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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반일 감정 조장의 원흉들
조선시대 최악의 약탈자는 조선왕과 양반
여러 연구들에 의하면 일본에 병합되기 이전까지 조선에서 성씨를 가진 인구는 전체 인구의 10%, 90%가 성씨가 없는 노예였다. 세종은 ‘노예종모법’을 제정해 태어난 아이들을 모두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노예로 만들었다. 양반은 여러 여성들을 취했고, 수많은 노예 여성이 출산한 아이들 모두가 노예가 된 것이다. 노예는 노동력을 가진 동물에 불과했고, 당나귀 값의 30~50%에 거래됐다.
궁전에서는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들이 없고 당파 싸움만 계속했다. 양반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서로를 모함했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져 당파 싸움을 벌였다. 조선왕조 518년 동안 1,000건 이상의 역모 사건이 발생했다. 1년에 평균 2회의 역모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역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수많은 양반집 식솔들이 사돈의 팔촌까지 피를 흘렸고, 그들이 거느리던 수십 수백의 식솔들이 모두 관노비와 사노비로 전락했으니 노비의 수가 줄어들 수가 없었고, 사회는 그야말로 공포에 질려 있었다. 거짓말, 모략, 음모들이 뒤엉켜 굴러가는 원시사회요, 혼돈의 사회였다.
‘수탈’은 양반들의 생리였고 양반의 대명사였다. 왕과 양반은 수탈을 일삼는 일종의 산적이요 해적과 같은 존재였다. 먹거리 산업이 없던 시대의 노예들 입장에서는 양반이 약탈하든, 일본이 약탈하든, 청나라가 약탈하든 무슨 차이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조선의 노비들이 어떻게 일본에 직접 약탈당했다고 수선을 떠는가? 조선 양반은 100원을 약탈해도 괜찮고, 일본 경찰이 1원을 약탈하면 그것만 약탈이라는 말인가?
조선 노예들이 당한 고통은 약탈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수백 수만 배 고통스러웠던 것이 고문이었다. 검사도 없고, 판사도 변호사도 없이, 아무런 죄도 없는 노예를 끌어다 곤장 때리고, 불타는 인두로 지지고, 감옥에 가두고, 동물 이하의 취급을 당한 것이다.
조선의 왕들은 백성을 부려 먹기 위해 우민화 독재를 했다. 1504년 연산군은 언문(조선글)을 배우거나 가르치거나 사용하는 사람은 엄벌에 처할 것이며 이를 눈감아주는 이웃까지도 벌을 주라는 엄명을 내렸고, 이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됐다. 언문을 쉽게 배워 상소를 많이 올리는 것이 귀찮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개화 정책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어떻게 해주었는가? 1912년 ‘조선 토지조사 사업’으로 조선인의 사유재산 제도를 도입했으며 양반들의 착취를 금지시켰다. 1921년 3월 12일자 동아일보에는 총독부가 조선어를 장려하기 위해 조선어 시험을 치르게 하고, 합격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선어 수당을 지급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1922년에는 ‘조선호적법’을 공표하여 성도 이름도 없는 노예들에게 독립적 호적을 만들어줬다. 1925년에는 매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지정해 어린이를 중시하는 문화를 만들어주었고, 1928년에는 매년 10월 3일을 ‘한글날’로 지정해서 한글을 장려했다. 조선왕과 일본 총독 중 어느 쪽이 조선 백성과 조선의 앞날을 유익하게 만들어주었는가?
조선 개화에 빼놓을 수 없는 공헌자는 1835년에 일본에서 태어난 후쿠자와 유키치다. 그는 일본 개화의 선구자다. 그래서 그의 초상이 일본 은행권 최고액인 1만엔 권에 1984년부터 2023년까지 40년 동안 올라 있었다. 그는 수많은 유학파들을 TF(Task Force) 팀으로 꾸려 옥스포드 영영사전을 영-한문 사전으로 전환하는 대업을 이룩했다. 그리고 일본에 유학한 유길준 등 조선 개화파 청년들에게 영한문사전을 영한사전으로 전환하여 사용할 것을 권고했다. 아파트, 빌딩, 커피, 티, 넥타이 등은 외래어다.
經濟, 社會, 民主主義, 自由, 家族, 個人, 自然, 學校 등 이와 똑같이 당시에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창조한 외래어였다. Democracy를 어떻게 한문으로 번역할 것인가? 후쿠자와 팀은 고민을 했다. Democracy는 1215년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에서 유래했고, 마그나 카르타는 하극상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下極上으로 번역을 했다가 民主主義로 낙착이 되었다. 이처럼 한자를 조합하여 어휘와 단어를 조립한 사람이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한문을 사용하는 동양권 국가들인 한국, 대만, 싱가포르 중국 같은 나라들은 모두 후쿠자와 유키치의 혜택을 철저히 입고 있는 것이다. 이 영-한문 사전으로 인해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렇다면 그는 한국-대만-중국-싱가포르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돼야 할 인물이 아니겠는가?
