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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저우에서 카이펑으로 가는 버스
오늘은 TV 드라마로 익숙한 포청천의 무대이자 남송의 수도였던 카이펑(개봉:開封)으로 간다. 카이펑은 당초 기차를 타고 갈 생각이었으나, 기차표 매표소에 늘어선 많은 사람 때문에 버스로 가기로 했다. 정저우 역 앞에 있는 버스 터미널의 매표창구도 마치 혼잡하긴 마찬가지지만 기차보단 카이펑으로 가는 버스가 자주 있어 다행이다. 그런데, 매표창구에서 표를 사고 나니 매표원이 카이펑으로 가는 버스는 이곳에서 타는 게 아니라 터미널 건물을 나와 건물을 등지고 왼편으로 조금 올라가 다른 곳에서 타라고 한다.
▶ 카이펑 시외버스 터미널
만석으로 출발한 버스는 정저우에서 카이펑까지 1시간 40분 정도 걸려 카이펑 터미널에 도착한다. 카이펑으로 가는 길은 짙은 스모그에 가려 도로 주변 경치나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봄철 중국의 스모그는 정말 지독하다. 제멋대로 분출하는 공장의 매연에 황사와 자동차 배기가스, 가정에서 피워대는 연탄에다 봄철 일교차로 생기는 안개가 혼합되어 개인 날씨에도 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독하다 못해 이젠 지긋지긋하다. 이런 날씨가 이곳에 사는 중국사람의 얼굴마저 화난 얼굴로 만들고 입고 있는 옷 색깔마저 우중충하게 보이게 하는가 보다. 도시의 풍경은 우중충한 회색의 도시다.
카이펑은 청명상하도라는 그림에서 보듯이 북송의 수도가 있던 곳이라 큰 기대를 하고 왔지만, 생각보다 작은 도시였고 무엇보다 도시가 무척 지저분하다. 카이펑은 1955년까지는 허난성의 성도였지만, 교통의 요지라는 정저우에 허난성의 성도를 빼앗겼다고 한다. 가이드 북에 따르면 지금 개봉이라는 도시의 지하 13m 지점부터 당시 도성의 모습이 그대로 묻혀 있다고 한다. 큰 홍수로 황하의 물이 이곳을 덮쳐 도성의 모습은 모두 삼켜버려 북송의 도성은 지금 카이펑 지하에 그대로 매장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땅 밑은 그야말로 유물의 보고가 아닐까? 만약, 카이펑을 파 본다면 이탈리아 나폴리 인근의 베수비오 화산에 때문에 파묻힌 폼페이와 같은 고대도시가 나올지 모른다.
버스터미널 안에 있는 짐 맡기는 곳에 배낭을 맡기고 터미널을 나오니 허름한 삼륜 오토바이 택시와 택시들의 호객행위가 대단하다. 오토바이 택시는 넷이 타기엔 비좁고 두 대를 타면 택시 요금보다 비싸다. 택시로 철탑공원으로 향한다.
▶ 철탑공원 정문
시내를 가로질러 15분 쯤 달리니 멀리서도 탑이 보인다. 철탑(鐵塔)이 있어 철탑공원이라 불리는데 중국 100대 유명 공원 중 한곳으로 원래는 이곳은 개보사(開寶寺)였기에 개보사 탑(開寶寺 塔)이 정식 명칭이지만, 유약을 발라 구운 벽돌로 만든 塼塔이 세월의 풍파에 탑 색깔이 마치 철로 만든 탑처럼 보여 철탑이라 불리게 되었고 한다.
▶ 정문에서 분재전시원을 거쳐 공원길을 따라 극락세계 패방까지
입구에서 표(30元)를 사서 안으로 들어가니 먼저 좌측에 넓은 분재 전시장이 있고 철탑으로 향하는 길 좌우에는 나무와 잔디를 심고 조각상들을 배치해 놓아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공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좀 더 들어가자 극락세계라 새겨진 석패방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도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건가? 내가 현세에서 극락세계로 들어 갈 만큼 잘 한 일도 없는데 잠시 극락세계를 구경하기엔 입장료가 너무 싼 것 아닌가?
