하고, 스토아 학파는 이갈리타리아니즘이 아니라 이갈리타리아니즘의 전사(前史)에 해당한다"고 반론을 제기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평등에 이론적으로 영향을 주었을지언정 근대 정치철학으로서의 평등 사상까지 이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페미니즘의 역사를 근대적 의미로 한정한 예에 비추어봤을 때, 스토아 학파를 이갈리타리아니즘의 전사(前史)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계몽주의자들의 평등 사상까지는 이갈리타리아니즘의 범주로 묶일 수 있을 것이다.
넓은 의미의 이갈리타리아니즘은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평등은 인류 보편의 관념이지만, 어떤 것이 평등인지에 대한 근대적 이론 체계는 고안되는 것이며, 이런 이론들은 넓은 의미에서 이갈리타리아니즘이라는 범주로 묶일 수 있다. 사변적으로 봤을 때 페미니즘 역시 이갈리타리아니즘의 범주로 묶여 일응 하위 개념이나 파생 개념으로 보일 수 있지 않을까도 싶다. 그러나 아무리 이갈리타리아니즘을 넓게 보더라도, 일상적으로나 학술적으로나 현실상에서 페미니즘은 이갈리타리아니즘의 하위 개념, 파생 개념이 아니라 별개의 독립 개념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계몽 시대의 페미니즘은 이전의 이갈리타리아니즘을 그대로 계승한 게 아니라 안티테제로서 등장했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5)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1792)보다 시기적으로 앞섰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1789)은 <여성과 시민의 권리선언>(1791)보다 앞섰지만, 단순히 시기적으로 앞섰다는 사실만으로는 파생관계라고 볼 수 없다. 계몽 시대와 그 이후에 이갈리타리아니즘이라는 타이틀을 내걸었던 지식인들은 지속적으로 여성을 평등의 대상에서 배제해왔으며, 페미니스트들 역시 자신들을 이갈리테리안과 구분지어왔고 오랫동안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애초에 이갈리타리아니즘이라는 용어는 좁은 의미로나 '평등'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많이 쓰이고, 계몽 시대의 평등 사상은 이갈리타리아니즘이라고 묶이기도 하지만 계몽주의 일반이나 자유주의와 함께 묶여서 설명되는 경우가 더 흔하다. 이러한 역사적 전개과정과 통용되는 언어 사용을 고려했을 때 페미니즘은 이갈리타리아니즘과 별개의 범주로 묶는 것이 타당한 측면도 있다고 생각된다. 생각을 서로 공유하거나 영향을 받은 지점이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아나키즘의 탄생에 자유주의의 영향이 있었을지라도 아나키즘이 자유주의의 파생 개념인 건 아니다.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에서 파생되었다"라고 주장하는 건 온전히 맞는 얘기라고 볼 순 없을 것 같다.
다만,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에서 파생되었는가"라는 논의는 "페미니즘을 젠더 이갈리타리아니즘으로 대체할 수 있는가"라는 논의와는 결이 다르다. 비록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으로부터 파생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건 이갈리타리아니즘이라는 개념을 현실적인 쓰임과 과거 용례 등 언어의 사회성을 고려해서 정의내렸기 때문이다. 대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측도 현실적인 쓰임을 주요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언어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함께 변화한다. 오늘날 말하는 이갈리타리아니즘은 젠더 평등을 포함하고 있고, 페미니즘이 과거 여권 운동의 틀을 넘어서 젠더 평등을 지향하는 운동이 되었기 때문에, 대체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체되려면 사회적 수용과 합의가 뒤따라야 한다. 아직은 일상에서나 학계에서나 논의가 미흡하다.
3. 페시미즘 [pessimism]
1. 정의
세상과 인생을 악하고 괴로운 것으로 보고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나아질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주의
염세주의 (厭世主義 pessimism)
요약 주로 쇼펜하우어의 철학사상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는 용어.
(라틴어로 '나쁘다'라는 뜻의 malus의 최상급 pessimum에서 유래).