식민지론
조선이 2,000여 년 동안 중국의 속령으로 살아온 것도 사실이고, 일본의 식민지로 36년 동안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중국으로부터도 물질적, 정신적 유산을 형성했고, 일본으로부터도 그러했다. 이는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된다.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다. 영국과 전쟁도 했다. 미국이 영국을 증오하는가? 영국은 프랑스의 식민지, 독일도 프랑스의 식민지, 러시아는 몽골의 식민지, 핀란드는 러시아의 식민지,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 브라질은 포르투갈, 멕시코는 스페인, 이집트는 터키의 식민지였다. 특히 조선은 2천 년 동안이나 중국과 몽고의 식민통치 하에 있었다. 이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유럽 열강,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자기 나라 사람을 지배자로 심고, 말, 글, 종교, 문화를 전파하는 대신 광물(금, 은, 동)과 식품(커피, 차, 사탕수수 등)을 개발하여 본국으로 송출하는 방법으로 식민지를 경영했다. 하지만 중남미 국가들은 식민지배국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적대시하지 않고, 역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로 인해 개화되고 문명화를 앞당겼기 때문이라 한다. 인도의 경우 인도인이 영국의 총리를 하고 있지 아니한가. 서구 열강의 식민지 노선이 식민지를 열강국의 나라로 통합시키지 않고 개화와 물질을 맞교환하는 방식이었다면, 일본은 조선을 병합시켜 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조선을 일본화시키는 내선일체화 통치를 했다. 일본의 교육제도를 그대로 도입시키고, 일본 동경제대와 똑같은 수준의 서울국립대학을 세웠고, 농업, 광공업, 철도, 도로, 항만, 전력, 수도, 전신전화, 치산, 치수, 산림녹화, 수리 등을 일본 본토에서 하는 것처럼 똑같이 개발하고 건설했다.
서구 열강처럼 조선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조선을 일본국과 똑같이 만들어 같은 국민이 되게 한 것이다. 서구의 식민지 개념과 일본의 식민지 개념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교육이 전혀 없던 국민이 교육을 받아 정신적으로 근대화가 되었다. 조선왕 27명이 518년 동안이나 통치한 결과는 겨우 4억 달러어치의 논과 밭, 그리고 오염된 지하수, 전염병, 초가집뿐이었는데 일본이 36년 동안 통치한 결과는 23억 달러어치의 학교, 철로, 도로, 광업, 항만, 수도, 전신 등 사회간접자본과 기업들이었다.
2천여 년 동안이나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아서 얻은 것이 무엇이었는가? 조선왕 27명의 지배를 받아서 얻은 것이 무엇이었는가? 36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아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선이 굵어야 성취도 굵다. 그동안 주입된 소소하고 소아적인 모략물들을 내던지고, 선입견 없이 제로 베이스에서 사실들만 가지고 다시 평가를 해보자. 조선왕들 밑에서 노예 신분으로 수탈만 당했던 시절이 유익했는가? 아니면 일본의 개화가 유익했는가? 아무리 대차대조표를 써보고 손익 계산서를 써봐도 조선 왕들보다는 일본 총독들이 더 유익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이 곤장을 때렸는가? 조선 같으면 일본의 수상을 사살한 안중근을 어떻게 다루었겠는가? 칼춤 추는 망나니를 시켜 만인을 불러 놓고 그 앞에서 목을 쳤거나, 시뻘건 인두로 눈을 지지고 가슴을 지져가면서 고통스럽게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안중근은 지금과 똑같은 재판 과정을 통해 인권을 존중받으면서 재판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일과 그 의미
일본을 원망하고 증오한 가장 대표적인 정치인은 이승만과 김일성이었다. 두 사람은 혼돈에 빠져있던 민중들로부터 호응을 얻어야만 정치적 닻을 펼칠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민족’을 내걸었고, 민족의 정통성을 ‘조선’에 두었기 때문에 조선을 미화시켜야 했고, 조선을 미화시키기 위해서는 일본을 악으로 규정해야만 했다. 일본이 악인 이유는 조선을 강제로 빼앗고, 수탈했고, 고통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승만 대통령의 인식에 대해, 아니 주장에 대해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다. 첫째, 만일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지 않았다면 청나라나 러시아가 병합하지 않았을까? 일본, 중국, 러시아 중, 어느 나라에 먹히는 것이 더 비참했을까? 둘째, 만일 36년 동안 조선왕이 더 통치했으면,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노예들의 삶이 향상됐을까? 23억 달러어치의 근대화 자산이 생겼을까? 셋째, 조선왕과 일본총독 중 누가 더 조선을 근대화시켰는가?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이승만 대통령의 반일 논리는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국민 정서를 거스를 수 없어 반일의 표현을 했지만 그는 그의 지상 목표였던 ‘조국 근대화’의 에너지를 일본에서 얻어냈다. 