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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8장 - 1
가장 위대한 사랑의 언약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창세기를 알고 있는 독자라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창 2:23)는 아담의 노래에 매우 익숙해 있을 것이며, 반면에 그 노래에 대해 하와는 어떻게 답가를 했을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덴동산을 떠나 온 이후 그 어디에서도 하와의 노래를 찾을 수 없으며 그와 유사한 응답조차 찾을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는 하나님의 선언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을 당한 이후부터 과연 그 둘 사이에 어떤 사랑의 노래들을 주고받았을 것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인 ‘하와의 노래’를 발견한다면 그 기쁨을 결코 감출 수 없을 것이다.
그 해결의 열쇠를 찾을 수 있는 책이 바로 아가서이다. ‘노래들 중의 노래’(The song of songs)라는 책의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최상의 노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아가서라면 기꺼이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열쇠를 찾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열쇠가 아가서 곳곳에 널려 있다는 점에서, 마치 수많은 황금 열쇠들이 아가서에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곧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향해 노래하는 수많은 구절들 안에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모든 해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 많은 황금 열쇠들 가운데 하나를 예로 든다면 아가서를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 할지라도 기꺼이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아 7:10)라는 술람미 여인의 노래를 제시할 수 있다.
이 노래의 한 구절만으로도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고 하신 하나님의 선언이 결코 하와에게 준 저주가 아니었으며 ‘사랑’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에덴동산의 풍요로움과 안식과 기쁨을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풍성하게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향하여 ‘나의 기쁨의 사랑’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하바’(הבהא)라고 호칭하고 있는 것(아 7:6)은 가정이야말로 진정으로 에덴동산을 그 원형으로 하고 있음을 증거하고도 남는다.
때문에 “내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 합환채가 향기를 뿜어내고 우리의 문 앞에는 여러 가지 귀한 열매가 새 것, 묵은 것으로 마련되었구나 내가 내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 둔 것이로다”(아 7:11-1)라고 하는 술람미 여인의 노래야말로 바로 아담의 노래에 대한 하와의 답가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발견으로부터 오는 기쁨은 기꺼이 아가서에 대한 존경과 함께 아가서가 제시하고자 하는 혼인의 신성함과 그 순결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나아가 이 혼인의 신성함이 가정을 세우는 기초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이루었던 가정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원형으로 하는 가정제도에 대하여 새삼 높은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아가서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까지 아가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남녀의 인격적인 사랑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면서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누리는 승화된 사랑의 즐거움을 통해 혼인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보장된 부부 사이에 누리는 사랑의 신비로움을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주었다.
특히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존귀한 나의 사랑’이라는 의미를 가진 ‘암미 나디브’(בידנ ימע)로 부르고(아 6:12), 이에 병행하여 여인들이 술람미 여인을 ‘솔로몬의 여자’라는 의미의 ‘슐람미트’(תימלושׁ)라고 부르는(아 6:13) 장면과 이어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의 애칭으로 ‘나의 존귀한 아내’라는 의미를 가지는 ‘바드 나디브’(בידנ תב)라고 부르는(아 7:1) 장면들은 이들 사이에서 묘사될 수 있는 사랑의 순수한 열정이 얼마나 심오하게 전개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면서 마침내 이들이 발견하려고 하는 사랑은 다름 아닌 ‘나의 기쁨의 사랑’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하바’(הבהא)였다는 사실(아 7:6)에서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7장 말미에 이어 신비한 합일을 이룬 부부간의 사랑이 충만한 가운데 술람미 여인의 노래(아 8:1-4)로써 제4부가 끝나고 아가서의 피날레를 알리는 제5부가 시작된다. 제5부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대화를 주고받는 짧은 노래들로 구성되는데 상호간에 사랑의 언약을 재확인하면서 점점 깊어 가는 사랑의 내용을 표현하는 장면(아 8:5-7)과 아가서의 대단원의 막을 알리는 팡파르가 울려 퍼지면서(아 8:8-14) 그 막을 내리게 되는데 8장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① 여인들의 합창(아 8:5a) :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혼인식 행렬에 대한 묘사(아 3:6)와 대조되는 모습으로 새로운 신분으로 태어난 술람미 여인이 묘사된다.
