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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9-36
어리석도다! 인간의 지혜여 / 안효관 목사
고린도전서 1:20-25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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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골에 홀어머니가 남매(쟝과 말타)와 함께 가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너무 어려운 가정 형편을 참다 못한 아들은 돈을 벌어오겠다고 가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골에 남아 있는 모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기로 굳게 마음을 먹습니다. 돈을 벌어서 집을 나간 아들을 찾아오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녀는 작은 여인숙을 차렸습니다. 그러나 시골의 여인숙을 운영해서는 돈을 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모녀는 한가지 꾀를 냈습니다. 자기 여인숙을 찾아온 손님 가운데 제법 돈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죽이고는 돈을 빼앗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녀는 여인숙을 찾아온 사람 가운데 돈 꽤나 있는 것처럼 보인 사람에게는 수면제를 먹여 죽인 후에 여인숙 뒤에 있는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완벽하게 범행을 저지르고는 손님의 짐꾸러미에서 돈이나 보석과 같은 값나가는 것을 챙겼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간 지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잘 차려입은 한 청년이 그 여인숙에 들어왔습니다. 여인숙 주인인 모녀는 그 청년을 범행의 대상으로 지목하고는 그 날 저녁 그에게 수면제를 먹여 죽이고는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여인숙으로 돌아와 그 손님의 짐꾸러미를 풀어헤쳤습니다.
돈을 꺼내기 위해서 지갑을 여는 순간 두 모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방금 자기들이 죽여 강물에 던져버린 그 청년이 자기들이 20년 동안이나 그렇게 보고 싶었고, 찾고 싶었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두 모녀는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면서 아들을 던져버린 바로 그 강물에 투신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의 작가인 알베르 까뮈(Albert Camus, 1913∼1960)가 쓴 희곡 "오해(誤解)"(1944년 작)라는 작품의 줄거리입니다. 까뮈는 그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범죄는 아무리 행운이 따른다 하더라도 항상 불행할 뿐이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완벽한 지혜를 짜내어 어떤 일을 한다 하더라도, 그 지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유한한 존재요 결코 완벽한 존재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은 그 유한한 지혜를, 때로는 어리석은 지혜를 완벽한 것인양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그 지혜가 오히려 자신에게 올무가 되어서 자신을 구속하기도 하고, 더욱 큰 어려움에 빠뜨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에도 우리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때는 주전 853년 경이었습니다. 당시 아합왕이 통치하고 있던 북 이스라엘은 두 차례에 걸린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결코 아합왕의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합 왕을 도우셨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전쟁이었습니다. 두 번째 전쟁이 기록된 열왕기상 20장에 보면 당시의 전황을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점고함을 입고 군량을 받고 마주 나가서 저희 앞에 진을 치니 이스라엘은 염소새끼의 두 적은 떼와 같고 아람 사람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왕상 20:27) 아람왕 벤하닷이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침공해왔는데, 그 아람 군대와 싸우러 나간 이스라엘 군대는 "염소 새끼의 적은 두 떼와 같았고, 아람 군대는 그 땅에 가득했다"고 말씀합니다. 전세로 보아서는 도저히 이스라엘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이스라엘의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긴 것입니다.