▶ 옥불전과 옥불전 내부의 부처님들
패방을 지나자 옥불전(玉佛殿)이란 전각이 나타난다. 괴석과 소나무로 조경된 정원 뒤의 옥불전 내 정면엔 금복주처럼 배가 불룩한 부처상이 너그러운 미소를 짓으며 우릴 맞이하고 좌우로는 이름모를 부처상(신상)을 중심으로 만불상이 배치되어 있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새겨진 화강암 조형물 위에 천하제일탑(天下第一塔)이라 금색으로 새겨진 석판이 보인다. 중국인들은 어딜 가나 천하제일이란 말을 많이 사용해 정말로 천하제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워낙 넓은 중국 땅에서 교통이 불편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눈엔 자기 것이 천하제일이라 믿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接引殿 전경
▶ 접인전 내 부처상과 접인전에서 바라본 철탑
석판을 지나니 건물 뒤쪽으로 철탑이 보인다. 철탑 앞 건물은 접인전(接引殿)이란 불교사원으로 연꽃이 핀 연못과 황금 부처님 손에 들린 연꽃을 배경으로 선녀가 구름다리를 건너는 장식을 한 다리를 건너야 사원에 이를 수 있다. 단청이 화려한 목조 건물 내에는 금색 가사를 두른 부처님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기고 있다. 두 손을 모아 삼배를 올리고 천정을 올려다보니 천정에 그려진 극락세계의 선녀들의 모습이 화려하다.
▶ 철탑 전경
▶ 철탑 벽돌에 새겨진 각양각색의 부처상과 부조들
이곳을 지나 푸른 잔디 위 확 트인 곳엔 철탑이 우뚝 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55.63m의 팔각 전탑은 멀리서 보기엔 정말로 쇠로 지은 탑처럼 보인다. 가까이 다가서니 팔각 전탑 벽돌마다 새겨진 부처상을 비롯한 보살, 飛仙, 力士, 사자, 기린, 모란 연꽃 등 다양한 수만 개의 조각들이 탑을 장식하고 있어 탑 건축 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이 철탑은 석가모니의 사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석가모니의 사리는 인도의 8개국에서 똑같이 나누어 보관했지만 200년 후 마타(摩陀)국의 사리는 불교신자인 아소카왕의 손에 들어와 그는 사리를 다시 8만 개의 불탑에 나누어 보관했는데, 그 중의 일부가 중국으로 전파된다. 아소카왕은 저장성 닝파에 아육왕사(阿育王寺:아소카)를 지어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지만 五代시기 이곳을 점령한 오월왕(吳越王)이 사리를 항저우로 옮겼고 후에 오월이 송나라에 항복하자 송 태조가 사리를 동경(東京:개봉)의 자복전(滋福殿)으로 이동시켜 개보사(開寶寺)를 지어 “경성지관(京城之冠)”이라 불리던 13층 목탑에 보관되었는데, 이 탑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개보사탑(開寶寺塔)이다. 이 탑이 건설한지 55년 만에 낙뢰를 맞아 불타자, 1049년 송나라 인종이 탑의 자리를 옮겨 유리벽돌로 바꾸어 탑을 다시 지은 것이 지금의 철탑이다.
탑이 만들어진지 1000년이 다 돼 가지만 그 구조가 우수하고, 벽돌들이 서로 완벽하게 맞물려 있어 얼마 전에 지은 것처럼 견고한 모습을 하고 있다. 홍수가 잦고 지반이 연약한 카이펑에 탑이 세워진 후 수 차례 전화(戰火)에 휩쓸리고, 수해와 지진을 겪었지만 56m나 되는 전탑이 무너지지 않고 무사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극락세계 부처님의 가호가 있어서 일까?