② 술람미 여인의 노래(아 8:5-7) :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은 세상의 그 어느 것도 갈라놓을 수 없으며 둘 사이에는 서로 인격적으로 맺어진 사랑이 구현되고 있음을 고백한다.
③ 형제들의 합창(아 8:8-9) : 술람미 여인이 소녀로부터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하여 솔로몬으로부터 사랑받는 여인이 되었음을 선언한다.
④ 술람미 여인의 고백(아 8:10-12) : 성숙한 여인으로서 솔로몬과 상호간에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되었음을 고백하며 솔로몬이 누릴 영광을 찬송한다.
⑤ 솔로몬의 노래(아 8:13) : 솔로몬의 영광에 술람미 여인 역시 동참하게 되었음을 노래한다.
⑥ 술람미 여인의 노래(아 8:14) : 솔로몬의 노래에 대한 술람미 여인의 응답으로 아가서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1.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아 8:1-4)
8:1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8:2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石榴汁)으로 네게 마시웠겠고
8:3 너는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게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었으리라
8:4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이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
(필자역)
술람미 여인의 사랑 노래 2(독창)
오, 당신이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내 형제와 같다면!
내가 밖에서도 당신을 만나 입맞춤으로 인사한다 해도
아무도 나를 멸시하지 않으련만.
내가 당신을 이끌어 나를 가르치던 내 어머니의 집으로 당신을 데려가
당신에게 내 석류즙으로 만든 향기로운 포도주를 마시게 하였으리라.
그의 왼팔은 내 머리 아래 있고
그의 오른팔은 나를 안고 있네.
암노루들과 들의 암사슴들을 두고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라.
예루살렘의 딸들아.
그가 원하기까지
너희는 그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아다오.
<제4부. 끝을 알리는 피날레>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에게 있어서 가정은 더 이상 비밀의 정원(secret garden)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언제든 다채롭고 진귀한 과일들을 풍성하게 취할 수 있었던 것처럼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역시 언제든 서로 ‘나의 기쁨의 사랑’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하바’(הבהא)라는 이름의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술람미 여인은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아 8:1)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 합환채가 향기를 뿜어내고 우리의 문 앞에는 여러 가지 귀한 열매가 새 것, 묵은 것으로 마련되었구나 내가 내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 둔 것이로다”(아 7:12-13)라고 말했던 것처럼 솔로몬을 기쁘게 하는 ‘아하바’(הבהא), 즉 ‘나의 기쁨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바로 그 과일을 언제든지 솔로몬이 원하기만 한다면 줄 준비가 되어있을 뿐 아니라 바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솔로몬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표현하고 싶다는 술람미 여인의 마음을 담고 있다.
사실 고대 중동 사회에서 여성들은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을 제외하고는 입맞춤을 할 수 없었다(창 29:11). 심지어 남편이라 할지라도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애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비난을 받는 일이었다. 때문에 언제든지 자신의 열정이 담긴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 할지라도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 기쁨을 주는 사랑인 ‘아하바’(הבהא)답게 기꺼이 그 사랑의 열정을 표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이처럼 애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간절함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바로 그러한 사랑 나눔에 대한 묘사이다. 마치 이 둘 사이에는 그 어떤 부끄러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는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5)에서 묘사하고 있는 부부간의 참 모습에 대한 술람미 여인의 열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술람미 여인의 열정은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머니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게 하겠고 너는 왼팔로는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안았으리라”(아 8:2-3)로 더 강렬해진다.
본문에서 ‘내가 너를 이끌어’라고 번역된 ‘엔하가카 아비아카’(ךאיבא ךגהנא)는 자신의 결심을 실행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표시하고 있는데 ‘내가 너를 이끌 것이고 내가 너를 들일 것이다’로 번역하면 훨씬 그 의미가 살아난다(출 15:9에서도 이와 비슷한 용례를 찾을 수 있는데 ‘내가 뒤쫓아 따라잡아 탈취물을 나누리라’는 말은 ‘내가 쫓아가, 내가 취할 것이고 탈취물을 나누리라’는 의미이다).
