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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6348]우암 송시열의 생애와 서예-3-
증주벽립(曾朱壁立) :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7호)
증·주(曾·朱)는 공자의 제자 증자와 송(宋)의 유학자 주희를 가리킨다.
벽립(壁立)은 ‘벽에 서있다.’는 말, 두 선현이 우뚝 서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를 본받아 소신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우암의 학문하는 태도와 강직한 성품이 잘 나타나 있다.
‘立’의 짜임이 정연한 균제미(均齊美)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東國輿地勝覽)에 “송시열의 집이 성균관 서쪽 산기슭에 있는데,
우암이 예전에 기거하였기 때문에 동네 이름을 송동(宋洞)이라 한다.
동리의 골이 깊으며 석벽에 ‘증주벽립’이라는 네 글자를 새겼는데,
우암의 글씨”라는 기록이 있다. 이 암각은 제주(제주시 이도 1동)에도 있는데
성균관에 있는 것을 탁본해서 새긴 것이라고 한다.
치(恥) : 대전우암사적공원 유물관(영인본)
‘치(恥)’는 치욕스럽다는 의미다.
‘마음 心’ 대신 ‘그칠 止’로 쓴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단순히 글씨의 구성(結構)만이 아닌
어떤 뜻을 담았을지도 모른다.
정묘, 병자 두 번의 호란에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우리 임금(仁祖)이
오랑캐(淸)에게 항복했던 ‘國恥’를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았을 우암이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아마도 복수설치(復讐雪恥)를 다지며
원통함을 씻으려 했던 설치의 ‘恥’,
글씨가 마치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휘두르려는 것 같은 느낌은
필자의 영서연설(?書燕說)일 것이다.
지통재심(至痛在心) : 충남 부여군 규암면 헌비묘비(憲菲墓碑) : 충북 옥천군
사진 왼쪽의 암각은
“지통재심 일모도원(至痛在心 日暮途遠;
통한이 가슴에 사무치는데 날은 저물고 길은 멀다.)”이다.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李敬輿, 1585~1657)의 상소에 효종이 내린
비사(批辭, 誠以至痛在心。有日暮道遠之意)이다.
우암이 이 중 여덟 자를 써서 이경여의 후손에게 전한 것을,
1700년 손자 이이명(李?命, 1658~1722)이 부여 백강마을 바위에 새겼다.
글씨의 필체가 힘차고 강건하다. 북벌을 계획하면서 비분강개하던
효종의 분노를 담은 것도 같다. 암각을 보존하기 위해 바위 위에 정자를 세워
대재각(大哉閣)이라 했다.
대재각은 상서(尙書) “대재왕언(大哉王言, 크도다! 왕의 말씀이여)”에서 따온 것,
오른쪽 작은 글씨는 ‘孝宗大王賜白江李相國批辭’이다.
도 유형문화재(제 47호), 금석문으로도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진 오른쪽의, 유모 헌비(乳母 憲菲)는 우암이 82세에 썼다.
부친을 키워준 여종에게 보은의 정표로 세워준 묘표(墓表)다.
노비를 배려한 우암의 따뜻한 면모가 엿보인다.
문중에서는 매년 벌초를 하여 우암의 뜻을 기린다.
“영의정에 증직된 수옹 송공 유모 헌비의 묘, 아들 강수문의 묘는 서쪽에 있다.
숭정 61년(1688) 2월에 세웠다.
(贈領議政睡翁宋公乳母憲菲之墓 子姜叟文墓在右 崇禎六十一年二月日立)”는 내용이다.
노령 탓이었을까? 연호 숭정 61년의 ‘해 秊’자가 ‘끝 季’자로 쓰였다.
한벽루(寒碧樓) : 충북 제천시 청풍면
청풍 한벽루는 1347(고려 충숙왕 4)년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이다.
편액에는 대체로 서자(書者)를 밝히지 않는데 ‘화양노부서(華陽老夫書)’라 쓰고 낙관도 했다.
초서로 쓴 ‘華陽老夫書’의 흐름이 매우 ‘유려(流麗)’하다.
정려비(旌閭碑) :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석의 큰 글씨는 ‘烈夫高麗進士宋克己妻高興柳氏之閭’이다.
고흥 유 씨는 우암의 9대 조모이다.