▶ 청탑 뒷편에 자리한 철탑호수
▶ 철탑호수에서 본 철탑과 극락세계 정원에서 웨딩촬영 중인 예비부부
철탑 뒤에는 철탑호(鐵塔湖)라고 하는 커다란 호수가 있는데 시민들이 따뜻한 날씨엔 한가로이 뱃놀이를 즐기는지 배가 여기저기 매여 있고 나무로 만든 다리가 호수 주변과 호수를 가로지르고 있어 산책하기 좋다. 철탑 서쪽에는 1991년에 열반에 든 정엄법사(凈嚴法師)의 사리탑이 있다. 공원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철탑을 보러 이곳을 찾지만, 카이펑시민들에게는 가끔 저렴한 비용으로 극락세계를 즐기고 한적한 여유를 제공하는 공원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 룽팅공원 매표소에서 바라본 황궁
철탑공원을 나와 지도를 보며 룽팅(용정:龍亭)공원으로 간다. 지도상으로는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아 걷기로 했는데 실제 걸어보니 꽤 먼 거리다. 룽팅공원은 개봉의 중심지로 예전에는 송나라와 금나라 때의 황궁자리였지만 현재는 남아 있지 않고 현재 건물들은 대부분 1949년 이후에 지어 관광지화 했다고 한다. 룽팅공원 입구에는 이곳으로 들어가려는 관광객들로 북적이는데 입장료가 무려 130元이나 한다. 북송시대의 황궁에 조성한 공원의 입장료가 왜 이리 비싼지? 선조들의 문화유산도 아니고 그 자리에 옛 건물을 본 떠 지었을 뿐인데 중국 당국 너무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입장을 포기하고 공원 담을 따라 룽팅공원 호수로 향한다.
지도에 보니 담을 따라 돌아가면 큰 호수가 있고 호수 주변에서 룽팅공원에 지어진 전각과 다리를 볼 수 있어 담을 돌아 걸어가는데 갑자기 바로 뒤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려 소리치며 놀라 뒤돌아보니 5살 쯤 돼 보이는 꼬마 녀석이 폭죽을 터뜨리고 있다 내가 놀라 소리치는 바람에 꼬마가 놀라 울고 있다. 이런 젠장! 폭죽의 폭음보다 내가 놀라 소리친 것이 더 무섭다니? 어제 밤에도 숙소 주변에서 터뜨리는 폭죽소리에 잠을 설쳤는데 대낮에 그것도 꼬마가 관광객들이 다니는 길가에서 폭죽을 터뜨리고 있으니 중국인들의 폭죽 사랑은 밤낮도 없고 아이 어른도 없나 보다.
▶ 호수에서 바라본 룽팅공원과 황궁
▶ 룽팅공원과 송도어가를 잇는 다리
호수에 다다르니 멀리 높은 전각과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스모그를 뚫고 희미하게 보인다. 다리 위엔 수많은 깃발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이 호수 아래엔 옛날 왕궁 터와 유적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즉 이 호수는 수장고와 같은 건가? 그 옛날 카이펑에 닥쳤던 홍수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불에 타면 흔적이라도 남지만 홍수에 휩쓸리면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다는 어른들이 말씀이 새삼스럽다. 언젠가 중국 당국이 지금의 룽팅공원이 관광지로 외면당하면 무지막지한 인력을 동원해 호수를 파헤쳐 옛 유적지를 복원해 관광지화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호수엔 스모그가 짙은데도 많은 사람들이 봄볕을 즐기고 있다.
▶ 송도어가 쪽 룽팅공원 입구 광장
▶ 광장의 이모저모
호수를 돌아 룽팅공원과 연결된 다리로 나오니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몰려 있다. 춤을 추는 사람들, 연을 날리는 사람들, 마작을 즐기는 사람들, 무언가를 파는 사람들, 아이들과 휴일을 즐기러 나온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 송도어가 거리
▶ 송도어가의 이모저모
룽팅공원 앞 광장에서 시내로 이어지는 송도어가는 1990년에 북송의 수도 동경(東京) 거리의 일부를 재현해 놓은 풍물거리로 당시 간판까지도 그대로 복원할 정도로 공을 들여 만든 모습이다. 이곳은 주로 전통 그림, 문방사우, 골동품 등을 파는 상점이 많지만 거리 중간 중간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거리 음식을 파는 곳도 보인다. 기념품 구입보다 천천히 걸어 다니며 구경하기 좋은 곳이다.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을 사 먹으며 천천히 걸어 송도어가의 상가 이곳저곳을 구경한다.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세시가 넘었다. 포청천의 고장 카이펑을 왔으니 포청천을 만나보고 가야하는데 오늘 등펑(登封)까지 가려면 시간이 없다. 포청천의 사당인 빠오공즈(포공사:包公祠)를 갈까 포청천이 업무를 보던 카이펑부(개봉부:開封府)를 갈까 망설이다 시간을 고려해 빠오공즈로 가기로 하고 걸음을 서두른다. 빠오공즈는 명판관으로 중국을 빛낸 인물 중 하나였던 포청천(包靑天)을 기리는 사당으로 "작두를 대령하라!"고 당당하게 호령하던 모습과 검은 얼굴 캐릭터가 생각나는 곳이다.