또한 ‘내 어머니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로 번역된 한글 개역개정판은 그 의미가 모호해지고 말았는데, 이 구절을 ‘나를 가르쳤던 내 어머니의 집’이라는 관용구로 보면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이 면에 있어서는 KJV나 한글 흠정역이 잘 번역하고 있는데 고대 세계일수로 여성들은 대부분 자기 어머니로부터 살림살이로부터 시작해 일상에 대한 많은 교훈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내가 너를 이끌 것이고 내가 너를 들일 것이다’는 표현은 앞 절에서처럼 공개적으로 애정을 표하고 싶다 해도 사회적 윤리나 기반을 위협하거나 거슬릴 정도로 무분별하게 드러내기보다는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평소 가르침을 받은 것처럼 (이는 정숙하다 또는 교양이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솔로몬을 향한 자신의 모든 정열을 마치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을 마시는 것처럼 마시게 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보이도록 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에서 술람미 여인이 사랑의 열정을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상징화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 석류나무는 가정의 평강과 자손의 번영을 상징하는 나무로 알려졌었고 일부 상류사회의 혼례식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포도주 대신에 석류즙을 나누어 마셨다는 관습에 따른 것이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하면 적어도 술람미 여인은 교양을 지킬 줄 알았고 사회적 통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사회적 규율을 존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을 마치 남자를 어머니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동침을 하겠다는 말로 해석한다는 것은 이러한 본문의 의미를 매우 저급하게 받아들이는 잘못된 견해 때문으로 여겨진다.
심지어 ‘어머니의 집’을 여자의 자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로 인해 본문을 노골적인 성행위에 대한 묘사로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해석이다. 일부 해석자들은 이 ‘어머니의 집’이 ‘사랑의 밀실’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이 또한 본문의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설득력도 없다.
이처럼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은 동일한 사랑의 열정을 사악하거나 사심 없이 나누는 사이임을 밝히기 위해 “너는 왼팔로는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안았으리라”(아 8:3)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혼인제도의 완성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다.
이 표현은 제1부가 끝날 때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아 2:6-7) 한 술람미 여인의 노래에서도 등장한 바 있다.
이와 동일한 기법으로 아가서는 “너는 왼팔로는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안았으리라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아 8:3-4)는 술람미 여인의 노래로 제4부가 끝나면서 피날레로 접어들고 있다.
제2부가 끝날 때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아 3:5)만 등장한다. 참고로 제5부는 노루와 사슴의 모티프를 동반하는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아 8:14)로 끝남으로써 일련의 동질성을 보여준다.
제3부와 제4부 사이에서는 이러한 관형적인 기법이 등장하지 않는데 이것은 제3부가 혼인식에 대해 그리고 제4부가 혼인생활에 대해 엇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외형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3부와 제4부 사이에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아 5:1)에서 충분히 이러한 외형적 통일성을 찾을 수 있다.
단지 이 부분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의 열매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허용하시는 모습(창 2:16)을 연상케 하는데 이것은 혼인을 통해 세워진 가정을 통해 에덴동산의 회복을 구현한다는 아가서의 주제가 명확하게 나타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한다.
특히 아가서의 외형적 구조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아 5:1)는 신랑과 신부의 합일(아 4:16-5:1)을 다룬 이 제3부가 아가서의 핵심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서론 ‘3. 아가서의 구조와 메시지’ 참고).
2. 가장 위대한 사랑의 언약(아 8:5-7)
8:5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辛苦)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8:6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8:7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필자역)
<제5부.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
여인들의 노래(합창)
이는 누구인가?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광야에서 올라오는 이.
술람미의 노래(독창)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당신을 깨우리다.
거기서 당신 어머니가 산고를 겪었으니
거기서 당신을 낳은 이가 산고를 겪었어요.
당신은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어요.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맹렬한 불과 같으리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뜨리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리니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집의 모든 재물을 사랑 때문에 준다해도
그는 멸시를 받으리라.
아가서의 제5부 피날레는 여인들의 합창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아 8:5a)는 “이는 누구인가, 그녀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라고 광야에서 올라오는 이”라고 직역할 때 더 실감이 난다. ‘이는 누구인가?’(תאז ימ : Who is this?)라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구문은 아가서에 3번 등장하는데 모두 술람미 여인을 그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첫 번째는 “이는 누구인가,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아 3:6)에서 술람미 여인이 혼인식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두 번째는 “이는 누구인가,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아 6:10)에서 혼인식을 마친 술람미 여인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여자들 중의 여자’로서 이에 대한 경이로움과 존경의 대상임을 선언한다.
