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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의 힘
(삿 3:12-31)
오늘 함께 읽은 사사기 3장 말씀 중심으로 <부정의 힘> 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인간의 참된 부정만이 하나님의 긍정을 이끌어낸다, 더 정확히는 참되게 자기를 부정하는 자만을 하나님은 긍정하신다 라는 내용의 말씀이 되겠습니다.
오늘 첫 번째 사사인 옷니엘 사사 시대가 지나가고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종려나무 숲이라고 하는 것은 여리고 성을 말하는데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셔서 다시 또 집안싸움, 부부싸움과 같은 내분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과 선택받은 백성들 간의 갈등이 빚어지게 됩니다. 늘 이 선택받은 백성과 하나님과의 사이에는 이것이 문제인 거예요.
풍요와 다산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선민들을 하나님은 버리지 못하시고 그들을 채찍질 하시고 그들과 부딪치시고 그들과 충돌하시느라고 우리 선민들의 이 땅 위에서의 인생의 역사가 다 소모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풍요와 다산은 하나님 자신이 원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섭리가 이끌어가실 결실입니다. 근데 우리가 풍요와 다산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면서 이렇게 우리와 갈등 구조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게 되는 이런 상황이 빚어진다 이거에요.
옷니엘 사사가 죽고 나자 오늘 또 다사 돌아갑니다. 그래서 에글론이라고 하는 모압 왕을 시켜서 종려나무 숲, 여리고 성을 말하는데 점령하게 합니다. 이때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빌고 나오자 하나님께서 이번에 세운 사사가 에훗입니다.
1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 짧은 말 속에 담겨져 있는 깊은 뜻을 한번 꼭 짚고 넘어가야 되지 않겠나 생각이 듭니다.
한 구원자를 세우셨다...
지금 민족이 모압 왕 에글론의 핍박 아래 있게 됩니다. 이때 한 구원자를 세우셨다라고 하는 말은 참 많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거예요. 독립투사를 내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셨다 라고 하는 것, 독립투사는 핍박을 받는 민족을 사랑해서 자기 스스로 선 자입니다. 그 선 자를 하나님이 인가해주셨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세우셨다 라고 하는 말은 서지 못하는 자를 끌어냈다고 하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애국지사도 아닙니다. 나라를 사랑해서 스스로 그 나라를 그 민족을 구원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민족의 밝은 미래를 내다보며 비전을 제시하는 그런 지도자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런 지도자를 인가해주시고 승인해주셨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의지와 자기의 계획과 자기의 마음으로 자기의 애국심을 가지고 민족을 구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냥 세우셨다는 거예요.
그러면 민족과 나라 사랑을 실천한 것이 아닌 상황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에훗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라는 것을 성경이 그 에훗에 대한 성격 묘사를 예언적으로 해주고 있다는 것이에요. 여기서 예언적이라는 것은 영적으로 그러니까 먼 미래를 내다본다 라고 하는 그런 차원의 예언이 아니라 바울이 말하는 그런 예언, 즉 영적인 비밀을 풀어내는 그런 차원에서 예언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었냐 하면요,
베냐민 지파의 사람으로서 왼손잡이라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왼손잡이 라고 하는 이 히브리말을 그 히브리 문자 그대로 충실하게 번역을 하면 어떤 뜻이 되느냐? 왼손잡이가 아니라 ‘오른 손이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왼손을 잘 쓰는 사람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을 오른 손을 잘 못 쓰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이 긍정 아닙니까? 로버트 슐러 목사님께서 80년대 입니까? ‘긍정적인 사고’ 라고 하는 것을 정말 화두가 될 정도로 강하게 어필하신 뒤에 또 다시 요즘 ‘긍정의 힘’이라고 하는 말이 온 세상을 특히 교계 안을 덮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차원에서 보면 긍정의 힘이라고 하는 저서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쓰신다 이게 주제 아닙니까?
근데 오늘 본문 성경이 에훗이라고 하는 사람을 묘사하면서 에훗의 성격을 예언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이 모습은 뭐냐?
왼손잡이라고 문자대로 표현을 했어요. 근데 그 문자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냐? 오른 손을 못 쓰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나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긍정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왜 왼손을 잘 쓰는 사람 또 에훗이 왼손으로 죽입니다. 그 왼손을 잘 쓸 수 있는 사람을 오른 손이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겠느냐 이것입니다. 왜?