그 두 번째 전쟁에서 승리한 아합 왕은 아람왕 벤하닷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는 둘 사이에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그 평화조약 가운데 하나가 "전에 아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들을 되돌려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록 아람왕 벤하닷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화가 난 아합 왕은 이번에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아람을 쳐들어가서 이스라엘의 옛 영토를 찾아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군사력만 가지고는 아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아람 군대는 여전히 막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차에 남 유다의 왕 여호사밧이 아합 왕을 찾아왔습니다. 아합 왕이 그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습니다. 여호사밧에게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힘을 합쳐서 길르앗 라못을 되찾아오자'고 제안합니다. 길르앗 라못은 요단 동편에 있던 세 개의 도피성 가운데 하나로, 원래 레위 지파의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 물이 많고 포도와 올리브가 잘 자라는 비옥한 그 땅을 아람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둘이 힘을 합쳐 그 땅을 되찾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힘을 모아 아람을 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전쟁이라면 반드시 패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을 말을 들은 아합왕은 선지자 400명을 왕궁으로 불러 모아놓고 묻습니다. "우리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 그러자 400인의 선지자 모두가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전쟁을 독려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 왕이 가만해 보니까 그 400명의 선지자들은 모두 어용(御用) 같아 보였습니다. 실제로도 아합왕에게 녹을 받아먹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아합왕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던 선지자들이었습니다.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안 여호사밧 왕은 다른 선지자를 불러오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온 사람이 '미가야'라는 선지자입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이번 싸움은 반드시 이스라엘이 패배할 전쟁'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물론 그런 예언은 아합왕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결국 미가야 선지자는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참 선지자인 미가야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길르앗 라못을 되찾고 싶어했던 아합 왕은 여호사밧을 설득시켜 남북 연합군을 형성하여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불안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의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전쟁에 나가면 왕은 다시 이 왕궁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란 그 말이 자꾸만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아합 왕은 한가지 꾀를 냈습니다. 아람 군대와 전쟁을 시작하면서 아합 왕이 여호사밧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 30절입니다. "나는 변장하고 군중으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자신은 일반 병사처럼 변장하고, 여호사밧 왕에게 왕복을 입고 전쟁에 임하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아합 왕은 적군의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본문 31절에 보면, 아람 왕은 32명의 장수에게 '오직 이스라엘의 왕을 죽이는 데만 신경을 쓰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 장수들은 요즘으로 말하면 특수 훈련을 받은 특공대원들입니다. 오직 이스라엘 왕을 죽이기 위해서 훈련받고 명령받은 특수대원들이었습니다.
아합은 자신이 변장을 하고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있으면 그 특수대원들이 여호사밧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알고 그를 죽이려 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생명을 지키기가 훨씬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막힌 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아합 왕의 그런 기가막힌 꾀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한 아람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이 정확하게 아합 왕을 맞혔습니다. 당시 병사들이 입은 갑옷은 쇠로 만들어졌는데, 가슴과 갈빗대를 덮도록 되어 있습니다. 본문 34절에서 말씀한 '갑옷 솔기'라는 말은 가슴을 덮는 갑옷을 연결하는 부분의 작은 이음새를 말합니다. 그 작은 이음새 부분에 정확하게 화살이 꽂힌 것입니다.
그 화살은 아합 왕을 정확하게 조준해서 날린 화살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무심코 쏜 화살이 그 작은 이음새를 뚫고 가슴에 꽂힌 것입니다. 이건 분명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미가야가 예언한 대로 그건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화살이었습니다. 결국 그 전쟁에서 아합 왕은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아합 왕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전적으로 자기의 지혜를 의지했습니다. 남 유다와 연합군을 형성하여 아람을 침공하면 분명 승산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을 꾀어서 군사력을 빌었고, 아람을 이길 수 있는 큰 군사력으로 아람을 공격했습니다.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 줄곧 긴장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합 왕은 그런 긴장관계를 깨고 동맹관계를 맺었습니다. 남 유다의 군사력을 활용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략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아람과의 전쟁에서 그는 변장을 해서 자기의 신분을 감출 수가 있었습니다. 적군에게 노출되지 않음으로서 생명을 보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도 대단한 지혜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아합 왕의 지혜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해서 완전하게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아합 왕에게 미가야 선지자를 통해서 전쟁을 하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아합 왕은 자신의 지혜만을 믿고 전쟁을 감행했습니다. 자신의 지혜로 그는 결코 패배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이스라엘의 패배일 뿐만 아니라, 자신도 목숨을 잃어야 하는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알베르 까뮈가 쓴 '오해'라는 작품 속에 등장한 모녀와 같이, 또 아합 왕의 이야기에서와 같이,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한 채 자신의 지혜만을 의지할 때에는 결국 엄청난 재앙을 맞게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살아가면서 지혜가 필요할 때 우리는 누구의 지혜를 의지합니까?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 인간의 지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에게 무한한 지혜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아주 작은 지혜를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때로는 그 지혜로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대명사처럼 불리우는 솔로몬도 그가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할 때에는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이방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지혜 대신에 자신의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함으로써 결국 나라를 둘로 나뉘게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성경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지혜를 의지하다가 인생을 망쳤는지 모릅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인구가 많아지자 어떻게 해서든지 흩어짐을 면해보려고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바벨탑을 쌓고 문명을 만들면 흩어지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한 인간의 지혜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지혜를 깨고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써 강압적으로 흩어지게 만드셨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바벨탑처럼 높아져간다 하더라도 그건 결코 바벨탑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춰진 인간 지혜의 바벨탑은 결국 무너져야 할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도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우리에게 보여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초대교회 교인이었습니다. 