전두환 대통령 역시 반일에 대한 국민 정서를 거역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보다 연상인 나카소네 총리로부터 40억 달러라는 어마무시한 차관을 받아내 88올림픽을 치루고, 시궁창이었던 한강을 지금의 정화된 호수로 아름답게 가꾸고, 전자, 통신, 반도체, 한국형 원자로 산업을 육성하며 오늘날의 먹거리를 제공해주었다. 일본으로부터 받은 돈 40억 달러가 대한민국을 획기적으로 중흥시킨 통큰 자금이었다. 여기까지만을 살펴보아도 일본은 대한민국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유익한 나라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어째서 국민들은 일본을 적대시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가장 쉽게 표현하자면, 반역의 악귀들에 놀아났기 때문이다. 반역의 악귀, 대한민국에서 호의호식하고 정치사회적으로 떵떵거리고 살면서 대한민국을 도끼로 찍어내리는 반역들이 바로 반일의 악귀들인 것이다. 미국을 증오하는 반미주의자들이 자기 자식들은 미국에 유학보내고, 미국에 영주시키고 있다. 소니 제품에 열광하면서 일본을 증오하는 발언을 일삼고 있는 정치인들이 많다. 낮에는 일본의 오염수를 문제삼는 정치인들이 밤에는 회 접시를 앞에 놓고 일본 사케를 마시고 있다. 이런 자들이 만들어내는 괴담에 국민들이 여과 과정 없이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을 신봉하는 공산주의자들이 해방 직후부터 장악한 역사교과서 주권, 언론 주권, 문화 주권에 대책 없이 노출된 국민들이 이들의 모략과 괴담을 역사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암덩이, 김일성 종교
김일성 종교, 북한에서 김일성은 단군과 같은 존재다. 김일성 신화는 항일 유격전 신화다. 솔방울을 던지니 수류탄이 되었고, 나뭇잎을 던지니 배가 되어 일본군을 물리친 백두산 신령이 바로 김일성 장군이라는 신화다. 따라서 김일성 신자들은 김일성을 빛내기 위해 일본을 깔아뭉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을 더 많이 격하할수록 김일성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지고 고과 점수가 올라간다. 김일성 종교의 코란은 주체사상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외세를 배격하고 주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탈을 썼다고 다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 등 노동력을 가진 무산계급만이 ‘사람’이라 한다. 노동자, 농민이 행복하게 살려면 그들을 착취하는 외세와 외세의 앞잡이인 남조선 괴뢰 정부, 그리고 자본가들을 배격하고 쳐부숴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 투쟁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정의한다. ‘사람’이라는 뜻이 남에서와 북에서 너무 다르다. ‘민주화 운동’이라는 뜻이 남에서와 북에서 매우 다르다. 이를 언어선점혼란전술이라 한다. 남한 사람들에게 거룩하게 들리는 ‘사람’, ‘민주화 운동’이 북에서는 살인과 파괴를 의미하는 이념 용어인 것이다. 여기에 남한 국민이 속아서 저들의 장단에 부화뇌동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온갖 부와 자유를 향유하면서 자나깨나 대한민국을 파괴할 생각만 하는 사람들, 미국에 자식을 유학 보내고, 영주권을 따게 하면서도 미국을 증오하는 소리를 내는 사람들, 일본의 첨단제품을 사용하고, 일본 내복을 입고, 일본 술을 마시면서도 일본을 욕하는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도지사가 되는 어지러운 사회가 대한민국이다. 조상이 공산 혈통이어서 북한의 노예가 된 사람들, 돈과 여자라는 미끼에 걸려들어 약점 잡힌 사회 인사들, 북에 가서 약점 잡혀 협박당하는 사회 인사들, 멋모르고 세뇌되어 부화뇌동하는 소시민들, 이들을 모두 합치면 아마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은 넘을 것이다. 이들이 가장 열렬한 반미, 반일주의자들이고, 나머지는 교과서와 언론과 영화, 드라마, 서적, 학교 교사들에 의해 반일사상을 주입당한 사람들이다.
해방 후의 남한 역사는 구소련과 북한이 주도하는 대남공작의 역사였고 끝없는 폭동의 역사였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여름 전라남도 김대중 고향인 하의도에서 미군정에 반대하는 농민 폭동이 일어났고 이어서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미군정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 화폐를 찍어냈지만 정판사 사건이 발각되는 바람에 폭동 자금을 소련이 댔다. 1946년 9월 총파업은 1개월 내내 전국 경제와 통신과 교통을 마비시켰고, 10월 1일부터 46일 동안 지속됐던 대구폭동사건은 삼남지방 전체에 피를 뿌렸다. 좌익들은 9월 총파업과 대구폭동을 미군정의 폭압정치, 약탈정치에 항거한 정당방위적 ‘민주화 운동’이라고 몰고 갔지만, 1995년 비밀 해제된 구소련 문서 ‘스티코프 비망록’에는 소련이 9월 총파업에 일화 200만 엔, 대구폭동에 300만 엔을 지원했다는 기재가 있다. 이후 좌익들은 9월 총파업과 대구폭동에 대해 일체 함구했다. 일화 500만 엔이라면 10:1만 쳐도 5천만 원이 아닌가? 1946년의 500만 원이면 그 30년 이후인 1980년 화폐로 얼마나 될까? 1980년 200만 원이 강남 30평형 아파트 한 채 값이 아니었던가? 강남 아파트 수백 대 값이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대구폭동을 배후 조종한 인물이 간첩 ‘이석’이었고, 4.19를 배후 조종한 인물도 간첩 ‘이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