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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으로 혼란 겪던 독일서 창립
- 노틀담 수녀회 영성의 어머니 성녀 줄리 비야르와 창설자 마리아 알로이시아 수녀, 마리아 익나시아 수녀. 노틀담 수녀회 제공.
19세기 유럽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회 혼란이 극심했다. 대부분의 부모가 공장에 나가서 일해야 했고, 아이들은 제대로 된 돌봄을 받기 어려웠다. 종교 교육을 받을 기회도 거의 없었다.
독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848년 무렵 베스트팔렌 코스펠드(Coesfeld) 성람베르티본당 부설 초등학교 교사였던 힐리곤데 볼브링과 동료 교사 엘리사벳 쿨링은 이런 배경 속에서 가난하고 버림받는 아이들과 함께 살며 보살피는 한편 수도자로서의 삶에 지향을 두었다. 영성 지도 신부였던 본당 보좌 테오도로 엘팅 신부는 교회 내에서의 이런 사도직이 지닌 중요성을 깨닫고 이들을 수도 성소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당시 뮌스터교구에는 여성 교육수도회가 없었던 상황이라 엘팅 신부는 뮌스터교구장 요한 게오르그 뮐러 주교와 의논한 결과, 네덜란드 아메스포르트 노틀담 수녀회에 도움을 청했다.
1850년 6월 3일 아메스포르트 수도자들을 맞아 힐리곤데 볼브링과 엘리사벳 쿨링은 청원기를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 1일에 두 사람은 마리아 알로이시아 수녀, 마리아 익나시아 수녀로 각각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에 발을 디뎠다. 이로써 코스펠드 노틀담 수녀회의 창립이 이뤄졌다.
두 수도자가 뿌린 씨앗은 점차 번성하여 확산됐고 1855년에는 아메스포르트 노틀담 수녀회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아메스트로프 노틀담 수녀회는 벨기에 나뮤르 노틀담 수녀회로부터 정신과 규칙을 이어받았던 수녀회. 그런 면에서 성녀 줄리 비야르(1751~1816)에 의해 창설된 나뮤르 노틀담 수녀회의 정신은 자연스럽게 코스펠드 노틀담 수녀회 영성의 뿌리가 됐다.
노틀담 수녀회 ‘영성의 어머니’로 불리는 성녀 줄리 비야르는 프랑스 피카르디 지방 퀴비어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스스로 동정 서원을 할 만큼 어려서부터 돈독한 신앙심을 보였다. 그러나 23세 때 신경조직이 마비되고 8년 후에는 의사의 부주의로 회복 불가능한 전신 마비 불구자가 되어 이후 30여 년을 병상에서 지냈다.
그런 시련 속에서도 신앙과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비야르 성녀는 하느님 사랑에 보답하려는 마음에서 일생을 어린이와 부녀자 교육을 위해 바칠 것을 맹세했다.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1804년 수녀회를 창립했다.
같은 해 비야르는 예수 성심께 완치와 은혜를 구하는 9일 기도를 드린 뒤 병이 완치되는 기적을 체험하고 더욱 전교에 힘써 ‘걸어 다니는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불렸다. 1809년에는 수도회 본원을 벨기에 나뮤르로 옮기고 평생을 신앙 전파에 헌신했다.
피로와 노환의 고통에 시달렸던 비야르는 65세 때인 1816년 선종했다. 1906년 시복됐으며 1969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결국 성녀 줄리 비야르가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된 어린이 교육을 통해 세상에 드러냈고 이 정신적 유산은 아메스트로프 노틀담 수녀회를 통해 코스펠드 노틀담 수녀회 창설자들에게 전달된 것이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2월 9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7) 노틀담 수녀회 (중)
하느님께 영광, 마리아의 영예
- 가난한 아이에게 빵을 나누고 있는 창설자 힐리곤데 볼브링. 노틀담 수녀회 제공.
노틀담 수녀회(이하 수녀회) 회원들은 초창기에 아메스포르트 노틀담 수녀회로부터 전수받은 영성과 살아있는 전통, 회헌을 통해 ‘하느님의 좋으심에 대한 깊은 체험’인 성 줄리 비야르의 카리스마를 함께 나누고 있다.
수녀회의 카리스마는 하느님의 좋으심과 섭리적인 돌보심에 대한 하나의 깊은 체험이다. 이는 회원 개개인의 창조적 충실성과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을 통해 표현된다. 오로지 하느님을 향하며 모든 일에서 하느님을 찾음으로써 기쁨과 내적 자유를 체험하며 이를 나누고 증거하는 것이다.
이런 단순함과 하느님을 신뢰하는 정신은 수녀회 카리스마의 표현이다. 회원들은 이 정신을 생활화하며 수녀회 특성을 나타내 주는 사랑, 겸손, 순명의 덕으로 나아간다. 또한 항상 자신들을 감싸주고 있는 하느님의 부드러운 사랑에 민감하게 응답함으로써 성모 마리아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달해 주게 된다.
회원들은 그러한 정신으로, 만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좋으심과 섭리적인 돌보심을 체험하도록 도움을 주고 증거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에 참여한다. 선교사 정신을 통해 시대의 필요성에 응답하고 하느님 연민에 찬 사랑으로 다양한 믿음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 무엇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한다. 특히 여러 형태의 교육, 교리교육과 다른 사도직에 헌신한다.
