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4:1-14) 무서운 눈싸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중심으로 <무서운 눈싸움>이라는 제목의 말씀 증거 합니다.
무슨 눈싸움이기에 무서운 눈싸움일까?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뭉쳐서 던져 맞히는 눈싸움이 무서운 눈싸움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눈뭉치 안에 돌멩이를 넣어서 던지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요. 어렸을 때 동네 아이들 중에 못된 아이들이 그 눈뭉치 안에 돌을 넣어서 던집니다. 진짜 재밌고 장난으로 해야 하는 눈싸움이 무서운 눈싸움이 될 수 있지요.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는 눈싸움은 그 눈싸움이 아닙니다. 그러면 눈싸움이 뭐냐? 서로 꼲아보고 있으면서 누가 더 먼저 눈을 깜빡거리나 하는 그런 눈싸움. 지면 칼을 들이대서 지는 사람 목을 찌르는 것으로 그러면 무서운 눈싸움이 될까요? 그 눈싸움 아닙니다. 또 권투선수들이 서로 기가 눌리지 않기 위해서 레프리가 불러서 주의를 줄 때 서로 미친 듯이 꼲아보고 째려보는 그런 눈싸움 그것도 아닙니다.
진짜 눈알을 가져 버리는 거예요. 눈의 전쟁입니다. 눈을 가지려고 하는 시선을 탈취하려고 하는 그런 전쟁, 그리스 로마신화에 보면 아르구스라고 하는 거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거인은 눈이 백 개나 달린 거인입니다. 이 거인에게 얽힌 에피소드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주신 제우스의 아내가 헤라 아닙니까? 헤라를 굉장히 따르고 존경하는 여사제 '이오'라고 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헤라를 따르면서 늘 제우스 앞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다 보니 제우스가 이오와 바람이 나게 됩니다. 이 사실의 낌새를 챈 헤라가 제우스를 찾아오자 제우스가 위기를 모면하려고 이오를 암소로 변하게 합니다. 마누라의 추궁으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서 자기가 사랑하던 바람피우던 대상인 이오를 암소로 바꿔 버립니다. 헤라가 볼 때 ‘아, 요거 이오를 암소로 바꿨구나!’라고 눈치를 채고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이 암소를 선물로 달라고 합니다. 그까짓 암소 선물로 주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 제우스의 마음이 너무 아프고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면서 할 수 없이 들킬까봐 그 암소로 변한 이오를 헤라에게 줍니다. 그리고 다시 사람으로 변하게 해서 바람을 피울까봐 바로 아르구스에게 감시를 하게 합니다. 이 아르구스는 눈이 백 개인데 어떻게 감시를 하느냐? 잠도 안 자느냐? 잠을 자는데 백 개의 눈을 다 감지 않습니다. 몇 개만 감고 몇 개는 떠 있으면서 잠을 잡니다. 백 개가 동시에 감겨지는 법이 없기 때문에, 영어에서도 ‘아르구스 아이드’라고 하면 아주 면밀한 감시체계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감시를 하고 있어서 제우스가 너무 마음이 아픈데, 이제 이오를 감시체계에서 끄집어내기 위해서 헤르메스 신을 보내요. 전령의 신을 보냅니다. 헤르메스가 가서 피리를 불고 피리에 얽힌 이야기를 길게, 길게 하는 가운데 그만 아르구스의 백 개의 눈이 다 감겨 버리고 맙니다. 그 때에 백 개의 눈이 달려있는 목을 쳐 버리는 것이에요. 그 눈을 다 탈취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이오를 끄집어냅니다. 이 사실을 안 헤라가 자기에게 충직했던 이 거인 아르구스가 죽은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그 백 개의 눈을 다 수거해서 공작새 꼬리에 박아 놓았다는 것입니다. 공작새 꼬리를 보면 찬란한 무늬가 있는 가운데 눈 같은 것들이 박혀있지 않습니까? 그게 아르구스의 눈입니다. 백 개의 눈. 눈을 뺏는 전쟁을 했던 것이지요. 물론 눈의 시선도 가지가지입니다만, 이렇게 아르구스의 눈처럼 감시의 눈이 있고, 또 사랑스럽게 보는 눈도 있고 어쨌든 눈을 뺏기 위한 전쟁, 시선을 탈취하기 위한 전쟁이 오늘 본문에서도 아주 강렬하게 일어났습니다.