라틴어로 '좋다'는 뜻의 bonus의 최상급 optimum에서 유래한 optimism과 대응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맹목적인 생명의 의지에 이끌려 불행하고 비참한 삶을 영위하게 되는데 자아의 속박에서 벗어나 생명에의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우리는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그의 성장환경 및 당시의 사회적·문화적 배경과도 관련이 있는데 W.듀랜트는 그의 〈철학이야기 The Story of Philosophy〉에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의 원인을 그 시대의 낭만주의적 기대와 태도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즉 젊은이는 세상으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데 그런 낙관주의가 환멸을 겪은 후에 염세주의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염세주의는 환멸을 겪은 젊은이, 불행한 삶을 체험한 개인, 역사적 불행 속에 성장한 세대에 흔히 발견된다.
2. 박인환 시인이 간직한 페시미즘
1956년 이른 봄.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어느 정도 복구되어 제 모습을 찾아가는 명동 한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경상도집」에 몇 명의 문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는 가수 羅愛心(나애심)도 함께 있었는데,몇 차례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자 일행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했다. 그러나 나애심은 노래를 하지 않았다. 朴寅換(박인환)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즉석에서 시를 써내려갔다. 그것을 넘겨다보고 있던 李眞燮(이진섭)이 그 시를 받아 단숨에 악보를 그려갔다. 그 악보를 들고 나 애심이 노래를 불렀는데,그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것
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어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한 시간쯤 지나 宋志英(송지영)과 나애심이 자리를 뜨고,테너 林萬燮(임만섭)과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의 소설가 李鳳九(이봉구)가 새로 합석했다. 임만섭은 악보를 받아들고 정식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소리를 듣고 명동거리를 지나던 행인들 이 술집 문앞으로 려 들었다.
목마와 숙녀 / 시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草木) 옆에서 자라고
문학(文學)이 죽고...
인생(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作別)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記憶)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낡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술보다 독한 눈물 / 박인환
눈물처럼 뚝뚝 낙엽지는 밤이면
당신의 그림자를 밟고 넘어진
외로운 내 마음을 잡아 보려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그렇게 이별을 견뎠습니다
맺지 못할 이 이별 또한 운명이라며
다시는 울지 말자 다짐 했지만
맨 정신으론 잊지 못해
술을 배웠습니다
사랑을 버린 당신이 뭘 알아
밤마다 내가 마시는건
술이 아니라
술보다 더 독한 눈물이 이였다는 것과
결국 내가 취해 쓰러진건
죽음보다 더 깊은 그리움 이였다는 것을
4. 니힐리즘 [nihilism, 허무주의 (虛無主義) 허무주의자(The Nihilist)]
1) 정의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Gott ist tot. Gott bleibt todt. Und wir haben ihn getodtet. Wie trosten wir uns, die Morder aller Morder?)
- 프리드리히 니체
허무주의(虛,無,主,義) 또는 니힐리즘(nihilism)은 기존의 신, 구원, 진리로 대표되는 추구해야할 절대적 가치 및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이다.
18세기의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상이라 불린다.
허무주의는 허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능동적 허무주의, 수동적 허무주의로 나뉜다. 쉽게 분류하자면, 무엇을 하려고 하는 쪽이 능동적 허무주의이고, 염세적인 반응을 보이며 염세적인 행위를 제외 한다면 딱히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 쪽이 수동적 허무주의다. 수동적 허무주의의 특성상 페시미즘, 즉 염세주의와도 연결이 된다.
수동적 허무주의는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더없이 추악한 자(Der hässlichste Mensch)'라고 부르며 비판한 유형이다. 더없이 추악한 자는 자신의 치욕과 추함 같은 더러운 구석까지 파고들어와 연민하는 목격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참고 견딜수가 없어 신을 죽여버린다.
창작물에서 흔히 등장하는 허무주의는 수동적 허무주의지만, 이 문서는 일단 능동적 허무주의에 중점을 둔 내용이다.