회원들은 고유의 십자가와 반지를 착용한다. 십자가는 ‘삼위일체의 사랑’과 노틀담 수녀회 정신의 특징이다. 회원들은 어떤 어려움과 시련이 다가와도 모든 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구원적 사랑과 섭리적 돌보심을 확신한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충실하고 기쁨에 찬 서원 생활은 만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적 사랑을 기억하도록 이끌어 준다.
종신 서원을 하면 각 회원에게는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께로’(Toute à Jésus par Marie) 문구가 새겨진 반지가 주어진다. ‘예수님을 위해’라는 말은 기도와 사도직 활동 등 모든 생활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좋으심에 대한 유일한 응답이 되도록 봉헌한다는 뜻이다.
아울러 ‘하느님께 영광, 마리아의 영예’(Dei gloria, Marie Honor)라는 수녀회 모토는 마리아 익냐시아 수녀에게서 받은 유산이다. 인장은 성녀 가타리나 라부레의 환시에 따라 만들어진 ‘기적의 메달’ 뒷면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독일 코스펠드에서 수녀회를 시작한 회원들이 ‘노틀담’이라는 성모 마리아 명칭을 지닌 수녀회 정체성을 마리아에게 고백한 것이다.
해바라기 꽃은 수녀회 회헌에 표현된 “우리의 생활은 오로지 하느님만을 향하게 하고 모든 일에서 하느님을 찾도록 힘씀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기쁨과 내적인 자유를 맛보게 한다”(회헌3)는 의미를 대변한다. 줄리 비야르가 ‘나의 모든 일에 있어서 좋으신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만을 채우기를 원합니다’(서한 343)라고 밝혔듯, ‘오직 하느님만!’(Soli Deo)을 외치는 수녀회의 영성은 ‘해바라기 영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2월 16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8) 노틀담 수녀회 (하)
학생들 가르치고 소외된 이 보듬어
- 1967년 한국에 진출한 노틀담 수녀회는 당시 열악한 작업 환경에 시달리는 버스 안내양들을 위해 교육 기회를 마련했다. 노틀담 수녀회 제공.
노틀담 수녀회의 한국 진출은 1967년 7월 7일 독일 코스펠드 관구에서 마리아 알렉산드라 놀테 등 세 명의 수녀가 한국에 파견돼 이뤄졌다.
이는 당시 부산교구장이었던 故 최재선 주교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교육 수녀회 시작을 염두에 뒀던 최 주교는 앞서 1961년 수녀회 로마 총본원을 찾아 메리 베라 총장 수녀를 만나 수녀 파견을 요청했다. 또 독일 코스펠드 관구장 마리아 이르민가르드 수녀와 뮬하우젠 관구장 마리아 포레리아 수녀를 만나 한국 청원자들을 독일에서 수련하는 방법을 제안하는 등 구체적인 양성 방안을 논의했다. 이후 독일(1962~1971)과 이탈리아(1964~1967)로 한국 지원자가 파견됐다.
한국에 온 세 명의 독일 수녀와 함께 독일과 로마에서 초기 양성을 마치고 첫 서원한 4명 수녀가 귀국하면서 노틀담 수녀회는 한국 공동체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1973년에는 본격적으로 국내 회원 양성을 시작했다.
수녀회의 첫 사도직은 여대생들을 위한 기숙사 운영이었다. 학업을 위해 가정을 떠나 객지 생활하는 학생들에게 따듯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개인지도를 통해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했다.
또 과도한 근무와 적은 보수, 열악한 작업 환경에 시달리는 버스 안내양들을 위해 재단·재봉·수공예·예절 및 가정 관리 등을 배울 교육 기회를 마련했다. 1983년에는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니는 이들의 학업을 돕는 ‘쥴리 학원’을 열었다. 이 학원은 은인과 자원봉사자 지원으로 방송통신고등학교 보충 수업을 하는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끊임없이 새 사도직을 확장해 가던 노틀담 수녀회 한국 지부는 1987년 한국진출 20주년 행사를 개최했으며 1992년 10월 한국 관구로 설정됐다. 같은 해 10월 31일에는 한국 진출 25주년 행사 및 증축 축성식을 거행해서 발전의 기틀을 더욱 공고히 했다.
수녀회 사도직 활동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유치원 교육과 청소년 교육으로 구분되는 교육 사업이다. 1972년 부산 부민동에 노틀담 유치원을 설립했으며, 1975년에는 경기도 오산에 농촌 어린이 교육을 위한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개원했다. 또 1975년부터 인천 박문여자중고등학교 운영을 책임 맡았다.
수녀회는 서울시 부탁으로 1987년 노틀담장애자교육원을 열고 장애인을 위한 사회복지사업 분야에도 발을 내디뎠다. 교육원은 1998년 노틀담 복지관으로 명칭이 바뀌고 장애인 종합 사회 복지관으로 변경됐다. 정부 연계 부서도 서울시에서 인천시로 변경됐다. 복지관 내에는 장애인 보조기구 제작 판매소인 테크니칼 에이드 센터가 병설됐다.
1999년 중국, 2005년 베트남 선교를 시작하며 아시아 교회에 노틀담 정신과 카리스마를 확장해가고 있는 수녀회는 현재 206명 회원 이 학교와 유치원, 본당 사목, 사회사도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로마에 총본부를 둔 노틀담 수녀회는 6대륙 19개국에 회원들을 파견해서 교육과 의료사도직, 선교 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2월 23일, 이주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