자, 오늘 본문의 내용은 뭡니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성벽을 재건하는 공사를 개시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산발랏과 도비야 참 기가 막혀요. 7절에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바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근처에 모든 민족이 다 모여서 반대를 합니다. 그리고 심히 분노했다고 합니다. 왜 자기네들이 심히 분노합니까? 그런데 심히 분노하여 방해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느헤미야가 하나님에 대한 담대한 믿음.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밀어 주고 계신다.’ 라고 하는 담대한 믿음으로 이 방해를 무릅쓰고 겨우 52일 만에 예루살렘성벽전체를 어느 곳 하나 빈 곳이 없이 허물어진 틈새 없이 다 완공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4절 까지는 아직 완공이 되지는 않고 있습니다마는, 여기서 여러분, 한 가지 알 것은 예루살렘성벽의 의미가 뭐라고 했지요? 성전을 가운데 두고 그 예루살렘 성안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언제나 ‘세상을 등지고 세상에는 시선을 보내지 않고 오직 성전만을 바라보면서 살겠다. 이 세상은 등을 앞으로 내밀면서 살아가겠다.’ 라고 하는 결심의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 바라본다. 세상을 등지고 성전을 바라본다.’ 라고 할 때에, 이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너무너무 싫어하고 심히 분노합니다. 세상에 시선을 두지 않는 우리들을 향해서 어떻게 분노하며 어떻게 방해를 하는가가 오늘 세 가지로 나와 있어요.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세상을 사는 우리들을 세상이 얼마나 싫어하면서 방해하는가가 세 가지로 나와 있는데 첫 번째 1-3절 까지 보면 3절에 재미있는 말이 나와요.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라는 말이 나오고 앞에도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루에 마치려는가?’ 라는 말은 ‘하루에 마칠 만큼 부실공사를 하려는 것이냐?’ 라는 말이고 ‘여우 한 마리가 올라가도 무너져 내린다.’ 라고 조롱을 하는데 이 말이 여러분, 단순히 조롱이 아닙니다. 그 내용을 잠시 후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어쨌든 이렇게 조롱을 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 주님의 십자가 아닙니까? 옛날에 성전이었다면, 요즘은 주님의 십자가사건을 마음에 기억할 때,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당신의 이름을 두시는 곳이지요. 그렇게 세상을 등지면서 주님의 십자가 바라보면서 살아간다면 ‘야, 돈 벌기도 바쁜데. 이 세상 흐름을 따라 가기도 바쁜데. 촉각을 곤두세우고 쫓아가도 모자라는데. 그리고 미래에셋을 창시한 그런 사장님은 바람이 와서 바람개비를 돌릴 때 까지 기다리지 말고 내가 뛰어 가면서 바람개비를 돌려라.’라고 이런 얘기들로 조롱을 하지요. 그럼 매일 이진법 복음을 들은 사람들을 조롱하는 조롱이 뭐냐?
조롱 아닌 조롱이 ‘감나무 아래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느냐?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손 떼라고? 그러면 아무것도 안하고 기다리느냐?’라고 하는 말이 이게 다 그런 말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심히 분노했다'는 겁니다. 심히 분노해서 대적합니다. 단순히 조롱을 넘어서 심히 분노하여 대적하고 세 번째, 예루살렘 성 바깥에 떨어져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이 대적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었는데, 그 가까이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마음이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 유대인들이 뭐라고 하느냐면 성벽을 재건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성벽재건을 멈추고 다시 말하면 세상등지고 시선을 십자가에 고정하는 그런 삶을 멈추고 나에게 와서 오히려 나를 좀 지켜줘라.’ 라고 분산을 시켜버립니다. 이렇게 세 가지 방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조롱한다. '여우가 올라가도 성벽이 무너지리라.' 성벽을 쌓는 것이 뭐라고 했어요. 결심입니다. ‘세상등지겠다. 돈 문제가 급해도 건강문제가 급해도 우리 가족의 문제가 급하고 시어머니의 문제가 급해도 일단 세상등지겠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는 마치 그런 일이 없는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겠다. 하나님을 만나겠다.’라고 하는데 이렇게 사는 것 웃긴다는 겁니다. 그런 결심 자체가 성벽을 쌓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 결심이 어느 때 허물어집니까?