특히 여러분, 베냐민 지파라고 하는 것은 벤 + 야민 이라는 말은 벤이 ‘아들’이고 야민이라고 하는 것이 ‘오른 손’이라는 말입니다. 하여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이름 자체가 오른 손의 아들들입니다. 오른 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이름 자체가 오른 손의 아들들입니다. 그럼 오른 손의 아들들의 지파에서 오른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이 태어났다는 것은 왼손을 잘 쓰는 사람이라고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식으로 비유되느냐?
엄마, 아빠 그리고 형님, 누나 다 일류대학 출신인데 막내만 혼자 전문대에 들어갔습니다. 지금 이런 상황이라는거예요.
베냐민 지파 자체가 오른 손의 아들들입니다. 근데 에훗이라고 하는 사람은 왼손을 쓰는 사람이에요. 왼손을 쓴다는 말을 그래도 오른 손잡이 아들들의 지파에 태어나서 왼손을 잘 썼더라 이렇게 했으면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일 텐데 오른 손이 제 구실을 못한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훗의 인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에요. 에훗이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도 바울이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노라’ 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에요. 나의 강점과 나의 장점을 드러내서 그것을 극대화해서 사노라가 아니라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노라.
여러분!
여기에 참으로 기독교 진리에 신비한 힘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참되게 자기를 부정하는 자만이 자기의 능력에 대해서 부정하는 자만이 하나님은 그 자를 긍정해 주십니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내가 나를 긍정하고 내가 나의 인생을 긍정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원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적으로 참되게 사람이 자기의 위치를 하나님 앞에서 지킬 수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르게 자기를 부정하는 겁니다.
우리가 열등감을 가져요. 열등감이라고 하는 것은 뭘 말합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이 세상의 기준과 비교해서 나를 못하다고 나를 부정하는 겁니다. 이런 부정을 참된 부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내가 열등한 사람이다 라는 것을 성경이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이 원하는 부정이라고 하는 것은 뭘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목전에서 악을 행했다. 항상 하나님의 목전에 있는 사람들로서 오른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 이게 무슨 뜻일까요?
오른 손이라는 것은 ‘권능’을 상징합니다. 능력을 상징하고 힘을 상징합니다.
근데 오른 손을 쓰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게 주어지는 삶에 대해서 권능과 능력과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자라는 의식이 에훗 속에 있었다는 것을 성경이 예언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내게 주어지는 일, 내게 주어지는 과제에 대해서 권능과 힘을 나타낼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자기 스스로 알고 있었고 깨닫고 있었고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권능과 힘을 나타낼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나는 나로서 내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소원을 따라서,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계획에 따라서, 내 의지를 따라 살아가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그러한 삶을 적중시키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도 권능도 지혜도 없다는 것을 에훗은 스스로 깨닫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른 손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람,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에요. 그 사람을 하나님이 들어서 쓰십니다. 하나님이 긍정하시는 것이에요.
주님은 자기 자신을 그렇게 비하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고 하는 그 십자가의 자리까지 나가십니다. 하나님의 목전에서 자기를 아주 극한적으로 부정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부활의 사건으로 긍정해주십니다.
여러분!
긍정의 힘이라는 말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합니다.
깨졌어요. 적어도 장로교 그리고 정통 루터교에서 말하는 것이 형상이 깨져 버린 겁니다. 근본적으로 긍정할 수 있을 만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에요.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지요? 수학의 통계학에서 얘기하는 거.
정을 정하다 하면 정입니다. 부를 정하다 하면 부입니다. 틀려요. 정을 부하다 해도 부입니다. 틀려요. 그러나 부를 부라 하면 맞는 겁니다. 정이에요.
내가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에 대해서 내가 마음대로 소원하고 마음대로 계획하고 마음대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내가 깊이 깊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러한 부정이 하나님의 긍정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에요.
“그래 난 하나님이 보실 때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죄인인 것을 내가 나도 부정하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다 라고 명확하게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있는 그 사람만을 하나님은 맞다고 여겨주신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모습이 내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모습이 내 모습일 때 자식 앞에서도 십자가의 모습이 내 모습이고, 남편 앞에서도 아내 앞에서도, 사업 앞에서도 직장 앞에서도 무슨 일 앞에서도 십자가에 달려 죽은 모습이 내 모습일 때 거기에는 긍정의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이에요.