사후 200여 년이 지나 1653년 8대손 송준길이 조정에 의뢰하여 정려의 은전을 받았다.
당시 은진 송 씨들의 금석문은 거의 우암이 짓고, 동춘이 썼으나,
이 비문은 동춘이 짓고 우암이 썼다.
정려를 받기 위해 은진 송 씨 문중이 진정서를 내고 관찰사가 장계를 올렸다.
예조판서 이후원(李厚源)의 주청으로 윤허를 받았다.
영중추 이경여(李敬輿)와 영돈령 이경석(李景奭)이 도왔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김갱(金坑), 우의정 이시백(李時白)도 정려를 내릴 것을 주장했다.
이로써 1653년 쌍청당(雙淸堂) 앞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당시 동춘, 우암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3). 동춘(송준길)의 서예
시경 진로(詩經 振鷺) : 개인 소장
우암은 큰 글씨를 잘 쓰고, 동춘은 작은 글씨를 잘 썼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동춘도 우암 못지않은 대자(大字)를 남겼다.
사진의 작품은 시경의 “저쪽에서도 미워함이 없고/이쪽에서도 싫어함이 없네/
바라건대 밤낮으로 힘써서/길이 명예로움을 마치게 하라
(在彼無惡 在此无? 庶幾夙夜 以永終譽)”는 내용이다.
군자의 덕을 찬양하는 글이다. 글자가 획수가 많아서 필획을 전체적으로 가늘게 썼다.
특히 예(譽)자는 지금은 쓰이지 않는 이체(異體, )로 쓴 것이 특이하다.
청명재궁 지기여신(淸明在躬 志氣如神) : 개인 소장
동춘이 65세 되던 1670년에 둘째 손자 송병하(宋炳夏, 1646~1697)에게 써준 잠명(箴銘)이다. 검은 색을 띤 종이(紺紙)에 송홧가루(松花粉)로 썼다.
“청명이 몸에 있으면 지기(志氣)가 신과 같고,
인욕(人欲)이 깨끗이 없어지면 천리가 유행한다.
(淸明在躬 志氣如神 人欲淨盡 天理流行)”는 글이다.
말미는 ‘경술년 3월 조부 춘옹이 써서 손자 병하에게 준다(庚戌季春春翁書與炳夏孫)’이다.
4. 맺는 말
우암의 서예는 기호학파의 서체가 그랬듯이 석봉체를 바탕으로 했다.
안진경체, 주자체가 혼재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서체를 이루었다.
유묵이나 편액 암각 등에 나타난 그의 글씨는 장중하면서도 정형화 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있다. 기교 없는 질박한 아름다움과 격식에 구애받지 않은
분방함이 조화를 이룬다. 특히 우암의 서예는 한마디로 ‘직필서예’라고 할 수 있다.
“천지가 만물을 낳게 하고 성인이 만사에 대응하는 것은 오직 ‘直’ 뿐”이라고 했듯이
언행도 문장도 서법도 直과 일통하는 삶이었다. 이것이 우암서예에 대한 후세의 평가다.
그러나 우암은 정작 자신의 글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문인 박광일(朴光一, 1655~1723)이 어느 날 스승에게 묻는다.
“선생님도 안진경체를 익히셨는데 그렇습니까?”
“내가 안진경을 익혔으면 벌써 숙련이 되었을 텐데 못난 재주로 주자를 흉내 내려다가,
범을 그린다는 것이 개를 그린 꼴이 되었다.”
그러나 최신(崔愼, 1642~1708)은 “(선생님이) 글씨를 쓰실 때는
반드시 술 한 잔을 드시고 약간 취기가 돈 뒤에 일필휘지하시니,
운필의 기상이 호방하고 힘찼다.”고 했다.
[宋子大全附錄卷十六 語錄 朴光一錄; 先生曰 吾若習?魯公體
則當已練熟矣 以不逮之才 效朱子體 故今?虎不成矣//
宋子大全附錄卷十八 語錄 崔愼錄(下); 每於寫字時
必以一杯酒致其微? 乃把筆揮之 筆端豪健]
17세기 조선의 서예를 말할 때 동춘과 우암을 빼놓을 수 없다.
혈족으로 평생지기로 당대 대표적인 유학자이면서 정치적 동지였다.
최고의 명필가로 세상 사람들은 이들의 글씨를 양송체(兩宋體)라 불렀다.