굉장한 일이 있어야 허물어집니까? 여우 한 마리가 올라가도 무너져 내리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시선이 벌써 이 세상의 일들에 대한 시선으로 확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카페에 미국에 계시는 쥬얼리 아이디를 갖고 계시는 분의 글을 읽었어요. 아파트 관리사무실에서 통보가 왔다고 그래요. 이제 일 년 계약이 끝나고 나면 아파트 세를 50불을 올리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명색이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에 평강을 누리며 사는 하나님의 딸, 하늘 아버지의 딸이라고 했는데 아파트 세 50불을 올린다는 소리를 듣고는 마음에 먹구름이 끼더라는 겁니다. 맞아요.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한 달에 50불, 칠팔백 불, 천 불 이렇게 내는 세 중에 월세 중에 50불을 올린다고 하는데 하늘아버지의 딸이라고 생각하며 살던 내 마음이 50불을 바라보자마자 마음의 평강이 깨져버리고 마는데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여우 한 마리가 올라가도 세상등지고 십자가 보겠다는 결심이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이 세상의 일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마음의 평강이 깨어지고 이 세상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차 버리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 심히 분노한다. 시선이 멈춤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아내가 남편이 날마다 사업으로 바빠서 밤 12시, 1시에 들어오고 아침 7시에 나가고 또 출장 가서 한 달이나 있고 이럴 때 불평하게 되는 게 왜 그래요? 시선이 끊어졌기 때문에, 사업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뭐예요? ‘여보, 여기가 무슨 하숙집이야? 여기가 잠만 자고 나가는 여관방이고 호텔방이야? 나는 뭐야? 당신 하나보고 시집왔는데. 사업이 그렇게도 좋아? 나는 사업만도 못해?’ 라고 합니다. 다 뭡니까? 시선이 와 닿지 않을 때, 따듯한 시선 사랑의 시선 관심의 시선이 와 닿지 않을 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그런 것 같아요. 따듯한 관심의 시선이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겨울이 됩니다. 우리 아이를 키우면서 집사람과 내가 관심을 딱 끊어버리면, 그 아이는 겨울이 돼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노하게 됩니다. 자가발전이라도 해야 되니까, 스스로 열을 내야 되는데 스스로 내는 열은 마음이 겨울이 된 상태에서 분노의 열입니다. 이 세상을 향한 분노를 터뜨리게 되는 겁니다.
마귀도 마찬가지예요. 세상등진다니까 성질이 나는 겁니다. 왜 나를 안 보느냐는 겁니다. 왜 이 세상을 안보고 하나님을 보겠다고 하는 것이냐? 그래서 여러분! 사람의 원수가 제 집안 식구라는 얘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눈 싸움이거든요? 눈알을 뺏는 겁니다. 그야말로 잔인한 싸움이지요.
남편을 보고 있던 눈알을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는 겁니다. 하나님도 시선을 필요로 하시는 거예요. 자식을 보고 있는 시선을 하나님께서 그 눈을 빼앗는 겁니다. 그래서 제 집안 식구가 원수예요. 제 집안 식구가 눈앞에서 제일 알짱거리거든요. 제일 시선을 많이 빼앗거든요. 무슨 일이든지 내 마음의 시선을 빼앗으려고 악을, 악을 쓰고 달려들거든요. 마귀가 자식의 문제를 터뜨리고 남편의 문제 터뜨리고 아내문제 터뜨리고 건강문제 터뜨려서 어떻게 하든지 마음의 눈알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내 것으로 빼앗아가려고 하는 것이에요. 지독하고 무서운 눈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오늘도 하루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분의 마음의 눈알을 빼앗으려고 이 세상에서 계속해서 여러분 앞에 마귀가 일을 만들어 내고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우리의 시선을 강탈하려고 치고 들어올 것이에요. 그리고 또 하나는 이 눈 싸움이 믿는 사람들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리와라. 성벽 쌓는 것 그만해라. 십자가 바라보는 것, 세상등지지 마라. 십자가 바라보는 것 그만해라.’라고 합니다. 그러면 뭘 바라보라는 것이냐? / 이리로 오라. / 어디로 오라는 거냐? / 지금 세상이 나를 위협하고 있는데 세상과 맞서 싸우려면 세상을 알아야 되지 않느냐?’라고 합니다. 그래서 말한 것이 뭡니까? 십자가를 향하는 눈알을 빼내서 어디로 보게 합니까? ‘긍정의 힘, 목적이 이끄는 삶’ 이런 것들로 시선을 빼앗아 버립니다. 주님이 이끄는 삶, 목자가 이끄는 삶, 하나님이 이끄는 삶이 아니라, 내 인생의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 내 시선을 뺏어버립니다. 그리고 교회의 직분, 교회에 충성하라. 예배당 건축을 위해서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향하는 시선을 다 빼앗는 겁니다.