세 번째 ‘이는 누구인가’에서는 이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에게 기대어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장면은 “나는 나의 사랑하는 이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아 7:10)를 연상케 한다. 이제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는 ‘사랑 그 자체의 여인’이라는 의미의 ‘아하바’(הבהא)로서 솔로몬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이처럼 솔로몬의 사모함(הקושׁת)이 술람미 여인을 위한다는 것은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의 해석이기도 하다.
하와가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게 되고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남편을 사모하게 되며, 그의 다스림을 받게 된 원인은 ‘죄’로 말미암은 결과였다. 그에 따라 인류는 더 이상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창 2:9)에 접근할 수 없고 분리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과 가정을 이루게 됨으로써 범죄로 인한 저주의 파괴적인 결과들이 그 혼인을 통해 죄의 효과를 뒤엎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에덴동산에서 범죄 이후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건강치 못하고 의존적이거나 지배적인 욕구라는 부정적인 상태를 말하며, 남자 또한 냉엄한 억압자로서 여자를 다스리는 상태가 되었지만 이 모든 상황이 혼인이라고 하는 복된 제도 속에서 진정 서로를 사모하게 된다는 것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창 2:23)고 한 아담의 노래가 가정 안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여자들 중의 여자’로서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에게 기대어 있는 모습을 노래함으로써 모든 이들로부터 경이로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술람미 여인은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辛苦)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아 8:5b)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해석자들이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거의 일치하지 않으며, 그들이 제시하는 해석들조차도 신뢰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이 구절은 난해하기 그지없다. 갑자기 등장하는 ‘사과나무’와 ‘어머니’의 모티프가 해석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분명치 않은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辛苦)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는 개역성경 번역도 이를 반영하고 있다. “너로 말미암아 네 어머니가 고생한 곳,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는 개정개역 번역도 다를 바 없다.
KJV는 “I raised thee up under the apple tree: there thy mother brought thee forth: there she brought thee forth that bare thee”로 번역했고, NIV는 “Under the apple tree I roused you; there your mother conceived you, there she who was in labor gave you birth”로 번역했고, NASB는 “Beneath the apple tree I awakened you; There your mother was in labor with you, There she was in labor [and] gave you birth”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들 영어 역본들은 비교적 원만하게 번역하고 있다.
분문에서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는 표현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사과나무로 말미암아 해석자들은 사과의 붉은 색과 둥근 형태의 즙이 많은 과일은 젊은 여성을 상징하며, 사과나무 가지들이 여러 방향으로 분기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세대에서 세대로 ‘가족의 나무’가 확장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하면서 성욕과 다산 등 성적인 생산 활동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가서에서 사과나무가 이러한 성적인 연합과 출생을 상징하는지는 의문이 간다. 성경 어디에서도 사과나무에게 이러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이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아 2:3)라고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이 세상에서 말해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고백을 노래한 모티프에서 그 해답을 찾는 것이 더 논리적이다.
여기에서 ‘너를 깨웠노라’고 번역된 ‘깨우다’(רוע)라는 단어는 남자가 사과나무 아래에서 졸거나 자고 있을 때 그를 깨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으키다’(아 4:16) 또는 ‘일깨우다’(아 5:2)와 동일한 의미로 보아야 한다. 이 단어는 1차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운다는 의미와 2차적으로는 의식을 일깨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2장에서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을 수풀 가운데 있는 사과나무라고 비유하면서 자신이 그 그늘에 앉아 있었던 것으로 묘사했는데 이곳에서는 오히려 술람미 여인이 수풀가운데 있는 사과나무 아래에 앉아있는 솔로몬을 일으켜 세우는 것, 또는 그의 의식을 일깨우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솔로몬에 대해서는 그의 어머니가 해산과 분만의 고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으로 묘사한다.
이 모티프는 당연히 우리의 시선을 에덴동산으로 향하게 하는데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창 3:16)라는 말씀처럼 솔로몬은 어머니의 숭고한 해산과 분만의 고통 가운데서 태어난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본성적으로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본질적인 상태를 암시한다.