동춘은 자질이 온순하고 예법과 태도가 탁 트인 반면,
우암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답게 고집스럽고 강직한 인물로 알려졌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동춘을 빙옥(氷玉)에, 우암을 태산(泰山)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들의 글씨엔 이런 각자의 성정(性情)이 잘 드러나 있다.
동춘의 글씨는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고 단정해서 정제(整齊)된 아름다움이 있다.
우암의 글씨는 대담하고 자유분방하다. 작품 중 대표적인 글씨가 제자들에게
당부로 써 준 ‘刻苦’를 들 수 있다. 사람 키만큼 큰 종이에 장중하고 힘이 넘치는
획 하나하나에서 우암의 성향과 내면을 읽을 수 있다.
뜻도 심장하지만 획이 꿈틀거리며 화선지 밖으로 튀어 나올 듯 생동감이 넘친다.
이러한 면이 일세를 풍미했던 우암의 서예였다고 할 수 있다.
퇴계가 ‘글씨의 법은 마음의 법을 따라 나오는 것(字法從來心法餘)’ 이라 했다.
그래서인가? 양송(兩宋)은 양송답게 각자 개성 있는 양송의 글씨를 써서
오늘에 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록]; 우암 송시열 연보(약술)
1607(11.12); 戌時(오후 7~9시) 沃川 九龍村에서 태어나다.
* 宣祖가 승하하고, 光海君이 즉위하다.
1613 (7 세); * 癸丑獄事가 일어나다.
1614 (8 세); 宋爾昌에게 나아가, 宋浚吉과 함께 수학하다.
1623 (17세); * 3월 仁祖反正 일어나다.
1624 (18세); * 1월 李适의 난이 일어나다.
1625 (19세); 2월, 韓山 李氏와 혼인하다.
1627 (21세); * 1월 丁卯胡亂 일어나다. 3월, 丁卯胡亂으로 伯兄 宋時熹가 殉死하다.
1628 (22세); 4월, 부친상을 당하다. 9월, 沃川 赤登江가에 장사 후, 侍墓살이를 하다.
1630 (24세); 服을 마치고 沙溪 金長生을 찾아가 近思錄, 心經, 家禮 등을 배우다.
1631 (25세); 8월, 沙溪 金長生의 상을 당하다. 愼獨齋 金集에게 사사하다.
1632 (26세); 懷德 宋村으로 이사하다.
1633 (27세); 9월, 생원시에 장원하다. 敬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보름 만에 사직하다.
1635 (29세); 2월, 비래암에 서재를 짓다. 11월, 大君師傅에 제수되다.
1636 (30세); 12월, 丙子胡亂이 일어나자 仁祖를 扈駕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다.
1637 (31세); * 仁祖가 三田渡에서 항복하다.
1638 (32세); 別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정축년 이후 벼슬할 뜻을 버리고 黃澗에 우거하며 학문에 힘쓰다.
1639 (33세); 9월, 용담현령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1644 (38세); * 6월, 明 毅宗(崇禎帝)이 자살하다.
1645 (39세); 11월, 세자사부를 사양하다. 12월,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다.
1647 (41세); 4월, 세자시강원 翊善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1648 (42세); 진잠현 성전리로 이사하다.
1649 (43세); * 5월 仁祖가 승하하고, 孝宗이 즉위하다. 12월,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다.
1653 (47세); 충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체직되다.
1655 (49세); 2월, 이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모친상을 당하다. 沃川 月伊洞에 장사지내다.
1656 (50세); 부모의 묘소를 懷德 板橋로 移葬하다.
1657 (51세); 5월, 服을 마치고 贊善에 제수되었으나 不就하다.
8월, 사직소를 올리며, 丁酉封事를 지어 밀봉해 올리다.
1658 (52세); 2월, 이조참의가 되었다가 특지로 예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再從 兄의 아들 宋基泰를 後嗣로 삼다. 특지로 이조판서가 되다.
1659 (53세); 3월, 熙政堂에서 獨對 修攘의 일을 논하니, 효종이 은밀히 手札을 내리다.
* 5월 孝宗이 승하하고, 顯宗이 즉위하다.
좌참찬 제수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懷德 蘇堤로 돌아오다.
1660 (54세); 3월,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병조판서, 이조판서,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다.
1661 (55세); 公州 遠基로 거처를 옮기다.