2) 역사
허무주의는 근대 회의주의 사상에서 출발했다. 이전까지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어졌던 것들(예를 들어 절대왕정, 중상주의적 통제 경제, 신분 제도, '기적'과 숭배에 의해 유지되던 지역 사회의 문화)은 혁명의 시대를 거치면서 더 이상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게 되었고, 그 결과 18~19세기 유럽에서는 절대성과 신에 대한 믿음이 점차 퇴조했다. 또한 과학적 탐구를 통한 합리주의 사조에 의해 신의 자리는 점차 좁아져 이신론, 무신론에게까지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데이비드 흄은 회의주의 사상을 내세우면서 귀납법의 한계를 분명히 제시하였기 때문에 경험론의 한계성 또한 대두되었고, 이로 인해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현상 탐구 또한 인간의 감각에 의존하니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퍼져 나갔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철학자들에게 믿을 구석이 남아 있었다. 합리주의 철학자들과 독일의 관념론 철학자들은 이성에 의한 연역적 추론을 통해 절대적인 진리에 대해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르네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들은 때때로 이러한 인간의 이성을 신과 등치시켰다. 그리고 더 나아가, 헤겔과 같은 철학자들은 간혹 이것을 '국가'와 같은 경험적 현상 세계의 문제에 투영시켰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들어서면, 이러한 합리주의에 대해서도 금을 가게 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인간이 경험 세계에 사는 존재라면, 경험 세계가 불확실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인 이상, 이성을 사용해 파악한 세계관 또한 절대적일 수 없지 않은가? 애초에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한 것이라면, 인간의 이성보다 완전한 것을 인간의 주관적 합리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불완전한 것으로부터 완전한 것이 나올 수 있는가?
결국 19세기를 거치면서 합리주의에 대한 믿음조차 사그라졌고, 이러한 사고는 중세의 절대신과 합리주의 사조가 추구하던 절대 진리가 모두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상으로 귀결되었다. 그 결과 인간이 의존할 절대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가 확산되었고,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와 프리드리히 니체 등이 근대 허무주의의 구도를 잡았다. 니체는 투르게네프의 허무주의 관념을 본격적으로 철학에 도입하여 방향을 상실한 유럽 세계의 단상을 지적하였다. 산업화와 잦은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열악한 유럽 사회의 시대상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허무주의는 때때로 혁명적(또는 더 열악한 경우, 단순히 파괴적인) 사고 방식으로도 이어졌다(이후 시대에서의 역사적 발전에 대해서는 아래 '정치사상으로서의 허무주의' 단락을 참조). 철학적으로는 19세기의 현실이 합리성의 결과물인 것처럼 포장되었지만, 실제로 19세기의 국가는 그 반대편의 사람들이 보기에 그 이전부터 이어진 권위주의와 사회적 차별, 수단화된 종교 등이 혼재되어 이성적 사고라는 포장지에 싸여 있는 혼종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쇼펜하우어나 니체가 가장 싫어했던 철학적 상대가 이런 사고의 정점에 있었던 헤겔이었다.
허무주의적인 현실 비판론은 일각에서 염세주의로도 이어졌으며, 대중적으로는 이러한 시각이 많이 퍼져 있다. 그러나 니체를 위시한 철학자들은 그러한 시각을 '수동적 허무주의'라고 비판하면서, 허무주의 사상을 결국 인간이 궁극적으로 의존하거나 추구할 외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간이 가진 삶의 생동감을 일깨워야 한다는 주의주의(主意主義)와 실존주의 사조로 발전시켰다. 즉, 근대 허무주의는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간의 삶은 인간 바깥의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되며,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삶과 가치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 것이다('능동적 허무주의'). 따라서 철학사에서 허무주의는 절대성의 해체를 통한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의 출발점으로서 의미가 크다.