완전히 부정되어야 하고 그 부정되는 것이 구약에서 뭐로 나타납니까?
번제. 각을 떠서. 왜? 살 속 깊이 깊이, 뼈 속 깊이 깊이 죄악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완전히 각을 떠서 잿더미로 만들어버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부정을 철저하게 해야 되는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에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사건을 가능하게 하세요.
어떻게 해야 가능해집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긍정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이 하나님의 긍정이 가능해집니까?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신 주님께서 이 임마누엘을 가능하시게 하기 위해 하셨던 일이 뭡니까? 십자가에요.
십자가가 뭡니까?
머리털 한 끝, 바늘 끝만큼이라도 긍정의 요소가 없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우리로 하여금 자각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에요.
그것이 나다! 주님이 죽으셨지만 그것이 바로 나다!
오늘 에훗이 오른 손잡이의 아들들 이라는 지파에서 태어나서 오른 손이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예언적인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철저하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자기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이에요.
이 사람을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여기보면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김구 선생님도 우리의 모범이 아닙니다. 김좌진 장군도 우리의 모범이 아니에요. 을지문덕도 우리의 모범이 아니고 이순신도 우리의 모범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범은 뭡니까?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는 사실 그 이외의 다른 모범과 모델이 없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지지 않으면 위인은 될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구원받은 자는 될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지고 하나님에 의해서 살게 되고 하나님에 의해서 앞으로 나가게 되고 하나님이 밀지 않으면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오른 손이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 사실을 깨닫는 자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특성이 뭡니까?
다 자기기 할 줄 안다는 것이에요.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요. 이름도 잊어버렸습니다마는 미스 아메리카에 된 여자가 끊임없이 마음 속에 미인대회에 나가서 1등하는 꿈을 계속해서 꾸었다는 것이에요. 아름다운 모습을..
저는 말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인대회에 나가서 1등한 것이 그래서 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끊임없이 봐야 될 것은 나의 아름다운 모습 나의 긍정적인 성취된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연합해서 죽은 모습 그것을 그렇게 끊임없이 봐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나를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고 무엇이든지 허락하신 것에 대해 오른 손을 대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을 알고 손을 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 부정의 레일 위에 내 인생을 긍정하시는 하나님의 기차가 달려갈 수 있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긍정이 가능해진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긍정하는 게 아니에요. 아주 아주 무서운 얘기입니다. 이거 여러분!
심지어는 내가 나를 긍정한다고 하는 기본 원칙하에서 하나님의 능력까지도 이제는 내가 나를 긍정하는 그 궤도 안에서 내가 갖다 Tm는 것이 돼버리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빼내느냐.. 내가 긍정하는 내 인생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렇게 신앙이 되어버리고 말아요. 아니에요. 이거 아닙니다.
너무 너무 무서운 이야기들이, 너무 너무 교묘한 이야기들이, 비기독교적인 이야기들이 교회 안에 여과 없이 만연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에요.
성탄절날 주님의 오심을 생각하면서 과연 주님이 오신 이유가 뭔가?
모두가 다 자기를 긍정하고 또 자기를 부정해도 말입니다. 왜 부정하느냐? 긍정의 이면이에요. 이렇게 긍정적인 모습을 원하다가 안 이루어지니까 부정하는 것뿐입니다.
마치 미움이 사랑의 이면인 것처럼. 애증이라고 그러잖아요? 사랑과 증오가 한데 붙어 있는 동전의 앞뒷면인 것처럼 인간적인 부정이라는 것, 이 세상적인 부정 이거 소용없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 모두가 다 긍정하고 있는 거예요.
모두가 자기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고 싶어하고 그리고 부정을 해도 잘못된 긍정의 형태로 부정을 하고 있는 이 세상에 오셔서 참된 부정을 가르쳐주시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긍정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긍정이 이 세상에 내려오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육신이 되셔서 당신 스스로를 하나님 되심을 다 비우시는 부정의 행위를 통하여 십자가 사건을 완수하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계절 오늘 성탄절 아침에 부정의 힘, 참된 부정, 인간의 참된 부정의 힘 바로 알고 하나님의 긍정 안에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07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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