입구 매표소에서 표(30元)를 사 안으로 들어서니 입구에 안내판에 포증(서기999~1062) 안휘성 합비 사람으로 지현, 지부, 추밀부사 등을 지냈는데 일생을 청렴하게 지내며, 법을 집행하는데 있어 산과 같이 엄중 하게 해서 세인들은 존경 하는 의미로 "포청천"이라 불렀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 빠오공즈는 카이펑시의 시민들의 헌금으로 1987년 만들어진 사당으로 옛 북송시대 사당의 모습으로 재현해 놓았다고는 하나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기 짝이 없어 보인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좌측으로 검은 조벽이 보이는데 이는 단 한 점도 부끄러움이 없는 포증의 완벽한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조벽을 돌아 들어가니 초직청렴(峭直淸廉 :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엄하고 바르며 청렴하다.)이란 현판이 걸린 이전(二殿)이란 건물이 있다. 현판의 글씨는 포증이 법을 집행하는 판관으로서 어떤 자세로 임했는가를 한 마디로 표현한 글귀가 아닌가?
이전 내에는 포증의 초상화가 액자에 걸려 있는데 초상화에 그려진 포증의 모습은 엄격한 법을 집행하는 판관의 모습이 아니라 허리가 약간 구부정한 인자한 대신의 모습이다. 또한, 이곳에는 개봉부제명기비(開封府題名記碑)를 중심으로 포승의 출사명지시(出仕明志詩)와 , 포증의 가훈, 포증의 서체, 묘지명(墓志銘)등을 전시하고 있다. 개봉부제명기비는 북송 148년 동안 개봉 부인을 지낸 183명의 이름과 부임시기가 기록되어 있다. 송나라 때 관복이 유리관 속에 전시되어 있으며 포증이 업무를 보던 카이펑부의 모형이 전시돼 있다.
이곳을 나와 다음 건물로 가니 수많은 사람들이 향대에 향을 피우며 건물을 향해 절을 올리고 있고 건물 현판엔 공정광명(公正廣明 : 공평하고 올바르며 발고 환환 빛을 널리 비춘다.)이라 쓰여 있다. 이 건물이 대전(大殿)으로 입구에 걸린 현판은 포증이 법을 집행하는 판관으로 백성들에게 어떻게 보였는가를 보여 주는 글귀라 생각된다. 건물 앞에서 향을 올리며 절을 하는 사람들도 이런 포증을 존경해 경의를 표하는 것 같다.
건물 내에는 정면에 근엄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포증의 동상이 있고 좌우 벽에는 재판하는 모습이 도자기를 구워 만든 벽화로 그려져 있으며 포증과 관련된 사료들이 유리관 탁자에 전시되어 있다.
대전의 좌우에는 동배전(東配殿)과 서배전(西配殿)이 있다. 동배전에는 우리 나라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TV드라마 '판관포청천'의 한 대목인 찰미안(鍘美案)의 한 장면이 밀랍인형으로 연출되어 있다. 찰미안은 가난한 유생 진세미(陳世美)의 이야기로,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그는 왕의 사위가 된다. 그러나 그의 부인임을 자청하며 진향련(秦香莲)이 두 아이를 데리고 나타나자 진세미는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그녀를 죽이려 하자 진향련은 포청천에게 도움을 청하고, 포청천은 중재에 나서지만 끝내 진세미가 그녀를 살해하려 하자 죄를 물어 참형에 처한다는 이야기이다. 밀랍 인형 앞에 당시 중죄인을 처벌하던 작두를 복원한 세 개의 작두가 놓여 있다. 용머리를 한 용 작두는 황실사람들을, 호랑이 머리를 한 호 작두는 관원들을, 개머리를 한 개 작두는 일반인들을 처형할 때 사용되던 것이다. 이 밀랍인형들로 연출된 장면을 보면서 당시 포증이 실제 법을 집행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
서배전 건물의 현판에는 철면무사(鐵面無私 :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사적인 부탁을 거절하다.)라고 쓰여 있는데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얼굴에 철판 깔고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사적인 부탁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우리 같은 평범한 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존경할 만한 인물이다.