쾌락만을 추구하는 향락주의자도 넓게 보면 허무주의자에 속한다. 향락주의자는 진리, 선, 질서 등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기껏해야 쾌락을 위한 도구적 가치로만 바라볼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언급하는 종말의 인간도 '세상 왜 이따구냐.'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행복을 발견했다.'라고 말한다.이러한 허무주의가 바람직한 것인가의 문제와는 별개로 허무주의자이면 무조건 염세주의자인 건 아니며, 허무주의는 현대에 생각보다 훨씬 넓게 퍼져있다고 볼 수 있다.
단, 이러한 능동적 허무주의도 마냥 긍정적으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다. 허무주의는 합리적 사고까지도 해체하면서 절대성을 탈피하려 애쓰기 때문에, 그 특성상 학계의 권위 또한 무시하는 반지성주의로 타락할 위험성을 가진다. 니체가 세상을 떠난 이후 나치즘 운동가들이 니체의 이름을 이용해 지성계의 반발을 억누른 일은 많은 사상가들에게 악몽과 같은 사례로 꼽히고 있다(물론, 이는 사상이 왜곡된 사례로도 꼽힌다). 이런 부정적인 의미에서도 허무주의는 현대에 생각보다 넓게 퍼져 있다.
2. 박제된 천재 이상(李箱)
溥根 최기복 /시인, 효학박사, 덕향문학 발행인
이상 (李箱)
1. 출생과 성장
경성부 북부 순화방 반정동 4통 6호에서 부친 김영창(金演昌)과 모친 박세창(朴世昌)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본관은 강릉이다. 제적부에 기재된 본적은 경성부 통동(이후 통인동으로 개칭) 154번지다. 형제로 누이동생 김옥희와 남동생 김윤경이 있다. 김영창은 일본 강점 전 구한말 당시 궁내부 활판소에서 일하다 손가락이 절단된 뒤 일을 그만두고 집 근처에 이발관을 개업, 가계를 꾸렸다. 1913년, 백부 김연필은 본처 사이에 소생이 없던 차에 조카인 이상을 데려다 친자식처럼 키우고 학업을 도왔다. 1917년 여덟 살 되던 해 누상동의 신명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화가 구본웅과 동기생이 되어 오랜 친구로 이어졌다. 1921년 신명학교를 졸업한 뒤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경영한 동경학교에 입학했다. 1922년 동광학교가 보통학교와 합병되자 보성고보에 편입했다. 재학 중에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화가 지망생이 되었으며 학업 성적 상급 수준에 닿았다.[2] 1925년 교내 미술전람회에서 유화 〈풍경〉이 입선했다. 1926년 3월 보성고보 제4회 졸업생이 되었다. 같은 해 경성 동숭동의 관립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부에 입학했다. 1929년 동 학교 건축과를 수석 졸업했다. 졸업기념 사진첩에 본명 대신 이상(李箱)이라는 별명을 썼는데, 구본웅에게 선물로 받은 화구상자(畵具箱子)에서 연유했다는 증언이 있다. 이때 받은 화구상자가 오얏나무로 만들어진 상자였기 때문에 이상(李箱)은 '오얏나무 상자'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2. 직업과 등단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부를 수석으로 졸업하자 학교의 추천으로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발령을 받았다. 이해 11월 조선총독부 관방회계과 영선계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 건축기술자를 축으로 1922년 3월 결성된 조선건축회에 정회원으로 가입, 이 학회의 일본어 학회지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의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되었다. 1930년 조선총독부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일반에게 홍보하기 위해 펴내던 잡지 《조선》 국문판에 2월호부터 12월호까지 9회에 걸쳐 데뷔작이자 유일한 장편소설 《12월 12일》을 필명 이상(李箱) 아래 연재하였다. 1931년 6월,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양화 〈자상〉이 입선했다. 같은 해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로 쓴 시 〈이상한가역반응〉 등 20여편을 세 차례에 걸쳐 발표했다. 1932년 《조선과 건축》에 〈건축무한육면각체〉 제하에 일본어 시 〈AU MAGASIN DE NOUVEAUTES〉, 〈출판법〉 등을 발표했다. 《조선》에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비구(比久) 필명으로 발표하고 단편소설 〈휴업과 사정〉을 보산(甫山) 필명으로 잇달아 발표했다. 동년 《조선과 건축》 표지 도안 현상 공모에서 가작 4석으로 입상했다.