그러나 이제 솔로몬은 혼인을 통해서 여인의 해산과 분만의 고통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의 여인’이라는 의미의 ‘아하바’(הבהא)인 술람미 여인을 솔로몬이 사모하게(הקושׁת) 됨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었음을 강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술람미 여인의 노래는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아 2:16)와 “나는 나의 사랑하는 이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게 속하였다”(아 6:3)에 이은 “나는 나의 사랑하는 이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아 7:10)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동시에 그동안 술람미 여인은 세 번에 걸쳐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아 2:7),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아 3: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이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도 ‘깨우다’(רוע)는 말은 ‘일으키다’ 또는 ‘일깨우다’는 의미인데 본문에서는 아무도 일으키거나 일깨우지 못하게 했던 그 솔로몬을 술람미 여인이 친히 일으키거나 일깨우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급격한 반전이 발생했음을 암시한다. 이런 점에서 술람미 여인은 지금 여인의 숭고한 해산의 고통 아래 있던 솔로몬이었지만, 이제 솔로몬이 사모하는 그 여인으로부터 해산의 고통이 아닌 사랑의 기쁨으로 초대받고 있음을 강화시키고 있다.
술람미 여인은 이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증거하기 위해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고 노래하고 있다.
본문에서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라는 표현은 마치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아 1:13)라고 한 술람미 여인의 노래를 기억하게 한다. 술람미는 솔로몬을 자기 가슴 깊은 곳에 숨어있는 향주머니로 묘사한 것처럼 이제 솔로몬에게 자신을 마음 속 깊은 곳에 새겨 넣은 ‘인’이 되게 할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는 표현은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아 2:6)와 “너는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었으리라”(아 8:3)는 표현에서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인 자신을 솔로몬의 왼팔에 항상 매달고 다니는 도장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목 주변이나 팔에 인장을 차고 다니던 관습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인장은 소유권을 나타내거나 행위의 진정성을 보증하기 위한 증표로 사용되는데 여기에서는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신 6:8)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언약적 신실성을 나타내는 증표를 가지고 다녔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습에 기대어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사이에 맺어진 사랑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과 헌신의 증표를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로써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팔과 마음과 영혼에 새겨진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제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은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는 말씀처럼 명실상부한 한 몸으로 인정되며, 이로써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 2:25)는 말씀처럼 서로에 대해 전혀 부끄럽지 않게 소유하고 독점한 상태가 된 것이다.
따라서 이 둘 사이에는 그 어느 누구도 개입하거나 간섭할 수 없으며 오직 죽음만이 이 두 사람을 분리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럴 때 사랑의 언약은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는 표현처럼 사랑이 깊은 만큼 질투도 강렬하게 일어나서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두고 있는 연결고리가 된다.
여기에서 사랑의 질투는 유일하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죽음마저도 집어삼킬 만큼 강한 불같아서 마치 그 기세가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대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불과 같이 강렬한 것으로 묘사된다. 사실 사랑은 그 깊이만큼 순수한 질투를 동반하는데 이것은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출 34:14. 출 20:5 참고)라는 말씀처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 사랑의 언약이 이처럼 끈끈한 질투의 끈으로 묶여있는 것처럼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이며 불가항력적이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이제 한 몸이 된 두 사람의 사랑은 그 어느 것으로도 바꿀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 8:7)는 말처럼 강물로도 꺼뜨릴 수 없고 홍수로도 정복할 수 없는데 그것은 사랑을 해하고 위협하는 그 어떤 혼돈의 세력이라 할지라도 사랑에 맞설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술람미 여인은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의 여인이 지혜의 생산물인 열매를 가리켜 말하기를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천은보다 나으니라”(잠 8:19)고 말하는 것처럼 사랑은 금이나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그 어떤 가치로도 비교할 수 없음을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사랑과 지혜는 결코 서로 다르지 않다.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지혜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확고한 사랑은 오로지 혼인 안에서만 확인된다.
잠언은 젊은 청년에게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같고 아름다운 암노루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戀慕)하라”(잠 5:15-19)고 교훈하고 있다. 이 잠언의 경고처럼 가정제도를 파기하는 것은 혼인의 언약을 파기하는 것과 같다.
혼인의 언약과 가정제도가 하나님 나라를 굳건히 세우고 인간 존재의 목적인 인생의 본분을 성취하기 위해 주어졌다는 사실에서 볼 때, 그리고 이 일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서 이 혼인 안에서만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서 인생의 본분이 완성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때문에 혼인의 언약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