여러분 분명히 합시다. 교회 일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보는 것과 하나님을 보는 것은 다릅니다. 지금 느헤미야가 성벽을 건축하고 있지요. 이 성벽건축은 교회 일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충성봉사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면 아직 측근도 아니에요. 조건부로 하나님과 딜을 는 겁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측근이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겁니다. 이미 복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사명으로 하는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충성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라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세상을 등지게 될 때에 자꾸 방해가 들어오는데 ‘조롱하고, 화내고, 편벽돼 있어, 치우쳐있어, 그러면 안 돼.’라고 골고루 시선을 분산시키라는 거예요.
왜 이렇게 방해를 할 까요? 도대체 왜 이렇게. 왜 이렇게 방해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됩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에피소드로 설명을 드리면 여러분 제가 미국 프린스턴에 있을 때 어느 날 아침 왜 그런 마음이 생겼는지 오전 1회 첫 번째 상영하는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영화관들이 있는 줄 압니다만, 한 영화관 안에 개봉관이 여러 개 들어있는 그런 영화관을 들어갔어요. 10시쯤 영화가 뭐였는지도 기억도 안나요. 어쨌든 기억나는 것은 제가 제일 먼저 들어가 앉았어요. 영화관이 얼마나 큰지 프린스턴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다보면 1번국도 상에 있는 영화관인데 제가 한 번 얼추 세어 봤어요. 혼자 앉아있으면서 의자가 한 천 개가 넘는 것 같아요. 굉장히 큰 영화관이지요.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아무도 안 들어와요. 그래서 저는 나가야 되는 줄 알았어요. 시간이 딱 되니까 트는 거예요. 대형 영화관에 앉혀놓고 영화필름을 돌리더라고요. 좌불안석이에요. 천명이나 들어가는 그 대형 영화관안에 스피커가 꽝꽝 울리지요. 혼자 앉아 있는데. 난 또 그런 경험은 처음이에요. 그 뒤로도 한 번도 못해봤고 제가 그때 느낀 것이 있어요. 천명이나 들어가는 대형 영화관이 999좌석이 남아 있는데 그 대형 스피커가 꽝꽝 울리고 초대형 화면에 영화가 상영이 됩니다. 뭘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이 세상의 일이 많아요. 내가 보살펴야 될 일이 많습니다. '보살핀다'는 것이 뭐예요? 보고 살피는 겁니다. 내가 보고 살펴야 될 일이 많은데. 그 시선 다 접어두고 시선을 다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조금 더 하나님을 느끼기 위하여 좀 더 실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 시선, 사람의 시선이 있을 때 대형 영화관이 풀가동되는 되는 것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그렇게 싫어하는 거예요. 한 사람만 보고 있으면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가만히 서서 오늘날 내가 너희를 구원하는 것을 보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보라!'
마치 앞에서 상영하시는 하나님 영화관의 필름에 상영되는 영화를 보듯이, 나 한사람이 시선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으면 하나님은 엄청난 일을 행하실수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드리세요. 두 시를 드리세요. 두 시가 뭐냐? 시선과 시간을 드리세요. 하나님께 시선과 시간을 드리고 나면 반드시 하나님은 그 대형 영화관을, 나 한 사람이 보고 있는 사실 때문에 영화관이 풀가동되는 것처럼, 내가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 때문에 하나님은 내 삶에서 그렇게 큰일 까지도 불사하고 다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내 자식에 대해서 아내와 남편에 대해서 시선을 거두어 드립니다. 다 세상이에요. 이 땅입니다. 하나님 말고는 다 세상이지요. 이 땅위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모든 것이 다 세상 아닙니까? 그 세상을 등지는 것이에요.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보면서 등 뒤에서는 세상의 일이 바쁘게 나의 눈의 시선을 요구하고 있지만, 다 성벽을 쌓아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의 성벽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아버지를 향하여 시선을 드릴 때, 아버지는 그 천명이 넘는 영화관을 풀가동시키십니다. 나 한 사람의 시선이 갈 때, 이것을 그렇게 마귀가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에 시선을 고정시키려는 여러분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마귀는 방해하며 들어올 것입니다. 이 방해를 이기시고 어떻게 하든지 주님의 십자가에 눈의 시선을 고정하시므로, 하나님아버지와 만나고 그 시선을 의식한 아버지께서 대형 영화관을 나 한 사람 때문에 풀가동했던 그런 일처럼,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실 수 있는 아주 기가 막힌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땅에 대해서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우리의 눈이 십자가에 박히게 하여 주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을 느끼기를 원하는 우리의 시선 앞에서 구원과 사랑과 섭리의 역사를 해 나가시는 아버지하나님을 발견하는 복된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