3. 투병과 작품활동
1931년 이상은 폐결핵 감염 사실을 진단받았고 병의 증세는 점차 악화되었다. 1933년 폐결핵으로 직무를 수행키 어렵게 되자 기수직에서 물러앉고 봄에 황해도 배천 온천에서 요양하였다. 이곳에서 알게 된 기생 금홍을 서울로 불러올려 종로 1가에 다방 제비를 개업하며 동거하였다. 같은 해 문학단체 구인회의 핵심 동인인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등과 교유를 트고 정지용의 주선을 통해 잡지 《가톨닉청년》에 〈꽃나무〉, 〈이런 시〉 등을 국문으로 발표했다. 이듬해 이태준의 도움으로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지만, 15편을 발표한 후 너무도 난해한 표현이 끝내 독자들의 항의와 비난에 시달림으로 힘입어 연재를 중도 작파하였다. 같은 해 동 잡지에서 연재된 박태원(朴泰遠)의 소설 작품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아호 하융(河戎) 아래 삽화를 그렸다. 1935년 다방 제비를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금홍과 결별한다. 인사동의 카페 쓰루(鶴)와 다방 69를 개업 양도하고 명동에서 다방 무기[參]를 경영하다 문을 닫은 후 성천, 인천 등지를 표표하였다.
4. 일본생활과 사망
1936년 구본웅의 알선으로 창문사에 근무하면서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 창간호를 편집 발간했다. 단편소설 〈지주회시〉, 〈날개〉를 발표하면서 평단의 관심을 받았다. 이해 연작시 〈역단〉을 발표하고 〈위독〉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며 가장 생산적인 한 해를 보냈다. 6월 변동림과 결혼, 경성 황금정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10월 하순 새로운 문학 세계를 좇아 도일했다. 동경에서 삼사문학의 동인 신백수, 이시우, 정현웅, 조풍연 등을 자주 만나 문학을 토론했다. 이듬해 단편소설 〈동해〉, 〈종생기〉를 발표했다. 1937년 2월 사상 혐의로 동경 니시간다 경찰서에서 피검된 후 한 달 정도 조사를 받다 폐결핵 악화로 보석으로 출감한 뒤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4월 17일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2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위독하다는 급보를 듣고 일본으로 건너온 부인 변동림이 유해를 화장하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말년의 이상은 술과 여자를 즐겼다고 한다. 동료 문인이자 친구인 박태원은 이상에 대해서 "그는 그렇게 계집을 사랑하고 술을 사랑하고 벗을 사랑하고 또 문학을 사랑하였으면서도 그것의 절반도 제 몸을 사랑하지는 않았다."면서 "이상의 이번 죽음은 이름을 병사에 빌었을 뿐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역시 일종의 자살이 아니었든가 - 그러한 의혹이 농후하여진다."고 하기도 했다.
5. 이상의 사후
그를 기려 출판사 문학사상사에서 이상문학상을 1977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2008년에는 현대불교신문사와 계간 ‘시와 세계’가 이상시문학상을 제정해[6] 역시 매년 수상자를 내고 있다. 2010년에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생전에 발표한 작품과 사후 발굴된 작품을 포함해 그의 문학적 세계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6. 이상에 대한 평가
이상은 작품 내에서 문법을 무시하거나 수학 기호를 포함하는 등 기존의 문학적 체계를 무시한 새롭고 실험적인 시도를 하였다. 이는 한국어 문학에서 이전에 시도된 적이 거의 없던 것이며, 이로 인해 그의 작품들은 발표 직후부터 현대까지 문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또한 그의 작품은 줄거리의 전개방식이 명확한 경우가 많지 않고 소설의 전개는 극단적으로 주인공의 내면에만 치중되어 있는 자폐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 역시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자신의 흥미나 형이상학적 의미에만 집착하는 성향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작가 이상 스스로에 대한 묘사라고도 분석된다.