1662 (56세); 10월, 礪山 黃山으로 이사하다.
1666 (60세); 淸州 枕流亭에 우거하다. 上이 부르자 行在所에 나가 대죄하다.
俗離山 華陽洞으로 移居하다. 12월, 世子貳師가 되었으나 사직하다.
1668 (62세); 2월, 우의정에 제수되다. 11월, 상소를 올려 사직하다.
1671 (65세); 5월, 다시 우의정에 제수되고 특별히 世子師傅를 겸하다.
1672 (66세); 5월, 좌의정에 제수되다. 12월, 同春 宋浚吉을 곡하다.
1673 (67세); 12월, 영중추부사가 되다.
1674 (68세); * 8월, 顯宗이 승하하고, 肅宗이 즉위하다.
12월, 兩司의 논핵을 받아 파직되다.
1675 (69세); 削奪官職되어 함경도 德原府로 귀양가다. 6월, 長?에 圍籬安置되다.
1677 (71세); 3월, 夫人 李氏의 상을 당하다.
1678 (72세); 3월, 同春堂 현판을 쓰다. 朱子大全箚疑를 완성하다.
1679 (73세); * 3월, 宋尙敏 예론상소로 獄死하다. 4월, 巨濟島로 이배되다.
朱子의 年譜와 實紀를 합쳐 文公先生紀譜通編을 편수하다.
1680 (74세); 5월, 淸風으로 이배되다.
6월, 庚申換局으로 西人이 재집권하자 석방되어 懷德으로 돌아오다.
10월, 영중추부사에 제수되자 상경하여 입대하다.
1681 (75세); 2월, 상소하고 華陽洞으로 돌아오다. * 宋浚吉 숭현서원에 배향되다.
1683 (77세); 3월, 상차하여 致仕하고 奉朝賀가 되다.
1684 (78세); 明聖王后 誌文을 짓다. 5월, 尹拯에게 답서를 보내다. 이후 尹拯과 絶交하다.
1686 (80세); 權尙夏, 李喜朝, 閔泰重과 朱書箚疑를 교감하고 함께 俗離山을 유람하다.
朱子大全箚疑를 간행하라는 명을 받다. 10월, 南澗精舍를 짓다.
1689 (83세); 1월, 元子의 책봉이 너무 빠르다고 상소하였다가 濟州로 귀양가다.
2월 己巳換局이 일어나다. 6월, 拿鞫의 명으로 상경 중, 井邑에서 賜死되다.
7월, 水原 萬義 舞鳳山에 임시로 장사 지내다.
[사후기록];
1694; 甲戌換局으로 老論이 득세하자 관작이 회복되다.
水原 萬義에 梅谷書院, 井邑에 考巖書院, 忠州에 樓巖書院을 세워 祭享하다.
1695; 특명으로 諡狀없이 ‘文正’으로 諡號를 내리다.
德源의 龍津書院, 湖西의 華陽書院을 세워 제향하다.
1696; 趙靜庵의 祭享書院인 道峯書院에 병향하다.
1704; 門人 權尙夏가 遺命에 따라 萬東廟를 세우다.
1717; 王命으로 芸閣(校書館)에서 尤庵集과 別集을 간행하다.
1723; 道峯書院에서 位牌가 黜享되다.
1725; 道峯書院에 다시 배향하고 관원을 보내 致祭하다.
1730; 曾孫 宋?源과 門人들이 經禮問答 24권을 활자로 간행하다.
출처
http://cafe.daum.net/YEsarang/QQl4/393
1732; 附錄과 年譜 5책을 활자로 인행하다.
1756; 文廟에 배향하고 領議政에 추증하다.
1757; 淸州 靑山으로 移葬되다. 尹鳳九가 墓誌文을 짓다.
1776; 正祖 즉위 후 孝宗 廟庭에 배향하다.
1785; 驪江 大老祠에 賜額을 내리고 致祭하다.
1787; 9월, 平壤 監營에서 李命植이 宋子大全 102책을 목판으로 간행하다.
1901; 宋秉璿이 宋子大全隨箚 13권 6책을 목판으로 간행하다.(李世淵의 序, 宋秉璿의 跋)
1927; 南澗精舍에서 宋書拾遺와 함께 宋子大全을 重刊하다.(宋曾憲의 拾遺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