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재구 , 「 사평 역에서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지금도 나는 술만 취하면 사평역에서를 읊조린다.
'산다는 건 때론 술에 취한듯 한두릅의 굴비 한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하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낮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1989년 11월 운영 유창식 화백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준호리! 엉아한테 돈이 생겼는데 우리 곽재구의 사평역에 가보지 않을래요?" 나는 단숨에 청량리 역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가장 늦은 중앙선을 탔다. 고생의 시작이었다. 사평역은 간이역이라 그 이후로는 비둘기호만 탔다. 안동역에서 부산진역으로 가는 동해남부선, 부산진역에서 사천역으로 가는 완행열차, 그리고 삼천포로 빠져 남일대 바닷가의 코끼리 바위. 처음으로 덜컹거리는 열차가 아닌 뭍에서의 하룻밤 그리고 바닷물에 씻은 멍게와 멍께 껍질 소주잔. 소주잔에 비친 둥근달이 지금도 가슴 속 깊이 서려있다. 모든 역마다 하차하는 비둘기호지만 아직 사평역을 만날 수 없었다. 사천역에서 광주 송정역으로 가는 비둘기호를 탔다. 곽재구 시인의 고향이 전라도 해남이라 이곳에서는 사평역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컸다. 잠도 자지 않고 역이란 역은 모두 살폈다. 간이역이라 혹 서지 않고 지나칠까봐 두눈을 부라리고 역마다 확인하였다. 없었다. 그리고 광주에서 대전까지 마지막 비둘기호를 탔다. 없었다. 대전에서는 통일호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총 6일이 소요됐다. 결국 사평역을 만나지 못하고 돌와았다.
그런후 KBS TV문학관에서 [사평역에서]를 재방영하였다. 부지런히 보았다. 마지막 장면이 대합실에 사람들이 톱발난로에 모여 막차를 기다리는 모습이 떠오른다. 주인공이 김영철 씨 인거로 기억된다.
그리고 단막극이 끝나면서 자막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평역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역이며, 시인이 만들어낸 가상의 역이라는 자막이었다.
배신당한듯 실연당한듯 나는 멍해졌다.
당장 윤영 유창식 형에게 전화를 걸어 알고 있었나며 따져 물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가장 많은 소주를 털어넣었다.
내가 처음이 아니란다. 1985년에 지금 모여고 국어교사로 계시는 후배와 실제로 사평역에서를 찾아서 기차여행을 했었고 내가 두번째라는 것이었다. 운영 유창식 형하고는 그래서 지금도 애증의 관계다.
국어 교과서에도 사평역에서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