문법파괴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특유의 서술방식은 주인공의 비문법적인, 즉 무의식적인 내면을 잘 드러내며 기존 문학에 대한 반감 또는 무시를 의미하는 동시에, 서술의 대상을 없애고 언어 자체에만 비중을 둔다.
일부 주장에 따르면, 이상은 언어유희를 이용하여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발간하는 종합전문 월간지에 큰 글씨로 12, 12라는 제목의 소설을 연재하는 방식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을 표현했다.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은 12, 12를 단순히 숫자로만 이해했고 한글 발음으로 했을 때 욕설이 된다는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을 이용하여 이상이 그들을 골탕 먹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상이 일제에 대한 큰 반감이나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적은 없었다는 점에서 부정되기도 한다.
오감도 / 이상(李箱) 詩
이상의 연작시 오감도의 첫 작품으로 1934년 7월 24일자 조선중앙일보에 게재되었다
현대어로 띄어쓰기까지 적용된 본
<날개 줄거리>
지식청년인 ‘나’는 놀거나 밤낮없이 잠을 자면서 아내에게 사육된다. ‘나’는 몸이 건
강하지 못하면서 자아의식이 강하며 현실감각이 없다. 오직 한 번 시행착오로 아내를 차지해 본 이외에는 단 한번도 ‘아내’의 남편이었던 적이 없다. 아내가 외출하고 난 뒤에 아내의 방에 가서 화장품 냄새를 맡거나 돋보기로 화장지를 태우면서 아내에 대한 욕구를 대신한다.
아내는 자신의 매음 행위에 거추장스러운 ‘나를 ‘볕 안 드는 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수면제를 먹인다. 그 약이 감기약 아스피린인 줄 알고 지내던 ‘나’는 어느날 그것이 수면제 아달린이라는 것을 알고 산으로 올라가 아내를 연구한다.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지도 모를 수면제를 한꺼번에 여섯 개씩이나 먹고 일주일을 자고 깨어나서, 아내에 대한 의혹을 미안해하며 ‘나는 아내에게 사죄하러 집으로 돌아왔다가 그만 아내의 매음현장을 목도하고 만다.
도망쳐 나온 ‘나’는 쏘다니던 끝에 미스꼬시 옥상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물여섯 해의 과거를 회상한다. 이때 정오의 사이렌이 울고 ‘나’는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자기 소모적이고 자기 해체적인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사회현실의 문제를 심리적인 의식의 내면으로 투영시킨 문학 기법상의 방향전환으로 문학사적 의미를 가진다. 또한, 이전 1920년대 1인 칭소설에서의 목격자나 실제 경험자로서의 보고나 고백이 외면적 표현이나 평면적 구성에 머무르지 않고, 심층심리의 표현이나 입체적 구성의 시도 등의 실험정신을 통하여 내면화되어 구현되었다는 점에서 현대소설사의 한 분기점이 된다.
구실이 뒤바뀐 부부관계는 사육되는 남편의 모습을 통하여 일상으로부터 소외된 ‘나’의 가치가 전도된 삶을 은유한다. 일상세계와의 유일한 통로였던 아내와의 단절 위에서 일상으로부터 차단된 자아분열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자기구제를 꾀하려는 ‘나’의 역설적인 비상(飛上)은 이상의 실험적인 문학정신을 바탕으로 하였다.
이상의 <날개>
<참고 문헌>
이상, 《이상소설전작집1》, 문학사상자료연구실편, 이어령, 1977.
이상, 《정본 이상문학전집 1_시》, 김주현 주해, 소명출판, 2005.
위키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날개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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