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원전 371년은 ( 가 )(으)로서는 치욕의 해였다. 무적을 자랑하던 중갑병 부대가 레욱트라 전투에서 테베군에 대패하여 전사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와 더불어 주역을 담당하였고,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맹주로서 그리스 세계를 제패하였던 나라가 왜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 수의 부족을 쇠퇴의 결정적 요인으로 지적하였다. |
① 12표법을 제정하였다.
② 파르테논 신전을 건축하였다.
③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진압하였다.
④ 도리스 인이 원주민을 정복하고 세웠다.
⑤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세력을 격퇴하였다.
<정답> ④
펠로폰테노스 동맹 맹주 = 스파르타.
<세계사. 금성. 2014. 74쪽>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고립된 지역에 침입한 도리아 인은 원주민을 정복하고 스파르타를 세웠다. 스파르타에서는 소수의 이주민이 다수의 원주민을 국가 노예로 삼아 지배하였고, 다수의 피지배층을 제압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 통치 체제가 발전하였다. 모든 성년 남자 시민은 엄격한 군사 훈련 과정을 거쳐야 했고, 통제된 군사적 집단 생활을 하였다.
<세계사. 금성. 2014. 75쪽>
기원전 5세기 초 오리엔트를 통일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지중해로 세력을 확대하고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 도시를 압박하면서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479)이 발발하였다. 세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그리스 세계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페르시아군을 물리쳤다.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는 대외적으로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되어 강력한 해상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안으로는 페리클레스의 지도 아래 민주 정치가 전성기를 맞았는데, 이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서 누리는 경제적 번영과 전쟁에 수병으로 참전한 하층민의 요구가 반영된 결과였다. 이 시기 아테네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상공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문화도 전성기를 누렸다.
아테네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시기하는 폴리스가 나타났다. 특히,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맹주인 스파르타와 크게 대립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을 벌였다. 전쟁 초기에 펠리클레스를 잃은 아테네는 민주 정치가 중우 정치로 타락하면서 스파르타에 패하고 말았다. 승리한 스파르타는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였지만 곧 테베에 패했고, 이후 그리스는 내분에 시달렸다. 혼란에 빠진 그리스는 북방에서 등장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게 정복되었다(기원전 338).
① 12표법을 제정하였다. - 로마
<세계사. 금성. 2014. 79쪽>
상공업이 발달하여 부유해진 평민이 중장 보병으로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자, 평민은 자신들의 역할에 걸맞은 정치적 지위를 요구하였다. 당시 반도 정복 전쟁을 치르기 위해 평민의 군사력이 필요하였던 귀족은 평민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귀족들은 정치 참여와 법적 평등과 관련된 평민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평민회와 호민관 제도, 12표법, 리키니우스 법, 호르텐시우스 법 등이 마련되었다. 그 결과, 기원전 3세기에 로마의 평민은 형식상으로는 귀족과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② 파르테논 신전을 건축하였다. - 아테네
<세계사. 금성. 2014. 76쪽>
파르테논 신전과 아테나 여신상 :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을 모신 곳이 파르테논 신전이다.
③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진압하였다. - 로마
<세계사. 금성. 2014. 80쪽>
기원전 73년 카푸아 검투사 양성소의 검투 노예였던 스파르타쿠스는 동료 검투사들을 이끌고 자유를 위해 봉기하였다. 3년이나 지속되면서 로마를 흔들었던 봉기는 결국 실패하였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노예의 처우가 개선되었다.
④ 도리스 인이 원주민을 정복하고 세웠다. - 스파르타
⑤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세력을 격퇴하였다. - 메로베우스 왕조(프랑크 왕국)
<세계사. 금성. 2014. 114쪽>
우마이야 왕조는 아랍 어를 공용어로 하고 화폐를 통일하였다. 8세기 초에는 동쪽으로 인더스 강 유역까지 이르러 중국의 당과 접하고, 서쪽으로 크리스트교 국가들과 대립하며 이베리아 반도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투르 · 푸아티에 전투에서 패배하여 피레네 산맥 남쪽으로 물러갔다. 이 시대의 지배 영역은 수백 년 간 이슬람 세계의 영역이 되어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세계사. 금성. 2014. 121쪽>
게르만 족이 세운 국가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오랫동안 번영을 누린 국가는 프랑크 왕국이었다. 프랑크 족은 라인 강 부근의 본거지를 유지한 채 서쪽으로 이동하여 카이사르 정복 이후 로마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갈리아 지방에 정착하였다. 5세기 말에 메로베우스 왕조를 개창한 클로비스는 갈리아 중부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크리스트교로 개종하는 등 왕국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하여 대개 단명하였던 다른 게르만 국가와는 달리 유럽 세계 형성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왕조의 힘은 6세기 후반부터 약화되어 그 실권이 재상 격인 궁재에게 넘어갔다. 8세기 초 궁재 카롤루스 마를텔은 이베리아 반도를 넘어 침입해 온 이슬람군을 물리치면서(투르 · 푸아티에 전투) 왕국을 수호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 피핀은 부친의 후광을 업고 메로베우스 왕조를 무너뜨린 뒤 카롤루스 왕조를 세웠다. 새로운 왕조 개창을 지원한 보답으로 피핀은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롬바르드 족으로부터 빼앗아 교황에게 기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