바나바가 자기의 밭을 팔아 교회에 헌금한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자기가 갖고 있는 소유를 다 팔아 헌금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헌금을 하려고 생각하니까 너무 아까웠습니다. 고민하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꾀를 냈습니다. 지혜를 짜낸 것입니다. 헌금하려고 했던 것 가운데서 일부를 빼돌렸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말입니다. 그리고는 사도들 앞에 자기의 재산을 갖다 놓았습니다. "이게 우리의 재산 전부인데 교회에 헌금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그들은 아무도 자기들의 숨겨진 비화를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꾀로, 자기들의 얄팍한 지혜로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까지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의 거짓은 곧 드러나게 되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을 속인 죄를 물어서 한날에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건 너무나도 값진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인 그 지혜를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데 사용하기도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지혜보다 우리 인간의 지혜가 훨씬 더 나은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그게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불행하게도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오늘의 신앙인들 가운데도 자기의 지혜로 하나님을 거역했던 아합왕이나,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이나,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의 아합, 오늘의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 오늘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 여러분, 혹 우리가 그 중에 하나는 아닙니까?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지혜가 완벽한 줄 알고, 자신의 지혜만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을 본받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분명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났는데도, 또다시 인간의 어리석음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아합, 현대의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 현재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는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기는 지혜자들을 일부러 찾아가서 그들과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일을 자신의 사명을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지혜롭다고 자랑하던 모든 사람들이 소크라테스 앞에서는 끝내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자랑할만한 지혜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늘 신약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이 세상에 아무리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과연 하나님보다 지혜로울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하나님보다 자신이 지혜롭다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있습니까? 내 지혜를 앞세우기 앞서 하나님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니까?
똑똑한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현대에 맞지 않고,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 구시대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똑똑하다는 헬라인들은 하나님의 복음이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이 추구하는 철학이 최고의 지혜요, 그 자기들의 지혜인 철학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복음을 보니까, 이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요 미개인들이나 믿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미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가장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의 지혜가 미치지 못한 최고의 지혜였습니다. 신약 본문 23-24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지혜는 분명 우리에게 미련해 보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방법이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는지 모릅니다.
- 오른 쪽 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편도 치라고 돌려대주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내 속옷을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바보처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서 축복하며 기도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먹질을 하고 대들어도 마음이 풀리지 않을 판인데, 어떻게 그들을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해주고 축복해 줄 수 있습니까? 세상에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게 우리에게는 어리석어 보여도, 그게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어리석은 방법을 통해서 세상에 당신의 뜻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신약 본문 25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사람이 제 아무리 지혜롭다고 자랑해도 하나님의 미련함보다도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뽐내도 하나님의 약한 것보다 더 약한 것처럼 말입니다.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우리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고전 3:19)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미련한 세상 지혜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하나님의 지혜로 사시겠습니까?
미련해 보이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지혜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난 지혜로 우리에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게 하늘의 지혜를 얻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
그리고 우리의 어리석음에 하나님의 지혜가 채워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여러분, 삶의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계십니까?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어떤 인생의 짐에 짓눌려 힘들고 고달픈 걸음걸음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 인간의 지혜로 풀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과도 같은 지혜'만이 우리 인생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방법이 됩니다.
아합 왕과 같은 어리석은 인간의 지혜는 우리의 삶과 생명이 죽음을 자초하는 화살을 맞게 될 뿐입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든 교우님들은 어리석은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아합 왕을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지혜로 인생을 살아가심으로 하늘의 복을 누리는 축복된 생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