이런 포증의 행적은 힘없는 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심지어 당시 청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염라대왕과 포증 밖에 없다는 말이 떠돌다 보니 힘없는 일반 서민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포증의 사당에 가서 빌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이곳에는 억울한 일을 당한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중국이 개방화 이후 최소한의 사회안전망마저 붕괴된 상황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서민들은 멀기만 한 공안국 보다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지금 내 눈 앞에서 향을 올리며 절을 하는 사람들은 무슨 억울한 일을 당했을까? 하는 마음이 짠해진다.
서배전을 나오니 포공호라는 호수가 보인다. 포공을 추모하는 사람들은 그 호수를 포부갱(包府坑)이라 불렀고, 세월이 흘러 포공호(包公湖)로 바뀌었다고 한다. 호수 주변으로는 기이한 돌과 나무로 정원을 만들어 놓았는데 아름답긴 하지만 어쩐지 포증의 사당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다.
기암괴석을 쌓아 그 위에 정자를 지은 백룡정에 올라서니 스모그로 잘 보이진 않지만 카이펑 시내와 호수 건너편이 아련하게 보이고 바람이 시원하다.
한 시간 정도 빠오공즈를 구경한 우리는 택시를 타고 번타(번탑:繁塔)으로 향한다. 택시기사가 길에 내려주며 철로 밑 다리 쪽으로 가면 번타가 있다고 가르쳐 준다. 번타는 현지인들은 만불 탑이라고 부르는데 북송대인 977년에 세워진 벽돌塔이다. 5분 쯤 걸어가니 관광지로 재개발 하려는 듯 탑 주위의 많은 집들이 헐려 썰렁한 가운데 동네 아이들만 탐 앞에서 뛰어 놀고 있고 탑을 둘러싸고 있는 담에는 이 탑이 티벳 불교의 탑인지 룽다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번타는 카이펑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977년에 세워졌다. 건립 당시에는 9층탑으로 높이가 72m에 달했지만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3층으로 나머지 6층은 연이은 황허의 범람으로 점점 토사에 매몰되어 지금은 땅속에 묻혀 있다. 현재 높이는 31.67m로 청나라 때 남아 있던 3층의 탑머리 위에 7단의 작은 탑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높아진 것이라고 한다.
번타는 벽돌을 쌓아올린 전형적인 전탑으로 약 7,000여 개의 벽돌로 구성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각 벽돌마다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자세히 보니 불상 하나하나의 손모양이나, 옷, 표정, 머리 모양, 자세가 제각각으로 똑같은 불상이 하나도 없어 재미있다. 자료에 의하면 불상들은 108종류의 자세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은 여행자라 108개를 일일이 확인해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서둘러 번타를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다 민가 대문에 공씨파짜이(恭憙發財:삼가 기쁜 마음으로 재물이 번창하기를 기원한다.)라고 쓰여 있기에 대문 앞 의자에 앉아 있는 집 주인에게 “꽁시파짜이!”하고 인사를 했더니 집 주인이 고맙다며 한사코 집으로 들어오란다. 민가 구경도 하고 싶었는데 못 이기는 척하고 집으로 들어갔더니 안주인이 차를 내온다. 목이 스모그로 컬컬해 맛있게 차를 마시는데 주인이 자꾸 차를 따라 주며 밥을 먹고 가란다. 처음 보는 이방인에게 인사 한 번 했다고 친절을 베푸는 주인아저씨가 고맙지만 너무 늦으면 등펑 가는 버스가 없을까 두려워 서둘러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시내버스를 타고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등펑가는 차표를 사려 했더니 등펑행 버스는 하루 두 번 오전 8시와 오후 1시 40분에 있는데 우리가 너무 늦게 온 것이다. 등펑가는 버스가 카이펑보다 많은 정저우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탄다. 미리 등펑가는 버스 시간을 알아두지 못한 것도 있지만 알았다고 해도 카이펑까지 왔는데 카이펑 구경을 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는가.
오후 5시 정저우행 버스를 탄다. 퇴근시간과 맞물려 카이펑으로 갈 때보다 시간이 더 걸려 오후 7시 10분 정저우 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 내일 등펑가는 버스시간을 알아보려 매표소로 갔더니 오늘 오후 8시에 등펑가는 막차가 있다. 우선 차표를 사고 인근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한 다음 등봉행 버스에 오른다. 등펑에 도착하니 오후 9시 40분. 인근에 숙소를 잡고 긴 하루를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